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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신약의 전체 기사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종교적인 사람과 성적으로 소외된 사람(눅 7장 참조), 종교적인 사람과 인종적으로 소외된 사람(요 3-4장 참조), 종교적인 사람과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눅 19장 참조)을 만나실 때면, 소외된 사람은 매번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지만 '형(탕자의)' 부류의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지위가 높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을 항상 끌어들인 반면 당대의 종교적이고 성경을 믿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대체로 그런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 끌렸던 부류의 외부인들이 현대 교회에는 끌리지 않고 있다. 가장 전위적인(avant-garde)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우리가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반듯하고 도덕적인 경향이 있다. 인습을 벗어난 난잡한 사람들이나 소외되고 망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피한다. 그 의미는 하나뿐이다. 우리의 설교와 행실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예수님과 같지 않다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와 같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동생들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더 형들의 세상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인가! 물론 2막에서 아버지는 맏아들의 훨씬 더 복잡하고 유해한 영적 상태를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형들의 사고방식에 도전을 가하는 깜짝 놀랄 메시지가 이미 1막에도 나와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그 어떤 죄나 허물도 다 사면해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든 상관없다. 고의로 사람을 괴롭히거나 심지어 살해했어도 상관없고 자신을 지독히 학대했어도 상관없다.
동생은 아버지 집에 양식이 풍족한" (17절) 줄은 알았으나 이제 은혜도 풍족함을 깨달았다. 아버지 사랑으로 용서하고 덮지 못할 악은 없고, 아버지 은혜에 맞먹을 만한 죄는 없다.
요컨대 1막에는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시된다. 예수님이 보여 주시듯이 아버지가 사랑으로 아들을 끌어안은 시점은 아들이 개과천선을 입증하기 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워 두었던 회개의 대사조차 다 읊기 전이었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 어떤 공로나 뼈저린 참회로도 얻어 낼 수 없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수용은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이다.
*그래서 형은 자신의 이력을 내세우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권리가 있습니다! 이번 일에 나도 의견을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아버지 혼자 일방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실 권리는 없습니다."
이렇듯 형은 홧김에 아버지를 무례하게 대하기까지 한다. 그 문화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는 극진히 예를 갖추어야 했고 특히 남들 앞에서는 더했다. 그런데 형은 그러지 않는다. "존경하는 아버지여"라 하지 않고 그냥 "보소서!"라고 한다(헬라어 원문과 저자가 사용하는 NIV에는 29절 맏아들의 말 서두에 보소서"가 있다 - 옮긴이). "이거 보세요!"와 같은 말이다. 어른을 공경하며 복종하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문화에서 이는 발칙한 행동이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들이 자신의 책에 아버지의 치부를 다 폭로해 평생의 이력과 명예를 짓밟는 것과 같다.
마침내 우리는 대단원에 이른다. 맏아들의 공공연한 반항에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그 시대 남자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부자의 연을 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이번에도 놀랍도록 자애롭다. "아들아"(my son; NIV)라고 그는 말문을 연다.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욕되게 했다만, 나는 너도 잔치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나는 네 동생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널 버릴 마음도 없다. 내 말대로 자존심을 버리고 잔치에 들어오너라. 선택은 네 몫이다. 들어오겠느냐 말겠느냐?" 예상을 뛰어넘는 인자한 호소가 심금을 울린다.
듣는 사람들은 이야기에 잔뜩 빠져들어 있다. '이 집안은 결국 연합과 사랑으로 다시 뭉칠 것인가?' '두 형제가 화해할 것인가?' '이 너그러운 제의에 형의 마음이 누그러져 아버지와도 화해할 것인가?'
그런데 우리 머릿속에 이런 모든 생각이 스쳐 갈 그때 이야기가 끝나 버린다! 예수님은 왜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 결과를 들려주지 않으시는가? 그것은 이 이야기의 진정한 청중이 형들, 곧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에게 메시지에 반응할 것을 촉구하신다.
그 메시지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이 나오려면 그분이 지금 밝히시려는 핵심 요지가 무엇인지 다음 장에서 충분히 살펴봐야 한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재정의하신다. 죄, 잃어버린 바 된 상태, 구원의 바른 의미를 알려 주신다.
*1막에 예수님이 둘째 아들을 통해 묘사하신 죄는 누구나 수긍할 만한 것이다. 이 젊은이는 집안을 욕되게 하며 허랑방탕하게 살아간다. 완전히 통제력을 잃고, 하나님을 대변하는 비유 속의 아버지와 멀어진다. 누구든지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것이며, 비유를 듣던 청중도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2막의 초점은 맏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철저히 순종했고 유추컨대 하나님의 명령에 다 순종한 셈이다. 그는 대단한 극기로 자신을 완전히 통제한다. 두 아들을 보통 기준에서 보면 하나는 '못됐고 하나는 '착하지만 아버지와 멀어져 있기는 둘 다 똑같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둘 다 사랑의 잔치로 불러들여야 한다. 그래서 비유 속의 잃어버린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그런데 2막의 결론은 상상을 초월한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예수님은 일부러 맏아들을 멀어진 상태로 놓아둔다. 못된 아들은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는데 착한 아들은 그렇지 않다. 창녀들과 놀아난 사람은 구원받는데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은 여전히 잃어버려진 상태다.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바리새인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태까지 그들이 배웠던 모든 내용이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단순히 거기서 끝내지 않으신다. 충격은 더 한층 깊어진다. 형은 왜 들어가지 않는가? 자신이 직접 이유를 밝힌다. "내가,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눅 15:29). 형이 아버지의 사랑을 잃고 있음은 착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착하기 때문이다.…
두 형제의 마음은 똑같았다. 둘 다 아버지의 권위를 못마땅해하며 거기서 벗어나려 했다. 둘 다 아버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서려 했다. 다시 말해서 두 아들 모두 반항했다. 방법상 하나는 아주 못되게 굴었고 또 하나는 지극히 착했을 뿐이다. 둘다 아버지의 마음을 멀리 떠난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고 계신지 이제 알겠는가? 두 아들 중 누구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둘 다 아버지를 이용해 이기적인 목표를 이루려 했을 뿐이지 아버지를 사랑해서 즐거워하고 아버지를 위해 섬긴 게 아니다. 하나님께 반항해 그분과 멀어지는 길이 두 가지라는 뜻이다. 하나는 그분의 규율을 어기는 것이고, 또 하는 모든 규율을 열심히 지키는 것이다.
충격적인 메시지다. 하나님의 율법에 힘써 순종하는 게 오히려 그분께 반항하는 하나의 전략이 될 수도 있다니.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죄'의 개념을 훨씬 심화시키신다. 그분이 알려 주지 않으시면 우리 중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하나님의 행동 규범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의하시는 죄는 그 이하는 아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 Wise Blood(현명한 피)에 보면 등장인물 헤이즐 모츠에 대해 이런 말이 나온다. "그 사람은 죄를 피하는 게 곧 예수를 피하는 길이라는 깊고 어둡고 사악한 무언의 확신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심오한 통찰이다. 구주로서의 예수님을 피하려면 모든 도덕법을 지키면 된다. 그러면 당신에게 '권리'가 생겨난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기도 응답, 행복한 삶, 사후의 천국 입장권을 주셔야 할 의무가 있다. 값없는 은혜로 당신을 용서해 줄 구주는 필요 없다. 당신이 자신의 구주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것이 비유 속 형의 태도다. 그가 아버지에게 그토록 노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집안의 옷이며 반지며 가축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자신의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개 아주 도덕적으로 살지만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분을 통제하고, 자기네 생각대로 그분께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엄격한 윤리와 경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들은 그분의 권위에 반항한다. 당신도 하나님께 순종해 착한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이유로 그분이 당신에게 복과 도움을 베푸셔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당신을 돕는 자 내지 감화를 주는 모본은 될지언정 당신의 '구주'는 아니시다. 당신 스스로 구주 역할을 맡고 있다.
행동의 틀은 두 형제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지만 이면의 동기와 목표는 같다. 방식만 다를 뿐 둘 다 자기 마음속에서 집착하고 있는 목표물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줄게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재물이라 믿는다.
*요컨대 여기 우리 죄에 대한 예수님의 급진적인 재정의가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죄를 일련의 규범을 어기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덕적 비행을 사실상 하나도 범하지 않은 사람도 가장 방탕하고 부도덕한 사람 못지않게 영적으로 철저히 잃어버려진 상태일 수 있음을 보여 주신다. 왜 그럴까? 죄란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게 아니라 구주요 주님이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몰아내려던 두 아들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도덕적인 '착한 사람들'과 부도덕한 '나쁜 사람들'로 가르지 않으신다. 그분이 보여 주시듯이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력 구원 사업(project of self-salvation)에 몰두해 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이용해 스스로 권력과 통제력을 거머쥐려 애쓴다. 방법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두 아들 모두 틀렸는데도 아버지는 둘 다 소중히 여겨 사랑의 잔치 속으로 불러들인다.
이는 예수님의 메시지 즉 '복음'이 전혀 다른 영성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종교나 무종교, 도덕이나 부도덕, 도덕주의나 상대주의, 보수나 진보가 아니다. 양극단 사이의 중간 어디쯤도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무엇이다.
복음은 앞의 두 접근과 구분된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틀렸으나 모든 사람이 사랑받는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불러 그 사실을 인식하게 해서 변화시킨다.
반면에 형 부류의 사람들은 세상을 둘로 나눈다. '(우리처럼) 착한 사람들이 실세이고 나쁜 사람들은 퇴물이다. 세상의 진짜 문제는 후자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동생 부류의 사람들도 똑같이 말한다. '아니다. 넓은 마음으로 관용하는 사람들이 실세이고 옹
졸한 고집불통들은 퇴물이다. 세상의 진짜 문제는 후자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한 사람들이 실세이고 교만한 사람들은 퇴물이다'라고 말씀하신다(눅 18:14 참조). 자신이 별로 선하지 못하거나 마음이 넓지 못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쪽으로 간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자신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아는 게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이대로 괜찮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겸손한 자들을 돌보시며 교만한 자들을 멀리하신다”(시 138:6, NLT).
어느 신문에 '세상의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공개 질문이 실렸을 때 가톨릭 사상가인 G. K. 체스터턴은 이런 짤막한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담당자에게. 그건 바로 나입니다. G. K. 체스터턴 드림." 이것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깨달은 사람의 자세다.
*형 부류의 사람들은 선행 자체가 즐겁거나 사람들을 사랑해서 선을 행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들이 양식과 옷을 베푸는 대상은 굶주린 빈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뿌리 깊은 이기심이 고스란히 건재할 뿐 아니라 두려움에 기초한 도덕이 오히려 이를 더 부추긴다.
그것은 충격적인 방식으로 터질 수 있고 실제로 터진다. 수많은 교회가 험담과 싸움에 시달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수많은 사람이 외관상 착실하고 반듯하게 살다가 갑자기 심히 추악한 죄에 빠지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겉으로는 사심이 없어 보이지만 그 밑에 엄청난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도덕의 의무는 종종 사람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다. 삶에 대한 좌절감과 권태감은 억압되고 부정된다. 형들은 행복하고 편안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으로 자신까지 숨 막히게 한다. 도덕군자 같던 형들이 때로 자신의 인생을 결딴내 버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의무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동생처럼 살기 시작해, 자신을 아는 모든 이를 충격에 빠뜨린다.
형 같은 태도의 마지막 징후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내게는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29)라고 말한다. 이 형이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는 춤이나 흥겨움이 없다. 선행으로 하나님을 통제하여 구원을 얻어내려 하는 한 당신은 여태껏 자신이 그분께 충분히 착했는지 알 길이 없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즐거워하심을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이런 확신이 없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인가? 하나는 이미 언급했다. 삶이 잘못되거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뭔가 잘못 살아서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든다. 또 다른 증상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을 때 기분이 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참히 무너져 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추상적으로 느껴져 당신 삶에서 진정한 능력을 별로 발휘하지 못하다 보니 사람들의 인정이라도 받아야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형의 상태도 그 동생의 상태 못지않게 잘못되고 해로운 것임을 드러내신다. 그 사실을 아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우선 세상의 형들은 반드시 이 거울로 자신을 봐야 한다. 예수님은 주로 바리새인을 겨냥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들의 실상을 보여 주고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말했듯이 동생은 자신이 아버지와 멀어져 있음을 알았으나 형은 몰랐다. 그래서 형의 잃어버려진 상태는 매우 위험하다.
형들은 하나님께 가서 자신의 상태를 치유해 달라고 구할 일이 없다. 자신의 상태에서 아무런 문제도 보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자신에게 병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의사에게 갈 수 있으나, 병이 있음을 모르면 의사에게 가지 않고 있다가 위험한 상태에 이른다.
세상의 동생들도 반드시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비유 속의 형의 태도를 보면 애초에 동생이 집을 나가고자 한 이유 하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의 종류를 막론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신앙을 버리는 이유는 주요 종교마다 형들이 득실거리는 게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얼씬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종교야말로 세상의 불행과 갈등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아는가? 이 비유로 그들의 생각이 맞다고 하신다. 형 부류의 사람들의 분노와 우월감은 모두 정서 불안과 두려움과 내적 공허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찌든 영적 맹인을 대거 양산할 수 있다. 이는 사회적 불의, 전쟁, 폭력 등의 큰 원인이다.
*형 부류의 사람들은 삶의 상황에 대해 속에서 분노가 들끓고, 쓰라린 원한이 오래가고, 인종이나 종교나 생활방식이 다른 이들을 얕보고, 기쁨 없이 고역에 시달리듯 살아가며, 기도 생활에 친밀함과 기쁨이 별로 없다. 또 정서 불안이 심해 남의 비판과 거부에 대해서는 과민한 반면 남을 정죄할 때는 가차 없고 냉혹하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인가!
그렇다고 반항하는 동생의 길이 더 낫다는 건 물론 아니다. 개인적 성취와 자아 발견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도 비유에 나오는 이 동생만큼 인생을 망치지는 않는다. 자신의 도덕적인 노력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부분 이 형만큼 매정하고 분노에 차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과장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분의 설명인즉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지만, 이 두가지 인생관 모두에 자체적으로 파멸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입장의 추종자들은 그분이 정확히 묘사하신 영적 종착지로 끌려간다.
고심하며 듣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비유는 적잖은 위기를 유발한다. 그분은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영적인 길을 생생히 그려 내신다. 양쪽 다 행복을 발견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방식이다. 그러나 그분은 양쪽 다 심각한 오류이며 막다른 골목임을 폭로하신다. 분명히 그분은 우리가 완전히 다르게 접근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그게 무엇일까? 그것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 답을 찾으려면 예수님이 이 비유에 일부러 빼 놓으신 인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가 그 인물을 찾고 만나서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다.
*동생의 족쇄든 형의 족쇄든 각자의 잃어버린 바 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마음속 역동이 어떻게 두려움과 분노에서 기쁨과 사랑과 감사로 바뀔 수 있는가?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도적 사랑이다. 보다시피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게 먼저 나가 사랑을 표현한다. 그들을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다. 아버지는 저만치 오고 있는 둘째 아들을 대문간에서 기다린 게 아니다. 조급하게 서성대며 이렇게 중얼거리지도 않았다. "저기 아들놈이 오는군. 큰 사고를 쳤으니 납작 엎드려 기어들어 와야지!" 그런 태도는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아버지는 달려가서 입을 맞춘다. 아들에게 자백할 겨를조차 주지 않는다. 회개가 아버지의 사랑을 유발한 게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다. 아버지의 아낌없는 애정 덕분에 아들이 참회를 표현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아버지는 분노와 원망을 품은 맏아들에게도 나가서 잔치에 들어오라고 다독인다. 이 장면은 양날의 검과도 같다. 한편으로 가장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도 똑같이 잃어버려진 상태라서 하나님의 주도적 은혜가 필요함을 보여 주고, 또 한편으로 바리새인에게도 진정 희망이 있음을 보여 준다.
아버지의 이 마지막 당부는 당시 예수님의 이야기를 직접 듣던 청중을 떠올리면 특히 더 놀랍다. 그분은 지금 종교 지도자들을 상대로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결국 그분을 로마 당국에 넘겨 처형당하게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비유 속의 형이 받은 것은 매서운 정죄가 아니라 독선적인 분노로부터 돌이키라는 사랑의 당부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일 적들을 사랑으로 타이르신다.
*그분은 바리새인을 대하실 때 바리새인과 같지 않으시고, 자칭 의인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으신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그분은 방탕하게 살아가는 자유분방한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완고한 종교적인 사람들도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지 않으시는 한 우리는 절대로 그분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찾으시는 방식이 각기 판이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생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극적으로 와락 우리를 얼싸안으실 때도 있다. 그러면 그분의 사랑이 생생히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계속 등을 돌리고 있음에도 형의 경우처럼 그분은 차분히 끈기 있게 우리를 설득하실 때도 있다.
지금 그분이 당신을 설득하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일 자신의 길 잃은 상태가 점차 느껴지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갈망이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에는 그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 순간 그분이 당신 곁에 계시다는 확실한 증표다.
이 비유에서 배워야 할 게 또 있다. 우리의 회개는 개별적인 죄를 뉘우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깊어야 한다. 집에 돌아올 때 둘째 아들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참회했음을 표현하려 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란 이런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려면 당신 죄의 목록을 꺼내 항목별로 그분께 사죄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죄를 지으면 비참한 심정으로 회개한다. 자신을 벌하거나 자기 연약함 때문에 비탄에 잠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끝나면 그들은 여전히 형이다. 참회와 뉘우침도 자력 구원 사업의 일환일 뿐이다. 바리새인의 회개는 깊이가 없어 문제의 핵심에 가 닿지 못한다.
그 핵심이란 무엇인가? 형을 구원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자신의 나쁜 행실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이다. 형의 문제는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태도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이력을 내세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빚을 지운다. 그분과 그들을 통제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게 만든다.
그의 영적 문제는 자아상의 근거를 성취와 행위에 두는 데서 비롯되는 지독한 정서불안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옳다는 느낌을 끊임없이 떠받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흠잡아야 한다. 내 신학교 시절의 한 교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바리새인과 하나님 사이를 막는 주된 장벽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의 저주받을 선행"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 물론 하나님을 만나려면 자신이 잘못한 일을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친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냥 형일 수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이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회개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죄만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의 뿌리까지 회개한다.
우리는 다른 모든 죄의 이면과 모든 의의 이면에 깔려 있는 죄 - 스스로 자신의 구주와 주인이 되려 한 죄를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동안 자신의 궁극적인 소망과 신뢰를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두었으며, 잘못된 행동과 올바른 행동 모두를 통해 하나님을 피하거나 통제해서 그 다른 것들을 얻고자 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당신의 죄악과 착한 행실 양쪽 모두의 배후에 스스로 구주와 주인이 되려는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 사실을 알아야만 당신은 비로소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직전까지 온 것이다. 악행의 해법이 단지 선행이 아님을 깨달았다면 문턱까지 이른 셈이다. 거기서 내처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즉 하나님, 자아, 타인, 세상, 직업, 자신의 죄와 덕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를 거듭남, 즉 새로운 출생이라 부름은 그만큼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우주의 무언가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느낀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것과 다시 이어지고 싶은 그리움이 있다. 늘 바깥쪽에서만 보았던 어떤 문의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은 평생의 향수가 있다. 이런 향수는 그저 신경성 망상이 아니라 우리의 실상을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둘째 아들과 같다. 다 유랑자로서 늘 집을 그리워한다. 늘 떠돌이일 뿐 결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실제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건물은 도중에 묵어가는 여인숙일 뿐 집은 아니다. 집은 자꾸만 저만치 멀어져 간다. '집'이 이토록 위력적이면서도 우리에게 아득한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의 가장 일관된 주제 중 하나를 살펴보면 그 답이 나온다. 지금까지 우리가 묘사한 이 경험은 우리 영혼 속에 남아 있는 더 큰 이야기의 흔적이다.
우리는 왜 모두 자신을 유랑자처럼 느끼고, 여기가 정말 집이 아닌 것처럼 느낄까? 그 이유가 창세기의 첫머리에 나와 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동산에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곳은 사랑을 떠나 이별할 일도 없고 부패나 질병도 없는 세상이었다. 그때는 우리 삶이 하나님 앞과 그분의 임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그분의 무한한 위엄을 흠모하며 섬기도록 되어 있었다. 그분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알고 즐거워하고 닮도록 되어 있었다. 거기가 본래 우리의 집이었고 우리는 그 본연의 나라에 살도록 지음 받았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그 집의 '아버지'신데 우리가 그분의 권위에 반감을 품었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비유와 같다. 우리는 그분의 간섭 없이 살고 싶어 등을 돌렸고, 그리하여 그분과 멀어졌다. 둘째 아들이 집을 잃은 것과 똑같은 이유로 우리도 집을 잃었다. 그 결과가 바로 유랑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 뒤로 우리는 영적 유랑자가 되어 방황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제 우리의 가장 깊은 동경에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아니”(사 40:31) 한 몸을 원하건만 질병과 노화와 죽음을 면할 수 없다. 영원한 사랑이 필요하건만 우리의 모든 관계는 세월과 함께 쇠락하여 속절없이 무너진다. 우리에게 충실한 사람들조차도 결국 죽어 우리를 떠나거나 우리가 죽어 그들을 떠난다. 일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도 끝없는 좌절에 부딪친다.
우리의 희망과 꿈은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다. 잃어버린 집을 재창조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성경 말씀대로 그 집은 우리가 피해 도망쳐 나온 하늘 아버지의 임재 안에만 존재한다.
이 주제가 성경에 누누이 재현된다. 아담과 하와가 본래의 집에서 쫓겨나 유랑한 뒤에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죄로 땅을 정처 없이 유리해야 했다. 훗날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가 여러 해 동안 유랑했다. 그 후에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는 기근 때문에 고국을 떠나 이집트로 가야 했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살다가 마침내 모세의 지도하에 조상들의 고토로 돌아왔다. 다윗도 왕이 되기 전에 수배자가 되어 방랑 생활을 했다. 결국은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느부갓네살 왕의 포로로 다시 유랑 길에 올라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이야기마다 유랑이 뒤풀이됨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인류 전체가 귀향을 시도하는 유랑의 무리라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는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다.
*"집이란 우리가 그곳에 가야 할 때 우리를 받아 주어야만 하는 곳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유명한 말이다(“고용인의 죽음). 그러나 비유 속 둘째 아들이 알았듯이 성공적인 귀향이 반드시 보장되는 건 아니다. 왜 그럴까? 그의 죄가 장벽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벽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몰랐고, 자신이 거부당하여 계속 유랑자로 살아야만 할 수도 있음을 알았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우리 인류의 귀향길에 얼마나 높은 장벽이 가로놓여 있는지 보여 준다.
바벨론 유수의 기간에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위대한 귀환과 귀향을 예언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나 실제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간 유대인들은 소수에 그쳤다. 거기서 그들은 계속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로도 그리스, 시리아, 로마의 순서로 세상의 강대국이 줄곧 이스라엘을 침략해 지배했다.
이 민족은 여전히 압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작은 해방과 작은 귀향은 선지자들이 약속했고 만인이 동경하던 궁극적이고 완전한 귀향을 끝내 가져다주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의 내면이 망가져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여전히 이기심과 교만과 죄에 빠져 있다. 인접국과의 끊임없는 충돌과 전쟁 못지않게 우리 마음속의 온갖 싸움도 우리를 압제한다. 결국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주변이 망가져 있다는 것이다. '유랑'의 상태에는 인간의 도덕적 악 이상이 존재한다. 성경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타락한 자연계에 살고 있다. 본래는 이렇게 질병과 자연재해의 세상, 우리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부패하고 죽는 세상에 살도록 지음 받지 않았다. 현존하는 이 세상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집이 아니다. 궁극적이고 진정한 귀향이 이루어지려면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물질세계의 성질 자체에도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예수님이 사역하실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은 자기 민족이 바벨론에서 귀환했는데도 여전히 유랑하는 중임을 깨달았다. 불의와 압제와 상실과 고통이 여전히 그들의 삶을 지배했다. 궁극적 귀향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기도로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한 귀향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해방이었다.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 곧 이스라엘을 구속할 왕은 막강한 군사력과 정치권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자기 백성에게 와서 인정과 영접을 받은 뒤에 그들을 승리로 이끌 사람이었다.
그때 예수님이 등장해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막 1:15)를 들여놓고 있다고 선포하셨다. 사람들은 열심히 모여들어 그분을 보고 말씀도 들었으나 그분은 그들의 기대에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그분이 태어나신 곳은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집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마구간의 밀짚 깔린 구유였다. 사역하시는 동안 그분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완전히 정치경제적 권력의 관계망 바깥에 머무셨고, 학문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격증조차 얻으려 하지 않으셨다. 결국 생애 끝에 그분은 도성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이는 공동체에게 거부당한 유랑자의 생생한 상징이었다. 죽으실 때 그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말씀하셨다. 영적으로 버림받은 실향에 대한 처절한 절규였다.
어찌된 일인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한 나라를 정치적 압제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죄와 악과 죽음 자체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다. 인류를 본래의 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분은 강함으로 오지 않으시고 약함으로 오셨다.
그분이 오셔서 겪으신 유랑은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임재로부터 축출되어 우리 대신 영적 소외라는 극한의 절망과 어둠 속에 내던져지셨다.
인류의 반항에 대한 모든 저주와 우주적 실향을 친히 당하셨다. 우리를 진정한 집으로 맞아들이시기 위해서.
*그러나 구원은 객관적이고 법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관적이고 체험적이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 감각적 어법을 고집한다. 그래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믿고 동의하는 데 그치지 말고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빛"이라는 유명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분임을 믿는 것과 그 거룩함과 은혜의 멋과 매력을 마음속으로 새삼 느끼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것과 맛보는 것의 차이는 꿀의 단맛을 머리로 믿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의 차이와 같다.”
예수님의 구원은 잔치다. 그래서 그분이 이루신 일을 믿고 그 안에 안식하면 성령을 통해 그분이 우리 마음에 실제로 거하신다. 그분의 사랑은 꿀이나 포도주와 같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믿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랑의 실체와 아름다움과 위력을 느낄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은 어느 누구의 사랑보다도 더 절절하다. 그 사랑이 당신에게 기쁨과 활력과 위로를 줄 수 있고, 다른 무엇과도 다르게 당신을 일으켜 세우고 두려움에서 해방시킬 것이다.
모든 차이는 여기서 온다. 당신이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추상적 개념으로 믿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 자비의 단맛을, 이를테면 심령의 입속에서 느껴야 한다. 그러면 그분이 당신을 받아 주셨음을 알게 된다.
당신이 염려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임을 믿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분의 눈부신 위엄을 심령의 눈으로 봐야 한다. 그러면 만사가 그분의 손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경험이 정말 가능할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남들에 비해 더 어렵게 여긴다. 기질상 더 이성적이고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 신비체험에 너무 목말라 있어 모든 직관과 강한 감정을 '주님이 주신 말씀'으로 해석한다. 요컨대 우리 대부분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받으려는 열의가 너무 과하거나 또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아버지의 임재에 들어가게 해 주시는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지금은 맛보기에 불과하며, 평생 성령의 도움으로 그분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하는 동안 기복이 있다. 하지만 누릴 수 있음은 분명하다. 찬송 작사가인 아이작 와츠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천국의 들녘에 이르거나 그 황금길을 걷기도 전에 시온 산에서 거룩한 단비가 수시로 내리네.“
*물질세계가 동양 철학의 말처럼 한갓 환영일 뿐이거나 플라톤의 말처럼 진정한 이상세계의 한시적 복제품에 불과하다면, 이 세상이나 지금 이 땅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영이나 혼의 문제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저 '영으로' 구원받으신 게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셨다. 하나님은 몸과 영을 둘 다 지으셨고 몸과 영을 둘 다 구속하신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그 사실을 잘 보여 준다. 그분은 말씀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아픈 이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시고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돌보셨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이 묘사하신 심판 날이 나온다. 그날 많은 사람이 거기서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겠지만 그들이 굶주린 이와 난민과 환자와 죄수를 섬기지 않았다면 그분을 섬긴 게 아니라는 것이다(마 25:34-40 참조). 그분의 발언은 충격적이다. 이것은 그분이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와 모순되지 않는다.
그분은 지금 사회사업가들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당신이 순전히 헤아릴 수 없는 은혜로만 구원받은 죄인이라면, 그 불가피한 증거로 사회적 양심이 민감해져 평생 행동으로 빈민을 섬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비유에 나오는 동생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형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 독선적인 생각에 젖어 양쪽 다 빈민에게 무관심하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유물론적인 종교일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은 자연 질서를 깨뜨렸다기보다 오히려 회복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는 시각장애와 한센병과 기아와 죽음이 없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그분의 창조세계에 침입한 이 모든 타락상이 언젠가는 모두 없어질 거라는 징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사회 구조를 개혁하여 안전한 거리와 따뜻한 가정을 만드는 일을 한 문장 안에 함께 말할 수 있다. 진실로 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고난과 불의와 악과 죽음을 미워하신다. 그래서 친히 오셔서 그것을 다 당해 이기셨고, 언젠가는 세상에서 그것을 깨끗이 없애질 것이다. 이 모두를 알기에 그리스도인은 기아와 질병과 불의에 대해 수동적일 수 없다.
카를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비난했다. 종교라는 진정제 때문에 사람들이 불의에 대해 수동적인 채 "사후의 천국"만 바란다는 것이다. 물질세계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환영이라고 가르치는 다른 종교에는 그 말이 해당될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은 이 물질세계의 고난과 압제를 심히 미워하셔서 기꺼이 그 속에 들어가 그것과 싸우셨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기독교는 결코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이 들게 하는 명약이다.
*종교는 '나는 순종한다. 고로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라는 원리로 작동한다. 그러나 복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 고로 나는 순종한다. 앞서 보았듯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처음 하나님과 연결되는 방법이다. 복음을 믿음으로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정체성을 받는다. 그러나 일단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해서 그것으로 복음의 메시지가 끝났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마르틴 루터의 근원적 통찰은 '종교'가 인간 심령의 기본값이라는 것이다. 일부러 설정을 바꾸지 않는 한 당신의 컴퓨터는 자동으로 기본값 모드에서 작동한다. 이와 비슷하게 루터는 당신의 마음 역시 복음으로 회심한 후에도 다른 원리로 되돌아가 작동할 것이라고 말한다. 일부러 반복해서 복음 모드로 설정하지 않는 한 말이다.
칭의와 희망과 의미와 안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가 아닌 다른 것들로부터 찾으려는 게 우리의 습성이자 본능이다. 우리는 한 차원에서는 복음을 믿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믿지 않는다. 우리 마음이 '사실상 의지하는 대상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定), 직업적 성공, 권력과 영향력, 가정과 가문의 정체성 등이다.
그 결과 우리는 계속해서 다분히 두려움과 분노와 무절제에 끌려다닌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의지력만으로는 변화될 수 없다. 성경의 원리들을 배워 실천에 힘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영속적 변화는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마음에 속속들이 배어들게 해야만 가능하다. 말하자면 복음을 늘 섭취하고 소화해 자신의 일부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어떻게 독자들의 동기를 불러일으키는지 잘 보라. 여기서도 그는 위협하거나 무조건 훈계하지 않는다. 본받아야 할 훌륭한 모본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의 구원을 남편의 희생적 사랑으로 생생히 그려 낸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 이는 곧 …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엡 5:25-27). 예수님은 우리가 아름다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그분은 우리의 궁극적 남편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신부"다.
인색함을 해결하려면 그리스도의 베푸심이 있는 복음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그분은 자신의 부를 당신에게 쏟아 부으셨다. 당신은 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이 당신을 돌보시고 철저히 안전하게 지키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은 당신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놀라운 신분을 부여한다.
잘못된 결혼생활을 해결하려면 남편의 온전한 사랑을 보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간음하지 말라'라는 계명은 신부인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 때문에 지당해지며, 특히 그분이 당신에게 철저히 정절을 지키신 십자가 때문에 그렇다. 남편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만 정말 의연하게 정욕을 물리칠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은 차고도 넘치기에 당신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성관계에서 구하지 않게 된다.
요지는 무엇인가? 충절을 다하거나 후히 베풀려면 도덕규범을 지키려는 노력을 배가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모든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깊이 이해해야 하고, 그 이해에서 비롯된 마음의 변화들이 삶으로 옮겨져야 한다. 복음을 믿으면 우리의 동기, 자아에 대한 이해, 정체성, 세계관 등이 뜯어고쳐진다. 마음의 변화 없이 규정만 지키는 행동은 피상적이고 일시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종착점이다. 우리의 문제들은 다분히 우리가 끊임없이 복음으로 돌아가 그것을 내면화하고 생활화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썼다. "복음의 진리는 모든 기독교 교리의 기본 조항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이 조항을 잘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머릿속에 계속 주입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 담아낸 성경 본문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13장에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다.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씨 뿌리는 자로 비유된다. 복음을 '받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 부류가 있는데 그중 둘은 변화된 삶을 결실하지 못한다. 한 부류는 끈기와 인내가 없어 고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부류는 계속 염려하며 물질주의적 삶을 고수한다. 유일하게 변화된 삶을 결실하는 부류는 더 열심히 노력했거나 더 순종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 13:23) 사람들이다.
본회퍼는 역설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삶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은혜에 수반된 엄청난 희생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으며, 따라서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막연히 알 뿐이지 죄의 심각성과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마르틴 루터의 옛 강령에 여전히 핵심이 잘 압축되어 있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믿음은 믿음으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어떤 행위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를 얻어 낼 수 없다. 다만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음을 믿고,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희생적으로 우리를 섬기신 분을 참으로 믿고 신뢰한다면, 우리도 희생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로 변화될 수밖에 없다.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그것이 우리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 해결책은 지금부터 힘써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우리가 예수를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믿지 못했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