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을 지나가면서 다시 한번 우리 시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극과 극이 공존하는 대한민국의 2009년, 왜 우리는 서로가 다르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일까요? 왜 저가 나와 같이 되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다른 채로 살면 안되나요?
왜 여전히 극우 극좌라는 색안경을 끼고 살까?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폭력은 결코 우리 시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영성 작가요 사제인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이 들려주는 ‘바보들의 마을에 들어선 수박 사냥꾼’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바보들의 마을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마을 한복판에 있는 밀밭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 밀밭에 괴물이 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보니 그 괴물은 다름아닌 수박이었습니다.
그는 괴물을 처치하겠다고 선언하고 수박을 줄기채 짤라 쪼각을 낸 후 한 쪽을 먹어 보였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우리도 저렇게 난도질을 할 것이라”고 소리치며 그에게 달려들어 그는 마을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얼마 후 또 다른 사람이 그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앞의 사람과 달리 마을 사람들이 괴물을 인해 놀라면 같이 놀라고 도망치면 같이 도망치며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가르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수박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했고 수박을 재배하는 마을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극우도 극좌도 모든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서 열정과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사람들로 세워갈 수 있는 리더쉽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 가운데 한가지가 의미있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은 의미없는 쓰레기요.’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수긍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의미, 더 중요한 의미를 찾다보니까 사소한 일을 의미있게 여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뉴스나 신문보도를 봐도 작은 일보다는 쇼킹한 일, 자극적인 일, 대형사고, 최초로 일어난 일등을 보도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인생의 대부분은 의미있는 큰 일이 아닌 아주 작고 사소한 일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작은 일에 집중하며 살아가야 하고, 작고 사소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삶과 일을 의미있는 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존 오토버그는 '누더기 하나님'이란 책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구순구개열 즉 언청이로 태어났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그러진 입술, 구부러진 코, 균형이 안 잡힌 치아, 그리고 말을 더듬는 작은 소녀였습니다. 친구들이 짖궂게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물으면 어렸을 때 넘어져서 유리 조각에 찢겼다고 말하곤 했답니다. 다르게 태어난 것보다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 훨씬 더 자존심을 세우는 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가족 이외에 그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레오나르드 선생님의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작고 통통하며 생기 넘치는 선생님은 언제나 행복해 보였고, 그녀는 학생들에게 조금은 특이한 듣기시험을 치루었는데 평가 방식은 학생들이 문을 등지고 서서 한쪽 귀를 막으면 선생님이 뭔가를 속삭이셨고, 학생들이 그 말을 따라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말들은 이를테면 “하늘은 파랗다”라든지 “신발을 새로 샀니?” 같은 말로 사소한 말들이었습니다. 드디어 소녀의 차례가 되었고 그녀는 잔뜩 기대하며 선생님이 들려주실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책은 이렇게 썼습니다. “잠시 후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그 다섯 마디가 내 삶을 바꿨다. 레오나르드 선생님은 이렇게 속삭이셨다. “난 네가 내 딸이었음 좋겠어.”우리 인생에 영향을 주는 것은 결코 크고 위대한 사건들만이 아닙니다. 한 소녀의 부정적인 인생을 밝고 힘있고 긍정적인 인생으로 바꾼 것은 작은 말 한마디 그러나 그안에 진정한 격려와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였습니다.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을 다시 바라보며 소중히 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노방전도를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주보에 사탕 하나 매달아서 주더군요. 그게 실제로 효과가 있느냐? 묻는다면 거의 2만장에 한 사람이 교회를 찾는다니 거의 효과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럼 왜 하느냐? 하도‘목사가 괴롭히니까 한다.’이게 정답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여러분을 안 괴롭히니까 고맙죠?
그러나 전도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의미없는 일이 아니라고 믿는 것이죠. 주보를 전하고, 차를 끓여 주는 이 일이 의미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효과도 없는 일을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요? 본문은 그 확신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주시는 확신 가운데 하나는 영접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40-41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고, 너희를 영접하는 자들은 상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란 전략적이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공감합니다. 그런데 전략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용대 효율을 고려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 자체가 영혼의 소중함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아무리 전략적으로 잘 분비되어진다 해도 반드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습니다. 모든 영역이 그렇듯이 전도도 하나님의 영역에 속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전도를 명령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전도가 명령이라 해야하는 일이라면 기쁨이 없죠. 전도는 생활입니다. 마치 씨앗을 심으면 새싹이 나고, 잎을 피우고 꽃이 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생활의 한 단면입니다.
우리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우리는 전도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차운행을 할 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차들이 있습니다. 제 마음에 이런 염려가 생깁니다. 저 차 교회차 아닐까? 만약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이름이 쓰여진 것을 본다면 교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자신은 신호를 위반하고, 중앙선을 넘어가는 것이 예배에 사람들을 태워다 주는 충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교회에 오지 마시오.”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아는 사람들 앞에서 술집, 노래방등의 출입이 자유롭다면 그들은 여러분을 자유로운 신앙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만의 향기를 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삶 전체가 전도입니다. 식당에서 밥을 사먹는 것, 차선과 신호를 지키며 운전하는 것, 공공장소에서 질서를 지키는 것 모두가 전도입니다. 전도를 명령이 아닌 자연스러운 생활을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예신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전도는 열매맺기 보다 헛된 바람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다가 중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득이 없으니 기운이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같은 사람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가 결코 아무 소득이 없는 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취 쉬츠의 소망이란 책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쉐라라는 여인이 여행중에 너무 멋진 석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이 너무 멋져 혼자보기 아까운 이 아줌마가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 점원에게 잠깐 밖으로 나오라고 하고서는 ‘저 석양을 보세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보여요.’
그후 4년이 지난뒤 그녀는 이혼을 하고 소망없는 삶을 살던중 한 집지에서 한 여인의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그녀는 이혼 후 낯선곳에서 가게를 하며 죽지 못해 살던 자기에게 어느날 한 여인이 들어와 밖으로 나오라며 자신을 끌고 나가 석양을 보게 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 일로 자신의 삶이 달라졌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4년전 여행중에 만났던 여인이었죠. 그녀의 말은 한 여인의 삶을 바꾸고 다시 한바퀴 둘아 그녀의 삶에 소망을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향해 던진 위로와 격려의 말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전해준 주보 한 장, 전도지 한 장, 나누었던 작은 사랑의 선물, 함께 보낸 시간 그 모든 것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을 영접하는 자를 예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미있는 상대란 반드시 세상적인 기준에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소자입니다. 우리 눈에 별 볼일없이 보이는 사람, 큰 비중이 없는 사람이 소자입니다. 사람의 속성이 좀 힘있는 사람이 부탁을 하면 잘보이려고 하고, 별볼일없는 사람의 부탁은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세 가지 의문>을 보면 인생에서 풀기 힘든 세 가지 의문을 가지고 고민하는 한 임금이 나옵니다. 첫째,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시기는 언제인가? 둘째, 어떤 인물이 가장 중요한 사람일까? 셋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답을 찾지 못한 왕은 산골의 은자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왕의 질문을 받은 은자는 말없이 밭만 갈고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숲속에서 한 청년이 피투성이의 몸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임금은 자신의 옷을 찢어서 청년의 상처를 싸매주고 정성껏 간호를 해주었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그 청년은 임금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젊은 신하였는데, 임금의 간호에 감격하여 원한의 감정을 풀고 더욱 충성스런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은자는 그제서야 말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사람이 지배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존재는 자신이 지금 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지요.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일은 지금 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 정성을 다해 사랑을 베푸는 것 입니다.”톨스토이가 복음서를 좋아했던 작가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아마도 이 말씀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요?
오늘 내 삶에 하나님이 보내신 그래서 내가 찾아야 하는 소자는 누구일까요? 내 마음에 큰 비중이 없이, 내 눈에 좋아보이지 않지만 바로 나의 관심과 사랑과 내가 전해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한 사람 그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 깊이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행동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냉수 한 그릇의 의미가 뭡니까? 돈들지 않는일, 많은 수고가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큰 것이 아닙니다. 단지 냉수 한 그릇, 우리에게 별로 힘들지 않는 행위이지만 그 행동이 하나님이 주실 상을 놓치지 않는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행동의 크고 작음이 아닌 그안에 담긴 사랑의 진정성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있는 사람, 도움되는 사람이 아닌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고 냉수 한그릇 나눔으로 상받는 성도가 됩시다.
프레드라는 노르웨이출신의 콩고선교사가 있었습니다. 큰 뜻을 품고 가서 죽을 고생을 다하며 전도를 했지만 그가 건진 것은 7살난 한 흑인소년뿐이었습니다. 그 소년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사랑을 베풀었을 뿐입니다. 그러다 임신한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었습니다. 프레드는 용기를 잃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품고 콩고를 떠났습니다. 1살된 딸을 선교회에 맡기는 비정함을 보이며 그는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뒤 그 딸이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영국 런던을 경유하여 아버지를 찾은 딸은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런던에서 콩고 출신의 한 흑인 목사를 만났는데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고 바로 자신이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해받은 7살짜리 소년이었다고, 그분의 헌신으로 지금 콩고에는 10만명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전도와 선교에 힘쓰고 있노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실패라고 생각했던 일, 딸도 버리고 떠난 콩고 땅에서 하나님은 7살난 한 작은 흑인소년에게 밥먹여주고 씻기고 성경을 가르쳐주었던 그의 작은 헌신을 통해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의미있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작은 섬김과 헌신을 귀하여 여겨 사용하시는 주님을 높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