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선대부 부호군 병윤 묘갈명
지은이 : 박화진(朴華鎭,1857~1925)
가선대부 부호군 휘(諱) 병윤(竝閏)은 월성(月城) 사람이다. 월성 이씨는 가계(家系)가 신라(新羅) 공신(功臣) 알평(謁平)에서 시작되었고, 호부낭중(戶部郎中)을 지낸 휘 금서(金書)에 와서 비로소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였다.
중세(中世)에,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고 호(號)는 제정(霽亭)이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진 휘 달충(達衷)이 있고, 강릉부 판사(江陵府判事)를 지내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추증되며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진 휘 수(䇕)에 이르러 본조(本朝: 조선(朝鮮)을 지칭함)에 벼슬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휘 흥상(興商)은 세조(世祖) 때의 공신(功臣)으로 시호가 양희(襄僖)인데, 그 뒤에 대대로 벼슬에 나아가 현달(顯達)하고 영화(榮華)를 누렸다. 이로부터 십여 세(世)를 지나 죄승지에 추증된 휘 중린(重璘)에 이르는데, 이가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추증된 휘 신영(新榮)을 낳고, 신영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추증된 휘 장주(章周)를 낳으니, 이들이 호군에게 있어서는 증조부, 조부, 아버지가 된다.
집안은 대대로 예천군 서쪽 덕달리(德達里)에 살았다. 선비(先妣)는 영월 엄씨(寧越嚴氏) 중빈(重彬)의 따님으로 헌종(憲宗) 병신년(丙申年1836년) 정월 7일에 공(公)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장성해서까지 근면하고 검소하며 질박하고 성실하였으므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림에는 근본에 힘써서 이에 기틀을 세웠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면서 남에게 덕을 베풀고 자손을 교육하는 것으로 일상을 삼으니, 인근 사람들이 다들 존경(尊敬)하고 감복(感服)하였다. 정부인(貞夫人)은 상산 김씨(商山金氏) 계영(繼榮)의 따님 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이 둘이 있는데 종철(鐘喆)과 종우(鐘佑)이며, 두 딸은 김도영(金道榮)과 엄종섭(嚴宗燮)에게 시집갔다. 종철의 큰아들은 우호(禹頀)인데, 젊은 나이에 집안을 이어받아 선대의 가업을 크게 확장시켰으며, 부모의 하늘처럼 끝이 없는 자애(慈愛)와 훌륭한 덕을 그리워하여 묘도(墓道)에 글을 새겨 새롭게 하였으니, 효성스럽다 하겠다.
둘째는 부호(富頀)이다. 종우의 아들은 영호(英頀), 순호(純頀), 광호(光頀)이다. 우호의 아들은 재익(宰翼), 재경(宰敬), 재규(宰奎)이며 영호의 아들은 재봉(宰鳳), 재직(宰稷)이다. 외손(外孫)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수성(壽星)이 인후(仁厚)한 마을을 널리 비추니 덕(德)이 있고 현달(顯達)한 곳이로다.
훌륭한 관작이 하늘에서 내려옴이여 누차 공덕(功德)을 쌓아 복(福)을 받은 것이로다.
당산(堂山)이 수려하고 그지없이 높으니 길이 공의 부장(副葬)이 간직된 곳이로다
자손이 번창할 분명한 증거여 송백(松栢)이 그늘을 드리우고 푸르디 푸르도다.
신유년(辛酉年1921년) 9월 상순(上旬)에 함양(咸陽) 박화진(朴華鎭)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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