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항주 소주 그리고 경항 대운하
2월 10일, 늘 친절하게 알려주고 안내도 해주는 고복이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 거의 확실하게 되자 이제는 갈 여정에 대해 당부의 말을 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당신은 경사(북경)로 가는데 앞길을 모르면 안 되오. 우리나라의 소주(蘇州)·항주와 복건·광동(廣東) 등의 지역에서는 바다를 다니며 장사하는 사선이 점성국(占城國, 베트남 중남부), 회회국(回回國,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지역) 지역에 이르러 홍목(紅木)·호초(胡椒)·번향(番香)을 수매하느라 배가 끊이지 않지만 열이 가면 다섯이 돌아오게 되니, 그 길은 결코 좋지 않소. 오직 경사로 가는 하로(河路)는 아주 좋소. 이런 까닭으로 유구(琉球)·일본(日本)·섬라(暹羅, 태국)·만랄가(옛날 말레이반도 서북쪽 나라) 등의 나라에서 공물을 진상할 때 모두 복건포정사에서 배를 정박(조공로)한 뒤 이 항주부에 이르게 되고 가흥을 지나 소주에 도착하오. 천하의 사(紗)와 라(羅) 단필과 여러 가지 보화는 모두 소주로부터 나오게 되오. 소주로부터 상주(常州)를 지나면 진강부(鎭江府)에 이르러 양자강을 지나게 되는데 강은 항주부로부터 천여 리나 떨어져 있소. 그 강(양자강)은 물결이 매우 세차고 험악하여 풍랑이 없어야 비로소 건널 수 있을 것이오. 이 강을 지나면 바로 경하(京河)에 다다르게 되는데 운하로 거의 40일 정도 걸리오. 당신들은 봄을 만난 것이 다행이오. 만약 여름이었다면 찌는 듯 한 더위와 숨 막힐 것 같은 열기로 병이 생길 것이니 어찌 갈 수 있겠소. 또 산동(山東)·산서(山西)·섬서(陝西)의 세 포정사에서는 해마다 가뭄으로 인하여 황폐되어 사람이 인육을 먹고, 백성은 각각 그 거처할 곳을 잃었소. 양자강을 지나 천여 리를 가면 곧 산동 지방에 도달하게 되니, 당신들은 스스로 살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마 최부도 항주의 번영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가 있다.”이 속담은 11세기부터 민간에 널리 전해져 오늘날까지도 심심치 않게 사용된다. 강남의 쑤저우와 항저우는 지상의 천당이라는 의미이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정치의 중심을 북경을 경제의 중심지로 남경을 드는 사람들이 많다.
쑤저우와 항저우가 왜 천당에 비교되는 것일까? 이것은 송대의 경제발전, 특히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송나라 때 ‘소호숙 (蘇湖熟) 천하족 (天下足)’ 즉 강남지역인 소주와 호주의 풍년이 들면 천하가 충족하다는 속담이 있다. 명나라 때는 천하의 세금의 절반가량을 남경을 비롯한 항주 소주등지에서 부담했다. 송나라(960∼1279)는 우리나라의 고려 전기에 해당되는 데, 이 시기 중국의 경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송대에 농업혁명과 상업혁명이 발생하였다고 말한다. 송대의 농업 발전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강남 일대의 농업 생산력 증대였다. 양쯔강 델타 지대의 벼농사 기술 수준이 높아지면서, 강남 지방은 중국내 최고의 곡창지대로 발돋움하였다. 풍요로운 강남 지방의 중심 도시 항저우와 쑤저우는 그래서 지상의 천당이라 불렸다.
남송덕우 원년(1275년)에 항주의 인구는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13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인 마르코폴로는 (1254~1324)는 북경에 들어와 원 세조 쿠빌라이(1260~1294)를 섬기다가 17년 동안의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던 중 항주에 들른다.
<상고가 다른 지방으로부터 견포를 수입해 오는 외에 항주 소속의 토지에서도 견포를 산출하는 양은 막대하다. 많은 백성은 항상 견포를 동여매고 있다. 이것은 지방에서 행하는 수공업중에 다른 지방보다 뛰어나고 교묘해 널리 세상에 수급되는 것에 12종류가 있다. 한 종류마다 공장 수가 1,000곳이나 된다. 한 공장마다 직공을 10인,15인, 혹은 20인, 드물게는 40인을 사용한다. 모두 고용주에게 복속된다.-동방견문록 중에서->
이후 명(明)제국의 선진 경제 지역은 이른바 요즘 서울의 「강남」과도 같았다. 강남의 대표 도시가 항주다. 최부가 본 때보다 90년 뒤인 1578년 통계를 보면 저장성의 인구밀도는 전국 1위, 농지면적은 강남지역이 전국의 4분의 1, 농세는 전국의 45%를 차지했다. 풍요한 농업생산을 바탕으로 비단, 면포, 도자기, 차, 제지, 잡화 등 각종 수공업과 유통업이 발달해 명제국 초기 자본주의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사람들은 압도적인 이문화(異文化)를 만나면 보통 두 가지 패턴으로 대응한다. 거부감으로 외면하거나 아니면 현실의 도전을 관념으로 극복한다. 뒷날 조선조 선비들이 중국이나 일본에서 새로운 상품과 문화를 만났을 때 거의 모두가 성리학적 정신주의로 도피, 겨우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실학의 고고(呱呱)한 소리를 듣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최부는 일찍이 체험하지 못한 경이로운 세계와 조우했다.
최부는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몸소 경험한 상품·도시문화를 정밀하게 관찰하고 낱낱이 기록「표해록」을 파란만장의 이야기책으로서뿐 아니라조선이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경세(經世)의 서(書)」로 부각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닌가 싶다. 곳곳에 그런 흔적이 보인다. '사람들은 거의 상업에 종사하며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소매 속에 저울을 넣고 다니며 푼돈까지 따진다.' 명의 선진적 상품경제를 그가 요약한 대목이다. 명제국의 행정 군사 지리 경제 풍속 등에 관한 최부의 다양한 관찰과 서술은 꼼꼼하고 자로 잰 듯 정확해 마치 정교한 5만분의 1 지도를 보는 느낌이다.
소주의 비단은 지금도 알아준다. 나 역시 항주에 들를 때 비단부터 알아보았다. 최부도 소주의 사라단필(紗羅段匹)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보통 실크로드 시작하는 길을 보통 서안으로 잡는 데 그렇지가 않다. 실크로드 길은 소주에서 잔뜩 비단을 싣고 경항 대운하를 거쳐 뭍에 올라 시안으로 향했다. 남선북마란 말이 있다. 중국의 남쪽은 강이 많아서 배를 이용하고 북쪽은 산과 사막이 많아서 말을 이용한다는 뜻으로 고대 중국의 교통체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중국의 화남(華南)지방은 양쯔강(장강)을 비롯하여 수량이 풍부한 하천이 많아서 수로를 이용해 사람의 왕래와 물품의 운송이 활발하였다.
이에 비해 화북(華北)지방은 산과 사막이 많고 강수량도 적어서 육로를 이용한 거마(車馬)가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삼국지에 유비가 감로사 밖에서 손권과 말을 몰며 이 말을 하자, 남방 사람인 손권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뜻으로 잽싸게 언덕 위를 한번 내달았다는 고사도 전해진다. 늘 쉬지 않고 여기저기 여행을 함을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아무튼 항주에서 시작해, 안서에서 하미와 돈황으로 갈라지고, 팔미라에서 알레포와 가는 길과 다마스쿠스로 갈라져 북쪽 지중해로 빠지는 콘스탄티노플과 가자를 거쳐서 남쪽방향 카이로로 향하는 실크로드다.
당시 항주에 들어오는 물건은 벵골에서는 물소 뼈, 인도 아프리카에서는 상아, 산호, 진주, 수정, 향료, 장뇌 등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서로 앙숙이면서도 항주(월나라)와 소주(오나라)는 같이 번영의 길을 걸은 것 같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오월동주"," 와신상담" 이라는 말, 다들 잘 알지 않을까. 가장 미워하는 오나라 왕(부차)과 월나라 왕(구천)이 같은 조각배를 타고 바람센 바다를 항해 하려면 어쩔 수 없이 휴전내지 합심을 해야 하고, 월왕 구천이 오왕에게 잡혀가서 그 쓰디쓴 곰쓸개를 씹으며 후일을 다짐한다는 "와신상담" 그리고 그런 월 왕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충신 범려가 서시를 데려다가 호색가인 오왕 부차에게 바쳐 결국 오나라를 망하게 했다 하는,...
훗날 청나라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건륭제는 조부 강희제를 본떠 남방순회 6회, 동방순회 5회, 서방 순회 4회를 했다. 당시 황제의 순회는 최소 다섯 달이란 시간이 소요되었고 동원되는 인원은 황족,문무대신등을 포함해 2천명이 넘었다. 건륭제는 남방순회를 특히 좋아했는데 그는 남방순시를 가는 것에 대해 민심을 살피고 효를 다하고자 함이라고 말을 했다지만 실은 소위 강남이라 일컫는 강소성이나 절강성 일대가 풍류지역, 그러니까 예부터 볼거리 먹거리가 풍부하고 문학인재들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학문과 예술을 아끼던 건륭제이니 더할 나위없는 즐거운 여행이었을 것인데 사실 그 지역에는 명 왕조 말에 이주를 해간 반청감정을 가진 인물들이 많았다. 따라서 그들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그들을 추슬러 고른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려 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경비를 들여 행차를 한 바람에 말도 많았다. 그것을 아는지 건륭제는 임기 말기에 남방순시는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것과 같으니 후대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한다. 그만큼 항주와 소주는 황제들이라면 꼭 챙기고 신경을 썼던 도시다.
중국이 비록 이합집산이 잦았지만 큰 땅덩어리를 갖고 버티는 데는 내가 보기에는 누구든 한자를 쓰고 먹고사는 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원지대의 축산물이 남으로 내려가고 풍부한 물과 따뜻한 기후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긴 거리임에도 유통이 원활했기 때문이다. 6백년 대 그들은 큰 운하를 건설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 12곳 중 일곱 번째인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 이는 세계적으로 가장 일찍 판 인공물길이며 길이가 가장 긴 인공하천으로써 중국인(人)자의 한 획으로 공인된다. 경항대운하는 중국 북쪽의 북경(北京, Beijing)과 중부의 항주(杭州, Hangzhou)를 연결하는 1,800km 길이의 인공물길이다. 경항대운하는 중국의 만리장성과 함께 고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두 공사로 인정된다.
이 경항대운하는 천진(天津, Tianjin), 하북(河北, Hebei), 산동(山東, Shandong), 강소(江蘇, Jiangsu), 절강(浙江, Zhejiang) 6개 성과 시를 경유하며 해하(海河)와 황하(黃河), 회하(淮河), 장강(長江), 전당강(錢塘江) 등 동서향으로 흐르는 5갈래의 물길을 거친다.1902년까지 단순한 물길이 아닌 해운의 역할을 담당해서 남방의 쌀은 대부분 이 운하를 통해 북방으로 운송되었다.
지금 최부의 표해록에서 읽고 있듯이 운하 양안의 풍경과 사람들의 풍속, 갑문과 언제 등 운하의 시설, 절과 다리, 탑 등 운하기슭의 고건물, 운하로 인해 번창해진 양안의 도시, 편리한 운하로 인해 풍성해진 사람들의 생활 등등 자연 젖줄기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운하로 인해 형성된 남북문화의 융합을 바로 느끼게 된다. 원체 긴 운하이니 이를 오르면 위도가 변하면서 날씨나 수목, 농작물, 건물, 생활양식, 언어 등의 자연변화 또한 뒤따르지 않았겠는가. 이쯤 중국을 알려면 이것만은 하는 관점에서 쓴 글을 남겨두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