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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비물질적인 세계 p.441
신평행우주론은 여러 개의 (사실은 무한히 많은) 물질적인 세계가 같은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일종의 다중 우주(多重宇宙) 이론이다. 비물질적인 세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미 ‘비물질적 평행우주론’이 증명되어 있다. 우리 인간은 모두 각자 자신이 구축한 비물질적인 세계에 산다. (이 세계를 불교에서는 마음의 세계라고 부른다.)
모든 인간의 비물질적인 세계, 즉 비물질계는 모두 서로 다르다. 이 세계는 물질계에 영향을 끼치며 서로 작용한다. 아직은 물질계가 비물질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크다. 인간의 욕망이 대체로 물질적인 것으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물체의 욕망은 진화 단계가 낮을수록 물질적이다. 인간이 진화를 거듭함에 따라 완전히 비물질적인 욕망을 향해 가게 된다. 바둑이나 체스가 좋은 예이다. 이들은 순수한 사념의 세계이다. 두뇌가 순수한 ‘논리적인 자극과 구조와 질서’를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바둑을 두는 즐거움은 순수한 비물질적인 욕망의 예이다. 이 게임들은 어떤 물질적인 것과도 연관이 없다. 혹자는 바둑판과 바둑돌은 물질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숙련된 프로기사(棋士)들은 눈을 감고도 200수 가깝게 바둑을 둘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불교가 인간의 비물질적인 진화를 내다보긴 하였지만, 좀 미흡하다. 지금처럼 기이한 인터넷적인 가상 세계로 진화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물질적이건 비물질적이건) 진화의 세계에는 고정된, 필연적인 방향성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비물질적인 마음의 세계를 ‘환상・망상・공상・상상의 세계’라고 부른다. 한 비물질적인 종(種)이 보기에, 다른 종의 정신세계는 환상・망상・공상・상상이다. 이 세계의 특징은 (궁극적으로) 선악이 없다는 점이다. 선악은 물질계처럼 그 크기에 한계가 있을 때 생기는데, 무한히 큰 비물질계에는 선악이 없다. 누구에게나 무한히 넓은 땅, 무한히 많은 여자(남자), 무한히 많은 음식, 무한히 많은 즐거움, 무한히 긴 수명이 부여되면 도둑질, 간음, 살인, 거짓말 등이 사라질 것은 분명하다.
설사 그런 일들이 벌어져도 개의(介意)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빼앗기고 잃어도 여전히 무한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한한 즐거움과 소유가 보장되어 있는데 그리할 리 만무하다. 45억 년 동안, 조그만 행성인 지구라는, 유한한 세계에 갇혀 살아온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버거운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설마 '가산적으로 무한히 많은'(countably infinite, Aleph-0) 즐거움을 가진 자가, ‘비-가산적으로 무한히 많은’(uncountably infinite, Aleph-1) 즐거움을 가진 자를 시기・질투・해코지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무한한 즐거움 사이에도 차별이 존재할 수 있을까? Aleph-1(셀 수 없는 무한 다음 단계) 만큼의 즐거움은 Aleph-0(셀 수 있는 무한) 만큼의 즐거움의 선망 대상일까? (Aleph-1은 실수의 개수이고, Aleph-0은 자연수의 개수이다. 둘 다 무한이지만 크기에 차이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lkg짜리 금괴를 Aleph-1개만큼 가진 자가 Aleph-0개만큼 가진 자보다 더 부자일까? 수학자인 필자의 머리로도 감당하기 힘든 주제이다.
(수학 집합론에 의하면, 돈을 Aleph-1원 만큼 가진 자가 Aleph-0원을 가진 자의 돈을 모두 뺏어도 그의 돈은 조금도 늘지 않는다. 여전히 Aleph-1원이다. 또, Aleph-1원 부자가 두 아들에게 각각 Aleph-0원씩 증여를 하고도 여전히 Aleph-1원 재산을 유지할 수 있다. 무한의 세계에는 이처럼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여러분은 이해가 가시는가?)
비옥함, 아름다움, 맛까지 무한히 많다면 더욱 그러하다. 악은 부족함에서 온다. 비물질계의 인간이 선인(善人)인 것은, 한계가 있는 유한 세계를 벗어나, 아무나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는 광활한 새 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비물질적인 땅은 한 사람이 아무리 많이 차지해도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 기이한 땅이다. 내가 자비심이라는 땅을 차지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자비심의 땅을 차지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다.
한 조각 맛있는 돼지고기는 한 사람의 몸(혀)만 즐겁게 하지만, 한 편의 맛있는 이야기(소설, 영화, 연극, 드라마, 뮤지컬, 오페라, 만화)는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종교는 극단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기독교는 ‘하나’만 지키면 만 가지 즐거움이 따라온다고 주장하고, 불교는, 무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아무것도’ 즐기지 않으면 최고의 즐거움이 찾아온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기독교는 하나(1)의 종교’이고 ‘불교는 영(0)의 종교’라고 표현한다.
물질세계와 달리 비물질적인 세계에서는 ‘하나’를 ‘무한히’ 많은 사람들이 공유를 할 수 있다. 한 모금의 물은 한 사람의 갈증만 해소할 수 있지만, 지식은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예를 들어 구구셈) 무한히 많은 사람의 지적 갈증을 해소한다. 한 조각 지혜나, 한 점 관점이나, 한 마디 가르침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 무지와 어리석음과 고정관념과 고뇌를 몰아낸다. 이들은 실로 화수분이다. 즉 비물질계에서는 열역학 제2 법칙(자연에서는 모든 것이 점점 더 무질서해지는 방향으로 흐른다)이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비물질계로 진화하는 것은 물질계에 비해서 훨씬(사실은 무한히) 더 경제적이다. ‘인터넷’이라는 발명이 좋은 예이다. 이 발명으로 전(全) 인류가, 거의 시차가 없는, 지식의 공유가 가능해졌다. 내가 어떤 사물, 사람, 생명체, 현상, 상황에 대해서 상상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동일한 대상에 대한 상상에 제한이 오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무-제약이다. 특정한 물리법칙들과 시공간(時空間)의 제약을 받는 물질계는, 아무 제약이 없는 이 비물질계의 극히 일부분이다. 이 환상・망상・공상・상상의 세계는 자유의 땅이다. 비물질적인 신자유주의의 땅이다.
물질적인 먹이사슬의 최정상을 차지한 인간은 물질적인 진화를 거의 멈추었다. 이제 인간은 비물질적인 세계로 진화하고 있다. 각자가 각자의 길로 무한히 가지를 치며 진화하고 있다. 우리는 같은 물질세계에 살아도, 같은 비-물질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다. 어떤 비물질적인 세계를 구축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세계의 끝에는 무아(無我)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 무상(無常)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연기(緣起)의 대해(大海)를 건너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이 끝에 도달한 자들은 이 괴물에게 잡아먹힌다. 그 순간 세계는 찬란한 대자유의 세계로 돌변한다.
무여열반과 단멸론
개별의식에 대한 집착이 단멸론이다. p.446
“무여열반(無餘涅槃-번뇌가 다해 몸과 마음이 둘 다 삼계(三界)에서 사라지는 것)에 들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자”라는 교리(敎理)는 결과적으로(혹은 궁극적) 단멸론(斷滅論)이다. 결국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 우주 중생이 모두 일시(一時)에 부처가 되어 무여열반에 들면 생명계(生命界)는 그 즉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생명계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생명계라는 유위법(有爲-원인과 조건, 즉 因緣으로 生成, 變化, 消滅하는 모든 것) 의 세계는 업(業)의 세계인데, 업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우주를 불모지(不毛地) 우주라 한다) 이 점에서는 일반적인 단멸론과 다를 바가 없다. 열심히 수행해서 사라지나, 한 생만 살고 사라지나,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단지 “언제 사라지냐?”라는 시간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군집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 철학・사상・교리가 군집의 행복・평안에 공헌하는가?, 아니하는가? 여부이다.
그런데 무여열반을 목표로 하는 ‘궁극적 단멸론’과, 원하건 원치 않건 ‘이번 생이 즉 한 생이 모든 생’이라는 ‘현실적 단멸론’은,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어느 것이 더 인류라는 군집에 혜택을 줄까?
궁극적 단멸론에 의하면, 중생은 무여열반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 고해(苦海)로 개처럼 자꾸 끌려 나와 윤회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 끌려 나와 윤회하는 것은 다 ‘자기가 못난 탓’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지는, ‘업 이론’ 내에서도,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공업(共業 집단의 업)이 별업(別業 개인의 업)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공업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 업의 작동은 공업과 별업의 연기작용(緣起作用)이다. 더 넓게는 유정세간업(有情世間業 생명계의 업)과 기세간업(機世間業 물질계의 업)의 연기작용이다. 빅뱅(Big Bang)은 최초의 업이다; 많은 이들이 그리 믿는다.
발이 실수해서 넘어질 때, 손으로 땅을 짚다 손이 삐었다면, 손은, 아무 잘못이 없지만, ‘발과 같은 몸에 속해 있다’라는 것으로 화를 입는 것이다.
사회를 하나의 군집생물체로 보게 되면, 지나치게 개인의 업 즉 별업에 집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개인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하는 것은, 개인이 과거에 저지른 일(業) 때문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마찬가지이다. 개인이 과분하게 또는 과소하게 과보(果報)를 받는 일은 생각보다 흔히 벌어진다.
위에 든 손과 발의 일화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손이 자신을 희생해 가며 땅을 짚어 발이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면, 발은 과도한 상을, 손은 과도한 벌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몸이라는 집단의 관점에서는 손이 문제가 아니라, 일단 몸이 살고 봐야 한다.
이런 집단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업이나 해탈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개인이 무여열반에 들어 사라져도, 나머지 사람들은 즉 중생계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때때로 개별 부처가 출몰해도, 중생‘계’는 영원할 것이다(衆生界常住). 이 면에서 주인은 ‘중생계’이지 부처가 아니다, 부처는 손님이다: 중생계는 유(有, 假)요 부처는 무(無, 空)이다. 그렇게 유와 무가 어우러져 돌아가는 것이 법계(法界, 中)이다.
이 점을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게 되면, 군집의 존속이 있을 뿐이지, 개별자라는 개념은 환상・망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즉 주인은 유전자이다. 군집은 같은 유전자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종은 조금 덜 비슷한 유전자로, 속은 종보다 조금 덜 비슷한 유전자로, 과는 속보다 조금 덜 비슷한 유전자로 연결된 군집생물체이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동물계는 하나의 군집생물체이며, 식물계 역시 하나의 군집생물체이다. 마지막으로, 지구 생물계가 하나의 군집생물체이다. 그뿐만 아니라 생물계나 무생물계나 동일한 물질 즉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둘은 하나의 확장된 군집 세계이다! 이것을 일합상자(一合相者)라 한다. 그런데 이 ‘일합상자’는 시공간을 통해서 끝없이 변하고 진화하므로 ‘무아(無我)’이다. 이것은 금강경에 ‘일합상, 즉비일합상, 시명일합상(一合相, 卽非一合相, 是名一合相 일합상은 일합상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일합상일 뿐이다)’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각각 다른 학문 분야가 모여 하나의 군집을 이룬 것을 ‘일 세계(university, uni는 일, versity는 세계이다)’라 하며, 각각 다른 별과 다른 은하들이 모여 하나의 군집을 이룬 것을 ‘일 세계(universe, uni는 일, verse는 세계이다)’라 한다. 각기 다른 것들이 모여 합쳐(合) 하나의(一) 세계(相)를 만든 것을 ‘일합상(一合相)’이라 한다. 결국 이 가르침은 (常住不變하는 실체로서의) 개별자라는 아(我)도 없지만, (상주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전체아(全體我)’ 또는 ‘집단아(集團我)’도 없다는 말이다. 이 집단아 개념 중 가장 큰 것이 일합상자이다. 또는 브라흐마(梵)이다.
불교는 우주가 일심(一心)이라 하지만, 진화생물학에 의하면 도도한 유전자의 흐름만 있을 뿐이다. 이기적인 유전자들의 흐름! 그리고, 이 이기심(貪慾, 渴愛)이 이 세상을 고해(苦海)로 만든다. 그런데 유전자는 진화하므로 이에 따라 이기심도 진화하고, 이 세상에는 새로운 종류의 고가 끝없이 탄생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에서, 끝을 알 수 없는 미래로, 인식과 생명은 끝없이 흐른다. 누구나 예외 없이 유한한 능력을 지닌 물거품 같은 인간은,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쾌락’과 ‘무한한 수명’과 ‘무한한 세상’을 꿈꾼다. 매번 무참히 실패하면서도. 그래서 항상 삼천대천세계는 살아남은 자들의 환상・망상・공상・상상으로 몹시 소란스럽다. 그런데, 죽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살아있다, 아니 우리가 바로 죽은 자들이다. 우리는 생체 유전자이자 문화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극적 단멸론’이건 ‘현실적 단멸론’이건, 이 세상에 ‘단멸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7. 도(道) p.453
우리나라는 동북아시아의 오랜 전통으로 인하여, 道를 비, 바람을 부리고 하늘을 날고 천 리 밖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그리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으로 착각하고 오해하는 경향이 많다. 道(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오병이어(五餠二魚) p.453
기독교 [신약]에 오병이어(五餠二漁)라는 기적이 등장한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벌이고 있었는데 식사 때가 되었다. 나누어 먹으려고 음식을 모아보니, 겨우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지만, 5천 명 대중이 먹고도 남았다는 일화이다.
이 일화는 많은 문제점을 시사(示唆)한다. 그리고 경전을 기록한 자들과 후대에 해석하는 자들의 의식(意識) 수준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 일화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의 사상(思想)과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富)는 지상(地上)에 쌓을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쌓으라고 했다. 그리고, 철저한 구약 율법(舊約律法)의 고수(固守)를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다. 천번 만번 맞는 말씀이다.
(구약 레위기를 펼치고 한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그들의 율법이 얼마나 엽기적(獵奇的)으로 기괴한지 단박에 깨달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 기독교인들은 목사, 신부, 신도 할 것 없이 절대로 레위기를 언급하지 않는다) 당시 유대인들이, 그 당시로부터 이미 500년 전에 부처님이 유언으로 남기신 ‘소소(小小)한 계율은 폐지해도 좋다’고 하신 말씀을 들어 알고 있었다면, 자신들의 계율인 율법을 반성(反省)해서 검토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수는 “외적인(몸적) 율법 준수가 아니라 내적인 율법 준수가 되어야 한다, 즉 마음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한다”라고 했다. 이렇게 몸의 행위 이전, 마음의 행위를 강조한 예수가,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고 설교한 예수가, 야외(野外)에 모인 오천 대중의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초점(焦點)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종교 경전은 맹독성 복어(鰒魚)이다. 잘못 요리(해석)하면 그 독으로 죽는다. 그리고 종교는 가시(온갖 헛소리 망상, 환상) 많은 생선이기도 하다. 가시를 조심해서 잘 발라내지 않으면, 가시가 목에 걸려 죽거나 죽도록 고생한다. 크고 작은 가시를 판별해 내는 천하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시금석(試金石 층샛돌)이 있다: 종교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사람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양식은, 한 그릇 밥이라면 한 명 또는 몇 사람밖에 배를 채우지 못한다. 반면에 비-물질적인 양식은, 한 그릇으로도 수없는 사람들의 배를 채운다. 뛰어난 사상, 철학, 가르침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와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인식의 전환은 빵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정신적인 굶주림과 고통을 해결해 준다. 예수는 야외에 모인 군중에게 단 몇 마디 말로(당시는 확성기가 없었으므로 대용량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설교’라는 ‘비-물질적인 5餠 2魚’로 대중(의 마음과 영혼)을 배부르게 하였다. 대중은 설법에 감동한 나머지 마음이 배불러서 밥을 안 먹고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5餠2魚밖에 못 먹었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또는 밥 먹을 생각이 안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해석해야 예수의 면목을 살리는 길이다.
더욱이, 빵과 밥이 넘쳐 나는 이 시대에 아직도 ‘물질적인 오병이어’라니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아닌가? 수시로 끼니를 거르는 지독히 가난한 동네와 끔찍하게 못 사는 후진국에서나 통할 법인 얘기이다. 빵과 물고기로 대표되는 먹을거리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이지 종교의 영역이 아니다. 거꾸로 종교가 득세하면 민중은 오히려 배를 곯았다. 일부 종교인들이 지옥을 동원한 ‘비-물질적인 공갈 협박’으로 수탈해 갔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생산 활동은 전혀 하지 않는 종교인들이 인구의 수십 프로를 차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옛날 조선 시대 마을에 판소리꾼이나 남사당 패거리가 오면 그 마을의 사람들이나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으로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수십만에서 수억 명이 즐긴다. 당신이 사람들 마음을 울리는 노래 한 곡만 유튜브에 올리면 한꺼번에 전(全)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유튜브 조회수가 자그마치 20억 회를 넘어섰다. 오병이어가 아니라 ‘1 餠 0 魚’ 또는 ‘0 餠 1 魚’로도 충분하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때는 판소리꾼과 남사당 패거리가 마을을 떠나면 그 좋던 소리와 멋진 공연 모습도 같이 떠나버리지만, 지금은 컴퓨터, CD, DVD에 저장해 놓고 유튜브에 올려놓고 영원히 즐길 수 있다, 언제든지 원할 때마다, 스위치만 켜면 갑자기 그 남사당 패거리가 부활해서 눈앞에서 오두방정을 떨며 공연하고, 소리꾼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댄다. 진실로, 시공(時空)을 초월한, 오병이어 기적의 시대이다.
종교가 세력을 잃어가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종교의 기적이 너무 시시해졌기 때문이다. 현대농업은 종자 개량과 유전자공학과 농업기계화와 화학비료 개발 등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생산력을 자랑한다. 그러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초라해졌다. 설사 그 기적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이 천계(天界)에 보좌(寶座)를 설치하고 펴는 신(神) 삼두정치(三頭政治 triumvirate)의 일위(一位)인 예수가 궁벽진 갈릴리 해안의 타브하(Tabgha) 마을에서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자들에게 베푼 일회적인 기적인 데 비해서, 현대과학이 베푸는 은혜는 善人과 惡人, 信者와 不信者를 가리지 않고 ‘평등한 시혜(施惠)’를 되풀이해서 베푼다. 장소를 구별하지 않고 베푼다. 그것도 지금부터 영원히 베푼다. 즉 시공(施空)을 초월한 베풂이다.
조선 시대 때 겨울딸기는 옥황상제가, 병든 어미의 입맛을 걱정하는 천하의 효자에게 내리는 상(賞)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효자를 포함한 누구나 겨울에 딸기를 맛볼 수 있다. 비닐(하우스)이라는 간단하다면 간단한 발명품을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종교의 베풂은 우뇌에서 나와 우뇌에 작용하고, 과학의 베풂은 좌뇌에서 나와 좌뇌에 작용한다. 한쪽은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비합리적인 마음(감정)에 작용하고, 다른 쪽은 합리적인 방법으로 합리적인 마음(이성)에 작용한다. 종교가 참이라는 주장은 맹목적인 믿음에 의지할 뿐이어서 근거도 없고, 비합리적이기 일쑤이지만, 과학이 참이라는 주장은 반박할 수 없는 합리적인 증거를 내민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심신으로 정신 분열에 시달린다. 마음은 종교로 향하지만, 몸은 과학으로 향한다. 마음으로는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춘 이야기)를 믿으면서, 몸으로는 비행기를 탄다. 심신분리현상(心身分離現象)이다.
종교 경전은 수천 년 전에 기록된 것이고 개정이 불가하지만, 과학의 경전은 끝없이 개정된다. 종교의 경전은 그 내용의 진위(眞僞)에 관한 의심을 천하의 악행으로 간주하여 금하지만, 과학의 경전은 의심을 장려하고 의심을 통해서 발전한다.
신약에 병자를 고치는 얘기가 나오지만, 지금은 부분적으로나 가능한 피부나 뼈 등의 인공 배양이 심장, 간, 폐, 위장, 콩팥 등의 주요 장기의 인공 배양으로 발달하게 되면, 종교 경전 치유의 기적은 모두 시시한 이야기로 전락할 것이다. 치유의 은사를 약속하고 자랑하는 기독교 신약에도, 콜레라, 장티푸스, 흑사병 등 집단적인 질병을 떼로 치료한 경우는 등장하지 않는다. (全知한 하나님과 그 아드님조차도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 현대의학은 과거에 치료하지 못했던 질병들을 다 치료한다. 그것도 특정 개인을 안 믿어도(거꾸로, 믿으려면 독하게 믿어야 한다), 그리고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는 하늘나라 독재자(celestial dictator)를 안 믿어도, 다 치료해 준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치료해 준다. 의사는 자기를 (모든 병을 치료하여 완쾌시키는 전능한 존재로, 혹은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착한 사람으로) 믿어야만 치료해 준다고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돈만 내면 된다. 그러니 비-형이상학적이고, 단순한, 계산이 빠른, 그리고 즉물적(卽物的)인 사람들이 돈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평등한 시혜이다.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은총이다.
이제 세상은 ‘돈 앞에 만인이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종교인들도 돈을 숭배한다. 믿음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믿으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선전한다. 신학적인 근거는 소위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다.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거나, 성상(聖像) 앞에서 기도하거나, 오래된 뼈를 모신 곳에서 기도하면, 크게 은혜롭고 대길(大吉)하다고 부추긴다. 영적인 구원은 골고다 언덕 밑으로 굴려 떨어뜨리고, 저 멀리 산 아래로 던져버렸다.
그렇게 번 돈을 가지고 속세로 달려가 마음껏 즐긴다. 혹자는 도박을 하고, 혹자는 주식 투자를 하고, 혹자는 양주를 마시며, 혹자는 고급 옷, 고급 음식점, 고급 호텔, 해외여행, 영화관람 등 즐길 것은 다 즐기며 산다. 그러면 그 돈은 다시 십자가와 불상으로 간다. 타락한 세상에서 더러워진 불인(不仁)한 돈이 회개와 참회를 하러 신성한 곳을 찾아간다. 속세를 거칠고 힘 있게 흐르던 돈이 힘이 넘친 나머지 용솟음치더니 성스러운 하늘나라까지 물길을 내고 말았다. 성속(聖俗)을 순환하며 천지를 흐르는 돈의 흐름이다. 희대의 전교(錢敎) 교주 장 여사 말마따나 돈은 흘러야 한다. 중생계는 돈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이 물질적인 풍요의 시대에 신약의 ‘물질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은 수명이 다했다.
들으면 우리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편협한 시각으로 한 치 앞밖에 못 보던 우리가 멀리 보게 하고, 낡고 좁은 통에 갇혀 있던 의식을 광활(廣闊)한 창공(蒼空)으로 끌어내고 밀어내는 가르침과 말씀이야말로 진실로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한 말씀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배고픔을 채워주니 어찌 기적이 아니랴. 성인(聖人)은 ‘한 번’ 입을 열어 미래세의 ‘무한한’ 중생의 마음을 배부르게 하였다. 진실로 ‘일구일설(一口一舌, 一口一說)의 기적’이다.
일찍이 2,500년 전에 소크라테스는 물었다. “아테네 시민이여, 오로지 돈을 벌고 명성과 위신을 높이는 일에 매달리면서, 진리와 지혜와 영혼의 향상에는 생각이나 주의를 조금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김한영 번역) 이 질문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디지털화된 지식이 인터넷을 통해 즉각적인 접근성을 제공하면서, 오히려 지식획득은 미래 시점으로 밀려나고,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선정적인 황색 기사와 비디오 게임이 지식습득으로부터 오는 (뇌 신경세포가 필요로 하는 전기화학적인) 흥분과 자극을 대체하는 이 시대에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더욱 유효하다.
숨은 도, 드러난 도 p.459
도는 항상 숨어있는 것일까? 도(道)는 항상 우리 곁에 있으나 우리가 못 볼 뿐이다.
부처님은 임종에 즈음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무엇을 주먹에 쥐고 감추어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내 가르침에 의지해 수행하라.
그런데 사람들은 뭔가 은밀(隱密)하고 비밀(祕密)스러운 가르침을 찾아 헤매는 성향(性向)이 있다. 삼법인(三法印)ㆍ사성제(四聖諦)ㆍ팔정도(八正道)가 있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리할까? 게다가 84,000경 장광설(長廣舌)까지 있는데, 뭘 찾아다니는 것일까? 아마, 도망가는 짐승과 식용식물을 찾아다니던 수렵(狩獵) 채집기(採集期) 습성의 흔적일지 모른다. 주거지 근처의 것은 다 잡아먹고 따먹고 캐서 먹었으므로, 멀리 이동해야 먹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므로 옛 습성은 이미 오래전에 쓸모가 없어졌건만, 사람들은 잠에서 덜 깬 듯, 꿈속에 사는 듯, 옛 습성(習性)의 숙취(宿醉)에 빠져있다. 그래서 태백산에서 수십 년 은거(隱居)한 도사(道士)를, 소백산 깊은 토굴(土窟)에서 수십 년 참선(參禪)한 스님을, 그리고 지리산 깊은 골에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수십 년 묵은 도라지 같은 때 묻지 않고 얼굴 맑은 수행자(修行者)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숨어있는 것이 최고(最高)가 아니다. 드러난 것은 이미 검증(檢證)을 거쳤으므로, 위험(危險)하지 않다. 모르는 걸 잘못 먹으면 독(毒)에 중독(中毒)될 수 있다. 낯선 버섯을 먹다 독버섯을 먹고 죽는 사람들이 매년 발생한다.
산에 은거(隱居)하여 수십 년 道를 닦았다는 사람들을 조심(操心)해야 한다. 세상(世上)은 무섭게 변하는데, 산속에만 살았다면 시대(時代)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는 기이한 주장은, 예를 들어 천둥・번개를 관장하는 용에 대한 믿음은, 그냥 현대과학에 무지해서 뱉어내는 말이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독이 없을지라도, 쉬운 말을 어렵게 표현하는 비상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 긴 시간을 들여 애써 파악하고 보면, 그 가르침의 그 평이함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뭔가 신비함을 찾아다니는 추종자의 마음’과 ‘시대에 뒤처진 도사(道士)의 표현 방식’이 연합해서 오해(誤解)를 빚은 것이다. 주어, 동사, 형용사, 부사, 전치사, 조사, 목적어가 문법의 우리를 박차고 뛰쳐나가 어지러이 제멋대로 날아다니면, 신비감은 가속화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진리가 숨어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언어도단, 심행멸처(言語道斷 心行滅處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소멸한 곳)’라고 몇 마디 얻어들은 문자가 있으면, 무른 된장에 떨어진 야무진 돌처럼 확신은 깊어진다. 대장경 84,000권에 차마 기록하지 못한 진리를 저분이 독점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이런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 진짜 독버섯일 수도 있다. 그것도 수십 년 묵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독버섯! 온통 황당무계하고 괴력난신(怪力亂神)적인 데다가 혹세무민까지 하는 환ㆍ망ㆍ공ㆍ상(幻・妄・空・想-幻想ㆍ妄想ㆍ空想ㆍ想像)으로 이루어진 허깨비일 수 있다. 이런 생각에 물들면, 몸은 현대 과학(자연과학과 인문과학) 문명의 빛으로 휘황찬란한 백주, 대낮에 살아도, 마음은 햇빛 한 점 안 드는 만 길 깊이의 동굴 속에 사는 것과 다름없다.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조심할 일이다.
중국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이 있다. 도로 건설 중 땅속에서 커다란 알이 발견되었다(이런 유의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을 자르자, 알 속에 좌정한 머리가 긴 사람이 나타났다. 알껍데기는 그 사람의 손톱과 발톱이 자라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 바로 전 부처인 가섭 불 때 수행자인데 석가모니불을 기다리다가 선정(禪定)에 들었다”라고 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디 계시느냐?”라고 물었다. 사람들이 “석가는 이미 2,500년 전에 입적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펑’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이는 자그마치 수백만 년을 선정에 들어 있었던 거다. 하지만 아쉽고 멍청하게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득도하셨을 때 선정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지나쳐버렸다.
그가 설사 사라지지 않고 이 시대를 살아간다 해도, 바뀐 세상에 적응하려면 엄청나게 힘들 것이다. 수백만 년 전 사람이라면 인간은 생긴 것도 동물원의 침팬지보다 더 동물적이고, 지능도 더 저열하고, 문화도 침팬지보다 더 미개한 시절인데, 무슨 수로 이 어지러운 현대에 적응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현대교육을 받지 않았으므로 현대문명을 이해하고 거기 적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애완동물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들은 인간과 같이 살지만 인간이 이룩하고 향유(享有)하는 과학기술문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며,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것이 더 우수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내 말이라고 무조건 따르지 말고, 행해보고 맞으면 따르라’라고 하셨다. 이것은 진정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자세이다. 부처님은, 하늘나라에 태어나려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에게 ‘과연 그 사람의 조상들이 제사를 지냄으로써 하늘나라에 태어났는지’를, 그 사람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수 대에 걸쳐서 물었다.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나오자, 부처님은 ‘그렇다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헛수고’라고 지적한다. 불경 도처(到處)에서 이런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 수행의 최고경지인 해탈조차도, 수행자가 자신이 해탈했음을 남이 말해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는 것이다: 이것은 오분향 중의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에 해당한다. 자신의 번뇌가 소멸하였는지, 즉 누진통(漏盡通)을 이루었는지는 스스로 아는 것이다. (초기 불전 ‘장로게(長老偈)’와 ‘장로니게(長老尼偈)’에는 이런 증언이 무수히 나온다) 최고경지인 해탈이 그러할진대, 지금 바로 여기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따라서 신비주의적인 면은 선도(仙道)나 힌두교나 배화교(拜火敎) 등의 외도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후대의 가필(加筆)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한 아이가 ‘우리 아빠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총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라고 큰소리치면, 다른 아이는 더 큰 목소리로 ‘울 아빠는 우주를 날아다니고 핵폭탄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라고 응수한다. 뻔히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리 대꾸한다. 모든 종교적인 초자연적인 현상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기이한 주장을 하면 철저히 검증을 해볼 일이다. 그러고도 믿을 만하다면 당신은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엄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으면 이미 시중에 유포된 가르침보다도 못한 저질 싸구려 주장과 견해를 턱없이 비싼 값을 주고 살 위험이, 즉 된통 바가지 쓸 위험이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십중팔구 당신이 게을러서 공부를 안 한 결과이다. 그래서 훨씬 더 품질 좋은 가르침이 이미 시중에 어디에나 널려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한탕을 노리는 당신의 사행심이 원인일 수도 있다. 심하게는, 생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권태에 뿌리를 둔 선정주의(煽情主義 sensationalism)일 수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는 베이어드 스폴딩(Baird T. Spalding)의 ‘극동 스승들의 삶과 가르침(Life and Teaching of the Masters of the Far East)’이라는 5권짜리 책을 권한다. 인도 카슈미르 지방에 석가와 예수가 손을 잡고 나타나는 등 경천동지할 내용들이 펼쳐진다. 하지만 당신의 삶이 변용될지는 의문이다.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보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볼 때야 기가 막히게 재미있지만, 다음 영화가 개봉될 즈음이면 그냥 흘러간 영화일 뿐이다. 아! 덧없는 이 세상에 대한, 부처님의 선언인 ‘무상(無常)’은 진리 중의 진리이다(無常是眞中眞).
이 세상(器世間)과 우리 몸과 마음은 연기(緣起)적인 것이므로, 개인과 도(道)는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회와 즉 타인과의 교류가 없는 도는 죽은 도이다. 그런 도가 의미가 있다면, 차라리 돌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돌 역시 번뇌도 없고 말도 하지 못한다. 방편(方便)이 사회와의 관계 안에서 나온다면, 도(道)도 이미 그 안에 사회성을 내포하고 있는 거다. 침팬지가 깨달음을 얻어도 인간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은 분명하다. 침팬지의 깨달음은 침팬지들에게나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식과 언어를 공유해야만 깨달음의 내용과 수준이 일치하고, 소통이 가능하고,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사반세기(25년) 전에 기이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19세기 초반 혼란스러운 동북아시아 국제정세 속의 티베트를 무대로 한,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주장하는, 소설이었다. 열심히 도를 닦은 한 티베트 스님이 예티(설인 雪人 눈사람)들을 교화한다는 내용이다. 눈 덮인 깊은 설산을 찾아가, 자신을 보고 도망가는 적대적인 예티들을 우여곡절 끝에 동굴에 모아놓고 설법한다. 이 스님의 전생이 예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동굴이 바로, 그 스님이 직전(直前) 전생에 살던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알아봤고 그들의 언어를 기억해 냈다.
그러므로 우리들 사이에서, 즉 사회 안에서 숨쉬고 살아 움직이며 소통하는 드러난 도(道)가 진짜 도이다.
부처님의 45년 전법인생(傳法人生)은 중생과 함께 한 소통의 삶이었다. 부처님은 임종 당일 병으로 인한 극심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부처님을 찾아와 기어코 제자가 되겠다고 떼를 쓰는 120살이나 먹은 외도(外道) 수행자 수발타라를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이고 그와 문답을 나누었다.
도(道)가 물이라면 깊은 산속의 옹달샘이 아니라, 마을 한가운데의 우물이다.
첫댓글
오늘도 하루 상큼하고 기분 좋게 출발 하시어
꽃피는 날들에 행복과 사랑이 넘치시기를 기원 합니다
본인이 강교수를 존경하는 이유는 道를 얻었다고 해서 장사꾼처럼 종교를 만들지 않았고 道를 얻었다고 시끄럽게 떠들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