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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의 냇가에 자리잡은 호안림이며 신라진성여왕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에 조성한 숲이라고 전한다. 당시에는 지금의 위천수가 함양읍 중앙을 흐르고 있어 홍수의 피해가 심하였다고 한다. 최치원선생이 뚝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강변에 둑을 쌓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까지 이어오는 숲을 조성하였다. 당시에는 이숲을 대관림이라고 이름지어 잘 보호하였으므로 홍수의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후 중간부분이 파괴되어 지금같이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으며, 하림구간은 취락의 형성으로 훼손되어 몇 그루의 나무가 서 있어 그 흔적만 남아있고 옛날 그대로의 숲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상림만이 남아있다.
상림의 아름다움은 봄이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등 사철을 통하여 그 절경을 맛 볼 수 있다. 특히 여름철 상림은 숲속 나무 그늘에 돗자리 펴고 누우면, 도심속 신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상림의 숲속에 조성되어 있는 오솔길은 연인들과 가족들의 대화와 사랑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상림에는 120여종의 나무가 6만여평 1.6km의 둑을 따라 조성되어 있어 어린이들의 자연학습원으로도 좋은 곳이다
전설
최치원은 신라 헌강왕 원년(857년)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설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문창이라는 곳의 영으로 부임하면서 치원을 잉태한 지 넉달만에 금돼지로부터 변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육개월만에 치원을 낳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차마 이 아기를 기를 수가 없어서 치원을 내다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아이를 보자기에 싸서 무인도에다 갖다 버렸다.
그런데 밤만 되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서 젖을 먹여 키웠고 낮이 되면 오색 무지개가 찬연한 하늘에서 큰 학 한 마리가 날아와서 치원을 품고 있었으므로 짐승들의 침입을 막을 수가 있어 아무 탈없이 자라나게 되었다.
치원이 무인도에서 책을 읽을 때 소리가 어찌나 낭랑했던지 중국의 황제 귀에까지 들려서 황제는 신라국에 학사를 보내어 시로써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동이라는 칭호를 받은 최치원은 12세 되는 해 당나라에 유학을 하여 명성을 떨쳤고 6년만인 18세 되던 해에는 중국에서 당당하게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중국에서 관리로 일하다가 황소가 난을 일으켰을 때는 황소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관군 총지휘관 고변의 비서관이 되어 종사관의 자격으로 황소격문을 써서 유명하다. 스스로 황제라 칭했던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충격적이고도 감동적이라서 놀란 나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의자에 앉은 채로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는 얘기가 전한다. 결국 황소가 반란의 명분을 찾지 못하고 궁지에 몰리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른 격문이다.
그는 28세 되던 해(885년) 당나라 헌종황제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하고 말았다. 그는 기울어져가는 신라를 어찌할 수 없음을 느끼고 시골로 내려가 조용히 조그마한 고을에서 여생을 마치기로 작정하고 지원하여 전북 태인과 정읍, 충남의 서산을 거쳐 천령군(지금의 함양군)태수로 부임하였다.
그의 치적 중에서 상림은 함양을 대표하여 내세울 수 있는 곳이다. 풍치가 아름답고 지방민의 휴식처로 알맞은 곳이며 많은 수종이 있다. 치원 자신이 손수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활엽수를 캐어다가 풍수해를 막기 위한 방제화 방풍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상림공원의 신도비를 읽어 보면 신라말 함양의 태수로서 그 공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우거진 숲속이나 시냇가에는 뱀이나 개구리, 개미같은 해충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우리가 숲을 좋아하지만 숲을 찾을 때에는 이러한 해충을 조심해야 함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특히 숲에서 잠깐만 앉았어도 개미떼가 어디서 나왔는지 금방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상림 숲에는 뱀이나 개미같은 해충이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림은 숲속의 어디를 가나 마음놓고 앉아서 쉴 수가 있다. 뱀에게 물릴 염려나 벌레들 때문에 귀찮은 일은 없다. 상림의 땅이나 숲을 형성한 나무들이 다른 곳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같은 지질일 것이고 같은 수목일 것이다. 그런데도 상림만이 이러한 해충이 없는 까닭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숲을 형성한 것은 신라 진성여왕 때이고 그 목적은 수해가 자주나고 지방민의 괴로움이 심해 치수의 일환으로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은 것으로 되어 있다. 농경 사회에 서 농경지의 안전과 농민을 위하고 백성들이 편안한 생활을 도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지만 숲이 우거져 휴양지, 휴식처로도 적합하여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최치원은 홀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어찌나 효성이 지극한지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고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아 나갔으며 돌아와서는 반드시 알려 근심하시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어머님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여기고 어머님의 근심을 자기의 근심으로 삼아 어머니의 뜻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하늘이 낸 효자로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님에 대한 불편은 조금도 없게 해 드릴려고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님은 혼자서 바람을 쏘일겸 상림 숲에 산책을 나가서 풀숲에 않아 놀다가 뱀을 보고 깜작 놀랐다. 집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숲에서 뱀을 보고 놀란 이야기를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치원은 어머니에게 송구함을 금치 못하여 상림 숲으로 달려가서 숲을 향해 이후로는 상림 숲에는 뱀이나 개미같은 모든 해충은 일체 없어져라. 그리고 다시는 이숲에 들지 말라. 고 주문을 외었다고 한다. 그 후로는 최치원의 지극한 효성으로 인한 주문 때문에 모든 해충이 사라지고 모여들지를 못한다고 한다. 치원의 지극한효성은 하늘도 감동하고 땅도 감동하고 심지어 하찮은 미물도 감동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으니 그를 하늘이 낸 효자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외에도 최치원이 상림숲의 조림을 마치고 숲속 어디엔가 나무 가지에 조림하던 금호미를 걸어두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그리고 숲을 만들고 떠나면서 상림 숲에 뱀이나 개미가 나타나고 숲속에 설죽이 침범하면 내가 죽을 줄 알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 뱀은 아직 나타나지 않지만 가끔 개미가 보이고 숲속에는 설죽이 많이 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는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라고들 한다.
그 외에도 함양의 학사루를 최치원이 지었다는 설도 있고 그 이전부터 있었는데 최치원이 자주 등루하여 시부를 읊었다하여 학사루라 명명했다고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