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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교원문인협회 여러 회원님들 모두 안녕하시지요?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제 졸고는 터키 기행 수필로 1회 '에페스에서 그리스인의 숨결을 느끼다' 외 4편, 모두 5편을 사진 자료와 함께 올렸습니다. 가능하시면 터키 기행수필을 한 꼭지로 해서 5편을 모두 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혹여 공간이 모자라시다면 1회인 '에페스에서 그리스인의 숨결을 느끼다' 만 사진자료와 함께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름다운 가을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윤연모 올림
터키 기행수필
에페스에서 그리스인의 숨결을 느끼다 (1)
윤연모
열한 시간 동안 칠흑 같은 밤하늘을 날아서 이스탄불의 아타투르크 공항에 도착하였다. 위에서 내려다 본 도시는 그야말로 공들여 한 알 한 알 박아 넣은 거대한 보석 공예품을 방불케 하였다. 여행이란 이런 보석을 감상하기 위해서 파도가 몰려오는 바닷물에 텀벙 뛰어드는 것 같다. 터키라는 말만 들어도 이국적인 냄새가 폴폴 솜아 나는데 나는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얻어갈 것인지 기대감에 가슴이 벅찼다.
이스탄불에서 다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이즈미르에 도착하여 에페스로 갔다. 에페스는 터키 남서부에 있는 고대 도시로 그리스의 안드로게오스가 그리스 신전에서 신탁을 받아서 기원전 11세기경에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고대 도시국가의 유적지이다. 생명과 불이 있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곳에 도시를 건설하라고 부탁을 받아서, 안드로게오스는 셀축 지역에서 낚시를 하며 어디가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잡은 물고기를 굽느라 불을 피우니 멧돼지가 산에서 튀어나왔다. 그래서 멧돼지는 생명, 물고기는 자급자족할 먹을거리, 그리고 불의 세 요소를 갖추었다고 생각하여 이곳에 도시를 만들었다. 에페스는 후에 서로마가 발전하는데 발판이 되었으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다녀갈 정도로 발달하였지만 지진으로 말미암아 폐허가 되었다. 화려한 로마의 유적만이 그 시대의 찬란했던 영광을 말해주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이 1453년에 멸망하고 오스만 투르크 족이 사흘 동안 이곳을 약탈하여 로마의 유적이 마구 파괴되었다. 하지만 인류의 놀라운 문명의 흔적들이 남아 후손들을 반겨 주었다. 대략 25,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 셀수스 도서관, 하드리아누스의 신전 터, 로마의 화장실, 유곽, 집터 등의 유적이 늠름하게 남아 있었다. 언덕길에 무수한 석주가 양쪽에 줄지어 서 있어서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 거리인 바실리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석주 밑에서 상인들이 자신의 상품을 가져다 놓고 팔았다면 이 거리가 지금만큼이나 붐볐을 것 같다.
이곳이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이 발달하였던 곳이라 이탈리아 폼페이의 집터와 목욕탕, 유곽이 있는 유적지와 흡사하였다. 이탈리아와 터키 사이에 로마제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니 놀라웠다. 과거에 로마가 사십여 개국을 지배하였다고 하는데 그 영향력을 이곳에서도 확인한 셈이다. 그리스가 로마의 속국이 되었으므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우선 모든 건축 재료가 대리석이었으며 발을 디디는 곳마다 대리석이니 땡볕이라도 이국적인 느낌에 최고의 기분을 만끽하였다. 온 세상에서 몰려온 관광객들 사이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축축 늘어진 긴 옷으로 땅을 쓸고 다니는 장면이 오버랩 되었다. 내가 그리스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들어온 것 같았으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던가. 현대로 돌아와서 인종 전시장에서 나 자신을 예술품 삼아 한국의 춤사위를 펼쳐 보이듯 두 팔을 양옆으로 활짝 펼치며 사진을 찍었다.
만약에 내가 그리스 시대에 살았다면 인류의 교사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처럼 소꼬리에 앉은 파리가 되어 조는 학생들을 깨워 공부하라고 귀찮게 하며 가르치며 살았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부서진 상태로 역사의 유물로 서 있는 셀수스 도서관에서 연구하다가 잠시 휴식을 위하여 코가 비틀어지게 잠자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리스 로마 문명이 발달하여 금세기의 철학, 교육, 사회 전반에 위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철학자가 많았고 저런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에 값진 인류 유산을 대대로 물려주어 인류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 시대의 교육이 우리의 서양 교육, 즉 현대교육의 기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 인들의 위대하고 찬란하였던 문명의 흔적을 만나는 것만으로 그들을 만난 듯이 흥분되었다.
아스클레피온 병원의 문장이 한 쪽 구석에 있어서 그 문장 옆에서 기념사진 한 장을 찍었다. 이 병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론 신의 아들이며 의사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설립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들의 의료 행위는 사람 목숨을 다루는 것이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는 직업이다. 하지만 그 옛날에도 의료 기피행위는 있었던 모양이다. 또한 800년 동안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던 병원으로 유명하다. 귀족만 환자로 받았으며 나을 가망이 없는 환자는 받지 않았다고 하니 어처구니없었다. 하지만 일단 이곳에 들어오면 옆에서 죽어나가는 사람이 없으니 심리적 안도감이 커서 살 수 있었단다.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인간의 생명에 관련되는 한, 똑 같은 모양이다.
셀수스 도서관을 지나 조금 걸어가니 길바닥에 새겨진 장방형의 카드 같은 표시가 있었다. 유곽으로 이끄는 표시로 가장 오른 쪽 아래쪽에 여자 모양이 있고 그 옆에 사람의 발바닥이 있으며 왼쪽 중간쯤에 사랑 표시가 있고 그 위에 돈을 나타내는 동그란 것이 있었다. 이것은 “사랑을 원하면 이 방향으로 돈을 가지고 오세요.”라는 뜻으로 아주 오래된 광고 문구이리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분출 욕구를 해소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모양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더욱 동물에 가까운 인간인 것 같다.
고양이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늘에서 쉬거나 털을 고르거나 두 마리가 서로 아끼는 장면을 연출하여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이곳의 관리인들이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어 기르니 고양이가 사람을 피하지 않고 사람과 공존한다. 이곳은 고대 유물의 천연 박물관일 뿐만 아니라 개나 고양이의 낙원이다. 터키 사람들의 동물 사랑하는 마음씨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었다.
에페스를 떠나기 전에 원형 극장에 올라갔는데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원형 극장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고대에도 배움을 중시하여 도서관을 짓고 원형극장에서 공연을 하였으니, 시대만 다를 뿐, 일찍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과 공통된 즐거움을 누렸다는 점에 놀라움과 희열을 느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곳 원형 극장을 포함하여 유적들이 복구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복구하면 자연스러운 맛을 상실하여 고고학자들을 제외하고 발걸음이 뜸해질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버스로 이동하여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도착하였다. 버스 기사 아이한이 시간을 뛰어넘은 고대의 조용한 시골 마을 쉬린제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그 마을은 그리스 사람들의 이주 마을로, 신기하게도 그 마을에 자연스레 동화되어 내 마음은 흐르는 바람처럼 자유로워졌다. 또한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그리스인들의 마을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와인 한 잔을 마시며 건배라는 뜻의 ‘쉐라페’를 외쳤다. 푸른 하늘 밑에서 내가 느낀 정취를 ‘쉬린제 마을에서 쉐라페’라는 제목으로 스케치하였다.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와인을 음미하는 연인들
향긋한 와인을 시음하라고 따라주는
시골 총각의 건배
쉐라페, 쉐라페, 쉐라페!
그리스 사람들의 이주 마을에서
진분홍 유도화가 손님맞이를 하고
붉은 지붕에 하얀 벽을 한 그리스 풍의 옛집
오후 명상에 젖어 있더니 벌떡 깨어 나를 반긴다
할머니는 손수 뜨개질을 하고
아주머니 아저씨 처녀 총각 모두
꽃무늬로 꾸민 수예품과 과일을 판다
아이스크림 파는 중년의 남자
김 총각 바지 중심부를 찌르듯
펜싱 놀이 하며 아이스크림을 건네니
김 총각 잠시 화들짝 놀라고
구경꾼의 즐거운 웃음소리에
흐르는 공기도 평화롭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그저 반겨주는 터키 사람들
코쟁이에게서 느끼는 형제애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서
가슴에 스며드는 행복에
소리 높여 깔깔깔 웃는다
사진 자료
806번: 과거 시장거리인 바실리카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
보드륨에서 패션모델과 함께하다 (2)
윤연모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짝지은 파란 바다가 평화롭다. 보드륨 성으로 가는 길에 하얀 건물이 즐비하여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요트들이 뜨거운 땡볕을 쬐며 에게 해의 푸른 바다에 정박하여 다음 여행지를 꿈꾸며 편히 쉬고 있다. 수많은 관광객들은 배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보드륨, 보드륨을 외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보드륨 성에 들어가기 전에 부겐베리아 꽃이 하도 예뻐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우리나라에 있는 꽃은 대부분 이곳에 다 있어 반가웠고 새로운 종류도 많아 신기하였다. 그 감흥을 터키인 가이드에게 말하니, 그가 자랑스럽게 한 마디 하였다. 유럽에 7,500 여종의 식물이 있는데 터키에는 9,000 여종의 식물이 있다고 하였다. 다른 가이드들은 꽃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어째서 식물에 대해서 잘 아느냐고 물으니 영국 관광객들이 열심히 질문하여 공부하게 되었단다. 얼굴이 잘 생긴 사람보다 보편적이지만 아름다운 꽃이나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것을 정통하게 알면 더욱 멋지게 보이는 것 같다.
보드륨은 14세기에 여러 국적의 십자군이 머물던 성으로 유명하며 지금 전시된 침몰선의 유물이 말없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십자군 전쟁 이후에 셀주크 튀르크가 쇠퇴하자, 그 지배를 받던 오스만 튀르크가 오스만 제국을 세우며 1453년에 동로마가 망하였다. 오스만 튀르크는 비잔티움을 정복하고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 터키의 수도가 탄생한 셈이다. 지배자가 바뀌며 보드륨 성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보드륨 성을 건축할 당시의 비화를 들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쉬운 일이었겠는가. 마우솔레이우스 왕은 살아 있을 때부터 자신의 무덤 건설에 힘썼다. 하지만 십자군이 도착하였을 때는 왕의 무덤이 지진으로 다 무너진 상태였다. 십자군은 보드륨 성을 짓기 위하여 마우솔레이온에서 왕의 무덤의 토대까지 모두 뽑아서 가져왔다. 만약 마우솔레이우스가 깨어났다면 기가 차서 피를 토하며 십자군들을 모두 응징하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성 안에 영국, 독일 등 여러 나라의 십자군들이 자신들의 거주 영역에 해당하는 성을 세웠다. 여러 나라의 성이 모여 있고 여러 국기를 꽂아 놓았으니 연합 막사인 셈이다. 독일군의 성만 공개하여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슴 뿔, 독일군의 깃발, 당시의 무기 등이 전시 되어 있었으며 힘없어 보이는 노인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안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많은 병사들을 수용하지는 못하였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성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망루를 만들어 대포는 수문장처럼 젊잖게 바다를 바라보며 버티고 서있었다. 십자군들은 아름다운 성에서 화살을 쏘고 대포를 꽝꽝 쏘아대었을 것이다. 적군이 이 성에 침입하기 힘들어 방어하기 좋았을 터이니, 전쟁을 수행하기에 천혜의 장소였을 것 같다.
항구에 많은 요트가 정박하여 있어서 저것에 몸을 싣고 한 바퀴 돌며 바닷바람이라도 쐬고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여행의 일정상 이루기 어려운 꿈이라서 그곳 시장을 들러보고 기념품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한동안 여름방학 때마다 해양활동을 하며 호수에서 헤엄치고 강에서 윈드서핑을 하고 잠수복을 입고 바다 밑으로 잠수를 하거나 잠수함을 타보고 미사일을 구경하고 요트를 타며 즐기던 그 푸른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때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면 눈물 나게 반갑고 즐거워 꺅꺅 소리라도 지르며 달려가 포옹할 것 같다. 갑자기 그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여졌다. 또 세월이 흐르고 나면 오늘의 이 순간과 현장이 그리워질 것이다.
터키 사람들은 친절하며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마음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 터키 사람들이 한국에 군대를 보내주었고 우리도 터키 지진이 났을 때에 보답으로 원조를 하여, 터키와 한국이 ‘형제의 나라’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흐뭇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이 팔고 있는 물건에 대해서 확실하게 상행위를 하였다. 형제의 나라에서 왔다고 물건을 공짜로 퍼줄 리는 없지 않겠는가. 그들의 친절한 태도와 한국인에 대한 열린 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쇼핑을 더욱 즐겁게 할 수 있었다.
터키인들은 술을 즐긴다기보다 터키의 차, 즉 홍차를 즐긴다. 그래서 그런지 물건을 팔 때에 먼저 차부터 대접한다. 아침에 보드륨 성으로 가는 도중에 들렸던 가죽 판매점에서 재미있는 일을 경험하였다. 구경을 좋아하니 패션 쇼 무대의 앞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따끈한 터키 차인 홍차를 대접하여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듣기만 해도 온몸을 들썩이게 하는 리드미컬하고 섹시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곧 남녀 모델들이 런웨이에서 멋진 가죽 옷을 입고 워킹하며 다양한 포즈를 취하여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흐음, 이곳은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가장 멋진 남자 모델이 다가와서 나에게 손을 건네어 속으로 신이 났다. 흔쾌히 허락한다는 뜻으로 쌩긋 웃고 나가니 나를 이끌고 탈의실로 가는 것이 아닌가. 의상 담당 아가씨들이 나에게 빨간 가죽 재킷을 입혀주었으며 그 모델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오더니 나에게 인사를 하고 춤출 때처럼 내 손을 살짝 머리 위로 올려 돌려보는 것이 아닌가. 옛날에 스포츠 댄스를 도 닦듯이 다닌 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 팀이 되어 무대 위를 활보하였고 워킹의 맨 끝부분에서 아까 연습한 것을 자연스럽게 하였다. 하여 살짝 흥분된 상태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들은 가죽 옷을 사도록 패션쇼라는 만찬을 제공하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사보다 제삿밥에 관심이 많았다. 원래 제사를 준비하여 모시는 것은 힘들고 제삿밥이 맛있는 법이다. 쇼핑을 한다기보다 한 바퀴 휘익 돌고 나서 판매장에 있는 멋진 모델 아가씨와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곳을 떠날 때에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던 패션모델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과 헤어질 때에 ‘안녕’이라는 뜻의 터키 인사말인 ‘귤레귤레’를 주고받았다. 나의 파트너가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하여 주었을 때에 그의 큰 눈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보드륨 성 관광을 끝내고 파묵칼레로 가는 도중이다. 버스 안에서 ‘놀라운 은총’이 울려 퍼진다. 정말 이 아름다운 광경과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충분히 놀라운 은총이다. 연주가 끝나고 엔리오 모리코네가 작곡하고 사라브라이트만이 부른 ‘넬라 판타지아’가 흘러나와 마음속으로 가만가만 따라 부르고 있었다. 창밖에 짙은 코발트 빛 바다가 우리를 유혹하고 나의 피부처럼 익숙한 멜로디가 마음 깊은 곳을 자극하여 이유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갑자기 뭔가 이룩해야 한다는 생각도 사라지고 미풍에 흔들리는 부겐베리아의 진분홍 꽃잎처럼 가벼워짐을 느꼈다.
오늘 새벽에 창밖 풍경을 내다보다 시 한 편 ‘에게 해를 바라보며’를 스케치하였다.
사진 설명
0912 모델 아가씨와 함께한 필자
순수의 설원, 파묵깔레에 가다 (3)
윤연모
파묵깔레라는 지명은 참으로 신기하여 도착하기 전에 파묵깔레, 파묵깔레라고 입으로 되뇌어본다. ‘파와 묵을 깐다고? 파와 묵을 깔면 어떤 양념을 해야 맛있을까?’라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본다. 파묵깔레는 하얀 목화밭 같아서 지어진 이름이라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지질현상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다. 하얀 석회 눈밭에 녹색 길고 가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일렬로 서서 우리를 반겼던 그 특이한 인상! 순수의 설원을 지키는 나무들이 내 마음에 각인되어 아름답게 떠오른다.
버스에서 내다본 파묵깔레의 풍경은 굉장히 특이한 느낌이었다. 먼 거리를 달려왔기 때문에 내일 새벽에 그곳을 구경하기로 하고 호텔에서 쉬었다. 덕분에 땡볕도 적당히 기분 좋게 느껴지는 호텔 수영장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수영하였고, 인형 같은 터키 꼬마 아가씨가 수영장에서 물에 빠진 개미를 잡는 것을 지켜보다가 물에 빠질까봐 안아주고 놀았다. 가족들끼리 파라솔 아래에서 쉬고 몸매 좋은 아가씨들은 긴 의자에 누워 일광욕을 하고 연인들은 수영을 한다기보다 끌어안고 물속에서 서로를 느끼는 듯하였다. 세상이 평화롭게 느껴져 나의 마음속의 시계는 잠시 멈추었다.
수영을 마치고 호텔에서 온천욕 하는 곳을 찾아 들어가 따뜻한 탕에 들어가니 몸이 나른하며 졸음이 쏟아졌다. 여탕을 찾아가니 이 지역에 대리석이 하도 많아서 그런지 모든 것이 대리석이다. 게다가 욕조도 더러움을 씻어내는 넓은 판도 뜨끈뜨끈한 대리석이고 물을 받아두는 항아리 속에 조랑 박 물바가지가 떠 있어서 내가 옛날 페르시아 궁전의 욕탕에서 몸을 씻는 왕녀라도 된 듯이 기분이 좋았다. 옆에서 때밀이 아가씨가 수영복을 입고 있는 관광객을 대리석 위에 눕혀 놓고 열심히 닦아주었다. 흐음, 수영복을 입혀 놓고 몸을 닦아주다니 때를 닦는 것도 쉽지 않겠다. 이것이 예의일까, 폐쇄성일까, 어쨌든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쉽지 않은 일이겠다.
온천욕을 하고 나서 바로 식사하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면 십중팔구 침대로 기어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 호텔 주변을 산책하려고 나갔다. 바닥이 온통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테니스코트에서 청년들이 시합을 하고 있었다. 그들과 일행인 청년이 우리 옆에서 경기하는 친구들을 환호하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에게 인사말을 건네고, 터키가 아시아에 속하는지 유럽에 속하는지 물었다. 생김새도 깎아놓은 조각 같은 청년이 처음에 유럽이라고 말하더니 아시아라고 다시 수정하며 계면쩍게 웃었다. 말을 건네고 싶어 질문을 하였으며 아시아와 유럽의 두 지역에 속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며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스탄불 쪽은 유럽의 관문으로 유럽에 속하고 나머지 지역은 아시아에 속하며 종교는 거의 모든 국민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나라이니, 그 청년이 대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호텔 방안으로 돌아와서 바깥을 둘러보니 코앞에 에게 해가 나를 유혹하였다. 하지만 다음 날을 기대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파묵깔레에 입장하였다.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입이 크게 벌어졌다. 하얀 것이 눈 같은데 석회층이란다. 오! 주인장 나리! 큰 개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꼬리를 크게 흔들며 주인장처럼 우리를 맞이하고 앞장서서 기분 좋게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이 녀석은 아무래도 고대 히에라 폴리스의 수문장 노릇을 하다가 환생한 것이 아닌지 궁금하였다. 이른 아침에 관광객으로서 제일 먼저 입장한 우리에게 그곳은 신천지였고 거꾸로 가는 시간여행을 선사하였다. 그곳은 마치 하얀 눈밭을 연출하였으며 멀리 고대 유적들이 여명 속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죽 가다 보니 일부러 심어놓은 꽃밭을 지날 때는 마치 오월의 여왕인 장미의 정원을 산책하는 듯하였다.
드디어 전망이 좋아 속이 확 트이는 곳에 도착하였다. 건너편에 바바 산이 보이고 아래쪽으로 평화롭게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보였다. 위쪽으로는 그곳을 지키고 있는 유니폼을 입은 경비원들이 서 있어서 그들을 찍어보려고 줌으로 거리를 당겼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마음 좋은 그들이 앞으로 나와서 포즈를 취하여 주었다. 얼굴을 찌푸리고 돌아설 수도 있을 터인데 참으로 속이 트인 사람들이다. 이곳은 석회암 성분이 있는 물이 표면에 계속 흘러 쌓여서 미끌미끌하고 하얀 색깔 계단식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맨발로 조심조심 걷기 시작하였다.
마치 한 덩어리의 땅덩어리가 둘로 갈라진 듯 쩍 벌어진 곳에 따뜻한 온천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물속의 석회 성분이 오랜 세월동안 암석 표면에 흘러 침전하고 응고되어 이런 멋지고 넓적하여 기이한 석회붕 형태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이십 분만 담그면 혈액순환에 좋다며 발을 담그고 있었다. 나도 살짝 발을 담가 보았다. 천혜의 자연 속에서 발 담그고 잠시 휴식하는 이 맛! 건강에 좋다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한다. 그것도 여행의 묘미 중의 하나일 것이다.
히에라폴리스는 원래 유독가스가 나와서 주민들이 성스럽게 생각하여 히에론 신전을 지었다. B.C. 190년에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2세가 로마의 전쟁을 이기도록 협조하여 이 도시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도시건설에 힘썼으며 당시에 사랑하는 왕비 히에라의 이름을 붙여준 듯하다. 불행하게도 1세기 초에 대지진이 일어나 산의 흙에 도시가 다 묻혀버렸다. 하지만 신전 터의 나뒹구는 석재들만 보아도 규모가 어느 정도로 컸을지, 그 때의 영광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관광객들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지어 서있었다. 알고 보니 도시의 황금기에 세워진 유적 풀장이란다. 풀장 바닥에 로마시대의 원기둥이 나뒹굴고 있다는데 유적 속에서 헤엄치는 영광을 얻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하지만 페르가몬 왕조, 로마, 비쟌틴 시대를 거쳐 15세기에 셀죽크 터키가 지배하였지만 다시 엄청난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 위대한 인류 문명도 자연현상 앞에서는 한낱 하찮은 파리 목숨이 되는 것 같다. 그 날의 영광과 비탄을 유적들이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눈에 많이 띄어 일본인 모녀와 대화를 나누어보았다.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처음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나고야에서 왔단다. 2005년에 나고야 만국박람회에 다녀왔으며 박람회에서 인상 깊었던 것을 잠시 이야기하여 주었다. 그녀도 한국의 명동이랑 경주 지역을 다녀왔다고 하며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말해 주었다. 나도 1990년에 오사카에서 동경까지 열흘 동안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하였으며, 그때는 어머니가 건강하여 날아다닐 정도였는데 지금은 연로하여 그때가 그립다고.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너희 나라를 여행하였을 때에 귀중품처럼 모셨는데, 너도 그렇지 않느냐고 딸에게 물으니 모녀가 행복한 마음에 배시시 웃었다. 딸과 어머니가 함께 여행하면 서로 친구가 되고 그 여행에 대한 행복한 기억은 평생 동안 추억거리로 지닐 수 있지 않겠는가.
파묵깔레 여행을 마치고 코발트 빛깔 지중해에서 유람선을 타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 사진 여러 장을 찍었다. 배안에 해군복을 입은 소년이 있었다. 해양활동을 했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해양소년단 단원인줄 알고 말을 걸어 보았다. 그는 우리 식으로 하면 선장이 되기 위하여 해군직업학교에 다니며 실습을 하는 중이란다. 소년이 내년에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꼭 꿈을 이루기를 바라고 내 인생의 후반부를 어떻게 보내야할지 생각하며 ‘포세이돈과의 대화’를 스케치하여 보았다.
코발트 빛 지중해 물결에 몸을 맡기고
계획표 없는 시간에
포세이돈과 대화를 나누어본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납빛 바다 물결
너는 온 역사를 다 구경하고
때로 베풀고 때로 삼키고 응징하였지
해군복을 입고
오로지 바다만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을 꿈꾸는 소년
쥬네이트 아크디트
인생 70분 중에 17분을 달린 소년
지금 네가 있어 나의 꿈을 돌아본다
태곳적부터 흔들리던
바다의 푸른 피부에서
사람들은 위안을 얻는가
마나우가트 폭포의 환호성에
사진의 제물인양
폭포를 사진기 속에 덥석덥석 집어넣는다
5막 중에 혹여 네 번째 커튼이 올라갔다면
70분 경기에서 50여분을 돌았다면
남은 10분 혹은 15분을 위하여
인생의 마지막 장을 위하여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
포세이돈! 그대는 아는가?
안탈랴에서 만난 터키인 (4)
윤연모
하늘이 맑아 눈부시게 푸른데 뜨겁고 건조하다. 여행하는 즐거움 덕분인지 미지의 것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뜨거운 날씨가 몸속의 수분을 다 빼앗아가도 기분은 하늘로 오를 듯이 좋다. 유람선에서 내려서 항구에서 조금 걷다 보니 중세풍의 옛 길로 접어든다. 늘어서 있는 카펫 가게에 대형 작품도 드리워져 있어서 한들한들 구경하며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길이 고풍스럽고 낭만적인 옛 도시의 정취를 풍겨 현실이 아닌 입체 영상을 체험하는 듯하다.
한참을 걸으니 조그마한 규모의 하드리아누스의 문이 여행객을 반겨준다. 이 아름다운 문은 기원 130년에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통치하였던 것을 기념하여 만든 문이다. 세 개의 연속된 아치가 있는 문으로 이오니아식으로 우아하다.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이름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데 위정자들은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건축물을 남기는 데에 힘을 쓰는 것 같다. 그 예술품이 세월을 뛰어넘어 후손들에게 영원히 예술품으로 남게 되는 때문인 듯하다.
탁심 광장 앞에서 분주하게 지나가는 터키인들과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동상 하나를 바라본다. 터키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대통령인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타투르크 동상이 이스탄불의 탁심 광장 입구에서도 시민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이곳 안탈랴에서도 관광객인 나를 친숙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터키인들의 한없는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고 하니 보기만 하여도 듬직하다. 우리나라의 세종대왕 아니, 현대의 선구적 대통령이니 박정희 대통령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까.
비록 자유 시간을 얻었지만 돌아다닐 힘과 의욕이 없었다. 짝퉁시장이 있었지만 흥미가 없다기보다 날씨가 뜨거워서 더 이상 어딘가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근처의 카페에서 차나 한 잔 하려고 둘러보았다. 건너편에 거리 쪽으로 테이블을 내어 놓은 음식점 하나를 발견하고 자리에 앉아서 터키 차인 ‘차이’ 한 잔을 시켰다. 투명한 작은 유리잔에 담긴 터키 차는 홍차로 투명하게 붉은 빛이 매력적이었다. 이 홍차의 맛은 깔끔하고 상큼하여 기분도 맑아지고 정신이 확 깨이는 듯하였다. 인도에서 들어왔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우유를 넣지 않고 순수하게 홍차 맛을 즐긴다. 인도의 자이 차가 은근한 매력을 풍기는데 비하여 이 맛은 상큼하다 못해 신맛까지 났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선홍빛과 독특한 맛에 침이 막 나온다.
한참 뒤에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통성명을 하고 보니 그의 이름은 리(Lii)였다. 그는 마치 돈키호테처럼 행동을 하였다. 테이블에 놓인 나의 사진기를 마음대로 들고 거리로 나가더니 지나가는 사람과 자기 친구들을 찍었다. 그가 신이 나서 장난감을 손에 든 어린이 같이 즐겁게 찍었고 도시의 이방인은 터키의 돈키호테의 모습을 구경하였다.
리가 지금 라마단 기간이라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여덟 시까지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으며 성행위도 할 수 없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쏟아내었다. 이슬람교도들이 그렇게 금욕을 하며 자신을 구속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렸웠다. 불교에서 스님들이 동안거나 하안거를 하며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일반 불자들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라마단은 이슬람교를 믿는 국민들이 대규모로 하니 이 나라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작지 않을 것 같다.
이곳의 택시 기사들도 라마단 기간에는 이유 없이 화를 낼 때도 있단다. 배고픈데 하루 종일 참고 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만약 우리 한국에서 라마단처럼 거의 모든 국민이 금욕하며 생활하는 기간이 있다면 참으로 힘들 것 같다. 더구나 학교에서 종교 때문에 특정한 기간 동안 점심시간이 없다면 아이들은 무슨 힘으로 공부하고 교사는 무슨 힘으로 가르치겠는가.
이곳 사람들이 적당히 느리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이방인에게도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그러한 모습은 심지어 개와 고양이에게서도 찾을 수 있었다. 아무 곳에나 그늘이 있으면 길바닥에 편안하게 누워 쉬거나 자고 있는 개나 고양이들. 만약 터키인들이 그들을 학대하거나 보살펴주지 않는다면 개도 슬픈 눈으로 쳐다보다가 결국 냉담한 사람들을 피하여 살기 위해서 더러운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겠는가. 이곳 개들은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덩치가 슈나이저 만큼 큰 개들이 많다. 이곳에 태어난 개나 고양이는 삶이 괜찮은 듯하다. 혹시 이 개들도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지 궁금하다.
리에게 찻값을 치르고 그 자리를 뜨려고 하니 찻값을 받지 않겠다고 하며 한 잔을 더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바비큐도 공짜로 줄 수 있다고 하였다. 너희들은 돼지 바비큐를 먹지 않기 때문에 취급하지 않는 것을 아니까 농담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특별히 판다고 하며 자신의 찻집에 근무하는 친구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즐거워하였다.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살이 쪄서 바비큐라고 놀리느라 지어준 친구의 별명이었다. 리와 바비큐 때문에 시원하게 한바탕 웃었다.
다 마시고 나니 차를 한 잔 더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홍차에는 카페인이 있어서 많이 마시지 않는다고 하니, 자신들은 하루 종일 물처럼 계속 마시므로 한 잔 더 대접하겠단다. 정중하게 사양하고 떠나려는데 맛있는 차와 이방인에게 베풀어준 서비스에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세종대왕이 그려진 천 원짜리 지폐와 오백 원짜리, 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어 마음의 선물로 나누어주었더니 고맙게도 작은 기념품에 흐뭇해하였다. 이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씨와 이방인에게 차 한 잔 대접하는 그들의 여유, 돈키호테 같은 음식점 사장인 리의 행동에서 그들의 행복을 푸짐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진자료
1300: 아타투르크 동상 앞에서 터키 꼬마들과 포즈를 취한 필자
소녀 데리야와 버스기사 아이한 (5)
윤연모
터키 사람들은 순박하고 착하다. 분위기가 평안하고 외국에서 온 사람들의 눈을 그윽하게 쳐다본다. 그 사람들의 눈빛에 은근히 동화되니 빠르게 흘러가는 인생에 쉬어가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는 것 같다. 매일 우리를 실어 나르는 버스 기사 아이한.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베스트 마담, 섹시 마담’이라고 부르며 윙크까지 곁들여 준다. 처음에는 그에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더니 나중에는 베스트 마담이라고 불러주어 나도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불러주었다. 게다가 저녁 식사 후에 사진을 찍으며 만난 소녀 데리야 때문에 무려 닷새 동안 즐거웠던 해프닝이 있다.
터키는 이스탄불이 유럽 쪽에 머리를 두고 있으며 몸은 아시아 땅에 두고 마음은 이슬람교에 의지하는 나라이다. 또한 터키는 인구가 많고 땅이 넓어서 유럽의 중국과 같은 존재이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4월 1일이 여성의 날로 이슬람 권 국가에서 여성의 권리가 가장 센 나라이다. 밸리 댄스 를 구경하는 날에 터키의 전통 춤도 구경하였다. 신부가 신랑을 보고 맘에 안 들으면 거부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지혜롭게 해학적으로 물리치는, 그들의 전통적인 결혼관을 엿볼 수 있었다.
일몰 사진을 한 장 건질 수 있을까 생각하여 저녁 식사를 하다가 튀어나갔다. 하지만 주변이 기대 이하로 재미없는 단순한 시골 풍경이라 일몰 사진은 포기하고 인물 중심으로 소를 모는 농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꼬마들을 찍어 보았다. 여긴 확실히 구석진 시골마을인 모양이다. 터키에서 소 모는 농부를 만날 줄을 상상이나 했을까.
꼬마들에게 사진을 같이 찍으려고 인사말을 건네었다. 그 아이들은 영어를 하나도 모르고 나는 터키어를 하나도 모르니 대화가 안 되지만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의사소통하며 사진을 찍었다. 내가 사진 연출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맏이인 여자 아이가 적극적이어서,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모두 자신의 행위에 열중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협조하며 즐겼다. 예를 들면, 그 여자 아이가 나의 선글라스를 잠시 빌려달라는 것이다. 자신이 나에게서 빌린 안경을 턱 끼고서 찍다가 내가 하자는 대로 요구하면 또 미소를 함박꽃처럼 지으며 협조하여 덕분에 멋진 사진을 한 장 얻었다. 한 동안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것 같기도 하고 그 아이들의 이모나 고모가 된 듯하였다.
사진을 찍으며 왠지 그 아이들에게 고마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끝나고 1달러라도 주면 우리 아이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것처럼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메일 주소를 가르쳐주면 보내주겠다고 이메일을 외쳐도 그 아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집주소를 의미하는 ‘하우스’를 외치니 오십 미터 쯤 떨어져 있는 집을 가리키며 종이를 들고 뛰어갔다 온다. 아마도 어른들에게 물어서 가르쳐 주겠다는 내용이리라. 그래서 받은 주소가 불완전하였다. 아무래도 불완전한데 설명하기가 난해하였다.
그 때에 우리들의 아이한 카프탄, 아이한 버스기사가 저쪽에 서있었다. ‘아이한’을 소리쳐 부르니 그가 왔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주소를 물어서 완성해 달라고 하였다. 그는 흔쾌히 그 주소를 다 써주었다. 그 다음에 다시 보니, 이번에는 그 아이의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이름을 써달라고 하여 물으니 이름이 ‘데리야’였다. 내가 이 소녀에게 돈을 좀 주어도 괜찮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였다. 나는 그 아이에게 돈을 전해주며 땡큐와 ‘귤레귤레’라고 하니 그 아이도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멀어져갔다. 귤레귤레는 터키어로 헤어질 때의 인사말이다. 그 소녀는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주었다. 나는 그 아이가 커서 나중에 무엇이 되던 꼭 성공하리라 확신하였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차에서 오르고 내릴 때에 어딘가에서 ‘데리야, 데리야’하는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해프닝에 우연찮게 합류하게 된 아이한 기사가 나에게 장난을 거는 목소리였다. 나도 따라서 답으로 ‘데리야, 데리야’라고 불러주었다. 그런데 첫 음에 악센트를 주고 마지막 음을 가볍게 짧게 부르니 노랫가락 같아 듣기 좋았다. 또한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즐거운 음악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나라의 아이들을 귀여워하여 준 이국의 여자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또한 데리야라고 나에게 자꾸 부르는 것은 꼭 그 소녀와의 약속을 지키라는 일종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먼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고독하지만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고 즐겁게 운전하는 터키의 운전기사 아이한. 그가 ‘데리야, 데리야’라고 불러주는 노래소리가 내 귓가에서 나는 것 같다. 며칠 푹 쉬고 사진관에 가서 인화하여 사진을 뽑아서 그 소녀에게 부쳐주어야겠다. 밤이면 반짝이는 별이 바로 머리 위에서 노래하는 그런 나라의 소녀에게 절대로 실망을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 집의 현관문을 열고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냥 별 하나 없는 소박한 밤하늘이다.
아이한은 힘든 일을 힘들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스스로 행복해하며 천국에 머무는 순박한 기사양반이었다.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에 그를 다시 만날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터키를 생각하면 터키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콧수염이 멋지게 난 베스트 드라이버, 아이한을 함께 생각할 것 같다. 헤어지기 전에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하고 싶었지만 이미 다른 터키 사람들과 터키의 전통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탄불 공항에서 헤어지는 날에 카파도키아에서 산 건포도 봉지를 건네주었다. 그가 운전하다 졸릴 때에 해바라기 씨를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건포도라도 집어 먹으며 일을 한다면 덜 졸리지 않을까. 아이한 카프탄, 파이팅!
사진자료
1495 터키의 꼬마들과 함께한 필자
<윤연모 본인 소개>
1959년 전주 출생.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동 대학원 일본어교육학과, 영어교육학과 졸업.
황희문화예술상, 황금마패문화상, 시예술상, 서울시교육감상 등 수상.
시집 : <세상을 여는 출구> <하얀 사랑꽃> <물고기춤> 수필집: <아버지와 피아노 교본> <내 노래는 아무도 모를 거예요> <갠지스 강의 여명>
번역서 : <리고베르타 멘츄> 음반: 윤연모 시가곡 제1집 <구름 향기> 홈피: http://yoonym.kll.co.kr (현) 서라벌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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