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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續八 / 乙巳
대사헌 신경진(辛慶晉) 신도비명 - 이재(李縡)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 중흥(中興)의 업적에 대해 논평하는 자들이 대부분 체부(體府)의 공로로 돌리고 있는데, 그때 승상(丞相) 유성룡(柳成龍)이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훌륭한 종사관(從事官)을 얻었으니, 바로 신경진(辛慶晉)공이다. 대체로 그가 협찬한 공로가 많았으나 큰 것만 들어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여현(礪峴)에서 패배하자 ‘왜적의 기세가 한창 거세져 양맹(陽孟)의 길을 통해 평양(平壤)을 습격하려고 한다.’고 핑계대며 여러 군대를 재촉하여 돌아가 구원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이 달려가 이 제독을 만나보고 그것에 대해 불가한 점 다섯 가지를 극력 개진하였다.
하나는 ‘선왕(先王)의 묘소가 적의 소굴에 들어가 있으므로 귀신과 사람이 명나라 군대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고 하나는 ‘경기(京畿) 이남의 백성들이 날마다 명나라 군대가 오기를 바라고 있는데, 명나라 군대가 한 번 물러갈 경우에는 다시금 확고한 뜻을 가지지 못하여 반드시 서로 이끌고 적에게 투항할 것이다.’는 것이었고 하나는 ‘우리나라 강토를 한 치도 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고 하나는 ‘우리나라의 병력이 비록 미약하나 명나라 군대의 세력에 의지하면 같이 진취를 도모할 수 있지만 명나라 군대가 돌아가 버린 뒤에는 다시금 해 볼 수 없다.’는 것이었고 하나는 ‘명나라 군대가 퇴각할 때 외적이 그 배후를 덮칠 경우에는 임진강(臨津江) 이북은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극력 간하니, 이 제독이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아무런 대답이 없었으나 결국 평양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윽고 이 제독이 다시 진군(進軍)하였는데, 이는 우리 군대가 행주(幸州)에서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또한 공의 지성(至誠)과 대의(大義)가 그의 마음을 감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임진강에 이르자 얼음이 녹아버리고 배도 없어 건널 수가 없었다. 공이 지혜를 짜내어 칡넝쿨로 다리를 만들어 온 군대가 잘 건넜다. 그 뒤에 호성공신(扈聖功臣)ㆍ선무공신(宣武功臣)을 책정할 때 공의 이름이 호성원종(扈聖原從)에 들어있었으므로 공론이 모두 억울하게 여기었으나 공은 스스로 말한 적이 없었다. ≪주역(周易)≫의 계사(繫辭)에 ‘노고해도 자랑하지 않고 공로가 있어도 생색을 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공을 두고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공의 자는 용석(用錫)이고 호는 요호(了湖)인데, 영월(寧越) 사람이다. 증조 신윤형(辛尹衡)은 찰방(察訪)이고 할아버지 신보상(辛輔商)은 부사(府使)이고 아버지 신응시(辛應時)는 부제학(副提學)으로 호는 백록(白麓)이며 명종(明宗)ㆍ선조(宣祖) 무렵의 유명한 신하이고 어머니 영광 정씨(靈光丁氏)는 별좌(別坐) 정기(丁琦)의 딸이다.
공이 태어나면서부터 총명이 뛰어났다. 나이 겨우 11세에 백록공을 따라 호당(湖堂)에 갔을 적에 여러 사람들이 벽에 걸린 여선취적도(呂仙吹笛圖)를 가리키며 글을 지으라고 하니, 공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를 완성하였는데, 말과 뜻이 기발하였으므로 온 좌석이 경탄하였다.
장성하자 이 율곡(李栗谷)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만력(萬曆)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갑신년(甲申年, 1584, 선조 17)에 문관(文科)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사국(史局)으로 들어갔다. 기축년(己丑年, 1589, 선조 22) 정여립(鄭汝立) 옥사(獄事) 때 송강(松江) 정철(鄭澈)공이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갔는데, 공이 연평(延平) 이귀(李貴)공과 같이 찾아가 보고 ‘공평하게 진정시켜 사림의 소망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권면하니, 송강이 깊이 받아들였다.
신묘년(辛卯年, 1591, 선조 24)에 조정에서 한응인(韓應寅)공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왜적의 정세를 개진할 적에 공이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수행하였는데, 명나라 황제가 사신을 불러 전각의 계단에다 세워놓고 자상하게 권면하고 매우 후하게 상을 주었다.
그 이듬해에 의주(義州)로 돌아오니, 왜란(倭亂)이 이미 일어나 있었으므로 빨리 송도(松都)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임무를 보고하였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어 여러 대간(臺諫)들과 같이 나라를 그르쳐 난을 불러들인 이산해(李山海)의 죄를 성토(聲討)하고 이어 어가(御駕)를 호위하고 평양에 이르렀다.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체부(體府)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불려가 10년 가까이 힘을 썼다. 체찰사(體察使)가 관료들을 모아놓고 일을 의논할 때 체찰사의 어머니가 갑자기 나오자 관료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체찰사 어머니가 말을 전하기를, “신 종사관(辛從事官)은 가지 말라.”고 하였다.
공이 청사로 올라가 절을 하니, 체찰사 어머니가 말하기를, “우리 애는 대사(大事)를 감당할 수 없으니, 공이 잘 지도해 주었으면 한다.”고 하였다.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종부시 정(宗簿寺正),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을 역임하고 또다시 사간이 되었다.
김우옹(金宇顒) 등이 송강의 죄를 소급해 적발하여 관작(官爵)을 삭탈할 것을 요청하니, 공이 송강을 위해 억울한 점을 하소연하다가 연좌되어 면직되었다. 이윽고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임명되어 나가니, 온 경내가 사랑하여 부모처럼 떠받들었고 정사의 고과(考課)에 최고의 점수를 맞아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었다. 임기가 차자 그 고을 사람들이 1년을 더 유임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경자년(庚子年, 1600, 선조 33)에 경리(經理) 만세덕(萬世德)이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가려고 하니, 공이 또 명을 받들고 명나라에 가서 남병(南兵) 3천 명을 머물러 있게 하고 아울러 은전(銀錢)을 지급하여 남방을 수비해 줄 것을 요청하니, 명나라 황제가 윤허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성주 목사(星州牧使)와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나갔다. 광해군(光海君) 기유년(己酉年, 1609, 광해군 원년)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어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다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행대사헌(行大司憲),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가 재차 대사헌이 되었다.
임자년(壬子年, 1612, 광해군 4)에 독석(獨石) 황혁(黃赫)공이 참화를 입어 죽고 공의 아들 신희업(辛喜業)이 그의 사위로서 연좌되어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다. 공이 처음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서 국문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광해군(光海君)이 특별히 명하여 교체하였다가 곧바로 관작을 삭탈하였고 그 뒤 오래 있다가 사면하였다.
공이 그 뒤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시사(時事)를 들어보지 않았다. 공이 기미년(己未年, 1619, 광해군 11) 6월 11일에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여러 현인(賢人)들이 줄줄이 등용되었으나 공은 알지 못하였다.
공은 묵중하여 위엄이 있었고 지식과 사려가 두루 통달하였다. 젊어서부터 문무(文武)의 재주로 세상에 존중을 받았고 비록 만년에 세상의 버림을 받아 칩거(蟄居)하였으나 여전히 다급할 때 등용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서평(西平) 한준겸(韓浚謙)이 원수(元帥)에 임명되었을 적에 공이 승평(昇平) 김유(金瑬)와 아울러 추천되기도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즉위년) 제공(諸公)들이 너나없이 추모하며 말하기를 “아무개가 살아있다면 비록 참판(參判)의 자리에서도 의정(議政)의 선발에 들어갔을 것이다.”고 하였다. 공은 집안의 행실이 매우 독실하였다.
특히 계모(繼母)를 잘 섬기었고 상(喪)을 당하자 예절을 다하여 상복(喪服)을 입었으며 길제(吉祭)를 지낸 뒤에 비로소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으므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공이 올바른 예절대로 한 것에 대해 감탄하였다. 안팎의 벼슬을 역임하면서 청렴결백의 지조를 가다듬어 김청음(金淸陰) 선생과 같이 청백리(淸白吏)의 선발에 들었다.
그리고 공이 사람을 알아보는 식감(識鑑)이 있었다. 젊어서 기개가 호방한 이연평을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공은 말하기를 “후일에 국가의 대사를 감당할 자는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고 하였다. 공이 배천(白川) 비봉산(飛鳳山) 선영 손향(巽向)의 자리에 묻혔는데, 두 부인도 모두 곁에 묻히었다.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진사(進士) 조지(趙摯)의 딸이고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군수(郡守) 원축(元軸)의 딸이다.
아들 군수(郡守) 신희손(辛喜孫)과 사위 문과(文科) 신율(申慄), 찰방(察訪) 심평(沈枰), 생원(生員) 남궁 걸(南宮杰)은 조씨의 소생이고 아들 군수(郡守) 신희업(辛喜業), 신희순(辛喜楯)과 사위 지평(持平) 이시우(李時雨)는 원씨의 소생이고 아들 신희한(辛喜漢), 신희백(辛喜白), 중시(重試) 장원 통정 대부(通政大夫) 군수(郡守) 신희계(辛喜季)는 첩의 소생이다.
손자는 신황(辛), 신단(辛暺), 신항(辛暅)과 현감(縣監) 신상(辛), 신후(辛), 수직(壽職) 절충장군(折衷將軍) 신숙(辛肅)이다. 증손은 신성로(辛聖老), 군수(郡守) 신성중(辛聖重), 신성준(辛聖峻), 신성득(辛聖得), 신성면(辛聖勉)이다. 현손은 정랑(正郞) 신상동(辛相東), 현령(縣令) 신태동(辛泰東), 정랑(正郞) 신도동(辛道東)이다.
현령의 아들 신치복(辛致復)이 지금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있으면서 공의 묘소에 큰 비를 세우려고 그의 종제(從弟) 신홍복(辛弘復)ㆍ신경복(辛敬復)으로 하여금 나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써달라고 요청하였다. 아!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백여 년이 되었으므로 그 지략과 기개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오직 상촌(象村) 신흠(申欽)공이 공을 애도하는 글에 “공으로 하여금 띠를 늘어뜨리고 홀(笏)을 반드시 들고서 의정부에 서게 한다면 천직(天職)을 밝게 하고 백관의 모범이 되기에 넉넉할 것이고, 공으로 하여금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외방의 변새를 진압하게 한다면 요기를 몰아내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은 부차적인 일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에 대해 만분의 일도 알지 못하고 세상은 공을 조금도 시험해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효도와 우애하여 인륜을 다했다는 말도 공을 칭찬하기에 부족하고 청렴결백이 세상에 으뜸갔다는 말도 공을 예찬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개략적인 것을 얻었다.
그리고 공의 외손자 징사1)(徵士) 박필주(朴弼周)가 공의 묘지(墓誌)를 상당히 자세하게 저술해 놓았으므로 이를 근거삼아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백록(白麓)을 아버지로 삼고 율곡(栗谷)을 스승으로 삼아서 재주와 덕행을 다 갖추니, 일세의 위인(偉人)이 되었도다.
하늘이 이미 공에게 문무(文武)의 재주를 주고 또 중흥(中興)의 운수를 만났으니, 옛날의 길보(吉甫)만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했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막부(幕府)에서 침체되게 하였단 말인가? 몇 년이라도 수명을 더 주어 장수의 역할을 하고 정승의 역할을 하였더라면 국난(國難)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공의 지업(志業)을 발휘한 외손자가 있으니, 내가 그 말을 근거삼아 비석에 시를 새기어 천만 년을 보이노라.
각주
1) 징사(徵士) : 재야의 선비로서 학문의 명성이 높아 임금의 초빙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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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壬辰中興之業, 論者多歸功體府。 時柳丞相成龍爲體察使, 得賢從事焉, 曰辛公慶晉。 蓋其協贊之力居多, 語其大者, 則當李提督如松之敗於礪峴也, 托言“倭寇方徑, 取陽、孟路襲平壤”, 趣諸軍歸救。 公馳見提督, 力陳其不可去者五。 一曰: “先王墳墓淪於賊藪, 神人之望方切也。” 一曰: “京畿以南遺民日望王師, 王師一退, 則無復固志, 必相率而投賊也。” 一曰: “我國境土, 寸尺不可棄也。” 一曰: “國兵雖弱, 憑仗天兵, 共圖進取, 天兵退歸之後, 更無可爲也。” 一曰: “王師旣退, 賊乘其後, 則臨津以北亦非我也。” 涕泣力爭, 提督撫然無以應, 然竟退于平壤。 已而復進軍, 蓋聞我師幸州之捷, 亦公至誠、大義有以感動其心也。 及抵臨津, 氷泮無船, 不可以渡, 公創智設葛橋, 一軍賴以利涉。 後策扈聖、宣武兩勳, 公名在扈聖原從, 公議皆冤之, 而公則未嘗自言。 《易》之《繫》曰: “勞而不伐, 有功而不德。” 其公之謂與!
公字用錫, 號丫湖, 寧越人。 曾祖諱尹衡, 察訪; 祖諱輔商, 府使。 考諱應時, 副提學, 號白麓, 爲明、宣間名臣。 妣靈光丁氏, 別坐琦女。
公生而聰穎絶人。 甫十一歲, 隨白麓公往湖堂, 諸公指壁上《呂仙吹笛圖》使賦之, 公應聲而成, 詞意警發, 一座驚歎。 及長, 游栗谷李先生之門。 萬曆癸酉進士。 甲申文科, 由槐院入史局。 己丑, 汝立之獄, 松江鄭公澈以右相赴朝, 公偕延平李公貴往見之, 勉以公平鎭定無失士望, 松江深納之。
辛卯, 朝廷遣韓公應寅朝京陳倭情, 公以兵曹佐郞充書狀官, 帝引使臣立於殿陛下, 勅勵丁寧, 賞賜甚厚。 翌年, 還到龍灣, 倭亂已作矣, 疾馳復命於松都行在。 拜司憲府持平, 共諸臺討李山海誤國媒亂之罪, 仍陪扈至平壤。 除吏曹佐郞, 辟體府從事, 奔走
效力者殆十年。 一日, 體相會賓僚議事, 大夫人忽出來, 賓僚皆散。 夫人傳言曰: “辛從事勿去也。” 公升堂拜之, 夫人謂曰: “吾兒不足當大事, 願公之善指敎也。”
歷議政府舍人、司諫院司諫、宗簿寺正、侍講院弼善, 又還司諫。 金宇顒等追擿松江, 請奪官爵, 公爲訟其冤, 坐遞。 尋出補江陵府使, 一境愛戴如父母, 用治最陞通政。 及瓜, 邑人上章願借一年, 不能得。
庚子, 經理萬世德將撤兵歸, 公又承命朝京, 乞留南兵三千, 倂給折色月銀, 鎭守南陲, 帝許之。 歷吏曹參議, 出爲星、忠二州。 光海己酉, 拜慶尙道觀察使, 階嘉善, 遞拜漢城府右尹、同知中樞、行大司諫・禮曹參判, 再爲大司憲。 壬子, 獨石黃公赫死於慘禍, 公之子喜業以其婿連坐杖流。 公始以同知義禁參鞠, 光海特遞之, 旋命削職, 久而乃敍。 公自後杜門屛迹, 不與聞時事。 己未六月十一日卒, 年六十六。 及仁祖反正, 諸賢衮衮登庸, 而公則不及知矣。
公沈深有威容, 識慮周通。 自少以文武材重於一世, 雖其暮年廢蟄, 而猶擬以緩急之用。 韓西平浚謙拜元帥時, 公與金昇平瑬幷見擬。 旣歿而癸亥, 諸公莫不追思曰: “使某在者, 雖亞卿, 亦當入於夢卜云。” 公內行甚篤, 尤善事繼母, 居喪盡禮, 吉祭之後, 始飮酒食肉, 愚伏鄭公經世歎其得禮之正。 歷官內外, 勵氷蘖之操, 與淸陰金先生同被淸白之選。 且有鑑識, 延平少落拓, 人不之奇, 公則曰: “他日當國家大事者, 必此人也。”
公葬于白川飛鳳山先兆巽向之原, 二夫人皆祔。 楊州趙氏, 進士摯之女。 原州元氏, 郡守軸之女。 男喜孫, 郡守; 女婿及第申慄、察訪沈枰、生員南宮▼(术/灬), 趙氏出。 郡守喜業、喜循、持平李時雨妻, 元氏出。 喜漢, 喜白, 重試壯元、通政、郡守喜季, 側出也。 孫曰㫛、暺、暅、縣監㫾、(日+厚)、㬘壽職折衝。 曾孫曰聖老、郡守聖重、聖峻、聖得、聖勉。 玄孫曰正郞相東、縣令泰東、正郞道東。
縣令之子致復方爲淳昌郡守, 將樹公大碑, 使其從弟弘復、敬復請余爲文。 噫! 公歿已百有餘年, 謀猷、氣槪不可得而詳。 惟象村申公欽誄公之辭曰: “使公垂紳正笏, 立乎巖廊之上, 則亮天工、儀百僚而有裕; 使公建牙樹纛, 鎭乎徼障之外, 則廓氛祲、奠邦家爲餘事。 而人未識公之萬一, 世未試公之尺寸。 孝悌盡倫, 而不足爲公稱; 淸白蓋世, 而不足爲公譽。” 此可以得其大略矣。 且公彌甥朴徵士弼周爲公誌頗詳, 遂據此而爲之敍。 銘曰:
以白麓爲父, 以栗谷爲師, 其才全德備, 爲一世之偉人也。 宜天旣錫公以文武, 又際乎中興之運, 罔俾吉甫專美於古, 而胡獨屈之於幕府? 其或假之以數年, 爾將爾相, 庶幾弘濟乎艱否, 而此又不能者曷故焉? 發揮志業, 有彌甥在, 我徵斯言, 刻詩穹石, 用昭示于億載。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