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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거꾸로 걷는 실감
산티아고 알베르게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는데, 전날밤 함께 식사를 했던 한국인 처자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기도 하리라......'
800 km를 걸어와 이 길을 끝낸 사람인데다, 어젯밤엔 비노로 기분을 냈기 때문에... 그 아침은 이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지난밤에 인사를 해두었기 때문에 인야는 살짝 알베르게를 나왔다. 허기야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부산을 떨었기 때문에 살짝 나온 건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다시 이별의 인사를 하지 않고 나왔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 생각은 했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가야 하나?'
그런데 굳이 거기를 다시 갈 것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이 길을 거꾸로 간다고 굳이 대성당 앞에 가서 어떤 공식적인(?) 행사를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안 될 것도 없겠지만, 그건 우스꽝스런 일일 수도 있으니까.
전날 실컷 그 곳에 가 있었고 사진도 많이 찍어두었는데, 굳이 새벽부터 그 곳에 가서 어떤 의미를 찾겠답시고 허세(?)는 부리지 말기로 했다.
그래서 바로 알베르게에서 나와 프랑스쪽을 향해, 그러니까 산티아고를 벗어난 4km 지점에 있는 '몬떼 도 고소(Monte do Gozo)' 알베르게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쉽지 않아, 몇 번의 시민들한테 길을 물어보는 과정을 거쳐서야... 인야는 산티아고 시내를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몬떼 도 고소에서 출발했을 사람들이 아침부터 산티아고로 향해 몰려들고 있는 모습과 맞딱드리는 건 그다지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갈리시아 방송국을 지나면서, 한꺼번에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고개를 넘어 나타나는데.. 그들 모두는 이상하다는 식으로 인야를 바라보며 걷는데, 우선 인야가,
"부엔 까미노!" 인사를 해야 했는데,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인사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그 인사마저도 어쩔 수 없이 내뱉는, 그러면서도 귀찮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또는 일부는 피하면서 걸어야 하는 인야는, 어쩌면 도무지 숨 쉴 틈도 없을 것 같은 긴장감마저 느껴지면서... 정말 자신이 거꾸로 걷고 있다는 실감이 드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산티아고가 코앞이라 사람들이 많은 게 분명하겠지만, 그래서 어느 정도 간다면 이렇게까지 붐비지는 않겠지만...
'이래서는 어떻게 걸어간단 말인가?'하고, 다른 사람들 신경 써야 하는 일로 그는 질리고 말았던 것이다.
거꾸로 걷는 일이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것과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한 마을을 지나다 보니 수도가 보여 아까 산티아고를 빠져나오면서 가게에서 샀던 자두를 씻어 그 옆의 돌벤치에 앉아 막 먹으려는데, 저 모퉁이를 돌아나오는 한 모자로 보이는 사람은 분명 한국 사람이었다.
그는 막 자두를 먹으려던 참이라 약간 당황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반가워서 자두 든 손을 내리면서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웬걸?
40 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 한국 여인은(그 여자는 분명 한국여자였다. 한국 아줌마들이 쓰는 모자를 쓴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를 보자마자 싸늘한 표정으로 바뀌더니 외면해버리는 게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인야는 민망하기까지 했다. 정말 막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그 인사말이 쑥 들어가면서 그는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지나쳤다. 마치 투명인간이었던 것처럼......
'아니, 한국 사람들끼리 왜 이래야 하지?'
인야는 가슴이 아프기까지 했다.
'저 여자는 유독 나한테만 그런 건지(하도 꾀죄죄한 모습이라서 창피해서 그랬나? 더구나 길가에서 자두 하나를 씻어 먹으려던 참이니...), 아니면 성격이 저래서 다른 사람들 한데도 그러는지... 더구나 이런 길을 걷는 입장인데다 이제 그 여자쪽에선 목적지 산티아고가 바로 코앞이라면, 여태까지 어떤 심정으로 걸어왔기에...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건가?'
그건 그에겐 일종의 상처일 수도 있었다. 같은 한국사람 한테 당하는(?)......
그래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자두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맛은 별로 못 느꼈지만.
그러면서, 인야는 자꾸만 산티아고를 향해서 오고 있는 순례자들의 방향과는 반대 인도를 가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냐면 이른 아침부터 '몬떼 도 고소(Monte do Gozo — 산티아고를 앞둔 4 km 전방의 알베르게가 있는 고개. 산티아고를 앞두고 하룻밤 쉬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대단위 알베르게 단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와 마치 행렬처럼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과 일일이 '부엔 까미노!' 인사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야는 산티아고를 벗어나게 되었다.
오르막길을 올라 드디어 몬떼 도 고소의 산티아고 가는 길 조형물이 있는 곳도 통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산티아고 비행장도 지나고, 커다란 이정석도 지나면서... 조금 여유가 생기긴 했다.
그런데 거기서 한국 사람을 또 만나는데,
숲길을 가고 있는데 자그마한 동양 여자가 열심히 걸어오고 있었다. 인야는 반가움에,
"한국 사람이세요?" 하고 바로 물어보았다.
"아, 예..." (억양이 경상도 사람이었다.)
"반갑습니다."
"근데, 왜 거꾸로 오세요?"
"예, 저는 어제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오늘부터는 거꾸로 걷고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대단하시네요!"
"그건 아닌데... 그게......" (그는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 인야는 휴대용 가방 안에서 아까 샀던 자두 하나를 꺼냈다.
"이거, 얼마 전에 샀던 건데... 하나 드시지요?"
"아, 예?.. 고맙십니더..."
"그저, 반가워서..."
"근데, 저도 그냥 말 수는 없는데... 이 과자라도..." 하면서 그녀도 비닐에 포장된 과자 하나를 건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걸 받았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미국 교민이었는데, 그 뒤로 열 명쯤 되는 미국 교민들이 성지순례를 와서... 그날 나흘 째 걷고 있다는데, 그날 산티아고에 입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이태리 사람으로 뵈는 영감님 둘을 만났는데, 그들은 대뜸 인야에게,
"어디 사람이냐?" 고 물었다.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브라보(Bravo!) 브라비시모!(Bravisimo! 과장표현의 일종으로 '브라보' 보다 더 강한 의미)" 하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그를 껴안기까지 하는 거 아닌가.
'아까 독일 영감님들도 그러더니......'
아무튼 이렇게 거꾸로 걷다 보니, 이런 일이 잦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길이었다.
물론 '은의 루트'를 걸어오면서도 한두 번 새벽길을 나선 건 아니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 전날은 그나마 산티아고 도심이어서 어쨌거나 길을 물어볼 사람들이라도 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아무도 없는 산길이거나 들길을 혼자 가야만 하는데, 길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어서... 새벽부터 인야는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아, 거꾸로 걸어가는 건... 이렇게 색다르기도 하지만, 또 불편하기도 한 것이로구나......'
그런데 알베르게를 나온지 약 1km는 된 것 같은데, 뭔가 허전해서 보니... 알베르게에 안경을 빠트리고 온 것이었다.
인야는 잘 때, 2층 침대 철사 틈에 안경을 꽂아놓고 자곤 했는데... 그날 출발을 하면서 안경을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자신의 부주의를 탓하면서 다시 돌아갈 수밖에......
그렇게 알베르게에 돌아갔더니, 어느새 알베르게는 텅 빈 상태였고... 한국인 약혼자들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다.
안경을 찾아 쓰고, 그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런데 먼동이 틀 무렵, 이 전 알베르게에서 새벽같이 나왔을 상당 수의 사람들이 몰려오기에... 그들을 기준으로 걸어가는 게, 인야의 길이 되었다.
그리고 인야는 파란 화살표시가 거꾸로 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제 9월도 하순이라 날이 점점 짧아지면서, 새벽길은 상당히 쌀쌀했다. 그래서 인야는 지팡이를 등과 배낭 사이에 쑤셔넣고는, 손은 호주머니에 넣고 걷곤 했다.
산티아고를 향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제 거의 다 왔다는 희망에 들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인야는 쉴 틈 없이 몰려드는 그 사람들을 마주하며, 이젠 인사하는 것도 귀찮고 성가시기만 했다.
물론 상대방도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인사를 걸어오거나 받아주면 좋겠지만, 사람들이 다 그렇진 않았기에... 거기서 오는 심적 갈등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거꾸로 걷는 인야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매우 호의적인 인사를 걸어오기도 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 아예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인야가 먼저 인사를 청하는데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참, 사람들은 다양했다......
아무튼, 산티아고에 가까운 지점이라 사람들이 많아서... 인야는 밀려오는 사람들과 형식적인 인사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느라, 아무 정신이 없는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잘은 몰라도 산티아고 100 km 정도에 있는 '사리아(Sarria)'까지 가는 동안은,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질 것이었다..(100 km 이상을 걸어야 이 길을 걸었다는 '인증서'을 주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거나 관광객들은 사리아에서부터 걷는 경우가 많아서다.)
날이 훤하게 밝은 오전에도 인야는 두어 번 길을 잃었다.
아무래도 이 길은 산티아고로 향하는 사람들에 촛점을 맞춰 화살표시를 했기 때문에, 그 역으로 가다보면... 갈래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엔 스페인도 시골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길을 물어볼 사람 만나기도 어렵다 보니... 한 번 길을 잃으면, 상당히 많은 시간을 허비하곤 했다.
그날은 인터넷을 하기 위해, 일부러 17km 정도만 가는 '아르수아(Arzua)'에 묵기로 했다.
사실 산티아고에서 인터넷 까페라도 가고 싶었지만, 마땅한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은 상당히 큰 도시이기도 한 아르수아에 머물면서, 자신의 책 '자전거 아저씨'의 향방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벌써 추석은 지났는데, 책이 나오긴 했는지......
오전 11시가 다 되어서야 인야는 한 바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인야가가 바에서 아침을 먹는 건 이례적인 일인데, 어제 '산타 이레네'에서 한국인 약혼자들과 먹거리를 다 나눠먹었기 때문에... 그에겐 아무 먹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 길가에 이런 바가 없었는데, 이젠 마을이 아니라도 바로 길가에 새로 문을 연 바가 제법 있어서... 그 전 같이 항상 먹을 걸 비축하지 않아도(그러면 배낭의 무게도 더 나가곤 했는데) 배 곯을 일이 없는, 그러니까 점점 편리한 길로 바뀌어 있는 게 현실이었다.
바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그는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는데, 한 스페인 커플을 만났다.
그런데 여자 쪽에서 인야에게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었다.
인야가 거꾸로 걷는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인야를 존경한다고까지(?) 하는 것이었다.
"근데, 어디까지 갈 건데요?" 하고 물어서,
"나는, 아라곤코스의 '솜뽀르뜨(Somport)'까지 가게 될 것 같은데요." 하자,
그녀는 자기와 사진을 함께 찍어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뭐, 못할 거 없지요..." 했는데,
그 사이에 스페인 남자 친구는 더 기다리지 않고 저만치 멀리 가고 있기에, 인야가 서둘러 자동으로 놓고 사진을 찍었는데... 확인해 보니, 자신의 모습이 거의 잘릴 뻔한 사진으로 나와주었다.
이렇듯, 이 길을 거꾸로 가다 보니... 어떤 사람들 한테는 정말 굉장한(?)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물론 인야 역시, 그 전에는 지금의 자신 같은 사람을 보았을 땐... 정말 존경하기까지 했던 사람 아니었던가.
그런데 본인이 막상 그 입장이 되다 보니, 좀... 쑥스럽긴 했다.
한 징검다리를 건넜는데, 앞에서 오던 한 60대로 보이는 영감님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영어로), 어디사람이냐고 물어왔다.
"저는 한국사람입니다."
"그럼, 한국까지 걸어갈 거요?" 하고 웃으며 다시 물어왔다.
그래서 인야는 바로,
"글세요......" 하면서, "이 세상 끝까지 한 번 걸어가 볼까요?" 하며 웃었다.
그러자 영감님도 웃었고, 인야 자신도... 다시 웃고 말았다.
'그래, 이 세상 끝까지 이렇게 걸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과 반대방향인, 거꾸로......'
그건 마음이었지만, 인야는 이제...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새 거꾸로 걷는데 여유가 붙고 있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