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15 - 사마의 아들 사마염이 세운 진(晉)나라에서 8왕의 난이 일어나다!
265년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위나라 조환에게서 선양을 받아 진(晉)나라를 개국했으니 316년에
흉노족에게 망할 때 까지 50년을 서진(西晉)이라 하는데 수도는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했으며
팔왕의 난을 겪고 30년만에 멸망하고 이후 화북에는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되니..... 진나라는
황자 하나가 강남으로 수도를 옮겨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다가 동진도 420년에 수나라에 망합니다.
249년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으로 위나라를 장악했으며 위나라는 263년에 촉한을 정벌했지만 2년 후
265년 사마염이 황제로 즉위해 진나라를 세웠으며 279년 독발수기능을 격파하고 280년에 손오를
정벌해 통일을 이루었으나 291년 가남풍의 쿠데타에와 300년부터 307년까지 팔왕의 난이 있었고
307-311년 영가의 난을 거쳐 장안이 함락되어 망했고 317년 건강에서 사마예가 즉위하니 동진입니다.
처음 조조의 후계자 경쟁에서 조비를 지지함으로써 친위 세력으로 입지를 다진 사마의는 이후 제갈량
의 4차, 5차 북벌을 막아내면서 군부의 중심으로 성장하였으며 조비와 그 아들인 조예가 죽은뒤
나이 어린 조방을 끼고 실권자로 군림하던 조상을 249년 고평릉사변 쿠데타로 축출하고
위나라의 실권자로 군림했으니 과거 조조가 한나라 헌제를 앞에 두고 권력을 휘두르던 상황이 됩니다.
2년후 사마의가 죽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가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으니 위나라 황제 조방과 조모를
연이어 폐위시키고 반발하여 잇달아 일어난 관구검과 문흠, 제갈탄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조정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굳혀나갔으니 사마사 사망후 동생 사마소는 개국의 공으로 삼기 위해 촉한 정벌에
착수해 263년 촉한 정벌이 한창 진행되던중 연이어 승전보가 울리자 10월 진(晉)의 공작에 올랐습니다.
사마소는 태원(太原), 상당(上黨)과 하동(河東), 평양(平陽), 옹주(雍州)의 10개군 사방 700리 토지를
받았는데 이 지역은 옛 진나라(晉)의 영토로서 사마소는 이 토지를 위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
에게서 받아내고 진(晉) 공국을 세워 진공(晉公)으로 봉해지고 구석을 받았으니 263년 10월
후세에 서진과 동진 합쳐 155년간 황제국 진나라로 존속하는 나라가 공식적으로 역사에 등장합니다.
263년 11월 유비가 세운 촉한은 진공 사마소가 보낸 정촉군에 의해 멸망하니 이 공으로 이듬해
3월, 사마소는 왕으로 진봉받아 20개군을 거느렸지만 정작 사마소는 중풍으로 265년 9월에
죽고 이러한 건국의 기반은 고스란히 아들 사마염에게로 이어졌으니 사마의와 사마사 그리고
사마소를 고조, 세종, 태조로 추존하고 자신은 실제 초대 황제임에도 세조의 묘호를 받았습니다.
조조나 사마의는 자기가 시키거나 책임아래 일어난 일은 책임 졌으니 지지세력에게 불신을 심어주진
않았으나 진나라는 황제를 내치고, 시해하는등 건국 과정이 탈법적, 부도덕적 이었던지라 사마씨
의 정통성은 취약했으니 뒷날 동진의 명제는 조상들의 건국과정을 듣고 일족과 나라를 부끄러워
했고 후조의 석륵은 "나는 조맹덕 부자나 사마중달 부자와 같은 도적질은 안하겠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마소의 뒤를 이어 진왕이 된 사마염은 찬탈이나 다름없는 선양을 통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에 올랐으니 그 방법이 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흥기한 과정과 너무나 비슷해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인데 조조도 근본적으로는 한 황실의 권위를 이용
해 세력을 구축한뒤 후한의 근왕 세력을 주륙하고 위왕에 올라 찬탈의 준비를 끝내놓았습니다.
위나라는 황족과 외척들에게 권력을 주지않고, 방계 친척들로 근황세력을 구축하다가 사마씨
에 의해 숙청되면서 군권이 사마씨등 호족세력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권력을 잃고
망했는데, 사마염은 위나라의 쇠망과정을 생각해 황족들을 지방의 왕으로 분봉하는
것은 물론 군권까지 쥐어주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숙부 사마주(司馬伷)와 사마량(
司馬亮)으로 동관왕(東莞王)과 부풍왕(扶風王)으로 책봉되어 오나라와 선비족 전선에 나갑니다.
당시 진(晉)나라의 적국은 강남의 오나라와 농서의 선비족이니 농서의 선비족에 대해 진주
(秦州)를 설치하고 호열을 자사로 앉혔지만, 끝내 270년에 선비족의 독발수기능이 들고
일어나 호열과 견홍을 죽이고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니 선비족은 서량을 유린했고
사태를 수습하라고 보내려던 가충은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는 숳수를 부려 부임을 피합니다.
오나라에는 손호가 황제였는데 그는 폭군의 전형처럼 무리하게 무창으로 천도했다가 재정만 악화
시키고 돌아오거나, 신하를 살해하여 호랑이의 식사로 뒷산에 던져주고, 또 궁녀를 5,000명
이나 징발하는등 수많은 학정을 펼쳤으며 외치도 폭군의 전형대로 사마염이 즉위하자마자
깔보고 평화조약을 폐기하며 예언만 믿고 북벌을 추진하다가 폭설에 갇혀서 동사할뻔 했습니다.
부풍왕 사마준이 선비족 우두머리 독발수기능을 밀어내는데 성공하고 진나라에 양호, 오나라에는
육항이라는 두 명장이 있어서 서로 대치하며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274년에 육항이
죽자 양호는 장화, 왕준, 두예와 함께 오나라 정벌을 극력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이에 맞서 가충,
풍담, 순욱 등의 일파는 선비족이 먼저라면서 반대하니양호는 오나라 정벌을 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279년에 때마침 마륭이 독발수기능을 참살하자 진나라는 280년에 가충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사마주, 왕혼, 두예, 왕준 등으로 대대적인 오나라 침공을 개시했으니 한 갈래는
서주에서 건업을 직격하고, 두번째 갈래는 형주로 밀고 들어가며, 세번째는 익주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간 결과 마침내 진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완수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마염의 진나라는 천하통일을 달성하고 삼국시대의 최종 승자에 올랐는데 서진은
조위가 폐단을 나타내기도 전에 조씨 황족을 숙청하고 찬탈하면서 건국했기 때문에 전란기의
군벌 집단을 기반으로 성장한 위나라가 지니고 있던 전제적이고 법가적 정책 부정과 기득권
집단으로 문벌들의 귀족적 · 퇴폐적 사회 풍조를 단속하기 위해 유교 질서를 회복하려 했습니다.
사마염은 유교 예법을 준수하며 관대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으니 즉위후 3년상을 부활시킨
것은 가족적 윤리와 국가적 충성을 동일시하는 한대 유교의 국가운영 논리를 복구하려는 시도였으며
간관(諫官)을 설치하고 비판을 관대하게 받아들였으며 278년 11월 신사일에 태의사마 정거(程據)가
꿩의 머리털만 모아서 만든 옷인 치두구(雉頭裘) 라는 가죽옷을 바치자 이를 태워버린 일화가 유명합니다.
오나라 전선을 지키던 석포가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자 체포령을 내렸다가 석포가 자진출두
해오자 최고위관인 사도로 임명했고, 마륭의 능력을 믿어 그에게 독발수기능 토벌을 맡기는등
재위 초기 사마염은 바르게 통치했지만 문제는 하내 사마씨(河內司馬氏)가 상상도 하지못할
위법과 탈법으로 찬탈을 저지른 것이었으니 먼저 사마의는 무력 쿠데타로 정권을 뒤집었습니다.
그 아들 사마사는 임의로 외척을 척살하고 황제까지 쫓아냈으며, 사마소는 아예 황제를 시해
했는데 위문제 조비 역시 후한의 헌제를 핍박하여 황제가 되었지만 그래도 헌제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았지만 사마소는 가충을 앞세워 조모를 시해했으니 실행자인 성제에게
책임을 돌렸지만 정작 성제를 사주한 가충은 무사했으므로 눈 가리고 아웅일 뿐
이었으며 사마씨 일족에 조금이라도 제동을 거는 세력이 있으면 무력을 동원해 짓밟았습니다.
조씨의 위나라는 헌제가 동탁에게 옹립되어 문제의 소지가 있는 황제였다는 점, 그리고 무제
조조, 문제 조비, 명제 조예 3대 동안 동탁이 초토화시킨 낙양을 복구하고 황건적의 난
으로 초토화된 민생을 재건했으니 "조씨가 뭘 잘했길래 제위에 오르냐?" 라는 질문에 할 말
이 있었으나 서진은 조씨정권을 날로 집어삼키고 간판만 바꿔 달아놓은 정권에 불과했습니다.
사마씨는 찬탈로 정권을 잡았고 명분이나 정통성에서 부족했기 때문에 사마씨 정권하에서는 유교
를 외치면서도 정작 충(忠)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다고 하는데 황실의 일족인 사마씨
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위황제를 쫓아내거나 시해했으며, 반항하는 세력은 몰살시키는 행위로
조씨를 몰아내고 집권했으니 충(忠)을 강조하면 가장 많이 걸리는 쪽이 사마씨 황실이었습니다.
사마염은 유교적 가족주의를 내세웠지만 정작 사마염 자신이 사마의의 장손이 아니라 차남인 사마소
의 아들이었던 것이니, 물론 사마소의 형 사마사가 아들을 두지 못하기는 했지만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가 사마사의 아들로 입적되어 있었고 그의 개인적인 인망도 상당했으므로 사마염에게
강력한 위협이었는데 그렇다고 사마유를 아예 배제해버리자니 또 유교적 가족주의에 어긋납니다.
사마염이 내건 '유교 질서의 회복' 은 강조될수록 사마염의 집권 정당성이 약화된다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었으니 278년에 조정 내에서 군기반장 역할을 하던 부현(傅玄)이 사망하고 280년에는 삼국이 통일
되면서 사마염은 유교 질서의 실현이라는 기조를 포기했으니 유교적 가족주의에 입각해 파격적인
혜택을 받던 사마유가 견제의 대상으로 전락하니 산동지방으로 보내버리는데 이 과정에서 죽습니다.
문벌 귀족들의 범법행위에 대한 사마염의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었으니 267년 1월부터 관전을
점탈했다는 죄목으로 산도, 사마목, 무해. 유우가 함께 고발되었음에도 고관대작인 산도, 사마목,
무해는 방면되고 일개 현령인 유우만 목이 달아난 일이 있었으며 그 뒤에도 사마사의 인척이자
최측근인 양수는 탈법적으로 재산을 모아도 사마염이 보호해준 덕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사마염은 천하를 발 밑에 둔 뒤에는 개혁 같은건 그냥 다 포기하고 오나라의 손호가 모아들인 5천 궁녀
를 그대로 흡수해 1만 궁녀를 현실에 실현하는 중국판 하렘을 만들엇으니 이 많은 궁녀 가운데
오늘밤은 누굴 골라잡을지 몰라서 양이 끄는 수레에 타고 양 가는 대로 로또를 돌린 이야기도
유명한데 궁녀들은 양을 유인하러 양들이 좋아하는 댓잎과 소금물을 문간에 깔아놓았다고 합니다.
나라 꼴이 막장이었던 원인은 황제가 귀족의 눈치를 보느라고 제왕의 위상이 떨어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으니 사마씨 일족이 위나라말에 절대적 지위를 구축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귀족사회의
일원으로서 였으니 한나라 시조 유방과 위나라 시조 조조가 극적인 자수성가를 이루어낸 데 반해,
사마씨는 전통적 귀족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좋든 싫든 귀족 사회와의 관계를 염두에 둬었습니다.
제왕의 위상이 귀족층에 비해 나을 것이 없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위나라 처럼 강력한 법치를
통해 귀족들을 제어하는 것이 정답이지만 그러나 사마염은 법치의 각박함을 지적하며
유교적 통치를 시행하려다가 결국 그걸 버리고 아무것도 안 하는 현실 도피성이 강한
도교사상과 향락풍조를 스스로 조장했으니 사회 전체가 현실도피 및 퇴폐로 흘렀습니다.
이 당시 죽림칠현이 나온 것은 단순히 전란이나 권력투쟁에 대한 선비들의 염증이 퍼졌기 때문만은
아니고, 사마씨 황실이 이런 풍조를 조장했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졸부 석숭과 왕개가 온갖 사치로
돈을 뿌리며 낙양에서 "누가 더 돈을 많이 쓰나" 경쟁하는 돈지랄을 할때 황제 사마염은 말리기는
커녕 앞다투어 구경을 하곤 했다니 유가도, 법가도 다 버렸으니 귀족을 제어할 수단이 없어졌습니다.
황제부터가 이 모양이니 문벌귀족들부터 사치, 축재, 매관매직, 부정부패 등 온갖 비리를
일삼으며 극단적인 사치행각을 겨루었으니 승상 하증은 하루에 1만전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진수성찬을 차려도 먹을게 없다며 툴툴댔고 사위 왕제는 사람 젖으로 키운
돼지고기를 사마염에게 대접하는가 하면 낙양 한복판에 말 기르는 사육장을 만들었습니다.
사치의 두 끝판왕중 왕개는 사마염의 외삼촌인데 왕개가 엿기름으로 솥을 닦으면 석숭은 밀랍을 땔감으로
쓰고, 왕개가 명주로 40리에 장막을 치면 석숭은 비단으로 50리에 장막을 치며 석숭이 집을 산초로
칠하면 왕개는 주사로 칠했는데 왕개가 밀린다 싶자 사마염은 외삼촌을 위해 2자(48cm)가 넘는 귀한
산호수를 하사하니 석숭의 집에 들고가서 자랑하자 석숭이 황제의 하사품을 쇠몽둥이로 부수고는
사과한답시고 창고에서 3~4자(72~96cm) 되는 산호수를 7개를 꺼내와서 하나 가져가라고 하였답니다?
위나라때 탄생한 구품관인법은 몇십년도 지나지 않아 제도 개혁을 요구할 정도로 문제가 생기는데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잡은 사마씨 일파는 주대중정을 둠으로써 사마씨 일파의 기호대로 관료
를 선출하게 되니 그나마 등애 같은 한미한 집안 출신도 고위관직에 나아갈수 있었던 초기 구품
관인법의 장점은 사라지고 좋은 가문 출신의 사람만 상위 관품을 받아 세습화에 기여하게 됩니다.
서진은 고위 문벌귀족들의 극에 달한 사치와 대비되는 자연재해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태양의 흑점 활동
부터가 어느 왕조보다도 자주 관측되었으며, 특히 271년부터 5년간은 해마다 일식이 일어났으며
농업도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았으니 계절풍이 위축되면서 화북에는 가뭄이, 강남에는 홍수가 일어
나고 초여름에 서리가 내려 싹을 틔운 보리가 죽어버렸고 한여름에 우박이 쏟아져 곡식들을 망가립니다.
황제는 위나라가 고립되었던 폐단을 경계하였으므로 종친을 크게 책봉하고 직임을 주었다. 또한 여러
왕들에게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봉국 안에서 장리(長吏)를 선발하도록 명령하였다. 위장군 제왕
유 혼자만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 위에서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
위나라는 후한의 혼란을 교훈삼아 황족, 외척, 환관을 배제하고 측근들을 위주로 국정을 운영했지만
그 때문에 측근들이 언제나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이 유지되도록 안배하지 않으면 아차하는 순간
황권이 그대로 삼켜질 수 있었고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은 능력이 뛰어났던 조씨와 하후씨
일가의 인물들이 대부분 사망하고 사마의 일파가 전면에 나서는 순간 그대로 실현 되었습니다.
위나라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위해 사마염은 황족에게 관속을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을 주었고,
277년부터는 최대 5,000명에 달하는 군대도 공식적으로 허용해 주었는데 280년에 삼국을 통일
하고 나서는 지방의 행정권(자사)과 군정권(도독)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분리된 군정권까지 황족
에게 나눠주었으니 황통을 지닌 사람이 인사권과 군사권까지 가지고 지방에 할거한 형국이었습니다.
다만 종실왕의 세력기반은 왕위가 아닌 장군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세력의 배치는 왕위의
배치와는 다르니 성도왕 사마영의 세력기반은 봉토인 성도가 아닌 평북장군·진북대장군·정북대장군
등으로서 주둔한 화북의 업인데 사마염 생전에는 중앙의 거대문벌이 일방적으로 지방을 압도했고
양호, 두예, 장화, 호분과 같은 측근들이 지방의 군정권을 분담한지라 황족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사마염이 죽고 뒤이어 즉위한 것이 백치 황제 사마충이었고, 이를 틈타 실권을 장악한 외척 세력이
황족을 중앙에서 쫓아내는 정치적 도구로 군정권을 사용하면서 지방의 군정권은 오롯이
황족들이 나눠먹게 되었으니 여기에 불만과 위기감에 싸인 중소문벌들이 출세하기 위한 방법
으로 독자적 인사권을 지닌 황족들에게 붙으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양상이 나타납니다.
사마충 같은 백치가 태자를 거쳐 황제에 등극한 것은 가충을 필두로 하는 귀족집단의 힘과 사마씨 정권
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일화인데 실제로 팔왕의 난을 일으킨 원인인 가남풍이 태자비가 된 것 부터가
가충의 도움 때문인데 사마염도 살아 생전에 걱정했지만 사마충의 아들 사마휼이 총명하니 믿기로
하고 작은 아버지 사마량, 장인 양준(楊駿), 개국 공신 위관(衛瓘) 에게 사마충의 보좌를 부탁합니다.
하지만 양준은 황족으로 군권을 잡은 사마량을 경계해서 쓰러진 사마염이 애타게 찾는
데도 사마량을 예주로 발령내서 쫓아내다시피 보내버렸고, 남은 위관은 알아서
숙이니 외척인 양준 일파가 조정의 권세를 틀어쥐고 전횡을 일삼았는데, 이때
이들이 쥔 권력을 매의 눈으로 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황후 가남풍이었습니다.
우선 가남풍은 양준을 꼬드겨서 형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와 양주의 군권을
잡고있던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을 불러들인뒤, 순식간에 양준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사마위
와 사마윤으로 양준과 양씨 일족들을 죽여버리고는 남은 두 고명 대신인 사마량과 위관이 정권을
넘겨받자 사마위를 꼬드겨서 이들마저 제거한 뒤 그 죄를 물어서 사마위 까지 토사구팽해 버립니다.
이렇게 조정의 권세를 한 손에 틀어쥔 가남풍은 그래도 장화와 같은 인재를 중용하면서 십여년 동안
이나 정사를 그럭저럭 꾸려나갔으니 오히려 평화로운 시대가 유지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는데, 전란의 시대가 끝났으니 삼국 시대의 인구는 모두 777만명 정도인데, 서진 대에 이르러
인구가 1600만 명으로 불어나는 것은 난세 동안 호적에 안 잡히던 백성들이 호적에 오른 것입니다.
당시 중국은 소빙기에 들어선 기후인지라 황하와 장강이 말라붙을 만큼 극심한 가뭄과 매서운
한파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런 마당에 왕융 같은 귀족들은 제 잇속부터 챙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고, 실권자 황후는 밤마다 애들과 놀아나고
황제라는 작자는 '곡식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 라는 소리를 합니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 속에서 팔왕의 난이라는 사건이 터지니 사마충의 태자 사마휼은 가남풍이
아니라 후궁 사구(謝玖) 소생이었는데, 가남풍은 의붓 아들이 황제를 하면 자신의 정권이
무너질 것을 염려해 사마휼의 목숨을 빼앗아 버렸으니 사마휼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폐하께선 이제 물러나십시오. 안 가시겠다면 제가 보내드리지요.' 라는 글을 베껴
쓰게 했으니 사마휼이 유폐되자 독살하려했는데 약을 거부하자 약방망이로 때려 죽입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301년, 마침 때를 노리던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은 이때다 하고 사촌인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과 함께 낙양으로 진격해 들어가 가남풍 일파를 모두 죽인후
정권을 차지했지만 사실 사마륜도 부하 손수(孫秀) 의 꼭두각시였을 뿐이었다니 또 모순입니다.
태자는 이미 죽었고 분수를 모르는 사마륜은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밀어낸뒤 자신이 황제로 올랐다가
사마경을 필두로 한 나머지 황족들에게 몰려서 3개월 만에 죽는데, 그 뒤로는 황족들 가운데
한 왕이 일어서면 나머지가 족치는 무한루프 상태로 돌입해서 치고 박고 싸우다가 사마충
사후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사마치(司馬熾)를 황제로 옹립하면서 팔왕의 난은 끝납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내전을 틈타 자립한 이민족들이 이미 진나라 내부에 일대 세력을 이룬 상태였으니 특히
조조가 병주에 정착시켰던 흉노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는데, 이들은 팔왕의 난 막바지에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과 결탁해 선비족을 끌어들인 사마월과 맞서다 사마영이 사마월에게 패사하자 흉노족을
끌어모아 한(漢)나라를 세우고 아들 유총(劉聰)이 남하하면서 석륵, 왕미, 유요 등이 화북 각지를 휩씁니다.
더욱이 팔왕의 난을 거치면서 서진의 지방 통치는 와해했기에 더욱 심각해졌으니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지방 호족들은 군사와 행정 직책을 겸임함으로써 독자적인 군벌 세력화 되어있었는데 중국
을 통일한 사마염은 다시 군사와 행정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밀어붙여서 지방의 군대를 해산시켰고,
대신 왕으로 분봉한 황족들에게 군사권을 쥐어주어서 보완시키려했지만 자기들끼리 싸워 공중분해 했습니다.
때문에 실권자 동해왕 사마월은 중요 거점에 친족들을 보내 거점을 장악하는등 고군분투했지만
애당초 이러한 자의적인 인사는 황권에의 도전으로 해석할 소지가 컸으니 실제로 자신을
향한 참소가 빗발치자 사마월은 그만 분사했으며 뒤이어 실권을 잡은 왕연(王衍)이 317년에
사마월의 장례를 치른답시고 황제를 버리고 피난가다가 석륵(石勒)에게 잡혀서 싹 몰살당합니다.
왕연과 동행하던 낙양 주둔군이 다수 죽었기에 석륵은 이 기회를 틈타 낙양까지 쳐서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했는데 선발대인 호연안(呼延安)이 배를 모두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황제 사마치는 달아나지도 못하고
포로로 잡혔으니 영가의 난인데 포로가 된 사마치는 2년뒤에 유총에게 불려와서 노예 복장을 하고 술을
따르다가 모습을 본 옛 진나라의 신하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위험 인물로 간주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습니다.
이에 관중에서 장안을 수복하고 태자로 추대받아 진나라 임시 정부를 이끌던 사마업(業)이 사마치의
부고를 접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지만 이 또한 각지에 흩어진 군벌들의 지원을 못받아 2년만에
장안이 포위되자 농성 끝에 항복했고, 역시 이듬해에 유총에게 불려와 술을 따르다가 그 모습을
본 옛 신하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또 살해당하니 화북의 진나라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사라집니다.
다만 강남에서 호족들을 규합하던 사마예가 사마업이 죽은 이듬해인 317년에 그의
부고를 듣고 황제로 즉위하여 진나라의 명맥을 이어나가는데 이 나라를 동진
이라고 부르며, 이후 백여년 동안 이민족 왕조가 화북에서 서로 격렬하게
다투면서 혼란이 극에 달햇지만 강남에서는 한족 왕조인 동진이 명맥을 이어나갑니다.
역사적 의의를 떠나 국가 자체로서는 전형적인 막장 왕조라고 볼 수 있으니 과장된 헛소문
이었던 백제의 삼천궁녀와 프랑스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같은 에피소드
가 진나라에서는 현실 정사에 기록된 채로 더 심각하게 등장했는데 게다가 내부 분열,
수뇌부의 부패와 체제의 붕괴, 자연적 재해, 전쟁과 외침이 모두 복합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화북에 있어서 형성된 귀족지배의 체제는 호족들이 무인 영주로서 지배계급을 만들어
나가는 방향으로 돌진하지 못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향론위에 서서 지식과 교양
을 갖춘 문인적인 "사(士)"로서의 지배층을 양성하게 되었고, 그 "사(士)" 계층
위에 귀족 사교계가 형성되어 가지만... 청담(淸談) 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