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육사에 입학하던 그해에는 12·12 군사쿠데타로 정부 권력의 실세가 이미 바뀌어 있었고
그에 따라 군의 주요 지휘관도 교체되어 가고 있었다.
소년이 생도 1학년이었던 1980년 7월에 학교장 이취임식이 있었다.
새로 부임한 교장님은 육사 11기 김복동 장군이었다. 그는 군사쿠데타에 반대한 대가로 군 지휘관 인사에서
실병 지휘권이 없는 육사 교장으로 보직되어 군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부임한 이후 처음 생도들에게 모습을 보인 것은
그해 9월에 학교 연병장에서 삼사체전 응원 연습을 하고 있던 1~2학년 생도들 앞에서였다.
그날 학교 지휘부 회식이 있어 술을 한잔했던 그는 야간까지 응원 연습을 하는 생도들이 생각나 찾아왔던 것이다.
생도들 앞에 도착한 그는 응원단장 단상에 올라서서 수고한다며 자신들의 삼사체전 추억을 말해주었다.
그러다 그의 말이 길어지자 동기생인 교수부장(준장)이 “교장님, 그만 가시죠.” 하니까
“야! 너 동기생이지만 내가 교장(중장)인데 나한테 명령하는 거냐?” 하니 교수부장이 웃으며
“아닙니다. 계속하세요.”라고 했던 것이다.
그때 소년은 권위적인 장군의 모습이 아닌 아버지 같고 스승 같은 그들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해 삼사체전에서 우승을 못 하자 그는 생도들에게 패배의 쓴맛을 잊지 말라고
한 달 동안 휴가 및 외출과 교내 공중전화 사용까지 금지하는 근신을 하게 했다.
생도들에게 우승에 대한 의지를 고취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듬해 우승을 한 생도들은 승자의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다.
근신하는 한 달 동안에 그는 전 생도들에게 학교장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내게 하고는
1,000명이 넘는 생도들의 건의 내용을 다 읽어본 후 본인이 직접 생도들에게 설명해주었다.
생도들이 적어낸 내용 중에 조치가 필요한 사항은 담당자에게 지시하였고,
잘 모르고 건의한 내용에 대해서는 왜 그리 지시되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고학년인 3~4학년 생도들은 그를 무척 따르게 되었다.
생도들은 학교장이나 생도대장의 승인 없이는 술을 마실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해·공군사관학교 3학년 생도들이 육사에 견학차 방문했을 때 학교장이 주관하는 격려 만찬에서 야전부대 회식 때처럼
삼겹살에 소주를 먹도록 하여 참가했던 육·해·공군사관학교 3학년 생도들 대부분이 많이 취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1학년이었던 소년은 이해하지 못했는데 임관 후 야전부대에서 그렇게 회식하는 것을 보고 그의 뜻을 알게 되었다.
생도들은 야전부대와 똑같이 아침에 일어나면 일조점호 행사를 하는데 이때 애국가를 부른다.
하루는 그가 생도들의 점호행사 현장을 둘러보다가 애국가 제창 시 음이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생도가 애국가 하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냐며 생도들의 노래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중대별로 여학생들과 함께하는 합창 경연대회를 하라고 지시했다.
생도들이 노래 연습을 열심히 하도록 독려하고자 여학생들과 함께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한 달간 중대별로 연습을 한 후 경연대회를 열어 우수한 중대를 선발하여 포상했다.
소년의 중대는 우수상을 받지 못했지만, 소년은 그때 매주 여학생들과함께 합창 연습을 했던 때가 그저 좋았다.
1학년 때 딱딱한 분위기의 사관학교에서 여학생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낭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소년의 중대에서 선정해 연습했던 곡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이 아련히 생각난다.
이후 소년은 수업 시간에 한 교수님으로부터 교장님의 생도교육 철학을 듣고서 감명받게 되었다.
그 교수는 자신의 생도 시절 교장님이 생도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장차 리더가 될 생도들이 자율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규정을 최대한 완화했다는 것이다.
당시 생도들은 평일에 외출이 안 되었고 저녁 식사 후 1시간 반 동안 학교 주변에 있는 공원까지만 산책할 수 있었다.
그랬던 것을 생도대장으로 부임한 후에 장소는 상관없이 외출시간만 정해주어 생도 스스로 알아서 복귀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늦게 복귀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자 많은 간부가 이전처럼 외출 장소를 제한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 그는 “복귀시간을 지키지 못한 생도들만 규정에 의해 처벌하면 되는데 왜 리더가 될 생도들이 자율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자꾸 통제만 하려 하느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소년은 그가 먼 훗날 군의 고위급 지휘관이 될 생도들의 모습을 그리며 지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난 1982년 1월에 그는 군을 떠나야 했다.
군사쿠데타를 반대했던 그에게 군대 내에서 더 이상의 보직은 없었던 것이다.
이임식 및 전역식을 하던 날 강당에 모인 생도들은 단상에서 그가 이임사를 읽어 내려갈 때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흐느껴 울었다.
그때 그가 마지막으로 생도들에게 들려준 이임사 구절을 소년은 지금도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에 “나는 모교에서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군 생활을 마치게 된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남은 여한을
교가에 담겠습니다.” 하며 교가를 낭독했던 것이다.
그렇게 소년은 정치군인이 되기를 거절하여 학교장으로 마지막 군 생활을 하면서도
생도들의 먼 훗날 모습을 그리며 자율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지도했던 그를 진정한 교장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다.
첫댓글
대단하신 분에 대한 각별한 추억이군요.
외부에서 제3자적 시각에서 보아도 멋진 군인이었습니다.
좋은추억이 있었군요.오늘도 행복한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