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새끼는 일 시키고 한 새끼는 잡으러 댕기고!”
- 영화 〈아수라〉 중, ‘작대기’의 말
사탄의 왕국이 무너지지 않으면
〈아수라〉는 틀림없는 ‘아수라장’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매순간이 잔혹한 클라이맥스이고 모두가 악당인 영화가 나쁘지 않다면 이유는 한 가지.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들처럼 궁지에 몰리면 그럴 수 있겠다, 정도가 아니다. 그건 일종의 깨달음이다. 아, 우리는 지금 모두가 약점 잡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상태구나. 권력의 〈내부자들〉에게 기대하기 전에, 주변부에 걸터앉은 이들이 먼저 고리를 끊어주어야 이 악의 향연이 잠시라도 중단되겠구나. 그런데 악의 맞물림에서 누구나 예외가 없는 상황이라면, 그것이야말로 파국이겠구나. 그러니 영화는 절대악에 근접한 ‘그들’을 고발하기보다는 적당히 악한, 당신과 나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 맞겠다. 차마 드러내놓고 ‘내부’를 탐하지 못한 채 한편으로는 ‘외부인’들에 군림하면서 중심을 향해 열심히 돌을 던지고 있는, 그러다가 혹시 기회가 생기거나 문득 억울해지면 냉큼 “나도 좀 해먹자”고 덤벼들게 될지도 모를, 이 땅의 잠재적인 중간 악당들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민중을 개돼지 취급하는 1%의 그들을 향해 마음껏 분노라도 할 수 있었던 〈내부자들〉이나 그나마 주적이 분명한 〈암살〉이나 〈터널〉같은 영화들과도 〈아수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인물들이 왜 그렇게 악해졌는지 구구절절 변명하지도 않고, 각자 동기야 좀 사악하다 한들, 누군가 맘만 잘 먹으면 이 엉망진창인 세상을 바로잡을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영화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수라〉는 일단 유혹에 굴복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우리 사는 냉혹한 세상이라고, 당신은 거기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기보다 세상이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는, 구조적이고 심지어 영적이며 묵시적인 절망이다. 오죽하면 영화의 엔딩이 로버트 플랜트의 노래 “Satan, your kingdom must come down”(사탄, 너의 왕국은 무너져야 한다)이겠는가.
한도경은 어떻게 덫에 걸렸나
인구 48만 안남시의 민선시장 박성배(황정민)는 도시재개발 사업을 추진중이다. 8천억 이권이 걸린 이 사업을 둘러싼 쟁투가 치열한 중에 반대파가 박성배를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하지만, 결정적 증인이 재판에 불참하면서 그는 무죄가 된다. 증인은 필리핀에서 피살된 채 발견되는데, 이는 강력계 형사 한도경(정우성)이 마약중독자인 정보원 ‘작대기’(김원해)를 시켜서 한 일이다.
한도경은 이것으로 지긋지긋한 이중생활을 끝내고 ‘양복쟁이’가 되어 박성배의 경호책임자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특수부 검사 김차인(곽도원)이 박성배와 도경의 뒤를 캐기 시작하면서 일이 꼬인다. 박성배와 김차인 사이에서 한도경은 선택해야 한다. 누구를 위해 일할 것인가. 하나가 악이고 다른 하나가 선(정의)의 편이라면 차라리 쉽겠으나, 검사 김차인은 박성배의 반대파인 오 부장검사의 하수인에 불과할 뿐 아니라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또 다른 악이다. 하여 도경에게서는 최악과 차악을 가려서 운신해야 하는 곤란함이 느껴지는데, 그 기준마저도 공적인 명분이 아니라 자신과 병든 아내에게 최악이 무엇이고 차악이 무엇인지를 따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박성배는 아내에게 일등 병실을 제공하며 돈으로 옭아매오고, 김차인은 죽어가는 아내에게 도경의 섹스 동영상을 보내겠다고 협박이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도경은 일단 아끼는 후배 선모(주지훈)를 자기 대신 박성배 수하로 보낸다. 도경은 곧 그것이 최악중의 최악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경은 이제 선모의 타락에 대한 죄책과 미안함까지 떠안아야 한다. 더욱이 그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동영상, 작대기를 검거하려다가 도경의 실수로 사망하게 된 선배형사 황반장(윤제문) 사건도 문제였다. 이번에도 박성배는 선모 외 유일한 증인인 작대기를 제거해주면서 그를 ‘돕고’, 김차인은 살해 동영상을 보이며 그를 협박한다. 다시, 최악과 차악의 싸움이다. 진심으로 그는 그만두고 싶다.
덫에 걸린 건 그만이 아니다: 먹이사슬의 아수라장
한도경의 곤경은 애초에 박성배의 온정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박성배는 아픈 아내의 이복오빠였다. 도경은 선모에게 비리와 살인의 현장을 들켰고, 선모는 양복을 입게 된 도경의 처지를 부러워하던 은근한 욕망을 도경에게 들켜 암흑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인물들의 욕망은 이처럼 친절의 외양을 입은 폭력과 협박이 되었다가 결국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덫이 되어 각자를 옭아맨다.
주·조역을 불문하고 〈아수라〉의 인물들 중 이 덫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황반장은 ‘나도 좀 해먹자’며 박성배가 작대기에게 준 돈을 탐내다가 죽음을 맞았고, 한도경의 끄나풀인 ‘작대기’가 박성배의 재판에서 증언할 증인을 섹스 동영상으로 협박하는 방식은 김차인이 섹스와 살인 동영상으로 한도경을 협박하는 방식과 똑같다. 김차인은 또 박성배에게 여성 부하직원 살인 현장을 찍혀 똑같은 협박을 당할 형편이었다.
박성배가 고용한 이주민 패거리의 마약거래와 ‘해결사’ 노릇도 그렇다. 그들은 곧 철거될 이주민 거주 지역의 피해자들이고 잠재적인 범죄자로 어차피 낙인찍힌 이들이었다. 약자에게 폭력과 최소한의 권력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공모자로 만드는 것은 악의 오랜 전략이다. 아우슈비츠의 ‘회색지대’에 대해 프리모 레비가 증언하듯, 물어뜯지 않으면 물리는 생존의 처절함이란, 권력자들에게 는 늘 가장 값싼 비용으로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자원이었다.
오늘도 텔레비전 뉴스는 150억 원대 사기 피의자로 도피중이던 한국인 부부가 필리핀에서 피살된 소식을 전하고, 최순실과 함께 권력의 비선실세로 떠오른 차은택이 불과 2~3년 전까지 현정부에 비판적인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들도 혹시 덫에 걸려 있었을까. 의사가 환자의 사인을 정직하게 기록하지 못하고, 검찰이 사사건건 범죄를 은폐하려 들고, 법원이 모호한 판결로 정의를 외면하고, 여당이 대통령에게 직언하지 못하고, 야당이 여당을 공격하지 못하며, 언론이 권력의 받아쓰기장이 되고, 무엇보다 교회가 엄청난 우상숭배와 부패 앞에서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모두에게 어느 정도는 약점이 잡혀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이 섹스 동영상이든 아픈 가족의 병원비든, 살인의 증거든…, 누군가 입을 열면 모두가 다치게 되는 그 무엇이든지 말이다. 그 덫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파국을 택한, 그렇게 우리 시야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지난 10년 사이 도대체 몇이던가. 정말 그렇다면 지금 이 땅이 지옥이자 아수라장 아니고 무엇인가. 참으로 그럴 듯도 하다.
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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