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도 하반기 선현유적답사 및 회원간담회
○ 테마: 대구근교 유교 관련 유적지(제4차)
○ 일시: 2013년 9월 29일(일) 08시 30분~19시
○ 답사지역: 대구시 달서구, 달성군(다사·서재)일원
○ 집합장소: 대구향교(08시 30분)
○ 답사지: 향교→구암서원→화암서원→태충각→용강서원→이락서당→금암서원(점심)→
영벽정→이유재→이강서원→금회영각→용호서원→병암서원→저녁 및 회원간담회→향교
○ 참석: 배희구 회장 외 51명
<정회원, 원로회원>
배희구, 이갑규, 구본준, 권영탁, 김건우, 김미애, 김수우, 김재환, 김태현, 민택기, 박재용, 박정호, 배인성, 송은석, 신창범, 신혜주, 오덕환, 윤주양, 이갑수, 이동영, 이명교, 이석임, 이영애, 이원균, 이원우, 이철하, 장세곤, 장택현, 전일주, 정동남, 정여호, 정원표, 조영화, 조익목, 조정숙, 조진형, 조혜경, 최덕수, 최영기, 한정호, 허미라, 황경보(이상 42명)
<대학생회원>
고동형, 김균호, 석영진, 심대용, 이동엽, 이아영, 정승원, 정재호, 정주연, 추나진(이상 10명)
○ 도움 주신 분들:
동래정씨 임하문중(점심식사), 김녕김씨 노곡문중(20만원),
이갑규·김재환·조혜경·김수우·이원균·김미애·정여호·정우일·이창환(각 10만원),
추태호·이명교·구본준(각 5만원),
조정숙(동동주·김치), 배인성(생수80병·사탕)
답사자료집 편집: 이원균·송은석·최덕수·김건우
금암서원·이유재 講 : 대학생부원(韓愈 師說), 조정숙(中庸 20章), 이명교(단소 연주)
☆ 우천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행의 점심을 준비해주신 동래정씨 임하문중을 비롯해, 답사 안내 및 문집·자료집, 다식, 식음료, 기념타올 등을 준비하시고 환대해주신 답사 현지 문중 관계자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답사에 함께 하시지 못한 회원님들을 위해...
답사자료집 및 답사현장 사진을 중심으로 답사소식 옮겨봅니다...
프롤로그
유난히도 무더웠던 계사년(癸巳年) 여름이 끝났다. 주위엔 어느새 가을 국화와 코스모스 꽃이 눈에 띈다. 그렇다. 답사(踏査) 시즌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대구시청년유도회 제14대(회장 배희구) 집행부에서는 임기 내 선현유적답사의 테마를 「대구근교 유교관련 유적지」로 정한 바가 있다. 이에 1차로 「달성군 하빈·현풍 일원(2012. 4. 22)」을, 2차로는 「대구 남·동부 일원(2012. 10. 28)」을, 3차로 「대구 북구·동구일원(2013. 5.12)」 답사를 성황리에 완료했다. 이번 제4차 답사지역은 「대구 달성군(다사)·달서구 일원」이다.
대구근교 답사를 시작하고부터 매번의 답사 때마다 우리 회원들로부터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대구의 유교문화와 전통에 너무 무관심했다’, ‘대구가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이런 유교 유적지와 전통이 살아 있다는 데에 놀라움을 금치 못 하겠다’ 등이 그것이다. 급격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무형의 유가전통을 지키고 있는 우리지역의 문중(門中)들. 우리는 그들을 통해 마치 「지주중류(砥柱中流)」를 바라보듯 ‘변화와 지킴’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제4차 답사는 그 놀라움과 긴장감의 절정이랄 수도 있겠다.
차수 |
일자 |
인원 |
답사지역 |
회원강독 |
1차 |
12.04.22 |
46 |
대구달성군지역(육신사,삼가헌,하목정,강정보,현풍곽씨12정려,도동서원,한훤고택) |
우리소리(유정임) |
2차 |
12.10.28 |
46 |
대구남동부지역(인흥서원,남평문씨세거지,월곡역사박물관,녹동서원,한천서원,박곡서당,옻골마을) |
대학경1장(대학생부),숙흥야매잠(조정숙 |
3차 |
13.05.12 |
50 |
대구북구·동부일원(문창후최치원영당, 와룡정, 경희정, 첨백당, 백원서원, 구로정, 표충사, 다천정, 화암서원구지, 서계서원) |
최영기(태극도설),조익목(서집전서),이명교(단소연주),성독회원(숙흥야매잠) |
이번 답사는 아래 두개의 키워드를 염두에 두면 여러모로 답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해당 지역 문중(門中)의 「입향조(入鄕祖)」와 관련된 유적지.
▪ 다사·하빈 지역의 「정자(亭子) 문화」·「선유(船遊) 문화」와 관련된 유적지.
[산격동]: 龜巖書院(達城徐氏)
「龜巖書院」은 그 규모로 볼 때 대구일원에서 가장 큰 서원이다. 신천대로 칠성시장부근 고가도로를 남에서 북으로 달리면, 우측의 신천 너머로 나지막한 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燕巖山이다. 산 중턱의 넓은 대지에 마치 절처럼 보이는 전통 건축물이 몇 동 보이는데 오늘의 첫 답사지인 구암서원이다. 대구시민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연암산 구암서원을 불교의 사찰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구암서원은 「達城徐氏門中」의 서원이다. 서원의 시작은 조선 세종 때의 龜溪 徐沈이라는 인물을 배향한 「崇賢祠」라는 廟宇에서 시작된다. 이 숭현사는 대구시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혁·특징
창건연대는 1665년(현종6)이다. 현 대구향교 남쪽 제일중학교가 있는 燕龜山 북쪽 사면에 자리하였다. 당시는 구암서원이 아닌 「숭현사」라 편액 하였다. 숭현사는 대구 府民이 구계 서침 선생의 福祿을 기리며 봉향한 곳으로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사연이 깃들어 있다.
「구계(龜溪) 서침(徐沈)은 세종 조에 달성서씨의 冑孫으로 그 門中의 세거지인 達城에 살았다. 당시 세종은 달성을 군사요새화하기 위해 많은 보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구계 서침은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어찌 그 대가를 바라겠습니까?” 하며 모든 보상을 사양하고 대대로 세거해온 달성(현 달성공원)을 나라에 헌납한다. 이때 구계는 세종에게 한 가지를 요구 한다. “일가의 사사로운 은혜보다는 대구부민이 모두 은혜 입기를 바랍니다. 대구지방의 환곡이자를 1섬에 5되씩 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세종은 그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이로써 대구부민 모두가 혜택을 입는다.」
이후 숭현사는 1675년(숙종1) 드디어 「龜巖書院」으로 승격된다. 1717년(숙종43) 대구 동산동(현 신명여고 북편)으로 移建하게 된다. 1718년(숙종44) 완공과 동시에 ‘龜溪 徐沉’의 위패를 移安하면서, ‘四佳亭 徐居正’을 從享한다. 1741년(영조17) ‘藥峯 徐渻’을 追享, 1757년(영조33) ‘涵齋 徐嶰’를 追享, 1778년(정조2) 賜額, 근년인 2008년 ‘樂齋 徐思遠’을 追享하여 현재에 이른다. 1868년(고종5) 훼철되었다가 1924년 복설이 되고, 1943년 숭현사와 강당을 중수한다. 이후에도 1974년, 1989년 중수를 거쳐, 1996년 현 산격동 燕巖山 南麓으로 이건하여 연암산 시대를 열고 있다.
주요 건물로는 樓門인 鳶飛樓, 講堂과 함께 東齋인 耕禮齋, 西齋인 耨學齋, 內三門인 景仰門, 廟宇인 崇賢祠 그리고 서원 입구에 百忍堂 등이 있다.
주요인물
▪徐晉: 고려 때 版圖判書를 지닌 인물로서 달성서씨의 遠祖이다.
▪徐均衡(1340-1391): 서진의 曾孫으로 고려말 문신. 右代言으로 성균관시를 관장하였을 때 禑王이 詩賦題를 보여 달라고 하자 이에 불복한 일이 있다.
▪徐沈: 字는 聖黙, 號는 龜溪. 서진의 玄孫이자 서균형의 子. 세종 조에 達城을 국가에 헌납한 공로로 대구부민들의 칭송을 얻어 숭현사에 배향.
▪徐居正(1420-1488): 字는 剛仲, 號는 四佳亭, 牧使 徐彌性의 아들이다. 연달아 문과에 급제하여 해동의 奇才란 칭호를 얻음. 조선조 최초의 兩館大提學. 세종이후 여섯 임금을 보필하며, 六曹判書를 두루 역임. 達城君에 封君. 26년간 文衡을 맡음.
▪徐嶰(1537-1559): 字는 挺之, 號는 涵齋, 贈領相. 퇴계문인으로 약관에 문장과 학문이 높았으나 요절하였다.
▪徐渻(1558-1631): 字는 玄紀, 號는 藥峯. 안동 一直面 蘇湖里 外家에서 함재 서해의 아들로 태어남. 율곡 이이와 귀봉 송익필의 문인. 宣祖의 顧命7臣 중 한명.
▪徐思遠(1550-1615): 字는 行甫, 號는 晩悟堂·彌樂齋라 하였으나 후에 洛齋라 하였다. 達城徐氏 12世 大宗孫. 향시 문과장원. 이천정사와 선사서재를 창건 하여 강학. 1601년(선조34) 여헌 등 23현과 船遊한 ‘琴湖仙査同遊錄’과 ‘船遊圖’가 現存. 泗水의 정한강, 玉山의 장여헌과는 從遊. 손모당과는 친교. 1586년 조정의 讀書鍊丹賦를 지으라는 시험에 장원. 임난 때 대구 최초의 의병대장. 역시 임난 때인 1595(선조28) 淸安縣監에 부임한 것을 끝으로 모든 관직을 사양. 대구 伊江書院, 龜巖書院, 청주 龜溪書院에 봉향.
達城徐氏·大丘徐氏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는 18세기 초에 판도공파(달성서씨)와 소윤공파(대구서씨)로 분파가 된다.
▪달성서씨(鄕派): 고려 版圖判書 徐晉을 遠祖로 하여, 樂齋 徐思遠의 後裔를 중심(版圖公派). 대표인물로는 徐均衡(徐晉의 曾孫), 徐沉(서균형의 子).
▪達成徐氏 系譜圖
徐晉(1)→奇俊(2)→穎(3)→均衡(4)→沉(5)→
→文翰(6)→濟(縣監公派)(7) ⇢⇢洽(生父), 泂(伯父로 出系)(11)→思遠(12)
→文幹(6)→渡(學諭公派)(7)
→文德(6)→涉(判書公派)(7)
▪大丘徐氏 系譜圖
徐閈(1)⇢彌性(9)→巨廣(10)→彭所(11)→厚(1男)(12)
→巨正(10) →固(4男)(12)→崦(2男)(13)
→嶰(3男)(13)→徐渻(14)
[노곡동]: 華巖書院·泰忠閣
신천대로 북대구 나들목을 지나 팔달교 방면으로 가다보면 우측으로 금호강을 가로지르는 魯谷橋가 나온다. 이 노곡교 초입에서 금호강 건너 북쪽 함지산 방향을 바라보면, 마치 삼태기 형국의 제법 널찍한 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노곡동이다. 동네의 풍광이 마치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 闕里의 풍경과 흡사하다하여 「魯谷洞」이란 동명을 얻었다고 한다. 노곡동 이전에는 「魯論里·魯老谷」이라 불렸다. 작은 동네이지만 이곳에서는 「華巖書院·泰忠閣」 두 곳을 둘러보게 된다. 「화암서원」은 水原白氏 魯谷 入鄕祖와 관련이 있고, 「태충각」은 白村 金文起 선생의 遺虛地에 세워진 유적이다. 참고로 노곡 초입의 서편 고속도로 변에는 昌原黃氏門의 齋室인 「黃氏同源閣」이 있다.
華巖書院(水原白氏)
연혁·특징
水原白氏 魯谷 入鄕祖인 白仁寬(1341-1421, 子는 士達, 號는 禪亭)을 배향한 서원이다. 1789년(정조13) 영남 사림들이 禪亭 白仁寬선생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뒤에 白文連·白龍采 2位를 追享했다. 처음의 화암서원은 대구 달서구 長基洞에 있었다. 고종 때 훼철이 되어 1997년 지금의 魯谷洞에 移建·復設이 된다. 달서구 장기동의 화암서원이 북구 노곡동으로 옮겨온 데는 까닭이 있다. 현재의 노곡동 화암서원 자리는 白仁寬이 魯谷 入鄕後 처음으로 터를 잡고 「景禪齋」를 지어 강학활동을 하던 곳이었다. 세월이 흘러 노곡동의 景禪齋가 퇴락해지자 1997년 경선재 자리에 華巖書院을 복설한 것이다.
廟宇인 崇義祠에는 禪亭 白仁寬을 主享으로 하고, 老庵 白文連·錦庵 白龍采를 配享하고 있다. 주요 건물로는 慕松門(外三門), 景禪齋(강당), 修德齋(동재), 博學齋(서재), 進道門(內三門), 崇義祠(廟宇) 등이 있다.
인물
▪得貫祖: 白宇經(字는 擎天, 號는 松溪, 諡號는 文景)은 수원백씨의 始祖이다. 당나라 詩聖인 香山 白樂天의 從弟인데 중국 蘇州人으로 신라 경덕왕 원년(780년)에 귀화. 만년에 경주 玉山의 紫玉山下에 迎月堂과 萬歲庵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후에 왕이 迎月堂을 景春堂으로, 萬歲庵을 浮惠寺로 改名.
▪魯谷 入鄕祖: 白仁寬(1341-1421,子는 士達, 號는 禪亭)은 여말 공민왕조에서 吏部典書와 集賢殿大提學을 끝으로 兩親을 모시고 水原으로 낙향. 이후 善山을 거처 대구 魯論里·魯老谷에 은거. 公의 老後隱居로 인하여 老谷洞이라고도 칭한다. 묘소는 노곡동에 있다.
▪白文連(1502-?, 字는 長叔 號는 老庵): (官)察訪 (贈)通政大夫禮曹參議)
▪白龍采(1735-?, 字는 潤澤 號는 錦庵): 篤志好學 鄕稱善士
泰忠閣(金寧金氏)
연혁·특징
1900년(고종37·광무4) 暮春선생의 후손인 金路淵·金書淵이 白村 선생의 遺虛地를 기념하기 위해 遺墟閣인 「泰忠閣」을 건립하였다. 노곡동 태충각 자리가 백촌 선생의 유허지인 까닭에는 그 유래가 있다. 白村이 세종 조에 慶尙道亞使로 부임하여 달성에 재직한 적이 있다. 이때 백촌은 魯論里의 경관이 노나라 闕里를 연상케 한다며, 공무에서 퇴근하면 늘 여기에서 소요하며 ‘魯論習禮’ 4자를 인근 바위에 암각하고 노후를 계획하였다고 한다. 이후 1456년 「단종복위사건」 즉, 丙子士禍때 三軍都鎭撫에 있으면서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 결국 이곳 魯谷洞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대구읍지·四佳亭 徐居正著 太平閒話)
주요 건물로는 「白村金先生遺蹟碑」와 비각인 「泰忠閣」을 中心으로 동쪽에는 「思誠齋」, 서쪽에는 「景毅齋」가 있다. 그 뒤편으로 2동의 廟宇가 있는데, 동쪽에 慕永 金貴松을 배향한 「崇孝祠」, 서쪽에는 白村 金文起를 배향한 「成仁祠」가 있다. 그리고 외삼문인 由義門 등이 있다.
인물
▪鼻祖는 신라 敬順王의 8세손인 大輔公 金閼智(신라 김씨왕조의 시조)
▪得貫祖는 文烈公 金詩興. 고려 仁宗 때 「妙淸의 亂」 평정으로 金寧君에 封君.
▪魯谷 入鄕祖: 金貴松(字는 瑞貞 號는 慕永·白村의 7세손). 임난 때 김귀송이 경북 칠곡에서 피난을 하던 중, 家傳하는 말을 따라 백촌 선조의 유적인 魯谷에 입향.
▪白村 金文起(1399-1456): 조선왕조실록에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인 선생은 동네이름을 효자동이라고 할 만큼 어려부터 효심이 지극한 데다 문무를 모두 갖춘 당대의 명궁이고 전략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촌은 1399년 조선조 2대 임금인 정종 원년 12월 충북 옥천 금강변 백지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금령(金寧)으로 이름은 효기였으며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뛰어나 옛부터 백지리를 효자동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1426년(세종8) 생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의, 공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三軍都鎭撫에 있었던 1456년(세조2)에 박팽년, 이개, 성삼문 등과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육신과 함께 6월 8일 순절하였다.
[이곡동]: 龍岡書院(金海許氏)
용강서원은 달서구 성서 이곡동 선원초등학교 서편에 자리하고 있다. 와룡산 등산로 입구에 자리하고 있어 인근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허씨재실’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인근에는 조선고종 때의 孝子 許浩의 효행을 기린 旌閭閣(1977) 「褒孝閣」이 있다.
연혁·특징
龍岡書院의 역사는 「忠烈祠」라는 묘우에서 시작된다. 「龍岡書院記」에 의하면 1696년(숙종22) 尙武軒 許得良과 그의 從弟인 洛庵 許復良을 봉향하기 위해 처음 「忠烈祠」를 창건했다고 한다. 1804년(순조4) 성서 臥龍山下 현 위치로 移建하고 「龍岡書院」으로 승격. 1868년(고종5) 훼철령에 따라 廟宇인 忠烈祠가 훼철되고 만다. 1920년 忠烈祠 遺址에 「龍岡齋」를 건립. 1990년 묘우·강당을 복원하고 尙武軒·洛庵 兩先生의 9대조인 高麗門下侍中 忠穆公 許有全을 主壁으로, 尙武軒·洛庵 兩公을 從享으로 배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주요 건물로는 知止門(外三門), 崇賢堂(講堂), 修德軒(東室), 思義室(西室), 尙義門(內三門), 忠烈祠(廟宇), 龍岡齋(齋室), 院庭碑, 忠穆公遺蹟碑, 金海許氏4世8位祭壇·祭壇碑 등이 있다.
인물
▪得貫祖(遠祖): 수로왕과 허황후(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의 둘째, 셋째아들을 허씨로 사성한 것에서 유래. 참고로 양천허씨·태인허씨·하양허씨·김해허씨·인천이씨(許寄)는 모두 허황후의 후손이다. 이러한 연유로 현재도 서로 간에 혼인을 하지 않는다.
▪起世始祖: 許琰. 허황후의 35世孫. 高麗三重大匡(文官 正1品). 駕洛君에 封君.
▪梨谷 入鄕祖: 直長公 許承立(尙武軒 許得良의 祖父). 임난 때 선산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후, 선산지역에서 隱身생활을 했다. 1622년 가족을 거느리고 구미 桃開를 떠나 金海로 가던 중 이곳 성서 葛山里(현 壯洞) 중마라는 곳에서 寓居하던 중 마을의 자연과 풍속에서 느낀 바가 있어 정착, 이후 世居地가 됨.
▪許有全(1243-1323): 고려 원종 말 문과급제. 1314년(충숙왕1) 駕洛君에 封君. 1321년(충숙왕8) 정승이 된다. 원나라 티베트로 귀양 간 충선왕의 편지를 받고 그의 환국을 위해 81세의 고령으로 원나라에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옴. 묘소는 인천시 강화군에 있다.
▪許得良(1597-1637, 字는 國弼 號는 尙武軒): 仙源 金尙容·淸陰 金尙憲 형제의 門人. 병서를 읽고 1620년(광해군12) 武科及第. 訓練院 副正. 1624년(인조2)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 振武原從功臣으로 副護軍에 오름.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廣州 雙嶺전투에서 전사.
▪許復良(1602-1637, 號는 洛庵), 仙源 金尙容·淸陰 金尙憲 형제의 門人. 1621년(광해13)武科及第. 副摠管.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從兄 상무헌 허득량과 함께 廣州 雙嶺전투에서 전사.
[강 창]: 伊洛書堂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구방면에서 다사 쪽으로 강창교 초입 우측에는 古家가 한 채 있었다. 금호강 단애 위 푸른 대숲에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이 고가가 바로 이락서당이다. 지금 우리들이 보는 서당은 2011년 重建한 새로운 모습의 이락서당이다. 「9門中 11村 30인의 선비」 라는 ‘비밀스런 키워드’를 간직하고 있는 대구 강창의 이락서당. 이곳은 과연 어떤 유적지일까? 참고로 인근 호산동 입구에는 孝婦旌閭碑閣(處事 順天 金鍾道의 妻 金海金氏 정려), 巴山 頌德碑, 낙재 선생 묘소와 그 山下에 樂仙齋(낙재 선생 묘소 齋室), 경모재 등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연혁·특징
이락서당은 1798년(정조22) 창건되었다. 당시 정조의 등극으로 조선사회는 문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우리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달성·고령·칠곡·성주’ 등지에서 누대에 걸쳐 세거해 온 ‘9門中 11村 선비 30인’이 모여 이락서당 창건에 뜻을 함께 한 것이다. 당시 結社를 한 ‘9문중 30인’은 가문의 師承관계가 대체로 寒岡 鄭逑와 樂齋 徐思遠 선생과 닿아 있었다. 그들은 강당의 東室을 慕寒, 西室을 景彌라 편액하였다. ‘한강(정구의 호가 寒岡)을 사모하고’, ‘낙재(서사원의 호 晩悟堂·彌樂齋·樂齋)를 기린다’는 의미를 담았던 것이다. 한강·낙재 兩선생에서 더 나아가 이들은 자신들의 학문을 유학의 근원인 ‘伊洛’에게까지 소급코자 했다. 그래서 편액한 이름이 이락서당인 것이었다.
伊洛淵源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말은 주자의 伊洛淵源錄에 근거한 표현이다. 상징적으로 程明道·程伊川이 伊水와 洛水 사이에서 강학을 한 연원을 말한다. 한편 「이락서당기」에서는 ‘달성의 伊水는 琴湖江이요, 洛水는 洛東江을 말하는데, 이 서당자리가 바로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라고 적고 있다. 다시말해 공맹의 유학이 이수와 낙수에서 중흥했듯이 퇴계를 이은 조선 유학의 연원이 바로 이곳 이락서당에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아마도 당시 결사에 나섰던 ‘9門中 11村 선비 30인’은 밑그림을 아주 크게 그렸던 것 같다. 「낙재→한강→퇴계→주자→정명도·정이천→주렴계」로 이어지는 거대한 학문의 道統을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연관시켰던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2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시 결성된 ‘伊洛契’가 후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伊洛書堂保存會’와 ‘伊洛九門會’(청장년 중심)가 조직되어 있다.
星州都門의 자료에 의하면 이락서당은 鋤齋에서 西村으로 넘어가는 계곡(서당골)에 있던 養直堂 都聖兪의 강학처인 「臥龍精舍」를 헐어 그 材木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9門中 11村 선비 30인’ 중 鋤齋·西村지역의 星州都氏가 15名이나 되니까 말이다. 한편 이락서당의 북쪽 바위는 「詠歸臺」라 이름하고 금호강 쪽의 서편은 「觀瀾臺」라 이른다.
인물
「9門中 11村 선비 30인」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星州都氏 15名<鋤齋·西村>, 廣州李氏 3名<上枝>, 全義李氏 3名<上谷·霞堂>順天朴氏 2名<妙洞>, 達城徐氏 2名<南山>, 咸安趙氏 2名<院垈>, 密陽朴氏 1名<德山>, 一直孫氏 1名<壽城>, 光山李氏 1名<瑟谷>
[매곡동]: 琴巖書院(東萊鄭氏)
다사읍을 관통하는 대구-성주간 국도의 매곡정수장 맞은 편, 산자락 깊숙한 골짜기에 유서 깊은 유교 유적지가 하나 있다. 지금의 거대한 대구유림을 있게끔 한 대구가 낳은 큰 스승과 관련 있다. 바로 동래정씨 매곡 입향조인 임하 정사철선생과 그의 외동아들인 낙애 정광천 선생이다. 대구지역 성리학의 계보를 논할 때 1세대로 불려지는 3분의 선생이 있다. 松潭 蔡應麟(1529-1584)·林下 鄭思哲(1530-1593)·溪東 全慶昌(1532-1585)이다. 이들 중 한분인 임하 선생과 그의 아들인 낙애 선생의 유적지가 바로 이곳 琴巖書院이다. 금암서원 인근에는 임하·낙애 「兩世遺蹟碑」, 「兩世壬亂倡義碑」, 「묘소」 그리고 김해김씨의 재사인 「連溪齋」 등도 있다.
연혁·특징
금암서원은 처음에는 묘우인 琴巖祠로부터 시작되었다. 1764년(영조40) 지역사림들이 임하선생 생전의 講學處였던 「林下書堂」 터에 금암사(琴巖祠)를 건립하고 임하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779년(정조3) 선생의 외동아들인 낙애선생을 從享한다. 1786년(정조10) 지역사림이 「서원승호사발문(書院陞號事發文)」을 상소하여 드디어 금암서원으로 승격된다. 1868년(고종5) 훼철되어 현재는 강당만 복원되어 있다.
주요 건물로는 훼철 후 三樂門과 강당만이 복원되어 있다. 서원 뒤 煙花山 자락에 兩선생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임하·낙애 兩世 遺蹟碑」를 세워 그 공을 기리고 있다. 유적비 앞쪽에는 훼철 시 서원 편액을 묻었다는 「洛涯先生埋板所」標識碑와 「兩世壬亂倡義碑」 등이 있다.
인물(東萊鄭氏)
▪始祖: 신라 유리왕9년(32), 육부촌장 중 한명인 智白虎에게 鄭氏 성이 賜姓되고 樂浪侯에 冊封, 甘文王으로 追封. 묘는 경주시 내남면 珍支村에 있다. 外來歸化한 정씨를 제외한 우리나라 정씨의 鼻祖.
▪得貫祖: 鄭繪文을 得貫祖로 하고, 鄭之遠을 起世 1世로 한다. 이들은 동래지방의 戶長인데 得貫祖와 起世祖의 묘는 失傳하고 2세인 鄭文道의 묘가 동래 華池山에 있다.
▪嶺南入鄕祖: 14世 鄭種(1417-1476, 字는 畝夫 號는 吾老齋). 武科及第. ‘이징옥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一等功臣에 冊祿.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精忠敵愾功臣 책록과 東評君에 책봉. 賜牌地로 받은 성주(현재의 고령군 德谷面)에 吾老齋와 불천위 사당, 盤巖書院(훼철 후 世德祠로 復設) 등이 있다.
▪多斯入鄕祖: 17世 鄭思哲(1530-1593, 字는 季明, 號는 林下), 東平君後 林下公派의 派祖. 獨子 洛涯 鄭光天. 임난 때는 「팔공산창의」을 하고 의병장에 추대. 피난지였던 居昌에서 卒.
▪洛涯 鄭光天(1553-1694): 임하선생의 외동아들. 儒學뿐만이 아니라 시조「述懷歌」로도 유명. 임란 때 자신이 지은 「龍蛇日錄」에 자신의 술회가 6수와 병중술회가 3수가 들어 있다. 연화산 선영에는 「洛涯詩碑」가 있다.
기타
林下草堂 林下
雲林寂寞久無人 임하 숲속은 고요하여 예부터 속된 사람 없고,
浮世淊淊總濫巾 덧없는 세상엔 사이비 선비 우글우글 하도다.
幽居一味憑誰語 그윽이 사는 재미 말하자면,
只喜兒孫學日新 오직 제자들이 학문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 뿐이라네.
洛涯는 위 父親의 시에 次韻하여 다음과 같은 詩를 읊었다.
草堂主人(伏次家君韻) 洛涯
林下如今有主人 숲속엔 지금 주인 있어,
數椽草屋一冠巾 몇 채의 초가를 꾸려 사는 참선비라네.
悠悠不管塵間事 티끌 세상일에 관여 않고,
詩酒林泉鶴髮新 풍류로 자연과 더불어 늙어간다네.
[문산동]: 暎碧亭(坡平尹氏)
금암서원에서 나와 성주방면으로 대구-성서 간 국도를 잠시 달리면 문산리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을 하면 「坡平尹氏 汶山世居地(영벽정)」라 새겨진 큰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이 길을 끝에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이곳에 牙琴巖 자락 높직이 자리 잡은 영벽정이 있다. 「暎碧亭」은 坡平尹氏 汶山 入鄕祖 牙巖 尹仁浹이 창건한 정자로 다사·하빈지역 최고라고 손꼽히는 정자 중에 하나이다. 이 답사지는 파평윤씨 400년 세거지 문산리이다.
연혁·특징
「暎碧亭」은 1585년(선조18)에 지어졌다. 파평윤씨 대구 문산 입향조인 牙巖 尹仁浹 선생이 進士를 하고, 경치 좋은 달성의 낙동강변 牙琴巖아래이자 杏灘 위의 터에 暎碧亭을 지었다. 牙巖公 당시 이곳은 인근에 은거하고 있던 林下 鄭思哲, 松溪 權應仁 등 지역 유림과 관리들이 修契하며 강학과 풍류를 즐기던 지역의 명소였다. 지금도 이곳에는 牙巖 尹仁浹의 詩외 宋近洙, 徐贊奎, 宋秉璿, 崔益鉉, 宋秉珣 등의 詩板과 詩板刻本이 남아 있다.
대구의 「河濱·多斯」 지역은 금호강과 낙동강 수계를 접하고 있다는 지형적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예전부터 「亭子文化」가 발전하였고, 동시에 「船遊文化」도 크게 성행하였다. 지금도 금호강과 낙동강 변에는 고색창연한 정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영벽정 상류에는 洛涯 鄭光天(1553~1594)이 지은 「牙琴亭」이 이었고, 하류에는 生員 尹大承이 건립한 「浮江亭」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영벽정을 제외한 아금정과 부강정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대구 달성권역의 금호강과 낙동강 수계의 이름난 정자들 중 과거에 「船遊」가 이루어졌던 정자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금호강: 押鷺亭(松潭 蔡應麟·무태)→喚性亭(苔巖 李輈·무태)→仙査齋·伊江書院(樂齋 徐思遠·이천리)→伊洛書院(9門30人·강창)
▪낙동강: 浮江亭(尹大承·죽곡)→映碧亭(牙琴 尹仁浹·문산)→牙琴亭(洛涯 鄭光天·매곡)→霞鶩亭(洛浦 李宗文)
「暎碧亭八景」은 生員 尹鍾大(1763~?)가 지었는데, 윤생원은 성주에 거주한 선비로서 영벽정에 자주 방문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제1경 행탄풍범(杏灘風帆) 제2경 다림연류(茶林烟柳) 제3경 연포호월(蓮浦皓月) 제4경 운정취벽(雲亭翠壁) 제5경 비슬선하(琵瑟仙霞) 제6경 아금어화(牙琴漁花) 제7경 마천조람(馬川朝嵐) 제8경은 봉산석조(鳳山夕照)이다.
인물(坡平尹氏)
▪始祖: 高麗 壁上三韓翊贊功臣 三重大匡 太師公 尹莘達(893-973). 東京(慶州)大都督 역임, 향년81세, 杞溪縣 伐治洞 九鳳山下 酉坐 幽宅, 鳳岡書院 배향
▪탄강신화: 신라 眞聖王7년(893) 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坡平山 기슭 龍淵. 어느날 운무가 자욱하더니 천둥과 함께 연못 위로 한 개의 玉函이 떠올랐다. 고을 태수가 단을 마련해 기도하기를 여러 날 여전히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동네에 사는 한 노파(尹媼)가 옥함을 건져보니 옥동자가 있었다. 瑞氣를 발산하는데 얼굴은 용의 상이오, 양쪽 어깨에는 붉은 사마귀(日月을 상징), 좌우 겨드랑이에는 여든 한 개의 비늘이오, 발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북두칠성)이 있었다. 노파가 거두어 기른바 자신의 성을 붙여 윤신달이다.
▪汶山 入鄕祖: 尹仁浹(1541-1597字는 德深 號는 牙巖). 進士를 하고 달성의 낙동강가 牙琴巖아래 杏灘 위에 暎碧亭을 지었다. 林下 鄭思哲, 松溪 權應仁 등과 교유. 입향조 牙巖 尹仁浹의 후손들이 현 대구시 달성군 多斯邑 汶山洞에 400년을 세거하고 있다.
기타
暎碧亭 原韻 尹仁浹
南來形勝此江汀 남으로 와서 경치 좋은 곳이 이 강가이니,
老去첩遲築小亭 늙어감에 놀고 쉬게 작은 정자를 지었네.
獨抱詩書閒臥久 홀로 시서를 안고 한가히 쉰지 오래이니,
風煙多意箇中停 세상사 많은 뜻이 이 가운데 멈추네.
又 後孫 義正
坡山千里洛江汀 파평산 천리에 낙동강 물가에,
南下當年創是亭 남으로 내려온 그 해에 이 정자를 처음 세웠네.
永世諸孫傳守地 영원한 세상에 여러 후손이 전하고 지키는 곳,
詩書講業戒無停 시와 글의 강론함을 정지함이 없기를 경계하네.
※ 용량초과로...
하는 수없이 2회에 걸쳐 나누어 올립니다..
아래글 클릭하시면 오후 일정 계속 이어집니다...
※ 용량초과로...
2회로 나눕니다용용량.. 아래글 클릭하시면 계속 이어집니다...
첫댓글 원인을 알수는 없습니다만,, 하여튼,,, 사진 작업 다시 했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