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설날 연휴에 7박 8일 여행을 가게 되었다. 동해안을 돌아보자는 남편의 제안에 한적한 겨울 바다를 볼 생각에 들떠 좋다고 했다. 설악산 울산바위에 가자고 해서 ‘바위쯤이야’하는 순진한 생각으로 흔쾌히 동의했다.취준생 큰아들의 머리도 식혀 줄 겸, 취직해 나가면 여행을 함께 가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나도 퇴직한 상태라 날짜에 연연하지 않고 맘 편히 떠난 퇴직 기념 가족여행이었다.
강원도부터 동해안을 따라 둘러볼 계획으로 속초에 숙소를 예약했다. 점심시간 포함 6시간 이상 운전해 숙소에 도착했다. 여행할 몇몇 곳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지와 겹쳐 설레기도 했다. 오후에는 낙산사를 둘러보았다. 날씨가 무척 추웠지만 어렵게 찾아온 사찰이기에 구석구석 다니며 구경했다. 홍련암과 해수관음상까지 낙산사를 일주하며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풍경에 빠져 들었다. 수학여행 왔던 이야기도 하며, 전각마다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새해 기도도 올렸다.다음 날 가벼운 마음으로 설악산을 향해 출발했다. 산이 가까워질수록 봉우리들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멋지다는 말을 쏟아내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흔들바위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올랐다. 고개를 들어 보니 저 위쪽에 바위산이 펼쳐 보였다. 남편이 거기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그곳이 바로 울산바위라고 했다. ‘허걱! 무슨 바위가?’ 말이 막혀 나오지 않았다. 멋지다고 좋아했던 그곳이 내가 이제부터 올라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니 준비도 하지 못한 숙제를 지금 당장 내야 할 때처럼 막막했다. 흔들바위에서 다시 내려가 비선대 쪽으로 가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목표인 울산바위를 꼭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비선대는 여고 때 수학여행을 깄던 곳으로 남다른 추억이 있다. 비선대 계곡 오른쪽에 기암괴석이 펼쳐진 암반층을 한 줄로 서서 걸었다. 높이 솟은 바위들은 살짝 건드리면 앞으로 쏟아질 것 같았지만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개구쟁이 기질이 있던 친구가 갑자기 엉뚱한 행동을 했다. 암반 웅덩이를 훌쩍 뛰어넘으려다 아래쪽으로 밀려 내려가는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 줄을 서서 걷는 행렬, 내 바로 앞에 섰던 친구였다. 잠깐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나도 뒤이어 웅덩이를 향해 뛰어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는 친구의 손을 붙잡았다. 아슬아슬한 광경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모두 놀랐고, 내가 친구의 손을 끌고 올라오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웅덩이는 안전 난간이 없었지만 물이 진초록색인 것이 깊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나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미 아이들이 울산바위를 향해 앞서기 시작했고 우리도 뒤를 따랐다. 좁은 길에는 설날 연휴라 그랬는지 산행 온 사람이 많았다. 한 줄로 오르내리기 복잡할 때가 자주 있었다. 게으름을 피우면 민폐가 되는 상황이었다. 천천히 걷는 습관인 나는 어쩔 수 없이 벅찬 발걸음이 되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를 때는 너무 힘들어서 뒤돌아 내려가고 싶었다. 마음을 다잡고, 이런 험한 곳까지 계단을 놓은 사람들이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걸었다.어느새 873m 높이의 울산바위 정상에 도착했다. 산행의 매력은 정상에서 둘러보는 경치에 있을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정상에서 보는 경치 앞에서는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 장관을 보겠다고 다시 산을 찾는 것 같다. 남편은 투덜대는 나를 뒤에서 밀며 올라오곤 했다. 그래도 정상에 오르면 더없이 좋아할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기에 내 투정을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끝까지 함께 올라왔다.
울산바위는 2013년에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병풍처럼 우뚝 속은 화강암 덩어리가 크고 작은 것을 더하면 30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거대한 바위가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는 동양 최대의 돌산으로 그 둘레가 4Km다. 정상에서 대청봉, 중청봉, 천불동계곡, 화채능선, 서북주능, 동해와 속초시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울타리같이 생겼다고 하여 '울산', 우는 산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는 울산바위의 정상에 올라간 것이 뿌듯했다.언제 올라오기 싫다고 했냐는 듯 활짝 웃으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간식을 먹고 쉬었다가 내려오게 되었는데 중간쯤 내려오다 탈진이 되고 말았다. 늘 바쁜 일상이라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체계적인 운동을 하지 못한 내가 급하게 산행을 한 탓이었다. 온몸에 기운이 빠져 휘청거렸다. 흔들바위까지 겨우 내려왔을 때, 다리가 풀려 아무리 애써도 힘이 들어가지 않고 제자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아이들은 서둘러 산에서 내려간 상태였다. 놀란 남편이 나를 부축하고 내려오게 되었다. 이렇게 사람이 갑자기 무기력해질 수 있을까,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몸 때문에 눈물이 났고, 여행 초반부터 극기훈련을 시키는 남편이 원망스러워 더 눈물이 났다. 왕복 5시간이 넘는 사투였다. 저녁에 아픈 다리와 허리를 계속 주물러 주었더니 조금 나아진 듯했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몸이 무겁고 발을 옮기기도 힘들었다. 약국에서 산행한 일과 증상을 말하고 붙이는 약과 먹을 약을 사서 먹었다.
그 후로도 계속된 여행 스케줄을 모두 아픈 몸으로 억지로 소화해 낼 수밖에 없었다. 한두 코스 정도 쉬고 싶었지만, 엄마의 껌딱지인 작은 아들이 엄마가 안 가면 자기도 안 가겠다고 슬며시 몸을 빼는 바람에 기어코 함께 가게 되었다. 고성 통일전망대, 정동진의 겨울 바다, 경주의 왕릉과 불국사와 석굴암, 통영 해저터널과 야경 투어, 박경리기념관, 눈에 덮인 덕유산 향적봉, 순창 채계산의 국내 최장 출렁다리(270m), 멋진 풍경과 잔도로 유명한 용궐산 하늘길을 끝으로 긴 여정 동안 울산바위 산행 후유증으로 심하게 고생했다.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통스러운 내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이 남편은 정해진 스케줄을 강행했다. 힘겨워하는 나를 밀고 끄느라 남편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행하는 내내 체력이 약해진 것을 확인했기에 운동으로 체력단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울산바위를 내려올 때의 아픔은 잊고 싶은 추억이지만, 다시 가기 어려울 것 같은 울산바위에서 둘러본 설악산의 기품 넘치던 풍경만은 잊히지 않는 산행의 유혹이다.
첫댓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가족여행이자 극기훈련이었네요
그래도 평소에 가족과 함께 한 산행 경험이 자주 있었으니 그렇게 꽉 찬 일정이 기능했을 것 같아요
저는 산행에 쉽사리 합류를 못합니다
저질체력이라서요
게으름으로 불어난 뱃살이 출렁거려 산행하다
중도하차 할까 봐 아예 포기를 합니다
올해부터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져서 건강 챙기는 삶을 누려볼까합니다
바짝 긴장하며 글을 읽었습니다
마치 산행을 같이 하는 것처럼요
건강에 큰 이상 없었으니 퍽 다행입니다
산에 오르기는 힘들어도 정상에서 구경하는 경치는 늘 너무 멋지다는 생각을 합니다.
평소에 운동을 해야하는데 허리에 협착이 있고 발목이 약해서 산행은 이제 무리인 것 같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민선생님의 산행 소식은 나를 자주 놀라게 하는데 울산바위를 읽으면서는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에겐 한계라는 게 있는데 그렇게 무리한 모험을 해야하는가? 라는 의문에 맞닿게 되었거든요.
읽는동안 내내 가슴이 조여진 느낌이었네요.
그런 극기 훈련 덕분에 힘든 농장 일도 강행할 수 있구나 싶은 짐작도 갑니다.
덕분에 좋은 글 잘 감상했어요.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르고요.
그리고 한 마디, 앞으로는 너무 무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민선생님은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조금은 돌아서 가는 여유와 비움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회장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휴가는 쉬는거라고 생각하지만 남편은 늘 극기훈련 수준의 휴가를 원해서 늘 휴가가 버겁습니다.
이젠 나이도 있고, 체력이 약해져서 휴가는 휴가답게 가야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