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태풍 때문에 넉넉하게 맞이한 이 땅의 가을 빛깔
가을 빛이 깊어졌습니다. 산과 들, 가리지 않고 고루고루 가을이 고이고이 내려앉았습니다. 가을 빛깔이 가장 선명하게 내려앉은 건 아무래도 나무들입니다. 지난 계절 동안 온통 초록이던 나뭇잎들이 이제는 그 동안의 초록 빛을 내려놓고 울긋불긋한 단풍 빛깔을 드러냈습니다. 절정을 이룬 가을 빛은 아마도 이번 주말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보여주지 싶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나라 안의 거의 모든 길이 가을 빛 찾아 떠나는 분주한 발걸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오가는 발길은 하냥 더뎠지만, 이맘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가을 빛의 절정을 찾아 모두가 즐겁게 길 위에 올랐습니다.
○ 21호 태풍 ‘란’에 발이 묶여 야쿠시마 답사 취소 ○
저의 개인 일정으로는 지금 쯤 일본의 작고 아름다운 섬, 야쿠시마의 숲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전설 속의 삼나무인 조몬스기를 향한 설렘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두근두근 옮길 예정이었지요. 그런데 때마침 다가온 태풍 ‘란’은 모든 일정을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하루나 이틀만 먼저 태풍이 지나갔다 해도 강행할 수 있었는데, 배를 타야 할 바로 그 날, 태풍이 야쿠시마 지역에 닥쳐오는 바람에 일정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태풍 발생 소식을 듣고, 수시로 태풍의 진로를 살폈지만, 정통으로 야쿠시마를 덮친다는 예고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야쿠시마로 떠나는 배편의 운항이 정지돼, 야쿠시마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지난 봄부터 오랜 기다림과 긴 설렘을 안고 기다렸던 조몬스기 답사이건만,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더 편안하게 산을 오르려는 생각에 헬스센터에서 등산을 위한 근육까지 단련하며 기다렸던 답사였지만, 자연의 변화를 이겨낼 재간은 없습니다. 결국 나흘간의 일종을 모두 전격 취소하고, 지난 주말에는 이 땅에 내려앉은 가을 빛을 찾아 나섰습니다.
단풍 빛깔도 아름답지만, 국화 종류가 피어올린 꽃도 가을 빛을 아름답게 합니다. 노란 꽃을 피우는 국화 종류를 비롯해 빨강 보라 등 온갖 빛깔의 국화 꽃이 한창입니다. 짙은 빛깔을 가진 대개의 국화 종류 가운데에 하얀 꽃을 피우는 국화 종류도 있습니다. 구절초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사진은 구절초 종류의 하나인 포천구절초입니다. 이른 아침에 마주친 포천구절초 하얀 꽃송이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이슬이 초롱초롱 맺혀 있었습니다. 부지런한 벌들이 향기 따라 꽃 송이 곁을 분주히 오갑니다. 날갯짓 소리가 싱그럽습니다. 포천구절초는 구절초와 같은 생김새이지만 꽃송이가 구절초보다 훨씬 커서 산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소박한 구절초와 달리 매우 풍성한 느낌을 줍니다.
○ 노랑 빨강 하양 보라… 온갖 빛깔로 가을을 밝혀 ○
국화 종류 가운데에 진다이개미취가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국화 종류의 하나인 개미취의 새 품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다이개미취는 일본의 진다이식물원에서 선발한 품종이어서, 그 식물원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무리를 지어 자라는 진다이개미취의 줄기는 대략 어린 아이 키 높이만큼 불쑥 올라와서 줄기 끝에 보랏빛 꽃을 무성하게 피웁니다. 그래서 멀리서도 진다이개미취가 모여 있는 자리는 돋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꽃송이에는 벌나비가 좋아하는 꿀이 많이 들어 있는 모양입니다. 해마다 보는 일이지만, 진다이개미취의 꽃에는 갖가지 곤충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모여듭니다.
몇해 전부터 이 숲에 많이 심어 키우는 털머위의 꽃도 지금 한창입니다. 털머위는 우리가 먹을거리로 많이 쓰는 머위와 전체적으로는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특히 털머위의 둥근 잎은 머위의 잎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습니다. 그러나 털머위의 꽃은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크고 화려합니다. 앙증맞게 작은 꽃이 모여 피어나는 머위의 꽃과는 다릅니다. 또 털머위의 잎이나 줄기는 머위의 그것을 먹는 것과 달리 먹지도 않습니다.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심어키우는 머위와 달리 털머위는 그래서 관상용으로 심어 키우지요. 이 즈음에 피어나는 털머위의 노란 꽃은 가을 숲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 살아남으려는 안간힘으로 피워 올린 빨간 단풍 빛 ○
국화 종류의 꽃이 단연 이 가을의 풍경을 압도하지만 국화 종류 외에도 많은 꽃들이 피었습니다. 그 가운데 벚나무 종류가 있습니다. 벚나무의 꽃은 분명 새 봄에 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 벚나무는 가을벚나무라고 부르는 새로운 품종의 벚나무입니다. 가을벚나무는 봄의 벚나무와 달리 한꺼번에 우우 피었다가 우우 낙화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다문다문 꽃을 피우기 시작해서 적어도 십이월까지 계속 피어납니다. 그러니까 겨울 깊어진 뒤에도 이 숲에만 가면 언제든 벚꽃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지 끝에서 간당간당 피어있는 벚나무의 가녀린 꽃송이들이 마냥 고맙습니다.
온갖 나무들에 단풍이 들었습니다. 초록 빛깔의 엽록소가 지난 계절 동안의 수고를 접었다는 신호입니다. 이제는 초록 빛 엽록소에게 앞 자리를 내주었던 나뭇잎 안의 다른 요소들이 제 빛깔을 뽐낼 때입니다. 바로 단풍입니다. 빨간 빛깔을 비롯해 노란 색 갈색 등 온갖 색깔로 가을을 밝혀줍니다. 그 많은 단풍 가운데 유난히 제 눈에 들어오는 단풍은 언제나 그런 것처럼 올 가을에도 화살나무 단풍이 먼저입니다. 이 숲에서 심어 키우는 대개의 화살나무들은 아직 채 붉은 빛을 올리지 않았지만, 햇살 좋은 곳에 서 있는 몇 그루의 화살나무들이 먼저 붉은 빛을 올렸습니다. 참 곱습니다. 살아남으려는 화살나무의 안간힘이 가슴 속 깊이 느껴집니다.
○ 지상의 양식을 지어내던 수고를 접고 잠자리에 들 시간 ○
가을은 분명 단풍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가을은 열매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지난 봄과 여름에 꽃 피웠던 나무들은 부지런히 벌나비를 불러 무사히 꽃가루받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무들은 하나같이 이 땅에 자신의 후손을 남기기 위해 공들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열매의 빛깔들도 단풍 빛깔 못지 않게 다양하고 아름답습니다. 빨간 색이 가장 많아 보입니다만, 그밖에도 노란 색과 까만 색 열매도 있습니다. 열매들이 빚어낸 빛깔 또한 더없이 아름다운 게 이 계절입니다. 사진으로 보여드리는 위의 열매는 피라칸사입니다. 워낙 많은 열매를 빨갛게 피워 올려서 언제나 눈길을 사로잡는 나무이지요.
꽃과 잎과 열매에 그렇게 가을 빛이 한창 내려앉는 중입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햇살을 받아 수굿이 지상의 양식을 지어내던 나무들이 서서히 지난 계절의 노동을 접고 긴 겨울 잠에 들 채비에 한창입니다. 사람들도 이제 잠시 숲과 나무가 지어내는 가을 빛을 바라보며 지난 시간 동안의 노동의 결실을 하나 둘 갈무리해야 할 때입니다.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갈무리를 위해 지금은 하늘 한번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나흘로 예정되었던 야쿠시마 답사가 갑자기 취소되어 적잖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맞이한 한 주입니다. 이제 다시 일 년 쯤 기다려 다시 야쿠시마의 조몬스기를 향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수요일까지는 편안한 마음으로 이 땅의 가을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