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미[海底] 篇
- 嶺南儒林의 搖籃
哲 鎭(八吾軒公 11代孫) 삼가 씀
<바래미 古家>
入鄕祖 八吾軒公과 後孫들
영주에서 봉화․울진으로 달리는 36번 국도를 따라 12㎞쯤 가다 보면 봉화(奉化) 읍사무소 2.5㎞쯤 못 미쳐 도로 왼편에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기와집이 문벌(門閥)을 말해주며, 가옥 100여 호가 동서선구형(東西船構型)으로 길게 뻗어 동남향으로 앉은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이 바로 영남 유림(嶺南儒林)의 요람(搖籃)이며 항일(抗日) 독립 운동인 제1차유림단사건[일명 파리장서사건]과 제2차유림단사건의 산실(産室)로서, 의성 김씨(義城金氏) 300여 년 세거지(世居地)인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1리, 세칭(世稱) ‘바래미’다.
바래미는 ‘바다’를 뜻하는 고어 ‘바랄’('ㅏ'는 아래 아)과 ‘밑’을 뜻하는 ‘믿’(ㄷ종성체언)을 합친 ‘바다밑’이란 뜻의 ‘바랄믿[海底]’에서 받침의 ‘ㄹ’과 ‘ㄷ’이 탈락하고 음운 변천과 ‘ㅣ모음역행동화’ 현상에 의해 ‘바라미’, ‘바래미’로 된, 행정 동명 ‘해저(海底)’의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다.
바래미는 뒤로 태백산맥의 지류인 해발 587㎞의 응방산(鷹坊山), 속칭 매뱅산[매봉산이라고도 불림]의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영동선 철길 너머 낙동강 상류인 내성천(乃城川) 맑고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며, 강 건너에는 범들[虎坪]이 펼쳐진, 산수(山水) 좋고 풍광(風光) 좋은 반촌(班村)이다.
이 바래미의 입향조(入鄕祖)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시조인 의성군(義城君)으로부터 24세인 휘 성구(聲久, 1641-1707) 선조로 자(字)는 덕휴(德休), 호(號)는 팔오헌(八吾軒)이시다.
팔오헌공(八吾軒公)은 고려금자광록대부태자첨사(高麗金紫光綠大夫太子詹事) 휘(諱) 용비(龍庇)의 15대손이요, 조선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가의대부행호남도병마절제사(嘉義大夫行湖南道兵馬節制使) 휘 용초(金用超)의 11대손으로서, 칠봉공(七峯公) 휘 희참(希參)의 자제 4형제분인 이계공(伊溪公) 휘 우홍(宇弘), 개암공(開巖公) 휘 우굉(宇宏), 사계공(沙溪公) 휘 우용(宇容), 문정공(文貞公) 휘 우옹(宇顒) 중 둘째 자제분으로 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광주목사(光州牧使)·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지내신 개암공(開巖公) 휘 우굉(宇宏, 1524~1590)의 현손(玄孫)이시다.
공(公)의 증조부는 개암공의 장자(長子)인 주봉공(柱峯公) 휘 득가(得可, 1547-1591)로 창녕현감(昌寜縣監)을 지내신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이시며, 조부는 진사(進士) 천유당공(天有堂公) 휘 율(瑮, 1568-1651)로 수첨추(壽僉樞)·증좌승지(贈左承旨)이시다. 공(公)은 1641년(인조 19, 신사년), 율(瑮)의 이자(二子)로서 생원(生員)인 부친 학정공(鶴汀公) 휘 추길(秋吉, 1603-1686년) 수첨지중추부사·증이조참판과 정부인(貞夫人) 전주 류씨(全州柳氏) 사이의 3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석평리(石坪里) 용담(龍潭)에서 태어나셨다.
<바래미 입향 시조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종택>
공(公)은 어려서부터 단중(端重)하여 잡된 놀이를 즐기지 않으셨으며, 글을 배울 나이에 이르러서는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시어 공부하라고 번거로이 독촉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열 살 무렵에 이미 글 짓는 방법을 터득하여 한번은 ‘부자현어요순론(夫子賢於堯舜論)’을 지으셨는데, 당시 어른들이 모두 감탄하여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과장(科場)에서 장원으로 뽑히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했다 한다.
이로부터 문사(文思)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1662년(현종 3)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을 하시고, 1669년(현종 10)의 식년 문과에서 갑과(甲科)로 급제하신 후, 벼슬길에 오르시어 전적·현감·지평·수찬·부승지·정언·수원부사·여주목사·대사성 등을 지내셨으며, 1679년(숙종 5) 장령(掌令) 재직 시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지면서 탁남의 모함을 받아 6월 14일에 유배(流配)나 마찬가지인 제주도 정의 현감으로 나가셨다가 1681년(숙종 7) 7월에 임기를 마치고도 1682년(숙종 8) 정월 16일에야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이때 쓰신 일기인 ‘남천록(南遷錄)’은 붕당 정치는 물론, 제주의 바닷길·풍물·전설·신화·언어·민속·특산물·지리·도서·공물·방위 등을 문헌과 답사를 통해 기록한 것으로, 당시의 사회상과 제주 연구의 귀중한 사료(史料)로 이용되고 있다.
1692년(숙종 18)에 일이 있어 파직되어 돌아오셨다가 다음해인 1693년(숙종 19) 가을에 홍주목사(洪州牧使)를 배수하셨으며, 부임도 전에 다시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배수하셨으나 일이 있어 사직하셨다. 다시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셨다가 1694년(肅宗20) 봄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옮겼으나 넷째 아들 여병(汝鈵)의 상(喪)을 당해 사직하고 돌아오셨는데,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시사(時事)가 크게 바뀌어 조정(朝廷)이 새롭게 되자, 전원(田園)으로 물러나 서사(書史)를 즐기시며 14년을 지내셨다. 그동안 1700년 바래미에 터를 잡으시고 「경오전(耕吾田), 음오천(飮吾泉), 채오전(採吾巓), 조오천(釣吾川), 피오편(披吾編), 무오현(撫吾絃), 수오현(守吾玄), 종오년(終吾年)」[내 밭을 갈고, 내 샘의 물을 마시고, 내 산의 나물을 캐고, 내 내의 고기를 낚고, 내 책을 펴내고, 내 거문고를 뜯고, 내 하늘을 지키며, 내 생애를 마치리]이라는 공의 인생관의 요체를 담은 여덟 가지 명(銘)인 팔오헌명(八吾軒銘)을 지어 몸소 실천하시며 학록서당(鶴麓書堂)을 열어 후학 양성에 힘쓰시다가 향년 67세로 졸(卒)하셨다.
<학록서당(鶴麓書堂)>
공(公)은 평소 평정을 잃지 않는 성품으로 어려서부터 차분하고 대범한 성격을 지니고 계셨다 한다.
대여섯 살 때 또래 아이들과 집 근처 바위 밑에서 놀고 있었는데, 마침 벼락이 바위에 떨어졌다. 집안 식구들이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다른 아이들은 혼이 반쯤 나갔는데, 공(公)만 아무렇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또 정의 현감을 마치고 제주도에서 돌아오시던 중 폭풍우를 만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하자 같은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는데 오직 공(公)만 단정하게 앉은 채로 안색이 변하지 않으셨다. 같이 타고 있던 제주목사 임홍망(任弘望)이 그 까닭을 물으니, 공(公)은 웃으시면서 “살고 죽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이지, 내가 놀라서 허둥댄다고 해서 무슨 득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한다.
또 승지로 재직시 하루는 술이 과하여 누워 계셨는데, 갑자기 임금이 급하게 찾아서 옆에 있던 이들이 부축하고 조복(朝服)을 입혀주자 공(公)은 문부를 지니고 들어가셨다. 그런데도 임금을 대할 때 매우 삼가는 태도를 잃지 않으셨으며, 글을 옮겨 쓰는데도 글자 한 자 흐트러짐 없이 매우 반듯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바로 취하여 쓰러지셨다고 한다.
이처럼 공(公)은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당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취해 있었어도 똑바른 자세가 필요할 때면 고도의 정신력으로 평정을 유지하셨다고 한다.
또한 언관으로 근무하실 때는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으셨다고 한다. 수찬(修撰) 재직 시에는 국가재정에 관하여 각사(各司)의 비용과 내탕비(內帑費)를 줄여 진휼비에 보충하는 일과, 경사(經史)를 열심히 강론하여 치도(治道)를 구하는 일 등 수천 언의 소(蔬)를 올렸고, 정언(正言) 재직 시에는 당시 형조 판서 남구만(南九萬)이 진휼비를 탕감했다고 고발하셨다.
특히, 1678년(숙종 4) 수찬(修撰) 재직 시 심한 가뭄 대책을 묻는 임금 말씀이 있어 올린 차(箚)에서, “… 전하께서는 근래에 들어 힘써 지혜를 쌓으심이 적고 자만하시는 빛이 있으신 듯합니다. 귀척(貴戚)과 종실(宗室)에서 마구잡이로 금리(禁吏)를 형벌하여 나라 안의 명산들을 나누어 왕실로 들이매, 간관(諫官)들과 법사(法司)에서 죄 주고 파직시키기를 청하는 것은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민폐를 막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건이 귀척과 근친에 관계되는 것이면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니, 가만히 생각하건데 전하께서는 아직도 한 ‘사(私)’ 자를 능히 다 버리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어찌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크지 않겠습니까? 수령(守令)을 잘 가려서 뽑으라는 말씀은 자주 내리시지만, 임명하실 때는 더러 되지 못한 사람을 써서 백성들을 가혹하게 하는 자를 우대하시니, 관리는 잘한다는 이름을 얻지만 백성은 혹독한 괴로움을 받습니다. 부정한 관리를 엄하게 다스리는 법(法)은 탐욕과 더러움을 징계하려는 것인데 근래에 어사가 염탐한 것과 대신(臺臣)이 탄핵한 이가 매우 많은데도 조사가 공정하지 못하여, 곧 허물이 없는 것으로 귀착되고 마니, 이는 바로 문천상(文天祥, 남송 말의 충신)이 말한 바 ‘하늘의 꾸짖음은 민원(民怨)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라고 하셨는데, 임금이 칭찬하고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이 말 밖으로 넘쳐난다. 내 가상히 여기는 바이니 어찌 마음에 두고 받아들이지 않으랴?”고 하셨다.
이처럼 강직한 성품으로 공(公)은 관직에 나아가서는 공평무사하고 청렴한 태도를 견지하셨으며, 물러나서는 또 철저히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살아가는 삶을 살려고 하셨을 뿐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한다. 때문에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를 지낸 이항(李沆)은 “관직자들은 누군가의 후원을 받아 관직에 오른 자가 많지만, 김성구만은 누구의 후원 없이 청현(淸顯)에 이르렀으니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이 일화(逸話)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公)은 조선 숙종조의 명신(名臣)이며 청백리(淸白吏)로서, 사림(士林)의 추앙(推仰)을 받은 학덕(學德) 높은 선비셨다.
팔오헌공(八吾軒公)은 바래미에 터를 잡기 전에 먼저 경기도 여주와 경상도 풍기 등지도 둘러 보셨다고 한다. 그런데 여주는 한양이 가까워 다시 나랏님의 부르심을 받아 벼슬자리로 나아가야 할까 염려되어 꺼렸고, 풍기는 땅과 물이 모두 좋지 않아 택리(擇里)를 포기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충정공(忠定公)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현손인 영릉 참봉(英陵參奉) 권목(權霂)의 딸과 결혼하여 처가(妻家) 동네인 안동권씨(安東權氏) 집성촌 닭실[酉谷] 가까이의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환란(患亂)을 피하기에 적합한 지세를 가진 ‘바래미’를 택하여 1700년(숙종 26, 경진)에 ‘일야각(一夜閣)’을 짓고 들어가 후손들을 위한 세거지(世居地)를 잡으셨다.
원래 바래미에는 의령여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여씨(余氏)들이 이 지역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래미[해저]와 내성[봉화읍] 사이의 개따밭골 입구에서 범들[호평(虎坪)]을 향하여 펼쳐진 산수(山水)의 모습이 한자로 여씨의 ‘여(余)’라는 글자의 모습을 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앞 둑을 따라 솔안[松內]까지 일직선으로 수천 그루의 소나무를 심음으로써 그 ‘여(余)’자의 끝에 일(一)자의 한 획이 더해져 ‘김(金)’자의 형상을 갖추게 하였고, 그 후 여씨(余氏) 성이 퇴조하고 김씨(金氏) 성이 번창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 후기 명필 원교 이광사가 쓴 바래미 '학록서당(鶴麓書堂)' 현판>
어떻든 공(公)이 바래미에 정착한 뒤인 숙종 말기부터 영․정조를 거치는 200여 년 동안 공(公)의 후손들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저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부친으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극찬하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인정한 조선 후기 서예 대가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현판이 걸려 있는 학록서당(鶴麓書堂)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문과 17장, 사마시[생원·진사] 63장, 수직(壽職)·음직(蔭職)·증직(贈職) 25장을 내었다. 그래서 마을 앞 솔거리에는 벼슬을 하면 세우던 소도(蘇塗, 붉게 칠한 장대 끝에 푸른 칠을 한 나무로 만든 용을 붙인 것)가 빼곡하여 “바래미에는 솟대[소도(蘇塗)] 그늘에 우케[찧기 위하여 말리는 벼]를 못 말린다.”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향리의 악폐를 막고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기 위하여 토착양반들로 구성된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留鄕, 鄕廳]의 수장으로, 추로지향(鄒魯之鄕)인 안동 유림의 원로격인 안동좌수[유향좌수]는 향중(鄕中)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으며 학식이 높은 집안 출신으로서 온 고을을 감화시킬 수 있는 인격자라야만 될 수 있었는 데다, 골짜기마다 양반들이 즐비한 안동에서 양반들의 대표로 뽑히는 것이기에 벼슬보다 더한 가문(家門)의 영광(榮光)으로 여겼던, 그 안동좌수(安東座首)[유향좌수]를 지내신 분도 13분이나 되셨다.
이처럼 한 마을 문중(門中)에서 200여 년 동안 낸 급제자로는 영남에서 돋보이는 등과 기록이며, 또한 대과 17장은 의성 김씨(義城金氏) 전체 대과 98장의 17.3%에 달하며, 사마시 63장은 의성 김씨(義城金氏) 전체 사마시 263장의 24%에 달하는 대단한 수였다.
이 분들은 공(公)의 맏자제인 휘 여건(汝鍵)과 둘째 자제인 망도옹(望道翁) 휘 여용(汝鎔), 셋째 자제인 졸암(拙庵) 휘 여당(汝鏜)을 위시하여, 휘 여건의 넷째 자제인 송암(松庵) 휘 경헌(景瀗), 다섯째 자제인 단사(丹砂) 휘 경온(景溫), 경온의 둘째 자제인 소암(素岩) 휘 진동(鎭東, 出汝鏜長子景潾后)과 셋째 자제인 휘 두동(斗東), 휘 여당의 셋째 자제인 학음(鶴陰) 휘 경필(景泌), 경필의 자제인 와은(臥隱) 휘 한동(翰東), 두동의 맏자제인 문천(文泉) 휘 희소(熙紹)와 둘째 자제인 식헌(寔軒) 휘 희락(熙洛), 공(公)의 백씨(伯氏) 휘 성유(聲厚)의 현손(玄孫)인 갈천(葛川) 휘 희주(熙周), 공(公)의 6대손인 만회(晩悔) 휘 건수(建銖), 휘 희소(熙紹)의 손자인 학포(鶴浦) 휘 우수(禹銖), 휘 희락의 둘째 손자인 노원(魯園) 휘 철수(喆銖)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한 공의 부친인 학정공(鶴汀公) 휘 추길(秋吉)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셨으며, 단사(丹砂) 휘 경온(景溫)은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을 지내시고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추증되셨고, 휘 두동(斗東)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셨으며, 와은(臥隱) 휘 한동(翰東)은 대사간·전라도관찰사를 지내셨는데, 정조가 우의정 번암 채제공에게 영남의 인재에 대해서 물었을 때 “김한동이 제일입니다.”라고 한 일화(逸話)는 유명하다.
와은공(臥隱公)은 교리 재임시 1792년(정조 16) 5월, 해은(海隱) 휘 희성(熙成)[문과, 지평, 삼계서원 원장], 해와(海窩) 휘 희택(熙澤)[이조참의, 청하현감], 갈천(葛川) 휘 희주(熙周)[대사간, 병조참판] 등과 함께 사도세자 신원 회복을 위한 영남만인소를 삼계서원에서 발의하고 1만 57명의 서명을 받아 정조에게 올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해와공의 증손인 성환(惺寰) 휘 조영(祖永)도 1881년(고종 18)에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대하여 10,432명이 서명해 올린 영남만인소로 1차 소수 이만손이 귀향을 가자 2차 소수로 활동하였다.
또 갈천(葛川) 휘 희주(熙周)는 영해부사·병조참판을 지내셨으며, 문천(文泉) 휘 희소(熙紹)는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셨고, 식헌(寔軒) 휘 희락(熙洛)은 규장각초계문신(奎章閣抄啓文臣)을 지내셨는데, 이 세 분은 영남 대유(大儒)였던 대산(大山) 이상정 선생에게서 배우고 교유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인근은 물론 영남 유림에서는 바래미의 ‘의성김씨’를 두고, ‘바래미김씨’로 불렀는데, 그러면서도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 분은 별로 없었으니, 그것은 후손들이, “우리 집안은 대대로 맑고 깨끗함을 전해 내려왔으니, 자손 된 자들은 삼가 지키고 바꾸지 않는 것이 옳다.(家世以淸素相傳 爲子孫者 謹守勿替可也)”고 하신 팔오헌공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벼슬보다 학문에 힘쓰며 참된 선비 정신으로 욕심없이 청빈(淸貧)한 삶들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집권층인 노론에 의해 경상도의 남인이 대략 200여 년 동안 철저하게 견제를 받은 조선 후기 지역 차별의 정치사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독립운동의 산실 만회고택 청풍헌과 명월루>
이처럼 입향조 팔오헌공(八吾軒公)의 충의효친 정신과 조선 청댓잎 같은 선비 정신은 바래미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일제 때는 수많은 항일 독립 투사들을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 일제 식민지하에서는 항일 독립 투쟁으로, 해방된 조국의 자유당 정권하에서는 반독재 투쟁으로 삶을 일관한 심산(心山) 휘 창숙(昌淑) 지사를 들 수 있다. 심산(心山) 지사(志士)는 부친 호림공(護林公)이 바래미에서 태어나셨으나 개암공(開巖公) 휘 우굉(宇宏) 선조의 계씨(季氏)인 성주의 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우옹(宇顒) 선조의 종가로 양자를 가셨기에 성주에서 태어나 성장하셨지만 실질적인 혈족은 모두 바래미에 살고 있었다.
그런 연유(緣由)로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심산 지사는 스승인 곽종석을 대표로 하여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낼 유림단독립청원서[파리장서:전문 2,674자에 달하는 장문의 독립청원서로 137명의 유림대표가 서명]를 작성할 때도 먼저 바래미를 찾아와 만회고택 명월루(明月樓)와 해관구택[김건영 가옥]에서 작성하고 뜻 있는 분들의 지지 서명을 받아 짚신으로 엮어서 몸에 지니고 상해 임시 정부로 가져갔다. 이 때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서명한 사실이 탄로나서 건영(建永, 1848-1924)․순영(順永, 1860-1934)․창우(昌禹, 1854-1937) 등 서명자들이 왜경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이것이 1차유림단사건[파리장서사건]이다.
그 6년 뒤인 1925년 상해 등지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심산 지사가 만몽(滿蒙) 접경 지역 황무지를 조차․개간하여 한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 모금을 위해 몰래 입국하여 다시 바래미를 찾아왔다.
이 때 바래미 100여 가구 주민들이 똘똘 뭉쳐서 집을 저당 잡히고 논밭 등을 팔아 황소 쉰 마리 값을 마련하여 심산 지사에게 건네주었는데, 이 사실이 또 발각되어 뇌식(賚植), 헌식(憲植), 한식(漢植), 우림(佑林), 창근(昌根), 창희(昌禧), 창백(昌百), 홍기(鴻基) 씨 등 주동자 여덟 분이 징역 3년씩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주민들도 여러 명이 체포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것이 2차유림단사건이었는데, 이 두 차례에 걸친 유림단사건으로 인하여 바래미는 쑥대밭이 되었고, 일경으로부터 감시의 눈초리는 더욱 심해졌다.
이는 산청문화원 발행 「유림의 독립운동」에서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는 일본 헌병의 혹독한 탄압으로 희생이 참으로 많았던 곳이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는 거문적인 항일 운동으로 봉화의 유곡과 함께 경북에서 가장 치열한 독립운동이 전개된 곳이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와 해저리는 유림단 독립운동의 총 본산이었다.'고 한 것과, 유림단독립운동실기편찬위원회 발행의 「유림단 독립운동 실기」의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만회고택에서 파리 만국 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의 초안을 직접 작성한 곳이다.'와, 안동대학교 김희곤 교수 등이 공동으로 펴낸 「봉화독립운동사」의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는 유림단 독립운동의 총 지휘자인 김창숙 선생 부친의 고향이었기에 영향력이 컸다.' 등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독립운동기념비>
그러한 왜경의 감시에도 조상 전래의 충의(忠義) 정신과 선비 정신은 시들지 않아, 이를 바탕으로 한 항일 투쟁의 불꽃은 계속 타올라 1933년 독서회 사건으로 번져나갔다. 독서회 사건은 창신(昌臣), 중문(重文), 중헌(重憲), 중렬(重烈), 덕기(德基)씨 등 5명이 항일 비밀 단체인 독서회를 조직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다가 왜경에게 발각되어 재판에 회부된 사건이었다.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던 말처럼 절손(絶孫)까지 당하는 3대 수난 속에서도 온 마을이 하나가 된 바래미의 항일 투쟁은 끝없이 이어졌고, 중욱(重旭)씨는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영하여 독립 운동을 벌였고, 당시 홍기(鴻基)씨의 아들 정진(正鎭)씨는 대구상고 학생 중심의 항일 비밀 단체였던 태극단의 주요 멤버로 활약하다가 왜경에 피체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2년 3개월 만에 조국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런데도 자료와 증거 유실로 애족장에 김뇌식, 김창백, 김홍기, 김창신, 김중문, 김덕기, 김창엽, 김정진 등 여덟 분, 건국포장에 김하림, 김건영, 김창우, 김순영 등 네 분, 대통령표창에 김헌식, 김창근 두 분, 이렇게 열네 분만이 독립유공자가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식헌(寔軒) 휘 희락(熙洛) 선조의 「고식(故寔)」 5권 3책>
이렇듯 바래미는 한마디로 충의 정신과 선비 정신이 유림(儒林)의 귀감(龜鑑)이 되는 반촌(班村)으로서 그 정신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로 효친, 조상 숭배의 전통도 계승되어 조선 말기부터 일제하의 그 항일 독립 운동으로 인한 수난의 와중에서까지도 조상들의 정신적 유산을 정리, 보전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수많은 문집들이 발간되었다.
바래미에서 발간된 문집들로는 개암공 휘 우굉(宇宏) 선조의 「개암집(開巖集)」 4권, 팔오헌공 휘 성구(聲久) 선조의 「팔오헌집(八吾軒集)」 7권 4책, 단사 휘 경온(景溫) 선조의 「단사집(丹砂集)」, 소암 휘 진동(鎭東) 선조의 「소암집(素巖集)」 6권 3책, 와은(臥隱) 휘 한동(翰東) 선조의 「와은집(臥隱集)」 8권 4책과 석(錫) 시조(始祖)로부터의 문집(文集)들을 정리한 「문소세고(聞韶世稿)」 11책, 백산(白山) 휘 희분(熙奮) 선조의 「백산집(白山集)」 4권 2책, 갈천(葛川) 휘 희주(熙周) 선조의 「갈천집(葛川集)」 10권, 식헌(寔軒) 휘 희락(熙洛) 선조의 「고식(故寔)」 5권 3책, 학포(鶴浦) 휘 우수(禹銖) 선조의 「학포집(鶴浦集)」, 노원(魯園) 휘 철수(喆銖) 선조의 「노원문집(魯園文集)」 5권 9책, 만회(晩悔) 휘 건수(建銖) 선조의 「만회헌문집(晩悔軒文集)」 6권 3책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문집들은 우리 나라의 명저는 물론 중국 고대로부터 당․송 시대의 고서들과 함께 영규헌(映奎軒)에 3000여 권의 장서로 보관되어 왔으나 6․25동란 이후 이리저리 흩어져 지금은 마을에서 찾아 읽을 수 없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팔오헌공께서 마을에 들어와 사실 때 인근에 소문난 명천(名泉)인 큰샘 터를 잡아 주면서 풍수 선거사(宣居士)가 “이 우물에서 조개껍질이 나오면 마을 운세가 다해 후손들이 떠날 것”이라 했다는데, 한일합방이 될 때쯤 마을 큰샘에서 조개껍질이 하얗게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지금은 많은 후손들이 바래미를 떠나 도시로 나가서 잿빛 기와지붕 아래 추녀 끝을 스치는 조선의 바람 소리만 스산하지만, 자손들에게 바래미의 얼은 그대로 살아 있어 1986년에는 세 분 선조의 합편 문집인 「칠봉개암팔오헌문집(七峰開巖八吾軒文集)」을 간행하였고, 2010년에는 독립운동기념비와 개암공 시비, 입향조 팔오헌 명비(銘碑)를 세웠으며, 매년 춘향(春享) 때나 추석(秋夕) 시제(時祭) 때는 객지로 나가 있는 후손들이 모두 모여 조상을 모시며 숭조돈목(崇祖敦睦)의 정신을 면면(綿綿)히 이어가고 있으니, 명문거족(名門巨族)인 의성김문(義城金門)에서 태어나 더욱이 바래미가 고향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추원사(追遠祠)'에서 향사를 지낸 후 筆者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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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향을 지키며 문중의 역사를 알리는 자네의 뜨어운 집념에 고마움을 느끼네.
후손의 한 사람으로 감사드리네. 그리고 조상님의 얼에 누 되지 않은 삶으로 보답하고싶은 마음이라네.
고향이 나를 버려도 조상님들이 계시는데 내가 고향을 버릴 수는 없제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때로는 과거의 규범 속에서 족보의 무게에 눌려 산다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