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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님 무문관 제창>
제13칙 덕산탁발 第十三則 德山托鉢
德山一日, 托鉢下堂. 見雪峰問, “者老漢, 鐘未鳴鼓未響, 托鉢向甚處去?”, 山便回方丈. 峰擧似巖頭. 頭云, “大小德山, 未會末後句.” 山聞, 令侍者喚巖頭來. 問曰, “汝不肯老僧那?” 巖頭密啓其意. 山乃休去. 明日陞座. 果與尋常不同. 巖頭至僧堂前, 拊掌大笑云, “且喜得老漢會末後句. 他後天下人, 不奈伊何.”
無門曰, 若是末後句, 巖頭德山俱未夢見在. 撿點將來, 好似一棚傀儡.
頌曰, 識得最初句, 便會末後句, 末後與最初, 不是者一句.
I. 본칙
하루는 덕산 화상이 발우를 들고 법당으로 내려가고 있었다.1 설봉이 이를 보고, “노스님, 아직 종도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는 들고 어디 가십니까?” 하니, 덕산이 말없이 방장方丈2으로 되돌아갔다. 설봉이 이 일을 암두에게 이야기하니, 암두가, “덕산 같은 분이 아직 ‘말후구末後句’를 모르시네.”라고 말했다. 덕산이 이 말을 전해 듣고 시자를 시켜 암두를 불러 물었다. “자네가 이 노승을 인정하지 않는가?” 그러자 암두가 덕산에게 은밀히 자신의 뜻을 전하니 덕산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음날 덕산이 법좌에 올랐는데, 과연 평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이에 암두가 승당 앞에 이르러 박장대소拍掌大笑하며 말했다. “기뻐할 일이로고. 우리 노장이 드디어 ‘말후구’를 아셨도다!, 이제 세상 누구도 저 분을 어쩌지 못하리라!”
무문 화상 평하기를, 만약 이를 ‘말후의 구’라고 한다면, 암두와 덕산 모두 꿈에도 보지 못한 것이다. 점검해 보니, 모두가 흡사 단막극의 꼭두각시 인형 같구나!
게송으로 가로되, 최초의 구를 알면, 곧 말후의 구도 알지만, 말후나 최초의 구, 모두 그 한 구는 아니다.
II. 배경
이 일화는『전등록傳燈錄』16권과『오등회원五燈會元』7권「암두巖頭」장에도 전한다. 이들에는『무문관無門關』에는 생략된 부분들이 보이는데, ‘설봉3이 덕산4 회상에서 반두飯頭5라는 식사 담당이었을 때, 어느 하루 공양이 늦어졌다(雪峰在德山作飯頭. 一日飯遲)’는 구절과 ‘설봉이 행주를 말리다가(峰曬飯巾次)’ 덕산을 보았다는 구, 그리고 끝에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3년뿐이로다. 과연 덕산은 3년 후에 돌아가셨다(雖然, 也秖得三年活 山果三年後示滅)’는 구절이 더 있어 자세하다.6
생략된 부분을 보면, 덕산이 왜 종도 치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나섰는지, 그때 설봉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후 3년 후에 덕산이 입적하였다는 사실 등을 추가로 알 수 있다. 암두7가 덕산의 죽음을 예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선기가 매우 뛰어났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덕산이 3년 후에 입적하였다면 이 때 덕산은 81세가 되고, 설봉은 41세, 암두는 35세가 되는데, 설봉은 암두보다 나이는 위였지만 암두의 사제師弟였다. 설봉은 언제나 공양주의 소임을 맡아 대중을 봉양하기를 좋아하던 수행자였다. 본칙은 그런 우직한 설봉에게 궁극적인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암두의 활약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설봉의 깨달음 설봉은 법을 구하러 처음 염관제안(鹽官齊安, ? ∼842) 선사에게 갔었고, 뒤에 투자대동(投子大同, 819∼914) 선사에게 세 번,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에게는 아홉 번을 찾아간다.8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얻은 바는 신통치 못하였는데,9 설봉이 덕산에게 가게 된 내력과 깨달은 이야기가『설봉록雪峰錄』에 전한다.
설봉(雪峰義存) 스님이 동산(東山良介) 스님의 회하에서 공양주로 있을 때였다. 하루는 쌀을 일고 있는데 동산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모래를 일어서 쌀을 가려내느냐, 쌀을 일어서 모래를 가려내느냐?” “모래와 쌀을 한꺼번에 다 가려버립니다.” “그렇게 하면 대중은 무엇을 먹으라고….” 설봉스님은 마침내 쌀 쟁반을 엎어버렸다. “인연을 보니 그대는 덕산德山스님이 맞겠다.” (중략) 설봉스님이 덕산스님을 찾아뵙고 물었다. “예로부터 내려온 종문宗門에 저도 자격이 있습니까?” 덕산스님이 몽둥이로 한 대 때리면서 “뭐라고?” 하시자, 설봉스님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스님이 다시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자 덕산스님이 말하였다. “우리 종문宗門에는 말이란 것이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줄 그 어떤 법도 없다.” 설봉스님은 이 말에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10
인연이 아니었던지 동산은 설봉을 덕산에게 보냈고, 설봉은 덕산에게 한 방망이 맞고 나서야 느낀 바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투철하지 못해 가슴에 의심이 남아 있었는데, 덕산 회상에서 5년을 보내고, 암두와 함께 떠난 행각 길에 비로소 크게 깨치게 된다.
설봉이 암두巖頭와 행각行脚하다가 풍주灃州 오산진鼇山鎭에 이르러 눈 속에 갇혀 버렸다. 암두는 매일 잠만 잤고, 설봉은 늘 좌선坐禪에 몰두하였다. 하루는 설봉이 암두를 불렀다. “사형! 사형! 일어나 보시오.” 암두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금생에는 다 틀린 모양입니다! 전에 문수(欽山文邃)11란 작자와 행각할 때는 가는 곳마다 그 놈 때문에 귀찮은 일만 생기더니, 이제 사형師兄은 그저 잠만 자는군요.” 암두가 악! 하고 할을 하고는 말하였다. “그저 푹 자시오. 매일 침상 위에 앉아 있는 꼴이 마치 시골구석에 있는 사당의 토지신土地神 같으니, 뒷날 선량한 사람들이나 홀리겠구려!” 설봉은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아직 여기가 편안하질 않으니, 감히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대가 뒷날 외로운 봉우리 꼭대기에 암자를 짓고 큰 가르침을 드날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저는 진실로 아직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대가 만약 진실로 그렇다면, 그대의 견처見處를 하나하나 말해 보시오. 옳으면 증명해 줄 것이고, 옳지 않으면 도려내 버리겠소.” 이에 설봉이 말했다. “제가 처음 염관鹽官12에게 갔을 때, 염관이 상당하여 색과 공의 뜻을 말하는 것을 듣고 들어갈 곳을 얻었습니다.”13 암두가 말했다. “이것은 앞으로 30년이 지나도록 절대로 언급하지 마시오.” “또 동산洞山이 물을 건너다가 읊은 게송인 ‘결코 남에게서 찾지 말지니, 나와는 아득히 멀 것이다. 그는 지금 바로 나이지만, 나는 지금 그가 아니라네.’14 라는 글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만약 이와 같다면, 자신조차도 아직 철저히 구제하지 못한 것입니다.” 설봉이 다시 말했다. “뒤에 덕산德山에게 묻기를 ‘옛 부터의 종승宗乘의 일이 저에게도 돌아올 몫이 있습니까?’라고 하니, 덕산은 한 방망이 때리고 말하기를 ‘무슨 말을 하느냐?’라고 하였는데, 저는 그 때 마치 통 밑바닥이 쑥 빠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자 암두가 악! 하고 할을 하고는 말하였다. “그대는 듣지 못했소? ‘문門으로 들어오는 것은 집안의 보물이 아니다!’라는 말을.” 설봉이 말했다. “그럼 앞으로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뒷날 그대가 큰 가르침을 널리 펴려 한다면, 그 하나하나가 그대의 가슴에서 절절이 흘러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나와 함께 하늘과 온 누리를 뒤덮을 수 있을 것이오.” 설봉이 이 말 끝에 크게 깨치고는 곧 절을 하고 일어나 연거푸 외쳤다. “사형! 오늘에야 비로소 오산鼇山에서 도를 이루었습니다.”15
그 유명한 설봉의 ‘오산성도鰲山成道’다. 설봉은 ‘모든 진리는 자신의 흉금胸襟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한다.’는 암두의 말에 크게 깨쳤다고 하는데, 물론 그 한 말에 깨쳤다기보다는 도반인 암두의 도움이 컸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고 하겠다. 어쨌든 설봉은 덕산을 스승으로 모셨지만 깨달음의 기연은 암두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엄밀히 따지면 암두가 그의 스승이 되는 셈이다.
그때의 깨달음이 얼마나 컸던지, 후에 설봉에게 한 승僧이 덕산 선사 밑에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나는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네(我當時, 空手去空手廻.).” 설봉은 그때 스승에게서 직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던 것 같다. 이는 처음 설봉에게 ‘우리 종문에는 말이란 것이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줄 그 어떤 법도 없다.’고 한 덕산의 말의 진의眞意인 것이다. 무엇을 배우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직접적인 체험이 중요한 것이다. 남에게 배운 것은 진실한 지혜가 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아무리 투철한 깨달음이라 해도 외부 것에 의존해 있는 한 진정한 깨달음(末後句)은 아니었던 것이니, 깨달음이란 다른 천체의 빛을 받아 빛나는 달이 아니라 자체에서 빛을 발하는 태양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16
암두와 설봉 그리고 흠산 암두와 설봉은 덕산 문하에서 같이 수행한 사이였지만, 둘의 성격은 매우 달랐다. 암두는 천재형으로 명민明敏하였고, 영적靈的으로도 뛰어났으며, 한편으로는 스승을 저울질할 정도로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남에게 절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는데, 심지어 스승인 덕산이나 동산에게조차 좀체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설봉은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의 노력파로, 조심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암두처럼 재기가 번뜩이진 않았지만 지극히 성실하였을 뿐 아니라, 겸손하고 인내심도 강했다. 더불어 아무 사심 없는 미덕으로 추앙받는 선종 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17 암두는 별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는데, 설봉은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 그의 문하에서 선종 5가 중 법안종과 운문종이 탄생하였다.
설봉은 둔한 근기였기에 역설적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의 오랜 모색과 방황이 가르침에 유용한 노하우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는 칼을 칼집에 꽂아 두고 끝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1,500의 제자 가운데 단연 운문(雲門文偃, 864~949)과 현사(玄沙師備, 835~908)가 돋보인다. 운문은 선문의 한 문화인 운문종雲門宗을 창시했고, 현사는 그 문하에서 법안종法眼宗의 개산開山인 법안(法眼文益, 885~958)을 키웠다.18
설봉의 깨친 이야기 중에는 함께 행각을 다닌 흠산문수欽山文邃가 등장한다. 흠산은 설봉, 암두와 함께 덕산에게 배웠는데, 뒤에 조동종의 종조인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의 법을 이었다.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흠산 스님이 암두, 설봉 스님과 앉아 있을 때 동산 스님이 차를 내었다. 흠산 스님이 눈을 감자 동산 스님이 말씀하셨다. “어디 갔다 왔느냐?” “선정에 들었다 왔습니다.” “선정은 본래 문이 없는데 어디로 들어갔느냐?”
장강사將江寺의 스님이 동냥을 하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돈을 거두어서 무엇하려우?” “우물을 파려 합니다.” “절 이름이 이미 강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인 장강將江인데 우물은 파서 무엇하려우?” 이 말에 스님의 대답이 막히자 흠산 선사가 대신 말했다. “온갖 잡물이 섞여 흐르는 강물을 마시지 않으려고 합니다.”19
III. 사설
말후구末後句 이 화두는 암두의 ‘말후구末後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럼 대체 말후구란 무엇인가? 보통은 깨닫고 나서 하는 말 혹은 깨달음의 극치에서 튀어나오는 언구를 말한다.
말후구末後句란 궁극적인 한 마디의 언구란 의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말末이란 마지막, 최종, 궁극이란 의미이다. 후後란 뒤에, 나중이란 뜻이니 비유하자면 막다른 골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일구를 말한다. 이것은 논리적인 추측으로 다가갈 수 없는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을 의미하니,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더욱 한 걸음 나아간 자리다.20
무문은 ‘최초의 구를 깨달아 얻으면, 문득 말후의 구를 알지만, 말후구니 최초구니 떠벌이면 그것은 이미 그 한 구가 아니다’라고 읊었다. 즉, 어떤 말을 말후구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말후의 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후구는 본질적으로 왜곡을 부른다. 말후구라고 하는 순간 최초구가 생기고 중간구도 생긴다. 마지막이라는 견해를 내는 순간 처음이라는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진리는 일원상一圓相과 같아서,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원주 위의 어디를 시작이고 끝이라 하겠는가? 원주 위의 어디가 좋고 나쁜가? 시작이 없어 ‘최초의 한 마디’가 없으니, 그것을 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제시해서 스스로 어리석음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게 한다. 진리에는 ‘최초’, ‘궁극’이란 것이 없다. 삶도 죽음도 진리의 한 때 모습이다. 어리석게 분별하는 자가 자의적으로 이름을 붙여 ‘최초’니 ‘궁극’이니 할 뿐이다.21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다. 말후구가 없으면 최초구도 없다. 글자의 뜻은 다르지만 결국 말후구는 최초구인 것이다. 종달 노사님은 ‘애초에 최초구니 말후구니 하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이러한 이치를 모를 암두가 아니었을 터인데 ‘말후의 구’라고 한 것에는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착어하셨다. 암두는 공연히 말후구네 뭐네 하며 별 의미없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말후구에 대한 신비감을 한껏 부풀리려는 의도였을까? 그렇다. 그래야 말후구의 본뜻을 더 처절하게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후구라는 신비감에서 벗어날 때 말후구는 그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암두가) 하루는 설봉과 흠산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설봉이 갑자기 말간 물이 담긴 물동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흠산이 말했다. “물이 맑으니 달이 나타난다.” 그러자 곧 이어 설봉이 말했다. “물이 맑으니 달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때였다. 암두는 아무 말 않고 물동이를 발로 툭 차 엎어버리곤 가버렸다.22
달이 나타났느니 나타나지 않았느니 하는 쓸데없는 논쟁을 보고 암두는 양동이를 발로 차 논쟁의 근원을 없애버린다. “이래도 달이 나타나나? 쓸데없는 논쟁은 집어치우고, 각자 자기 일들이나 하시지!” 암두를 ‘극단적 초월주의자’라고 규정한『선의 황금시대』의 저자 오경웅吳經熊은 암두의 이 같은 행동이야말로 그의 말후구를 직접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하였다.
이 일화에서 우리는 흠산의 접근 방법이 긍정적이요, 설봉의 접근 방법이 부정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암두가 물동이를 차버린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마도 암두는 그러한 행동을 통해 부정과 긍정을 다 초월해야 함을 보이려 한 것 같다. 암두는 <말후구末後句 - 마지막 한 마디>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그에 의하면 역대 선사들도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이 경우에 그가 발로 차버린 행위가 바로 <마지막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마지막 한 마디>는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23
물동이를 발로 찬 것이 말후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통쾌한 맛은 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나? 애써 떠온 물이니.
무슨 말후구가 있단 말이냐? 『산암잡록山菴雜錄』은 송말 원초의 불교혼란기, 무온 서중 선사가 제방을 돌면서 들은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이다. 이 책은 말후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정수사定水寺 보엽寶葉妙源스님은 사명四明 사람이다. 경산사徑山寺 허당(虛堂智愚: 1185∼1269)스님에게 공부하였는데, 선문 화두에 깨치지 못한 바 있으면 반드시 공부 많이 한 이에게 묻고, 깨닫기 전에 그만두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허당 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덕산스님의 말후구를 만일 있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덕산스님께서 알지 못하였으며, 만일 없다고 한다면 암두스님은 어찌하여 ‘덕산스님은 알지 못했다’고 말하였습니까? 스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모르니 그대는 운雲 수좌를 찾아가 물어보도록 하라.”
이에 스님은 운 수좌에게 물어보러 갔는데, 마침 운 수좌는 산에서 돌아와 발을 씻으려고 물을 찾던 중이었다. 스님은 재빨리 물을 가져다 드리고는 몸을 굽히고 손을 내밀어 운 수좌의 발을 씻겨주면서 고개를 들어 물었다. “덕산스님의 말후구에 대하여 저는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수좌께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운 수좌는 느닷없이 발 씻으려던 물을 양손으로 그에게 끼얹으며 말하였다. “무슨 말후구가 있단 말이냐?”
스님이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튿날 허당 스님을 찾아보니 허당 스님이 물었다. “내 그대에게 운 수좌를 찾아가 말후구를 물어보라 하였는데 그가 무어라 말하던가?” “화상의 말씀대로 물어 보았더니 그가 발 씻은 물을 나에게 끼얹었습니다.” “다른 말은 하지 않던가?” “무슨 말후구가 있느냐고 했을 뿐입니다.” “그렇지! 내 너에게 말하여 주리라. 그는 깨달은 자라고.”
스님은 이 말에 의심이 풀리게 되었다. 운 수좌는 바로 한극閑極화상으로 허당 스님의 수제자이며 높은 수행을 닦아 호구사의 주지를 지내다가 돌아가셨다.24
한 가지에서 나기는 했으나 원오극근圓悟克勤의『벽암록碧巖錄』25은 설봉과 암두를 참문한 두 스님의 선문답을 싣고 있는데, 말후구의 본뜻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현장의 소리다.
설봉스님이 암자에 주석할 때에 두 스님이 찾아와 예배를 하자, - 무엇 하느냐? (두 놈의 죄를) 똑같은 죄목으로 판결하라. 설봉스님은 그들을 보고서 암자 문을 열고 몸을 내밀면서 말하였다. “뭐냐?” - 귀신같이 잘도 보는군. 구멍 없는 피리이다. 꽉 들이받았다. 객스님 또한 “뭐냐?”라고 말하자, - 진흙으로 만든 탄환이로군. 방음 장치가 된 판대기[亶毛拍板]이다.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고 있는 것처럼 절묘하군. 설봉스님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가버렸다. - 물렁물렁한 진흙 속에도 가시가 있다. 마치 용에게 발이 없고 뱀에게 뿔이 돋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어떻게 손을 대기 어렵네.
그 스님이 그 뒤 암두巖頭스님 처소에 이르자, - (암두스님에게) 물어봐야만 되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어야 알 것이다. 암두스님이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 반드시 작가 선지식이라야만 대답할 것이다. 이놈이 번번이 실패한다. (설봉스님과 함께) 동참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이 객승을) 그냥 놓쳐 보낼 뻔했다. “영남嶺南 지방에서 왔습니다.” - 무슨 소식을 전하려고 왔느냐? 반드시 이 소식을 밝혀야 한다. 설봉스님을 보았느냐? “설봉스님한테는 갔다 왔느냐?” - 속셈을 감파해 버린 지 오래이니 가보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 “갔다 왔습니다.” - 진실한 사람 만나기 어렵다. 양쪽(설봉스님과 암두스님)에게 모두 헤어나지 못했군. “무슨 말을 하더냐?” - 결국은 이런 꼴이 되고 마는군. 스님이 지난날에 했던 대화를 말씀드리자, - 결국은 이런 꼴이 되고 마는군. 거듭거듭 잘못하는구나. 암두스님이 말하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 - 바로 때려 쳤어야 옳지. 콧구멍(급소)을 잃어버렸다. “설봉스님은 아무런 말씀 없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 또 졌구나! 그대들은 말해보라, 설봉스님이 뭐라고 했는지를. “아-아,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일러주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다.” - 큰 파도는 아득히 질펀하고 흰 물결은 하늘까지 넘실거린다. “그에게 일러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스님을 어찌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 문둥이가 짝을 끌고 가는구나. 꼭 그렇지 않다. 수미산이라도 부서질 것이다. 말해보라, 그의 올가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그 스님이 여름 안거[夏安居] 끝에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추어내어 법문을 청하였다. -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도적이 가버린 지 한참 되었다.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기는 격이군. “왜 진작 묻지 않았느냐?” - 선상禪床을 들어 엎어버렸어야 옳았다. 벌써 지나가버렸다. “감히 쉽게 여쭙지 못했습니다.” - 이 방망이를 이 스님에게 먹였어야 한다. 콧구멍을 뚫어버렸다. (하안거 동안) 감옥 속에 틀어박혀 못된 지혜만 키웠구나. 두 번 거듭된 잘못이다. “설봉스님이 나와 한 가지(덕산스님의 제자이므로)에서 나기는 했으나, 나와 똑같지는 않다.” - 하늘과 땅을 뒤덮었군. “말후구를 알고저 하는가? 다만 이것뿐이다.” - 같은 배 탄 사람들은 모두 속이는군. 나 원오는 믿지 않는다. 하마터면 구별하지 못할 뻔했다.26
설봉은 스님들이 오는 것을 보고, 문을 열고 몸을 내밀면서, “뭐냐?”고 물었다. 이에 객승 또한 “뭐냐?”고 되물었다. 이에 설봉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간다. 예전에 설봉은 스승인 덕산에게 “노스님, 아직 종도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는 들고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덕산은 말없이 다시 방으로 되돌아갔다. ‘천리동풍千里同風’이요, ‘사자창화師資唱和’다.27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설봉은 덕산의 법을 성실하게 잘 이은 듯하다.
한편, 암두는 두 승의 말을 듣고, 설봉에게 말후구를 알려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덕산 같은 분이 아직 말후구를 모르시네.’라고 대응한 것과 똑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뒤에 그 뜻을 묻자, ‘설봉은 나와 한 가지에서 나기는 했으나, 나와 똑같이 죽지는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같이 동문수학하였지만 깨달음을 체득하고 깨달음을 펴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설봉의 태도를 설봉의 말후구로 인정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가풍家風이 다를 뿐 차이가 없다는 의미이다. 암두는 암두이고 설봉은 설봉이다.
설봉과 암두가 똑같은 스승 덕산 선사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설봉은 설봉의 안목과 교화수단이 있고, 암두는 암두의 안목과 방편지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식으로 학인을 교화하는 방편지혜와 수단은 같지 않은 것이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는 바로 이것뿐이다.28
중생심으로 사량 분별하거나 좋다 나쁘다 차별하지 말일이다. 번뇌 망념을 쉬고, 본래 청정한 마음으로 삶의 지혜나 체득할 일이다. 원오는 이 말에 대해 ‘예로부터 지금까지 공안은 가시덤불처럼 천차만별이니, 그대들이 이를 철저히 사무치게 터득한다면 천하 사람들이 당해낼 수 없으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곧 그대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초경招慶과 나산羅山 그리고 한 스님의 대화를 들어 다시 한 번 말후구의 변주곡을 들려준다.
초경招慶스님이 어느 날 나산羅山스님에게 물었다. “암두스님이 이렇고 저렇다(같은 가지에서 태어나고……)고 하는데 이 무슨 뜻입니까?” 나산스님이 “대사!”하고 불러서, “네!”하고 대답하니, 나산스님은 말하였다. “한편으론 밝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두운 것이요.” 그러자 초경스님이 감사의 절을 올리고 갔다가 사흘이 지난 뒤에 또다시 물었다. “전일에 스님께선 베푸신 자비를 입긴 했으나 간파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그대에게 일러주었다.” “스님께서는 분명하게 설명해주십시오.” “그렇다면 대사께서 의심하는 곳에서 물어보십시오.” “한편으론 밝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둡기도 한 것이란 무엇입니까?”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한 것입니다.” 초경스님은 그 당시 감사의 절을 올리고 떠나갔다. 그 뒤 어떤 스님이 초경스님에게 물었다.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할 때는 어떠합니까?” “개 주둥이 닥쳐라.” “대사께서도 입 닥치고 공양이나 드시지요.” 그 스님이 다시 나산스님에게 찾아가 물었다. “같이 나서 같이 죽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뿔 없는 소와 같은 격이지.”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할 때는 어떠합니까?” “호랑이에게 뿔이 있는 것과 같다.” 말후구란 바로 이러한 도리이다.29
같은 가지에서 났지만 같이 죽지는 않는다.’가 여기서는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한다.’가 되었다가, 결국 ‘뿔 없는 소’와 ‘뿔 있는 호랑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말후구의 도리라니, 역시 선은 비논리의 논리이다. 어디에도 매이면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언어도 언어 그 자체가 진리인 경우는 없다. 말씀에 머물면 말씀의 노예가 되고 부처에 머물면 부처의 노예가 된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언어의 노예인 것이다.30 혜암 선사의 말후구에 대한 견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선관법요』「탁발화托鉢話」를 인용한다.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에서 하루는 혜공惠公 스님이 탁발화托鉢話 공안公案을 내게 물었다. (중략) 나는 말하되 “나는 그런 것을 말할 생각도 아예 못 낸다.”고 하였더니, 혜공 스님은 “그 무엇이 어려울 것이 있습니까? 암두巖頭 스님의 연극으로만 보십시오.”하였다.
나는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행이 없는 부처가 없고, 소림문하小林門下에 거짓말을 한 조사祖師가 없다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이니, 그 뜻(意)을 따라 나도 한번 해 보리라.”하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삼동三冬 결제 동안에 남모르게 정진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탁발화의 골자骨子가 부러져 나왔다.
그 뒤에 선학원禪學院에서 향곡香谷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때 향곡 스님이 이 탁발화 법문을 말씀하기에 나는 그 스님에게 “어떤 것이 암두의 말후구末後句인가?”하고 물었다. 향곡 스님은 “덕산德山이 옳은가? 암두巖頭가 옳은가?”하고 되물었다. 내가 “알면 안다고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누가 덕산 · 암두의 옳고 그른 것을 물었는가?”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이 탁발화에 대해서는 그 말후구末後句를 가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나에게 말후구에 대하여 묻는다면 “안불견眼不見하고 이불문耳不聞이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대답하리라.31
혜암 선사는 말후구를 ‘안불견眼不見 이불문耳不聞’이라 하였다. ‘뿔 없는 소’와 ‘뿔 있는 호랑이’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로 재주를 넘었다.
다시 돌아가자 설봉은 덕산에게 “노스님, 아직 종도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는 들고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었다. 설봉은 예기치 않게 되돌아온 객승의 “뭐냐?”는 물음에 그때 그 일을 회상하였을 지도 모르겠다. 스승인 덕산에게 “스님! 죄송합니다. 식사가 좀 늦어졌습니다. 돌아가셨다가 종이 울리거든 다시 내려오시지요.”라고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뭐냐?”는 말 대신에 “스님들, 어서 오십시오, 어디서들 오십니까?”라고 했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러나 여기에도 걸리지 말일이다. 절대 평등의 경지에서 보면 이 또한 허물이니, 어둠과 밝음, 차별과 평등, 깨달음과 미혹을 똑같이 보는 경지가 바로 말후구인 것이다.32
“夜深同看千巖雪, 한밤중에 일천 바위를 뒤덮은 흰 눈을 함께 보노라”33
우리는 일상에서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람과 교류한다. 그리고 그 말이나 행동으로부터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낸다. 특히 수행자는 그 말과 행동을 통해 수행정도를 고스란히 내보인다.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적절한 언어를 자유자재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훌륭한 수행자라고 할 수 있겠다. 수행이란 순간순간 바른 상황, 바른 관계를 알아 바른 실천을 하기 위함이다.
불교수행의 핵심은 마음의 평정과 통찰이다. 평정은 곧 선정으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상태이다. 쉽게 말해서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막다른 골목이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깊은 내적인 평정의 상태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물론 이런 경험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것으론 부족하다. 마음의 평정만 있다면 몽롱한 혼침이나 무기상태가 되는 경향이 높다. 여기에 깨어있음이 있어야 한다. 변화하는 일상에서 고요한 가운데 분명한 자각, 통찰이 요청된다. 단순하게 선정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 그 자체로 선정을 이루고 그곳에서 분명하고 분명한 깨달음이 구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말후구이고, 백척간두 진일보이다. 자기 수행의 철저함에서 대중의 일상생활에로 나아가는 것이다.34
아프면 약 먹고 쉬어야지요 선도회 책에 실린 필자의 글을 보고 어떤 분이 전화를 하셔서 만나게 되었다. 많은 보시와 사회봉사로 국민훈장과 불교계에서 주는 대원상을 받으신 분이셨다. 이야기 중에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러 가셨던 일을 말씀하셨다. 마침 감기 몸살이 걸려 나오시지 못하신다고 하여 실망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오셨다고 특별히 나오셔서 만나셨단다. 감격하여 일행 중 한 분이 말씀하셨단다.
“아프다고 하시더니 수행을 많이 하셔서 이겨내신 것 같습니다.” “수행이요? 아픈데 무슨 수행입니까. 아프면 약 먹고 쉬어야지요.”
“봉사활동을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 참선수행은 하십니까?” “나는 참선을 싫어합니다. 몸에도 맞지 않는 것 같고 참선하시는 분들은 선민의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방에서 몇 년 몇 십 년 참선한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자랑이나 하고.” 그래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참선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달라이 라마가 하신 평범한 말씀이 바로 참선 수행이 지향志向하는 바이지요.”
1597년 7월 15일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게 대패한다. 원균도 전사한다. 이 패전 소식에 놀란 조정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한다. 그리고 2개월 뒤인 9월 15일 명량해전이 있었다. 온전하지 못한 전선 12척을 가지고 왜선 133척을 상대해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절체절명의 순간,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
절대 열세의 전투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한 ‘결사구국’의 각오를 나타낸 말이요, 장수들의 전투의지 분발을 촉구하는 ‘결사항전’의 외침이다. 그리고 그 노량해전에서 흉탄에 맞아 죽음을 앞둔 순간, 그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다.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 군사를 놀래게 해서는 안 된다(戰方急 愼勿言我死 勿令驚軍).”
『선조실록宣祖實錄』1597년 10월 20일을 보면, 그런 열세에도 승리로 이끈 명량해전을 두고 선조는,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 데 불과하다. 이순신에게는 벼슬을 올려주지 않으면서 포상하는 방법을 연구해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역학 속에서 노량해전 중 날아든 유탄에 맞아 전사하시면서 하신 이 말씀은, 정녕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 나온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1598년 11월 19일 아침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투에서 23전 23승 전승을 거둔다. 이는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았다.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 태고종 종조이자 조계종 중흥조 태고 보우 선사는 처음 9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종풍에 따라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참구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26세 때에는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였으나 교학의 한계를 깨닫고 궁극적인 깨침에 이르고자 모든 반연攀緣을 끊고 화두에 전념한다.
죽음을 넘나드는 치열함으로 정진하던 33세 때 용맹정진 7일 만에 1차 깨달음을 경험하고, 이어 37세 때에는『원각경』을 읽다가 ‘일체가 다 사라지면 부동不動이라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2차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스님은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를 들고 다시 정진한 끝에 38세 때 활연히 깨치고, 다시 1,700 공안을 일일이 참구하던 중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에서 오래 막혀 있다가 홀연히 그 뜻을 깨닫고 마침내 중생의 안목에서 벗어나 활활자재한 ‘태고가’를 부를 수 있게 됐다.35
태고 보우 선사를 깨달음으로 이끈 <암두밀계처>는, 암두가 당시 덕산 화상에게 “은밀히 말한 것”이 무엇인가를 참구하는 화두이다. 이 공안은 선도회에서도 점검하고 있는데, 근대에 들어서 전강 선사와 향곡 스님 사이에 선문답에도 등장한다. 진제 스님에 의해 <암두밀계>로 정리되었다.
1954년 서울 대각사에서 향곡 스님이 전강 스님에게 물었다. “암두밀계[암두가 덕산에게 남몰래 말한 것]의 뜻이 무엇입니까?” 전강 스님이 말했다. “일천 성인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자 향곡 스님은 “아이고[蒼天]! 아이고[蒼天]!” 하며 문을 열고 나갔다. 전강 스님이 향곡 스님을 부르며 말했다. “자네가 긍정 못하겠으면 다시 일러보라.” “죽은 말에 침놓고 뜸뜨는 것은 어리석은 자나 할 짓입니다.” 향곡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는 가버렸다.36
10년쯤 지난 후 전강 스님이 대구 동화사 조실로 있을 때 향곡 스님의 제자인 진제[당시 법성 수좌] 스님에게 앞서의 법담을 들어 말했다. “10년 전 서울 대각사 큰 방에서 암두밀계의 뜻에 대하여 향곡 스님이 점검하라 하기에 ‘일천 성인도 알지 못함이거늘 내가 어찌 알리요.’라 하였네. 그런 후에 향곡 스님을 한 방망이 때렸던들, 그대가 향곡 스님이었으면 어찌하였겠는가?” 진제 스님이 방바닥을 치며 말했다. “옳지 않으니 다시 이르십시오.[不是更道]” 전강 스님도 방바닥을 한 번 쳤다. 진제 스님이 또 한 번 크게 방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누가 밤에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리요.” 하고 전강 스님이 말했다. 그러자 진제 스님이 다시 한 번 방바닥을 치면서, “그래 가지고는 덕산과 암두의 뜻을 꿈에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전강 스님이 말했다. “수좌, 다시 들어오게.” 그러나 진제 스님은 “아이고! 아이고!” 하며 가버렸다.
IV. 참구
경계를 제시할 곳을 찾고, 거기에 해당하는 적절한 견해를 밝히시라. 참고로 임종을 앞둔 자리에서 덕산에게 한 승이 물었다.
“영원히 병들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까?” “있고말고.” 그 사람이 놀라 되물었다. “영원히 병들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말에 덕산은 “끙, 끙!” 하고 신음 소리를 내었다.37
이런 덕산이다. 그에게는 병을 앓는 사람이나 영원히 병들지 않은 사람이나 같다. 그는 절대의 경지에 서 있다. 다만 그 승이 다르다고 차별심을 내었던 것이다. 그럼 “노스님, 아직 종도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는 들고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여러분이 덕산이라면 어떻게 대꾸하겠는가?
공부의 핵심은 ‘내가 곧 부처’라는 자신감이다. 나에게 충실하면 남에게도 충실한 것이고 세상 만물에게도 충실한 것입니다. 내가 곧 너이고 세상만물이기 때문이다.
V. 재독
1. 여러분이 덕산 선사라면,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느냐!” 는 설봉스님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2. 암두스님이 덕산선사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나? 3. 덕산선사의 법문이 전날과 어떻게 달랐을까?
VI. 감상
눈이 온다. 어릴 때 보았던 산타 마을에 내리던 눈이다.
눈이 온다. 가은산과 성벽 길 따라 괴곡 능선, 비봉산 너머 그 너머 첩첩이 하얗다. 팔을 벌리고 하늘을 날아오르다!
눈이 온다. 소나무들이 하얀 파티 옷을 차려입고 외출을 나선다. 산등성이를 일렬로 한 발! 한 발!
눈이 온다. 마당에는 하얀 발자국!
為甚麼孤峯不白, 만산萬山에 눈이 가득 쌓였는데 한 봉우리孤峰만 왜 검은고? 夜深同看千巖雪, 한밤중에 일천 바위를 뒤덮은 흰 눈을 함께 보노라!
눈이 온다!
VII. 참고한 책과 글
1)『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덕산경발하법당德山擎鉢下法堂’으로, 발우를 들고 법당으로 내려 간 것으로 되어 있어, 법당에서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당下堂은 방장方丈에서 법당으로 가는 것을 가리킨다. 법당(혹은 식당)이 보통 아래쪽에 있어 높이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 방장方丈은 사방으로 1장(丈, 약 3m)이 되는 넓이, 또는 그 넓이의 방. 특히 선종의 선원에서 주지의 방을 뜻하나 와전되어 주지 또는 스승의 존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유마거사가 사방 1장의 협소한 방에서 3만 2,000의 좌석을 벌여놓았다는 데서 유래해, 법력法力 또는 도력道力이 특출 난 스님을 의미한데서 기인한다.
3)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은 당대唐代 청원하靑原下 선사로 덕산선감德山宣鑑의 제자이다. 천주泉州 남안南安(福建省)사람으로, 성은 증曾씨이다. 12살에 아버지를 따라 포전蒲田 옥윤사玉潤寺 경현慶玄에게 출가하고 17세에 중이 되었다. 부용산芙蓉山 항조恒照에게 배우고 뒤에 德山에게 참예하여 법을 이었다. 함통咸通11년(870) 행실行實의 請에 의해 복부福府 서쪽 상골산象骨山에 암자를 짓고 주하였는데, 이 산은 겨울에 눈이 제일 먼저 내리므로 설봉雪峰이라 하였다. 후에 희종이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자가사紫袈裟를 주었다. 뒤에 복건성에 돌아가서 王의 후의厚意를 입었으며 양梁 개평開平2년 5월 87세로 입적하다. 그의 제자 운문雲門이 운문종雲門宗을 열었다. (송고승전12, 전등록16, 통기42, 통재25, 禪宗正脈7)
4) 덕산선감(德山宣鑑, 780~865)은 당대唐代 청원하靑原下 선사로, 검남劍南(사천성)사람이다. 성은 주周씨. 율律과 성상性相을 공부하고 금강경에 정통하여 ‘주금강周金剛’이란 별명을 얻었다. 남방선南方禪을 논파論破하다가 禪에 뜻을 두고 천황도오(天皇道悟, 748~807)의 제자인 용담숭신(龍潭崇信, 782~865) 선사를 참예하여(龍潭紙燭) 법을 이었다. 산영우山靈祐의 지시로 풍양灃陽(호남성)에서 30년을 주하였는데, 무종武宗의 파불破佛을 만나 독부산獨浮山의 석실石室에서 난難을 피했다. 대중大中 초初에 흥불시興佛時 무릉태수武陵太守 설연망薛延望의 청으로 덕산德山에 주하며 종풍宗風을 떨쳤다. 엄격한 수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제자들을 지도할 때 몽둥이를 잘 썼으므로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란 말이 생겼다. ‘할喝’은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에게서 유래되었는데, ‘덕산봉여우점德山棒如雨點, 임제할사뇌분臨濟喝似雷奔’이라고 하여 ‘덕산의 몽둥이질은 비 내리는 것과 같고, 임제의 고함소리는 천둥소리와 비슷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를 ‘당두봉할當頭棒喝’이라 한다. 함통咸通6년 12월 86세로 시적示寂하였다. 시호는 견성대사見性大師.(송고승전12, 조당집5, 전등록15, 속등록1, 회요20)
용담숭신(龍潭崇信, 782~865)은 당대唐代 청원靑原문하의 선사로, 가업이 떡장수인 그는 천황도오天皇道悟에게 떡을 보낸 것이 인연이 되어 그에게 귀의하여 출가하였다. 용담선원龍潭禪院에 머물렀다. 제자로 덕산선감德山宣鑒이 있다.
천황도오(天皇道悟, 748~807)는 당대唐代선사로, 천황은 주석하던 절 이름이다. 14세에 절강성 명주의 대덕大德에게 출가하였다. 경산도흠徑山道欽과 마조도일馬祖道一에게 참학하고 석두희천石頭希遷의 법을 이어 받았다. 원화元和2년 4월30일 입적하였다.
5) 반두飯頭는 절에서 큰 일이 있을 때에 밥하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가리킨다. 설봉은 전좌典座 직을 맡고 있었다고 하는데, 전좌는 선종禪宗의 절에서, 여러 스님의 상좌上座, 와구臥具, 식사 따위를 맡아보는 직책. 또는 사람을 말한다.
6) 雪峰在德山作飯頭. 一日飯遲, 德山擎鉢下法堂. 峰曬飯巾次, 見德山乃曰. 鐘未鳴, 鼓未響. 拓鉢向甚麼處去, 德山便歸方丈. 峰舉似師, 師曰, 大小德山未會末後句在. 山聞, 令侍者喚師去. 問, 汝不肯老僧那. 師密啟其意, 山乃休. 明日陞堂, 果與尋常不同. 師至僧堂前, 拊掌大笑曰, 且喜堂頭老漢會末後句. 他後天下人不奈伊何. 雖然, 也秖得三年活(山果三年後示滅). (『오등회원五燈會元』) 曬 쬘 쇄.
7) 암두전활(巖頭全豁, 828~887)은 당대唐代 청원하靑原下 선사로 덕산선감德山宣鑑의 제자이다. 천주泉州(복건성) 남안현南安縣 사람으로 성은 가柯씨, 휘는 全豁, 시호는 청엄대사淸儼大師이다. 영천사靈泉寺 의공義公에게 출가하여 장안長安 서명사西明寺에서 수구受具하였다. 처음에 교종에 몸을 담았다가 나중에 설봉의존雪峰義存, 흠산문수欽山文邃와 사귀고, 앙산혜적仰山慧寂을 배알拜謁하였으며, 德山에게 참례하여 법을 이었다. 회창사태會昌沙汰(845) 때는 서호강변西湖江邊에서 뱃사공으로 난을 피하였고, 후에 동정호반洞庭湖畔의 와룡산臥龍山 암두巖頭에서 종풍을 선양하였다. 광계 3년(祖堂集에는 中和5년 곧 885년) 4월 8일, 中原에 도적이 창궐했을 때, 도량을 수호하려 단거端居하다가 도적의 칼에 시적示寂하였다(세수 60세). (송고승전23, 조당집7, 전등록16, 회요21, 회원7)
8) ‘삼도투자구지동산三到投子九至洞山’이라고 한다.
9)『직지심경直指心經』222「설봉의존 선사 5 덕산 화상의 일방」.
10)『설봉록雪峰錄』「2. 깨친 인연」(선림고경총서 19)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28~37. 『설봉록』은 명 숭정 12년 임연행이 편집한 것으로 상당법문, 법어, 유계 등과 연보가 실려 있다.
11) 흠산문수(欽山文邃, ? ~ ?) 선사의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그가 불법을 편 산 이름을 따라 흠산欽山이라 하였다.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에서 태어나 항주杭州 대자산大慈山 환중에게 출가하였다. 암두와 설봉은 그가 법기(法器, 불도를 수행할 만한 사람을 이르는 말)임을 알아보고 행각을 다닐 때 같이 다녔다. 암두·설봉과 함께 덕산 선감德山宣敢에게 배웠으며 뒤에 동산 양개洞山良介의 제자가 되어 그의 법을 이었다. 27세부터 예주 흠산에 머무르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화살 하나로 세 관문을 뚫는다는「흠산일족파삼관欽山一鏃破三關」이『碧巖錄』제56칙에 전한다.
12) 염관제안(鹽官齊安, ? ∼842) 선사의 속성은 이李씨이며 해문군海門郡 사람이다. 해문군의 운종雲琮 선사에게 출가하여 구족계까지 받았으나 나중에는 마조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법을 이었다.
13) 염관鹽官 선사의 색과 공에 대한 설법은 황벽과 염관의 일화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다. 다음은『조당집祖堂集』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선사는 황벽을 가리킨다. 선사가 행각行脚을 하다가 염관盜官에 이르렀다. 염관이 어느 날 다음과 같이 설법했다. “색이 곧 공이라면 공의 이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공이 곧 색이라면 색의 이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사가 나서서 물었다. “듣건대 화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색이 곧 공이라면 공의 이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공이 곧 색이라면 색의 이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셨는데, 화상께서 이리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까?” “맞다.” 선사가 선상禪床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이것은 색色입니다. 어느 것이 공空입니까?” 염관이 대답하지 않았다. (정수선사 문등 지음, 김월운 번역, 동국역경원,『조당집祖堂集』제16권「황벽黃蘗 화상」)
14) 동산이 운암(雲岩曇晟, 780~841) 선사에게 물었다. 동산: “화상께서 돌아가신 뒤 누가 ‘화상의 초상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운암: “그런 사람에게는 ‘다만 이런 사람이었네’라고 대답하게.” 동산이 멍하니 생각에 잠기니, 운암: “이 일을 이해하려면 자세히 살펴야 되느니라.” 동산이 의심을 완전히 풀지 못하고 운암을 떠나 가다가 물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대오大悟하였다. 이에 게송을 지으니 선종오도송의 효시가 되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切忌隨他覓 迢迢與我疏 절대로 남에게서 찾으려 하지 마라. 멀고멀어서 나와는 상관없네. 我今獨自往 處處得逢渠 나 이제 홀로 가지만, 곳곳에서 그를 만나네. 渠今正是我 我今不是渠 그는 지금 진짜 나이건만, 나는 이제 그가 아니네. 應須與摩會 方得契如如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비로소 여여하게 계합하리라.
동산은 물에 비친 모습이 그의 형상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겉모습’일 뿐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언한다. 그것을 깨달아야 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고. 그리고 지금 나와 그는 하나라고.
15) 初與巖頭至澧州鼇山鎮阻雪. 頭每日祇是打睡. 師一向坐禪. 一日喚曰, 師兄. 師兄. 且起來. 頭曰, 作甚麼. 師曰, 今生不著便, 共文邃箇漢行脚, 到處被他帶累. 今日到此, 又祇管打睡. 頭喝曰, 噇. 眠去, 每日牀上坐, 恰似七村裏土地. 他時後日魔魅人家男女去在. 師自點胸曰, 我這裏未穩在, 不敢自謾. 頭曰, 我將謂你他日向孤峰頂上盤結草庵. 播揚大教. 猶作這箇語話. 師曰, 我實未穩在. 頭曰, 你若實如此. 據你見處一一通來. 是處與你證明. 不是處與你剗却. 師曰, 我初到鹽官. 見上堂舉色空義. 得箇入處. 頭曰, 此去三十年. 切忌舉著. 又見洞山過水偈曰, 切忌從他覓. 迢迢與我疎. 渠今正是我. 我今不是渠. 頭曰, 若與麼. 自救也未徹在. 師又曰, 後問德山. 從上宗乘中事. 學人還有分也無. 德山打一棒曰, 道甚麼. 我當時如桶底脫相似. 頭喝曰, 你不聞道. 從門入者不是家珍. 師曰, 他後如何即是. 頭曰, 他後若欲播揚大教. 一一從自己胸襟流出. 將來與我蓋天蓋地去. 師於言下大悟. 便作禮起. 連聲呌曰, 師兄. 今日始是鼇山成道. (『오등회원五燈會元』 제7권「복주설봉의존선사福州雪峰義存禪師」).『설봉록雪峰錄』「2. 깨친 인연」(선림고경총서 19)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 39 참조.
16) 이원섭 지음,『깨침의 미학』p. 50.
17) 오경웅吳經熊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pp. 162~163.
18) 한형조 지음,『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p. 89.
19) 曺五鉉 편저,『禪問禪答』도서출판 장승, p. 144.
20)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법보신문 1048호 (2010년 05월 11일).
21) 장휘옥, 김사업 제창, 간화선 수행의 교과서, 무문관『무문관 참구』p. 130.
22) 一日, 與雪峰, 欽山聚話. 峰驀指一椀水, 欽曰, 水清月現. 峰曰, 水清月不現. 師踢却水碗而去. (『오등회원五燈會元』 제7권「악주암두전奯선사鄂州巖頭全奯禪師」)
23) 오경웅吳經熊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p. 162.
24)『산암잡록山菴雜錄』 (선림고경총서 29) 「1. 말후구末後句 / 보엽 묘원寶葉妙源스님」 pp. 35~36.『산암잡록』은 명초明招 홍무(洪武: 1368∼1397) 10년경, 송말 원초의 혼란기를 살았던 무온서중(無溫恕中, 1309∼1386) 선사가 제방을 돌면서 들었던 절 집안 이야기나, 또는 당시 불교계에 널려 있던 문제점들을 평론 형식으로 써내려간 이야기 모음집이다.
25)『벽암록碧巖錄』은 정확하게는『불과환오선사벽암록佛果圜悟禪師碧嚴錄』이라고 하며 또한『벽암집碧巖集』이라고도 한다. 영미권에서는『Blue Cliff Record(푸른 절벽의 기록)』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중국 선종5가禪宗五家의 일파인 운문종雲門宗에 속하는 설두雪竇 중현重顯이『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700칙則의 공안 중에서 선禪의 전통적 사상에 의거하여 달마선達摩禪의 본령本領을 발휘하여 학인學人의 판도(辦道: 수행)에 중요한 지침이 되는 100칙을 골라서 그 하나하나에 종지宗旨를 거양擧揚하는 격조 높은 운문韻文의 송頌을 달았다. 후일 임제종의 원오극근圓悟克勤이 이 송에 대하여 각칙各則마다 서문적인 조어(釣語: 垂示), 본칙本則과 송고頌古에 대한 단평(短評: 著語), 전체적인 상평(詳評: 評唱)을 가하여 10권으로 한 것이『벽암록』이다. 보조普照에 의하여 1128년(建炎 2)에 처음으로 간행되었으나 원오圓悟의 제자인 대혜종고大慧宗杲는 이것이 선禪을 형해화刑骸化하는 것이라고 하여 간본刊本을 회수해서 소각해 버렸다. 현재 일반에게 유포되어 있는 것은 1300년(元의 大德 4)에 간행된 것이다. (위키백과)
26)『벽암록碧巖錄 中』「제51칙 암두의 최후의 언구[巖頭末後句]」(선림고경총서 36)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153~156. 擧. 雪峰住庵時, 有兩僧來禮拜. 峰見來, 以手托庵門, 放身出云, 是什. 僧亦云, 是什. 峰, 低頭歸庵. 僧後到巖頭. 頭問, 什處來. 僧云, 嶺南來. 頭云, 曾到雪峰. 僧云, 曾到, 頭云, 有何言句. 僧擧前話. 頭云, 他道什. 僧云, 他無語低頭歸庵. 頭云, 噫, 我當初悔, 不向他道末後句. 若向伊道, 天下人不奈雪老何. 僧至夏末, 再擧前話請益,. 頭云, 何不早問. 僧云, 未敢容易. 頭云, 雪峰雖與我同條生, 不與我同條死. 要識末後句, 只這是.
27) 千里同風은 천 리에 걸쳐 같은 바람이 분다는 뜻. 천리만리 떨어져 있더라도 부는 바람은 어디서나 같다는 뜻으로, 세상이 통일되어 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풍속이 같아짐을 이르는 말이다. 사자창화師資唱和는 스승과 제자가 부르면 화답한다는 뜻. (潙仰家風 師資唱和 父子一家 脇下書字 頭角 觴嶸, 위앙 가풍은 스승과 제자가 부르면 화답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집에 살고 있네. 옆구리에 글자 쓰고 머리 위에 뿔이 높이 솟았구나.『선가귀감禪家龜鑑』)
28) 원오극근圓悟克勤, 정성본鄭性本 역해譯解,『벽암록碧巖錄』p. 324.
29)『벽암록碧巖錄』(선림고경총서 36)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162~163.
30) 도올 김용옥『중용, 인간의 맛』p. 28.
31) 문인門人 묘봉 감수, 견우회 엮음, 덕숭산 혜암 대선사 법어, 바다 밑의 진흙 소 달을 물고 뛰네 pp. 179~181)
32) 원오극근圓悟克勤, 정성본鄭性本 역해譯解,『벽암록碧巖錄』p. 326.
33) 末後句爲君說, 明暗雙雙底時節. 同條生也共相知, 不同條死還殊絶. 還殊絶. 黃頭碧眼須甄別, 南北東西歸去來. 夜深同看千巖雪. 마지막 한마디를 그대에게 말하노니. 밝음과 어둠이 쌍쌍으로 어울리는 시절이구나. 같은 가지에서 나온 것은 모두 알지만, 죽음을 달리한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군. 까맣게 모르는군! 석가와 달마도 잘 분별해보아야만 알 수 있네. 남북동서로 돌아가련다. 한밤중에 일천 바위를 뒤덮은 흰 눈을 함께 보노라. (『벽암록碧巖錄』(선림고경총서 36)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 161.)
34)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법보신문 1048호 (2010년 05월 11일).
35)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 「22 태고보우 선사, 내 마음이 곧 정토요 내 성품이 아미타불」 법보신문 886, (2007.01.24)
36) 뒷날에 향곡 스님께서 법제자 진제에게 묻되, “암두밀계의 의지를 어떻게 보는가?”하시거늘, 진제가 답하되 “마조 스님은 천하 인을 답살했지만 임제스님은 아직 백염적이 못됩니다.”하니 스님께서 더 묻지 않으셨다고 한다. ‘백염적白拈賊’은 백주에 남의 모자를 빼앗아 가는 도적이라는 뜻이다. 손에 한 물건도 지니지 않고 교묘히 남의 물건을 훔치고서도 그 자취를 남기지 않는 도적. 도적 중에서도 가정 교활한 도적을 말한다. 巖頭密啓: 時在甲午秋에 於漢城大覺寺에서 師 問田岡禪師云 如何시 巖頭密啓意旨닛고 하니 田岡禪師하되 千聖도 也不識일세 吾亦不知니라. 하거늘 師曰 蒼天蒼天이라하며 開門出去하니 田岡禪師 呼喚云 你若不能인댄 更道一句來하라 하거늘 師云 死馬針灸은 愚者所行이라라고 拂유而去하다. 後日에 師問 眞際하되 巖頭密啓意旨如何오하거늘 眞際 答云하되 馬駒踏殺天下人하니 臨濟未是白拈賊이니다. 하니 師 便休하시다.
37) 師因病, 僧門, 還有不病者也無. 師曰, 有, 曰, 如何是不病者. 師曰, 阿口*耶, 阿口*耶. (瞿汝稷,『지월록指月錄』 卷之十五. 또는 德山宣鑒生病,有僧問他: “還有不病者也無?” 德山說:“有.” 僧問: “如何是不病者?”德山呻吟著說: “唉喲! 唉喲!” (公案100 - 显密文库佛教文集 有不病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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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법문 중 말후구의 변주곡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초경招慶스님이 어느 날 나산羅山스님에게 물었다.
“암두스님이 이렇고 저렇다(같은 가지에서 태어나고……)고 하는데 이 무슨 뜻입니까?”
나산스님이 “대사!”하고 불러서, “네!”하고 대답하니, 나산스님은 말하였다.
“한편으론 밝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두운 것이요.”
그러자 초경스님이 감사의 절을 올리고 갔다가 사흘이 지난 뒤에 또다시 물었다.
“전일에 스님께선 베푸신 자비를 입긴 했으나 간파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그대에게 일러주었다.”
“스님께서는 분명하게 설명해주십시오.”
“그렇다면 대사께서 의심하는 곳에서 물어보십시오.”
“한편으론 밝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둡기도 한 것이란 무엇입니까?”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한 것입니다.”
초경스님은 그 당시 감사의 절을 올리고 떠나갔다.
그 뒤 어떤 스님이 초경스님에게 물었다.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할 때는 어떠합니까?”
“개 주둥이 닥쳐라.”
“대사께서도 입 닥치고 공양이나 드시지요.”
그 스님이 다시 나산스님에게 찾아가 물었다
“같이 나서 같이 죽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뿔 없는 소와 같은 격이지.”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할 때는 어떠합니까?”
“호랑이에게 뿔이 있는 것과 같다.”
말후구란 바로 이러한 도리이다.
말후구 변주곡은 여실지견!
말후구는 화두의 경계 입니다!^^
^^
무문관 강의에 빠져서 아쉬웠습니다.
보현대자님 그 날 준비 해 주시느라
내용을 못들으셔서...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날 여러가지로 작은 것에서부터 분주하셨을텐데
감사하다는 말씀 이 자리 빌어 올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