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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와 '보리菩提'는 불교 신행의 기본입니다. 한마디로 번뇌는 어리석음이고 보리는 깨달음입니다. 어리석으면 중생이고 깨달으면 부처님인 것입니다. 중생에게는 세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장애는 괴로움의 장애, 고장苦障입니다. 중생의 온갖 괴로움 중에는 몸에 관련된 것이 있고, 마음에 관련된 것이 있고, 사람에 관련된 것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과 사람에 관련된 세 가지 괴로움[苦]으로 고장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괴로움이 어디서 왔을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괴로움이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모두 내 자신이 만들어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그 사람으로부터 괴로움이 오고, 내 몸도 그동안 어떻게 관리했는가에 따라서 괴로움이 오고, 내 정신 건강도 모두 내가 생활해 온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두 내가 지은 업業 때문입니다. 업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생기므로 이것이 두 번째 업의 장애, 업장業障입니다.
좋지 않은 업을 지었기 때문에 괴로움이 오는 것이지 좋은 업을 지으면 괴로움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업을 죄업罪業이라고도 합니다. 고통을 만들어내는 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고통 받을 죄업을 왜 스스로 지었는가? 그것은 어리석음, 즉 미혹迷惑때문입니다. 이 미혹한 장애가 세 번째 혹장惑障입니다. 미혹 때문에 업을 짓고, 지은 업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혹惑. 업業. 고苦의 혹장. 업장. 고장을 삼장三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삼장돈제三障頓際', 즉 삼장을 일시에 다 제거하게 되기를 발원하고 축원합니다.
이러한 삼장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혹장입니다. 미혹인 번뇌로 말미암아 죄업을 짓고, 그 죄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으므로 이 혹장을 어떻게 소멸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갔는데 둥그런 금덩어리를 하나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싸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금덩어리가 아니고 황금색 뱀이었어요. 황금색 뱀이 서리서리 돌돌 뭉쳐져 있어서 그것을 황금으로 잘못 본 것입니다. 황금으로 본 순간 욕심이 났고, 욕심이 나니까 가지고 온 것이지요.
황금으로 본 것이 미혹이고, 가지고 온 것이 죄업입니다. 그런데 이 뱀이 겨울잠을 푹 자고 깨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혹. 업. 고가 전부 이런 관계입니다. 중생은 괴로움인 줄 모르고, 알고 보면 괴로움인데, 즐거움으로 잘못 보는 것이 미혹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혹을 망견望見이라 하고 사견邪見이라고 합니다. 이를 합쳐서 번뇌煩惱라고 합니다. 번뇌는 망상妄想이라 번뇌망상煩惱妄想이라고 함께 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미혹이 있으면 업이 오고, 업이 있으면 고가 옵니다.
혹. 업. 고가 늘 따라다닙니다.
삼장은 또 고목나무를 귀신으로 착각한 비유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둑어둑한 밤에 오솔길을 걸어가는데, 길 옆에 말라 죽은 지 오래되어 둥치만 남은 고목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나무둥치를 귀신이 서 있는 것으로 잘못 보았어요. 거기 귀신이 서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무서워져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렇게 고목나무를 귀신으로 잘못 보는 것이 미혹이고, 무서우니까 도망가는 것이 업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가다가 넘어져서 몸을 다치는 괴로움이 옵니다. 그 사람이 고목나무를 바로 보았으면 무서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무서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도망갈 일도 없었겠지요. 결국 미혹 망상에서 업과 고가 따르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정견正見입니다.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정견은 깨달음이고 사견은 번뇌입니다. 번뇌는 번조요동繁躁搖動이라, 몸과 마음을 아주 고뇌스럽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번뇌에는 근본번뇌根本煩惱와 지말번뇌枝末煩惱가 있습니다. 무명無明이 근본번뇌이고 그 외는 모두 지말번뇌입니다.
이러한 번뇌 가운데 탐貪. 진瞋. 치癡를 삼독三毒이라 하여 크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세 가지가 매우 끊기 어렵고, 크게 고통을 초래한다고 해서 삼독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비유로 말하면 진화탐수瞋火貪水라, 성냄은 불과 같고 탐욕은 물과 같습니다. 불이 날 때는 모든 걸 다 태우는 것처럼, 화가 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다 태우고 맙니다. 평소 화내지 않는 사람도 크게 화를 내면 화산이 폭발하듯이 엄청 큰 일일 나요, 반면 물은 깊숙하게 계속 흐르고 스며들듯이, 탐심은 좀체로 멈추지 않고 스며들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러한 탐욕과 성냄으로 생기는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때 화를 내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를 한번 내어서 평생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는 어린 자식이 하도 울어서 화를 참지 못하고 아이를 번쩍 들어 창문 너머로 던지는 바람에 그 아이 몸에 장애가 생겨 부자父子가 평생 고통을 짊어지고 산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내에게 한번 폭력을 썼다가 평생 아내로부터 원망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화로 인해 고통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처럼 탐욕과 성냄으로 인하여 생기는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어리석음에서 오는 고통은 그보다 훨씬 더 많으니, 이것이 전부 어리석어서 생긴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젊음이 오래 갈 줄 알았는데 금방 지나갔더라.'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이렇게 말하는 것도 어리석은 탓입니다. 돌이켜보면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도 과거에는 다 좋았던 사람입니다. 나와 좋았던 사람이 아니면 절대 사이가 나빠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나와 사이가 좋은 사람은 앞으로 나빠질 사람인 것이 세간법입니다.
세간의 모든 고통이 알고 보면 전부 어리석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본래 참되게 아는 지혜智慧가 있습니다. 그 지혜인 본심本心을 한순간 허망한 생각으로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진여법眞如法이 하나인 줄을 여실如實하게 알지 못해서 불각심不覺心이 생生한다.'고 합니다. 불각심이 일어나서 허망한 생각이 생긴 이것을 무명이라고 하는데, 무명의 특징이 바로 하나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이냐?
다른 게 없는 것이 하나입니다. 우주 만법이 다른 것이 없고, 하나의 진여眞如뿐인 일진법계一眞法界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이 근본번뇌인 무명입니다.
무명의 특징은 분별分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별심分別心이라고 합니다. 하나인 줄 모르기 때문에 망념妄念이 생기는 것입니다. 망념이 무엇이냐? 예를 들면 중생은 자신의 몸만 중요하게 여겨서 자기 몸만 몸으로 알고 다른 것은 몰라요. 그 자기 생각만 마음으로 알고, 그 생각이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항상 상주常住하는 참다운 지혜는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명입니다. 자기 몸만 몸으로 아니까 청정법신淸淨法身을 알 수 없습니다.
자기 몸만 몸으로 아는 동시에 청정한 법신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분별심만을 마음으로 아니까 무분별의 참다운 지혜를 잃어버려서 무명無明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각경圓覺經』에서는 공화空華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눈병이 난 사람이 허공을 바라보니 허공에 꽃이 피었어요. 이것을 허공 꽃, 공화라고 합니다.
공화는 허공에 실제로 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눈병에서 생긴 것입니다.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는데, 그 꽃이 왜 보였겠습니까? 자기 눈에서 온 것입니다. 이 몸이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고통이 있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법신法身을 잃어버린 데에서 왔습니다.
법신을 잃어버려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망상심만을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나 참지혜를 잃어버린 것에서 왔습니다.
이런 것을 무명번뇌無明煩惱라고 합니다. 이런 무명번뇌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러면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 깨닫는다는 것은 자기 집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이고, 내 눈이 내 눈을 보는 것입니다. 한 번 맞춰 보세요. 자기 눈이 자기 눈을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니, 어떻게 하면 내 눈이 내 눈을 볼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외각外覺, 밖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밖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제법이 공함을 보는 것, 관제법공觀諸法空입니다.
밖으로 깨달음이 있으면 일체 만물이 공상空相임을 알게 됩니다. 공상이 무엇이냐?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이 불생불멸의 공상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밖으로 깨닫는 외각입니다.
둘째는 내각內覺, 안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공적함을 아는 것, 지심공적知心空寂입니다. 단지 외각만으로는 아무리 다 공하다고 해도 공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공하다고 보는 그 마음이 하나 남아 있어요. 그것은 온전한 공이 아닙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개 밖으로 공한 것만 아는 것에 걸려 있어요. 불생불멸이라고 하는데, 그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마음이 남아 있으면, 한 생각이 일어난 것이거든요.
그것은 생멸입니다. 거기에서 더 들어가 내각을 해야 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까지 다 공함을 알아야 합니다. 『기신론』에 보이듯이 한 생각 일어나는 미세망념微細妄念까지 다 여의어서 망상을 일으키기 이전의 그 본래 참마음을 보는 것이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밖으로 색. 성. 향. 미. 촉. 법을 쫓아다니다가 어느 한순간 '이렇게 해서는 끝이 없겠구나. 안으로 청정본심淸淨本心을 찾아가야겠다.'라고 해서, 밖으로 욕심내던 그 망상이 안으로 참마음을 찾으러 들어가요. 이와 같이 청정본심을 찾아가는 것을 수행修行이라 합니다.
수행을 해서 청정본심과 딱 마주칠 때가 있어요. 본래의 심성心性을 보게 됩니다.
구경각究竟覺을 얻은 것입니다. 깨닫기 전에는 깨달으러는 마음이 있고 번뇌 없는 마음을 얻으려는 뜻이 있었는데, 나중에 수행이 깊어지면 망상도 없어지고, 번뇌도 없어지고, 본심이라고 할 것도 따로 없고, 그냥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깨닫기 전에는 번뇌심이 있고 청정심이 있는데, 청정심을 본 다음에는 번뇌심과 청정심이 따로 없어요. 심체이념心體離念입니다.
청정도인淸淨道人은 번뇌니 지혜니 이런 구분이 없습니다. '수행이다.' '수행이 아니다' 라는 구분도 없습니다. 그래서 수좌首座가 큰마음 먹고 도인을 찾아가서 "도 닦으러 왔습니다." 라고 말씀드리면, "이 사람아, 도는 왜 닦으려 하는가?" "멀쩡한데 도를 닦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고?"라고 하십니다. 그 도를 닦으려고 하는 것이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내 눈이 내 눈을 보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만약 자기 눈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 눈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조지눌普照知訥1158~1210 스님이『수심결修心訣』에서 말씀하셨습니다.
旣是自眼 如何更見 기시자안 여하갱견
若知不失 卽爲見眼 약지불실 즉위견안
이미 자기 눈인데 어떻게 다시 본다는 것인가?
만약 잃어버리지 않은 줄 알면 곧 눈을 본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내 눈을 보는 방법은 내가 내 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을 잃어버린 사실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보는 것이 전부 자기 눈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 알 사람이 있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거듭 말해서 내가 내 눈을 보는 방법이 무엇인가? 이미 내 눈인데 또 무엇을 본다는 것인가? 내 눈을 지금까지 잃어버린 사실이 없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바로 내 눈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을 보는 것도 바로 내 눈이고, 땅을 보는 것도 내 눈이니, 모든 것이 내 눈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자기 눈을 보는 방법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심결』에서는 이어서 "이미 자기 마음이니, 어찌 다시 알기를 구하겠는가?[旣是自心 何更求會]"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내 마음인데 어디에 가서 내 마음을 찾는다는 말인가? 내 마음이 전혀 달라짐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나면 하늘도 내 마음이고, 땅도 내 마음이고, 사람도 내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내 눈으로 본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전부 내 눈인 것처럼, 모두 다 내 마음으로 한다는 것을 알면 일체가 다 내 마음이지요.
도道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를 닦으려면 푹 닦아야 합니다. 마음이 공한 것을 모른다든지, 겨우 색이 공한 것만 아는 것은 아주 어설픈 것입니다. 도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도가 아닙니다. 망념을 여의어서 망심도 진심도 없는 그 경지가 구경각究竟覺입니다.이미 자기 눈인데 다시 보기를 바라거나, 이미 자기 마음인데 자기 마음을 알고자 한다면 알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자기 마음을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다만 알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자기 심성을 보는 것입니다.
若欲求會 便會不得 약욕구회 변회부득
但知不會 是卽見性 단지불회 시즉견성
만약 자기 마음을 알고자 한다면 문득 알 수 없다.
다만 알지 못함을 알면 이것이 곧 견성이다.
보조지눌 스님의 유명한 법문입니다. 자꾸 내 마음을 알려고 하면 이것은 내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알 수 없음을 아는 그것이 견성입니다.
여러분, 자기 눈 보는 방법 아시겠어요? 내가 내 눈을 보는 방법은 내 눈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나면 나무를 보는 것도 내가 내 눈을 보는 것이고, 사람을 보는 것도 내 눈이 내 눈을 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이 이미 내 마음인데 내가 어찌 내 마음을 또 알겠습니까. 내 마음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확실히 아는 그것이 견성인 것입니다. 도인들은 보조 스님 법문 중 앞의 두 구절은 빼고, '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 이라는 뒤의 두 구절을 강조하였습니다. 다만 알지 못할 줄 알아야 하는데 자꾸 알 줄만 아는 거예요. 모를 줄 몰라요. 마음을 드러내서 무엇이든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가라앉히면 다 해결되는데 한 생각을 일으키면 해결이 안 됩니다.
모든 문제는 마음 하나 일으킨 데에서 일어났고, 마음 하나 사라진 데에서 다 사라집니다.
모든 문제 해결은 다만 모를 줄 아는 것, 이것이 견성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이렇게 쉽습니다. 이처럼 깨달음이라는 것은 무엇을 알아내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망상을 쉬는 것,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쉬면 밝아져요. 생각이 앞을 가려서 어두운 것이지, 생각을 쉬면 환해집니다. 그것이 자기가 자기 눈을 보는 것과 같고, 내가 나를 보는 것과 같고, 내 집에서 내 집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내 집에서 내 집으로 가는 것은 자기 집에서 자기 집을 아름답게 잘 꾸미면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공덕만 지으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규봉종밀圭峰宗密780~841 선사가 『원각경대소圓覺經大疎』에서 하신 법문을 들어 보겠습니다.
但怪空裏有華 단괴공리유화
不覺眼中有瞖 불각안중유예
外嫌身心苦惱 외혐신심고뇌
不知內畜迷情 부지내축미정
다만 허공 속에 꽃이 있는 것만 이상하게 여기고,
눈에 눈병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밖으로 몸과 마음의 고뇌만 싫어하고,
안으로 어리석은 생각 가진 줄 알지 못한다.
밖으로 허공 꽃이 보이는 것은 눈병에서 온 것이듯, 밖으로 고통이 오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 깨달음이고, 이런 망상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구경각의 깨달음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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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첫댓글 무명번뇌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러면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 깨닫는다는 것은 자기 집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이고, 내 눈이 내 눈을 보는 것입니다. 한 번 맞춰 보세요. 자기 눈이 자기 눈을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니, 어떻게 하면 내 눈이 내 눈을 볼 수 있겠습니까?....중략 순간순간 마음으로 돌아가는 역습을 위해! 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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