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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미쁘신 분의 미쁘다 이 말이여
본문 : 벧전 1:23-25절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설교 작성노트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점은 믿는 자들이 믿음의 “근거”(根據), 즉 뿌리를 어디에 박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본문은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말씀한다. 능력, 은사, 기분, 감정 등은 아름답고 화려해보이나 “마르고 떨어질” 풀이나 꽃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면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안전한가? 이를 증언하려는 것이 내용목적이다.
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말씀하신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보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견고하게 세워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한 불변의 복음인 것이다. 여기에 적용목적이 있다.
강론
여러분 앞에 질문을 드림으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하는 질문입니다. 헬라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역설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만이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뜻이지요.
어느 노 교수님은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만일 형제가 “신앙생활 백년을 해보니”라는 글을 쓰게 된다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점을 시편에서는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6-27)고 진술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1:25)한 것은 이사야서 40:6-8절의 인용입니다. 하나님은 “외치는 자의 소리여(40:3),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40:6)하십니다. 그러자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고 대답합니다.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6-8)하십니다.
그러면 전도자가 외쳐야 할 말씀의 내용(內容)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게 되는데 하나님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 40:9)하십니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는 말씀이 어느 말씀과 결부되는 것입니까?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즉 부귀영화 권세 등 모든 것이 변화무상한 이 세상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눅 21:33)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는데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핵심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복음(福音)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5)고 “임마누엘”하셔서 이루어주신 “복음”(福音)이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해설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활적으로 중요한 점은 “믿음”의 토대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점입니다. 어떤 분은 믿음의 근거를 “불을 받았다, 영음을 들었다”는 체험에 둡니다. 어떤 분은 병 고침을 받았다는 “경험”에 둡니다. 방언을 받았다는 “은사”에 둡니다. 어떤 분은 “축복”에 둡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한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지 나흘만에 살아난 “나사로”는 다시 죽었으며, 홍해는 아무 때나 갈라지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점에 너무나 둔감하고 소홀한 것 같아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작성하게 된 것입니다.
조크입니다만 어떤 분이 여객선을 타고 가다가 바다에 결혼반지를 빠뜨렸답니다. 어떻게 했는가? 그곳에다가 원을 그려놓았다지요. 훗날 와서 찾으려고요. 여러분은 웃으셨겠지만 그러면 여러분은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 두셨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조석으로 변하고 우리의 심령이 바람에 요동하는 바다 물결같이 자주 흔들리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신앙의 근거를 조석으로 변하는 기분이나 감정에 두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바다에 원을 그리는 것과 같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를 당한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 두었는가? 그의 믿음은 무엇을 붙잡고 의지했기에 그토록 담대할 수가 있었는가? 5병2어의 이적이 아닙니다. 자신이 물 위로 걸었던 경험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변화하시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이 보고 듣고 한 변화산상의 경험보다도,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確實)한 예언이 있다”고 단언(斷言)합니다. “더 확실한 예언”,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 두었기에 그토록 담대할 수가 있었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신 영음에 두었던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1:15절을 보겠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합니다. 4:9절에서도 거듭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합니다. 바울의 믿음의 근거는 “미쁘다 이 말이여”에 두었던 것입니다.
“미쁘다”는 원어는 피스토스(pistos)로 믿을만 하다, 확실하다,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믿어야 할 “이 말이여”가 어떤 내용인가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후에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은 다름 아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즉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어 받게 해서 구원 얻게 하려는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미쁘다 이 말이여”를 증언하다가 칼로 목이 잘리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도가 믿고 의지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시 상기시킵니다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2:11절을 보겠습니다.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붙잡고 의지한 것은 “미쁘다 이 말이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라”고 확신을 나타냅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합니다. 만일 환난의 날에 참지를 못하고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2-13)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입니다. 즉 우리 자신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는 항상 미쁘시니”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을 만하시다, 신실하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否認)하실 수 없으시리라”한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의 책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지켜주시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는 항상 미쁘시니”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실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하나님 자신을 부인(否認)하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거짓말 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하십니다. 결코 결단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이시라고 단언합니다.
바울이 믿은 하나님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살전 5:24)한 미쁘신 하나님입니다. 바울이 믿고 의지한 것은 “미쁘신 분의 미쁘다 이 말이여”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6:18절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變)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합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변하지 않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앞 절인 6:1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약속(約束)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합니다. 확인하셨습니까? “약속과, 맹세”가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미쁘다 이 말이여”인 것입니다. 믿을만한 것이 없는 세상에 “이 두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기에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소망(所望)이 있고 안위(安慰) 곧 위로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고 권면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여 보배라는 말같이 “더 확실한 예언”도 알고 믿을 때 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19편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 19:7-11)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까? 주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까? 베드로전서 1:8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합니다. 보지 못하였으나 “믿고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입니까?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한 “약속”, 즉 성경에 근거한 믿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모세 5경은 약 3500년 전에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은 말씀입니다. 변하지 않은 것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고 말씀하셨는데 기록하신 대로 성취(成就)하여주신 것이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에는 국보보다도, 세계문화유산에도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3500년 된 보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리고 “미쁘다 이 말이여”를 마음에 간직하고, 입으로 시인하며, 손으로 붙잡고, 발로 그 위에 굳게 서서 자신을 목을 형틀 위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행한 고별설교에서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하면서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25, 32)고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20)한 성도들을 “주와 말씀”에 부탁하고 떠납니다.
어찌하여 “주와 및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지 아십니까? 성경은 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된 말씀이요, 환난 날에 여러분을 붙들어줄 분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주 성령”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미쁘다 이 말이여”를 외치시기를 바랍니다. 견디다 못해 쓰러질 지경에도 “미쁘다 이 말이여”하고 선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노라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한 승리하는 자가 되실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제창하십시다. “미쁘다 이 말이여”!! (찬송 393장)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