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하는 말은 율법 안에서
자리 잡고 살려고 하는 자들아 하는 의미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신진대사가 계속이 되고 고정관념이 없는데 한 쪽으로 고착화 되어 죽은
신앙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과거지향적인 사람들이 그와 같습니다.
어디서나 율법의 종들은 사람을 붙잡으려고 말뚝을 박아 고삐를 묶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신앙의 형태를 견고한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율법을 듣지 못했느냐’ 성경 해석의 첫 번째 중요성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건 지식적인 공부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의 전개를 구속사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가 없는
구속사적인 성경공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승천과
재림만 있을 뿐 진리의 성령이 임하셔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비밀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파노라마식 전체 흐름을 따라와서 그만
십자가 앞에서 멈추므로 성경공부를 잘했다는 만족만 있을 뿐 생명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신진대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하나마나가 되고 마는 실정입니다.
계시를 가지고 율법과 그리스도 안의 은혜와 진리로 율법이 성취되는 과정을
파악해야만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 율법이 어떻게 완성(충만)해 가는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율법사에게 물으셨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경을 볼 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세로 말미암은 율법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로 완성되어 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완성의 과정에 우리가 어떻게 참예
곧 그 흐름에 어느 지점에 끼어들어가게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율법 안에서 성령을 받고 진리를 알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은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의 계통의 믿음의 선진들만
고난 받으실 그리스도와 고난 받으신 후에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미리
보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또 육신의 예수를 붙잡고 늘어져도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지상사역은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도록 하시는 대속의
죽으심으로 마치고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다음 성령을 보내셔서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아들의 영으로 아빠 아버지를 부르며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의 지상사역을 통해 천상사역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선을 따르는 길이 처음에는 희미하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반복해서 적용하다보면 점진적으로 터득하게 됩니다.
진리의 적용은 반복 연습하는 것 이상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장대높이뛰기 하듯 어디 가서 한꺼번에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령의 감동감화를 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바울에게도
다메섹의 체험이 있고 그 다음 아라비아의 숙성의 과정이 있는 겁니다.
계시는 단회적이고 점진적이므로 지속적인 사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안다는 것은 조각그림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경을 접혀진 교과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22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상기 시킵니다.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습니다. 계집종은 육맥이고 자유하는 여자는
영맥입니다. 육신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 즉 약속을 받은 사람의 비유입니다.
23절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계집종은 육체를 따라 났다는 건 그들 자신이 원해서 한 겁니다.
자유하는 여자는 약속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는 이삭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삭이란 이름의 뜻은 ‘웃음’이란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생식기능이 없어 죽은 자와 같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 진
상태이기에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입니다. 진짜 우습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요’하고
반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분명한 바람(소망)을 주십니다.
믿음이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비전과 동력을 주십니다. 밥 먹고 일하지 않을
수가 없고 공장의 전기 스위치가 올라가면 기계가 작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작정과 섭리입니다. 육체를 따라
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롬8:7절 이하) 점점 멀어지고 맙니다.
잘 되면 제 덕이고 못 되면 하나님이 그런 줄 압니다. 욥처럼 말입니다.
첫댓글 영적인 생명유지를 위해 마리아처럼 주님과 껌딱지가 되어 그분 발앞에 앉아 생명의 말씀 듣는(먹는)중에 왕성한 믿음의 신진대사가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오늘이 되길 기도 합니다.
아멘~~아멘
살아있는 신앙은 신진대사가 계속 되어지고 고정관념이 없어지고 날마다, 때마다 새로운 말씀으로 진리의 성령이 임하셔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음을 계시하여 주십니다.
몸의 실제를 살아내고 있는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임을 찬양하며,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찬양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