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르셀로나 성가족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19, 10, 20
성가족이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1883년, 갓 서른 살의 가우디가 스승이 포기한
성당 건축을 담당하게 된다.
그후 40년간 교통사고로 숨을 거둘 때까지
필생의 사역으로 설계하고 감독한 작품이다.
그러나 1926년 불의의 사고로 그는 결국
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해는 자신이 지은 이 성당의
지하 납골묘에 안장되었다.
원래 이 납골묘에는
성인이나 왕족의 유해만 안치될 수 있는데,
로마 교황청에서 그의 신앙심과
업적을 높이 사서 허가해 준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는 총 3개의 파사드
(건물의 주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가 있는데,
각각 ‘예수 탄생’, ‘예수 수난’,
‘예수 영광’을 주제로 설계되었고,
이 중 ‘예수 탄생’의 파사드는
가우디가 생전에 직접 완성시킨 것이다.
‘예수 수난’ 파사드는 1976년에 완공되었고,
마지막 남은 ‘예수 영광’ 파사드는
아직 착공도 하지 않은 상태이다.
3개의 파사드 위에는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종탑이 세워지고,
중앙에는 예수를 상징하는
거대한 탑이 세워질 계획인데,
현재까지는 8개의 종탑만 완공되었다.
가우디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건축물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즉 성가족 성당일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이미지에는
늘 성가족 성당의 모습이 포함되기 마련인데,
그 규모가 워낙 크고 계획도
현대 건축물답지 않게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1-2년이면 건물을 ‘뚝딱’ 짓고
삼십 년 된 아파트는 당연히 헐어 버려야 마땅한
퇴물 취급을 하는 우리의 풍토와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유럽의 성당 중에는 짓는 데
몇 백 년이 걸린 곳이 허다하다는데,
역사 속의 사건이 아니고
현재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지 9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축이 진행 중인데
그의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이라고 한다.
(다음백과 참조)
성당 앞에서 덤불링하는 소년들
무슨 행사인지...
성당 입장은 매일 입장객 수를 제한하기 때문에
단체라도 개인표를 구입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성당을 입장할 때는
엄격한 보안 검사를 거쳐야 한다.
가우디의 정식 이름은
‘안토니 플라시드 기옘 가우디 이 코르넷
(Antoni Plàcid Guillem Gaudí i Cornet)’이다.
1852, 06, 25 출생- 1926, 06, 10 사망
1918년부터는 자신이 평생동안 건축해온
성가정 (성가족) 대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재정 문제로 인해 끝을 보지 못하고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지나가던 노면전차에 치여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운전수는 지저분한 노숙인으로 생각하고
그를 길 옆에 팽개치고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지만
역시 노숙인으로 생각한 기사들은
그냥 지나쳐 3번의 승차 거부 끝에
4번째로 잡은 택시 운전수가 겨우 운전했지만
병원도 2곳이나 진료 거부를 당해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무상 병원에 놔두고 가버렸다고 한다.
문제는 신분을 증명하는 것인데
병원에서 방치된 채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가우디는
병원 간호사에게 이름을 말하자
병원 관계자들은 경악을 하며
가우디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했다고 한다.
서둘러 달려온 그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라며
그대로 빈민 병원에 남았고
결국 사흘 후 74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위키백과 참조)
10월 9일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10월 21일 귀국할 때까지 12박 13일
스페인, 포르튜갈
그리고 모로코 여행을 여기서 마친다.
사진과 글을 끝까지 보아주시고
동행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출처: 아굴라와 브리스가 원문보기 글쓴이: 아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