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의 꿈은 마을 이장님
성철(性澈) 이주성(李柱成)
나는 충남 공주의 어느 두메산골에서 6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에는 한 가정에 다섯 남매 이상이 흔했고, 일곱이나 아홉 남매, 열 남매가 넘는 집도 적지 않았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한 집에서 둘셋씩 함께 학교를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절이었다.
중학생들은 까까머리 검정 교복에 검정 모자를 써야 했고, 겨울철 교복은 군인들 제복과 비슷했다. 목 부분에는 연결 고리가 있어 목둘레를 고정해 단정히 하여야 했다. 이 목 부분이 풀어진다든지 풀고 다니면 불량 학생 취급하며 등굣길 아침마다 교문을 지키는 선배 선도부나 선생님들에게 주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선배들에게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얼차려를 당하곤 했다. 어지간한 이들의 행동은 묵시적으로 선도 담당 선생님에게 인정받는 시절이었다.
중학교 학생들은 교복에 검정 운동화를 신고 다니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초등학교 학생들은 부잣집 자녀들의 꿈일 뿐 도시에 나가 있는 삼촌이나 일가친척의 운동화 선물이 오면 횡재하던 시절이며 거의 모두가 검정 고무신이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라며 할머니는 고무신 살 때 발 크기보다 큰 것으로 사야 한다며 손수 잘 말린 고추와 콩 등을 머리에 이고 면 소재지 오일장에 파신 후 검정 고무신을 사 오시곤 했다. 할머니는 반드시 검정 고무신 코나 고무신 안쪽 바닥에 칼로 지워지지 않게 할머니와 나만이 아는 표시를 했으니 그 이유는 새 신발을 다른 아이들이 훔쳐 가거나 바꿔 신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땐 창피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기막힌 할머니의 지혜였다.
고무신을 신고 다니다 보면 여름철이나 발에 땀이 많이 나면 내리막길을 걸을 때 고무신 안에서 발이 미끄러지곤 했었다.
등굣길과 하굣길에는 집에서부터 마을 앞산을 넘어 걷고 타 동네를 지나 4~5km 떨어진 면 소재지에 위치한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걸어가야 하고 등굣길은 중학교 형들과 함께 가는 즐거움이 있었으나 하굣길은 초등학교는 수업을 일찍 마치므로 혼자 또는 몇몇이 짝을 이루어 집에 와야만 했다.
하굣길에 운이 나쁜 날에는 타 동네 아이들이 시비를 걸어와 구슬이나 딱지를 빼앗기곤 했다. 하굣길은 외길이라 반드시 타 동네를 지나야 했다. 그러다 보면 그 동네 선배들이나 다른 반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자기네 동네라는 이유로 텃세를 부리며 시비를 걸곤 했다.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구슬이나 딱지를 빼앗기고 집에 오는 날이면 엄청나게 분해하였지만 때론 맞대결 싸움하여 이기고 오는 통쾌한 날도 있었다.
그래도 중학교 고학년 형을 둔 친구들은 타 동네 지나칠 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면제되기도 하였다. 중학교 고학년 형들이 있는 초등학생 동생을 괴롭히면 후에
자기들의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한 마을에서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중학교 고학년까지 골고루 있었기에 형이나 형제가 많은 초등학생은 때론 형들의 후광이 있어 편안했고, 형들이 많거나 아들들이 많은 집은 아이들이나 이웃에서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또한 그때는 한 반에 학생들이 60여 명 인지라 반에서 10등 안에 들면 그래도 꽤 공부를 잘하는 편에 속했다.
초등학교 학생부터 중학생까지 각자의 집에서 일시에 집에서 걸어 나와 좁은 논두렁길과 마을, 앞길을 통해 산 아래 모퉁이에 자연스레 모여 산을 넘어 면(面) 소재지까지 매일 걸어 등교해야 하는 산골 마을이었으며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도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한 1978년 무렵이었다. 내가 공주읍내(公州邑內)에서 하숙하던 때라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마을 학생들이 다 같이 모여 함께 학교를 가는데 맨 앞에 걸어가던 덩치 큰 중학교 형이 외치는 것이었다.
형들끼리 말을 하였다.
야! 너 육성회비 가져왔냐?
오늘까지 육성회비를 내지 않으면 담임 선생님에게 혼난다고 하며 울상을 지어 보인다. 마침, 옆에 다른 형이 나도 어제 장날인데 우리엄니가 고추 팔아서 육성회비 내기로 선생님하고 약속했는데, 어제 비가 내려 장이 안 서, 고추를 팔지 못해 육성회비 못 가져왔다 하니 옆에 또 다른 형도 말을 건넨다. 울 엄마도 오늘 돈이 없어 육성회비 못 주니 그냥 학교에 가라 했다며 큰 한숨을 내뱉는다.
모두가 큰 걱정이 있는 형들이며 그중 한 형이 오늘 학교에 가지 말자고 제안을 하니 서로 눈을 마주치곤 이내 좋다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형제들과 서로 이웃 학생들인데 형들만 학교에 안 가면 부모님들에게 들통이 나니 동생들과 이웃 애들한테 입막음해야 했다. 묘수는 모두 학교에 가지 않으면 모두 비밀을 지켜 줄 거로 생각한 것이다. 해서 우리는 역사에 남을 동네 학생들 전체가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 되었다.
그 시절에는 나라 재정이 빈약해 지원이 없어 교육을 육성하기 위해 학부모들이 납부하는 육성회비라는 제도가 있어 학부모들이 납부한 돈으로 선생님들 수당과 학교 운영을 지원하던 시절이었다. 육성회비를 안 내면 부모님 모시고 오라고 하든지 심하면 학교에 다니지 못했으며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초등학교 저학년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학교를 마치고 하굣길 시간까지 시간을 보내야 했고 무엇을 하여야 하느냐고 고민하면서 산속으로 모두 들어갔으나 점심때쯤이 되니 배고픔이 밀려온 것이다.
마침, 참외밭 원두막이 보였다.
모두가 군침을 삼키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돌진해 참외와 수박을 따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밭을 짓밟게 되었다.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모두 참외와 수박을 따서 나오는데, 우리들의 길목을 어른들 몇몇이 지키고 있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초등학교 어린 동생들은 안전한 숲속에 있으라 하고 형들 몇몇이 특공대를 구성하여 서리를 해야 했는데 말이다.
온 동네 20여 명 학생들이 소재지 어른들이 말하던 무서운 순사들이 있는 지서 지금의 파출소로 모두 끌려가게 되었고 우리가 서리한 밭은 간식으로 먹으려고 경작한 것이 아니고 생계를 위해 힘들게 경작한 농가였으며 재수 없게도 어젯밤 서리를 당해 누구 짓인지 화가 나 잔뜩 난 채 범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모르고 우리가 또다시 서리를 한 것이었다.
우리가 잡혀 들어간 곳은 평소 어른들은 어린아이가 울면 저기 순사 아저씨 온다!
아이고, 무서워라 하면서 울음 안 그치면 잡아간다고 하며 우는 아이를 달래곤 하여 어릴 적 순사는 호랑이와 곶감의 동화 이야기 같았다. 그곳이 바로 어린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었던 지서, 지금의 파출소였다.
한번은 우리 반에 전학해 온 학생이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소개하면서 아버지가 지서에 근무하는 순사 아저씨, 그러니까 경찰 지서장님이시니 이 아이를 때리거나 못살게 괴롭히면 지서 순사 아저씨들이 나와 잡아간다고 말씀하시어, 그 아이가 못마땅해도 반 친구들이 참아주고 이해해 준 일이 있곤 했다. 나는 지서 순사 아저씨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가장 높은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어린아이였다.
한동네 학생들 20여 명이 지서에 잡혀 들어갔으니, 부모님들도 적지 않게 놀란 상태였고 연락받고 온 부모들이 찾아와 잘못 했다고 순사들에게 빌었고 어떤 아이어머니는 울기까지 하였으나 지서 순사 아저씨들은 우리들보고 너희들 모두 콩밥 먹어야 하고 징역을 보내야겠다고 겁을 주며 훈계하시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우리 동네 이장님이 나타나시어 순사 아저씨들 가운데 가장 높은 분인, 우리 반 친구 아버지이신 지서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무어라 말을 주고받더니 그 무서운 지서에서 우리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 세상에서 순사 아저씨가 가장 무섭고 높은 분인 줄 알았는데, 이장님이 지서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시자 우리 모두가 풀려났다. 그 순간 어린 내 눈에는 이장님이 멋지고 순사 아저씨보다 더 높고 더 큰 분처럼 보였다. 나는 그때부터 이장님이 지서 순사 경찰 아저씨보다 높으니, 나의 어릴 적 꿈은 대통령에서 마을 이장님으로 바뀌었다.
어린 시절에는 순사 아저씨보다 더 높은 분이 이장님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아이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그러나 그날 나와 친구들을 품어 주었던 이장님의 따뜻한 모습은 평생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공직생활 30여 년 동안 나는 언제나 이장님과 통장님들을 가장 가까운 행정의 동반자로 여기며 깊이 존경했다. 그분들은 언제나 주민과 행정을 이어주는 든든한 다리였고, 나는 늘 깊은 존경의 마음을 품고 일했다. 정년퇴직한 지금도 그 존경과 감사의 마음은 변함없이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어린 시절에는 이장님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분인 줄 알았지만, 이제는 주민을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세상에서 진정 가장 높고 귀한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