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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저주받은 혁명가 - 카를 마르크스(5)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이래저래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아버지의 사망은 그에게 금화 600프랑을 안겨 줬는데, 그는 그중 일부를 벨기에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는 데 썼다. 1856년에 사망한 어머니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유산을 덜 남겼는데, 그가 필립스 삼촌에게서 돈을 빌리면서 유산을 덜 남겼는데, 그가 필립스 삼촌에게서 돈을 빌리면서 유산을 당겨섰기 때문이네. 1864년에는 빌헬름 볼프의 유산을 상당량 물려받았다. 아내와 처갓집을 통해서도 상당한 액수가 들어왔다(예니는 그녀의 아가일, 조상들의 문장이 새겨진 은제 만찬용 식기와 침구 세트를 혼수로 가져왔다). 마르크스 부부는 각자의 가문을 통해 충분할 만큼의 재산을 받았다. 적절하게 투자했다면 재산을 넉넉하게 불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의 실제 수입은 1년에 200파운드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이는 숙련노동자가 받는 급여의 3배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나 예니나 돈을 쓸 때 빼고는 돈에 대한 관심이 조금도 없었다. 유산으로 받은 돈도 빚으로 얻은 돈도 찔끔찔끔 사라져 갔고, 살림살이는 영원토록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늘 빚에 쪼들렸다. 심각한 상황도 자주 겪었다. 은제 만찬용 식기는 식구들 의복을 포함한 다른 가재 도구와 더불어 정기적으로 전당포를 오갔다. 마르크스는 단벌바지 차림으로 지내야 했던 적도 있었다. 마르크스의 집안처럼 예니의 집안도 게으른데다 앞날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는 구제 불능의 사위를 도와주는 것을 거부했따. 1851년 3월, 마르크스는 딸이 태어났다는 내용으로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투덜댔다. “말 그대로, 집안에 땡전 한 푼 없네.”
이즈음에는, 물론 엥겔스가 새로운 착취 대상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1840년대 중반부터 마르크스가 세상을 뜰 때까지, 엥겔스는 마르크스 가족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엥겔스는 아마도 수입의 절반 이상을 마르크스 집안에 건넸을 것이다. 총액을 헤아리기란 불가능하다. 다음 기부자가 나타나는 대로 돈을 갚겠다는 마르크스의 거듭된 다짐을 믿고는 엥겔스가 4반세기 동안 불규칙적으로 돈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르크스 쪽에서 엥겔스를 착취하는 관계였고, 마르크스가 늘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때로는 거만한 파트너 노릇을 했기 때문에 불평등한 관계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이상한 방식으로 서로를 필요로 했다. 따로 떨어져서는 연기르 ㄹ할 수 없는 코미디언 콤비처럼, 두 사람은 툭하면 상대방에게 으르렁댔지만 결국에는 늘 서로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구걸이 정도를 한참이나 지나쳤다고 느낀 1863년에, 두 사람의 관계는 거의 깨질 뻔했다. 엥겔스는 맨체스터에 집이 두 채 있었다. 하나는 사업상 접대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애인 메리 번스를 위한 것이었다. 메리가 세상을 떠나자 엥겔스는 몹시 괴로워했다. 마르크스의 무심한 (1863년 1월 6일자) 편지를 받은 엥겔스는 격분했다. 편지에서 마르크스 엥겔스에게 짧게 조의를 표하고는 돈을 보내 달라는 더욱 중요한 용무로 곧장 넘어갔다. 마르크스의 철옹성 같은 이기주의를 이보다 더 잘 보여 주는 사례는 없다. 엥겔스는 싸늘한 답장을 보내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거의 끝이 났다. 엥겔스가 이 사건으로 인해 마르크스의 성격상의 결함을 깨닫게 됐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이즈음에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결코 취직을 하거나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없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작업에 종사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건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엥겔스는 1869년에 사업체를 팔아서 연간 800파운드 이상의 수입을 확보했다. 이 중 350파운드가 마르크스에게 갔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생애 마지막 15년 동안 불로소득으로 생활하는 연금 수령자가 돼서 안정적인 생활을 즐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연소득 500파운드 이상 가는 수준으로 살림을 꾸려갔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이렇게 변명했다. “상업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순수한 프롤레타리아적 생활은 이곳에서는 적합지 않네.” 그러므로 엥겔스에게 추가로 돈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 뒤에 이어졌다.
마르크스의 낭비벽과 노동 의지 부족의 주요 희생자는 물론 가족, 특히 그의 아내였다. 예니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의 역사가 낳은 비극적이고 가여운 인물이다. 스코틀랜드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녀의 창백한 피부와 녹색 눈동자, 다갈색 머리카락은 아가일의 2등 백작 가문 출신으로 플로덴에서 살해당한 친할머니를 쏙 빼닮았다. 예니는 아름다웠고 -마르크스의 시가 증명하듯- 마르크스는 그녀를 사랑했으며, 마르크스를 열정적으로 사랑한 그녀 역시 마르크스가 본가와 처가를 상대로 벌이는 투쟁에 동참해 싸웠다. 그녀의 사랑이 싸늘히 식어 버린 것은 고통으로 점철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마르크스 같은 이기주의자가 어떻게 예니에게서 그런 애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까? 아마도 마르크스가 강인했고 권위적이었으며, 소년기와 청년기 초기에는 잘생겼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지저분하기는 했지만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역사가들은 이런 특징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데, 이런 특징은 신비로운 매력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이것은 사적인 대화를 할 때나 대중을 상대로 연설을 할 때 모두 두드러졌던 히틀러의 장점 중 하나였다). 마르크스의 유머는 신랄하고 잔인했다. 그렇지만 그의 빼어난 농담은 많은 사람을 웃겼다. 그가 유머를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많은 불쾌한 특성 때문에 추종자를 거느리지 못했을 것이고, 집안의 여자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을 것이다. 농담은 남자들보다 더욱 힘들게 생활하는 곡절 많은 여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마르크스와 예니는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경우가 잦았고, 훗날 딸들이 마르크스를 따랐던 것도 무엇보다 그의 유머 감각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의 아내는 고상한 스코틀랜드 혈통(마르크스는 그 혈통에 대해 허풍을 떨었다)과 프러시아 정부의 고위층 인사인 남작의 딸이라는 신분을 자랑스러워했다. 그가 1860년대에 런던에서 보낸 무도회 초대장에는 그녀의 “처녀 때 성은 폰 베스트팔렌”이라고 인쇄돼 있다. 그는 자기가 탐욕스러운 부르주아지보다는 순수 혈통의 귀족들과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목격자에 따르면, 그는 부르주아지라는 단어를 특히 불쾌한 경멸조로 발음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니는 국적도 없고 직업도 없는 혁명가와의 결혼 생활의 끔찍한 현실이 눈앞에 드러나자, 아무리 초라한 생활이라도 부르주아지 생활 양식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1848년부터 시작해서 최소한 10년 동안, 그녀의 삶은 악몽이었다. 1848년 3월 3일, 마르크스에 대한 벨기에 정부의 추방명령서가 발급되면서 마르크스는 감옥으로 끌려갔다. 예니 역시 매춘부들이 가득한 감방에서 밤을 지냈다. 이튿날, 마르크스 가족은 경찰의 호위 아래 국경으로 향했다. 마르크스는 이듬해 대부분도 도피나 재판으로 보냈다. 1849년 6월 즈음에는 빈털터리 신세였다. 그다음 해에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집사람이 갖고 있던 마지막 보석들은 이미 전당포를 찾아갔네.” 그는 어처구니없는 혁명적 낙관주의를 끝없이 불태우며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그는 엥겔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라는 활화산의 거대한 분출을 지금처럼 목전에 둔 적도 일찍이 없었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쓰겠네.” 그러나 예니에게 그런 위안거리는 결코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을 했다. 부부는 영국에서 피난처를 찾았지만, 궁핍한 생활은 그곳에서도 이어졌다. 예니, 로라, 에드가 등 아이 셋을 두고 있던 그녀는 1849년 11월에 넷째 아이 기도를 낳았다. 다섯 달 후, 임대료를 내지 못해 첼시에 있는 방에서 쫓겨난 마르크스 가족은 (예니가 쓴 표현에 따르면) “첼시 사람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길바닥에 나앉게 됐다. 그들은 정육점 주인, 우유 장수, 약사, 빵집 주인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침대를 팔았다. 마르크스 가족은 레스터 광장에 있는 궁상맞은 독일인 하숙집에 숙소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갓난아기 기도가 죽었다. 예니는 이 시절에 대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난 절망적인 이야기를 남겼는데, 마르크스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결코 예전 상태로 회복되지 않았다.
1850년 5월 24일,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 웨스트모얼랜드 백작은 영민한 프러시아 경찰의 스파이가 보내온 보고서 사본을 받았다. 보고서에는 마르크스를 핵으로 하는 독일인 혁명가들의 활동이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예나가 감내해야만 했던 것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 주는 문헌도 없다.
(마르크스는) 보헤미안 지식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수와 몸치장, 옷 갈아입기 같은 것이 그가 가끔씩 하는 행위의 전부입니다. 그는 술에 취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온종일 빈둥거리면서 보내는 날이 많지만, 해야 할 일이 많을 때면 지칠 줄 모르는 지구력으로 밤낮으로 일을 합니다. 잠자는 시간이나 깨는 시간은 일정치 않습니다. 종종 밤을 꼴딱 새고는 낮 시간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채로 소파에 누워 있습니다. 그렇게 저녁까지 잠을 자는데, 잠이 들면 세상 사람 모두가 그의 집에 있는 방(두 개가 전부입니다)에 들어왔다 간대도 모를 정도입니다…깨끗하고 성한 가구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부서지거나 해지거나 찢어져있습니다. 사방에 먼지가 0.5인치 정도는 쌓여 있고, 어디를 가나 난장판입니다. 거실 한복판에는 방수포가 덮여 있는 커다란 구식 테이블이 있는데, 그 위에는 원고지와 서적, 신문뿐 아니라 아이들 장난감, 부인의 바느질 바구니에서 나온 옷감과 넝마, 이가 빠진 컵 몇 개, 칼과 포크, 램프와 잉크병, 커다란 사발, 네덜란드제 사기 파이프, 담배, 담뱃재(…) 등등이 놓여 있습니다. 이 놀라운 잡동사니 앞에서는 고물상 주인도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 지경입니다. 마르크스의 방에 들어서면 담배 연기 때문에 눈물이 찔끔거립니다. ….. 모든 것이 더럽고 먼지가 수북하기 때문에, 의자에 앉는 것도 상당히 위태로운 일입니다. 다리가 세 개밖에 없는 의자가 있습니다. 다리가 네 개인 의자에서는 아이들이 요리를 하면서 놀고 있습니다. 이것이 손님에게 제공되는 의자인데 아이들이 요리한 흔적을 치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앉았다가는 바지를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1850년부터 날짜가 매겨진 이 보고서는 아마도 마르크스 가족의 형편이 최하 수준이었을 때를 묘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후 몇 년 동안 다른 불행들이 몰려왓다. 1851년에 태어난 딸 프렌치스카가 이듬해 죽었다. 마르크스가 “꼬마 파리”라고 부르면서 애지중지했던 아들 에드가가 지저분한 환경에서 위장염에 걸려 1885년에 죽은 사건은 부부 모두에게 끔찍한 충격이었다. 예니는 이 충격에서 결코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우리 집사람은 매일 나에게 자기가 무덤에 누워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고 말한다”고 썼다. 그보다 석 달 전에 딸 엘리노어가 태어났지만, 마르크스에게는 위안이 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아들을 원했는데, 이제 그에게는 아들이 한 명도 없었다. 글 쓸 때 조수로 쓸 때를 제외하면 딸들은 그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1860년에 천연두에 걸린 예니는 외모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 시점부터 세상을 떠난 1881년까지, 지치고 환멸에 찬 여성, 전당포에서 은제 식기를 찾아 집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사소한 행운에 감사하는 여인이 된 그녀는 마르크스의 삶의 그림자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1856년에 마르크스 가족은 엥겔스 덕에 소호에서 벗어나 하버스톡 힐의 그래프톤 테라스 9번지의 임대 주택으로 이사를 갈 수 있었다. 9년 후, 다시 엥겔스 덕에 그들은 메이틀랜드 파크 거리 1번지에 있는 더 나은 집을 얻었다. 이 시점부터 그들은 최소한 2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살았다. 마르크스는 아침마다 <더 타임스>를 읽었다. 그는 지방 교구회의 위원으로 당선됐다. 화창한 일요일에 그는 엄숙한 가족들을 이끌고 행스테드 히스까지 산책을 갔다. 그가 선두에서 활보를 했고, 아내와 딸들, 그리고 친구들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지화는 또 다른 형태의 착취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딸들이 착취 대상이 됐다. 마르크스의 딸 셋은 모두 총명했다. 아이들이 혁명가의 자식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불안하고 피폐한 유년기를 보상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최소한 그의 급진주의의 논리에 따라 아이들에게 직업을 가지게 권유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아이들에게 만족할 만한 교육을 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아이들이 어떤 식이 됐건 직업 훈련을 받는 걸 허락하지 않았고, 직업을 갖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다. 그가 제일 아꼈던 딸 엘리노어는 올리브 슈라이너에게 이렇게 밝혔다. “힘들었던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사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어요.” 딸들은 상인의 딸처럼 집에 머물면서 피아노를 배우고 수채화를 그렸다. 딸들이 커 가는 동안에도 마르크스는 혁명가 친구들과 함께 술집 순례를 다니고는 했다. 그런데 빌헬름 립크네흐트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딸들이 들을지도 모른다면서 집에서는 음탕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나중에는 그가 이뜰던 혁명가 집단 출신 구혼자들을 못마당해했다. 그는 그들의 결혼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결혼을 어렵게 만들었고, 그의 반대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마르크스는 쿠바 출신으로 흑인의 피가 섞여 있는 로라의 남편 라파르그를 “니글리로”나 “고릴라”라고 불렀다. 그는 예니와 결혼한 샤를 롱게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두 사위 모두 멍청이였다. “롱게는 최후의 프루동주의자이고 라파르그는 최후의 바쿠닌주의자야. 둘 다 지억에나 가라고 해!” 딸들이 직업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딸들에게 구혼한 남자들을 적대시했던 마르크스 때문에 막내 엘리노어는 딸들 중에서 제일 큰 고통을 받았다. 그녀는 남자-즉, 아버지-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도록 배우면서 자랐다. 그녀가 결국 아버지보다 더 이기적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작가이자 자칭 좌익 정치인인 에드워드 에이블링은 여배우 유혹이 주특기인 난봉꾼이자 식객이었다. 배우가 되고 싶어 했던 엘리노어는 타고난 희생자였다. 그와 엘리노어, 그리고 조지 버나드 쇼가 여성의 자유에 대한 뛰어난 탄원서인 <인형의 집>의 런던 첫 낭독회에 참여했고, 엘리노어가 노라를 연기했다는 것은 역사의 씁쓸하고 자그마한 아이러니 중 하나다. 그녀는 마르크스가 죽기 직전에 에이블링의 정부가 됐고, 그 이후로는 어머니 예니가 한때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랬듯이 에이블링의 고통스러운 노예가 됐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본인이 인정했던 것보다도 더 아내를 필요로 했던 것 같다. 그는 예니가 죽은 1881년 이후 급격하게 활력을 잃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유럽 각지의 온천을 전전하며 병을 차료했고, 햇빛과 깨끗한 공기를 찾아 알제리와 몬테카를로, 스위스를 여행했다. 1882년 12월, 그는 러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커져가고 있다는 사실에 의기양양해했다. “내 성공이 입보다 더 기쁜 곳도 없을 거야.” 그는 “내가 영국에 버금가는 구체제의 진정한 보루라 할 정권에 타격을 가했다는 것이 만족스럽다”고 으스댔다. 3개월 후, 그는 화장복 차림으로 불가에 앉아서 숨을 거뒀다. 딸 예니는 그보다 몇 주 전에 사망했다. 다른 두 딸의 최후 역시 비극적이었다. 남편의 행동으로 인해 심적인 고통을 겪은 엘리노어는 1898년에 아편을 과다 복용했다. 동반자살이었던 것 같은데, 에이블링은 교묘히 죽음을 벗어났다. 13년 후, 로라와 라파르그 역시 동반 자살을 하기로 합의하고는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이 비극적인 가족에 마르크스의 가장 이상야릇한 개인적 착취의 결과로 태어난, 눈에 띄지않는 기이한 생존자가 있었다. 마르크스는 영국 자본가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사례를 많이 발견했지만, 말 그대로 무임금으로 일하는 사례를 밝혀내는 데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노동자가 실제로 존재했다. 그것도 그의 집안에. 마르크스가 가족들을 거느리고 공식적인 일요 산책에 나설 때, 소풍 바구니와 다른 용품들을 들고서 맨 뒤에서 따라가는 땅딸막한 여자가 있었다. 이 사람이 가족들이 “렌첸”이라고 부른 헬렌 데무스였다. 1823년에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여덟 살 때 보모로 폰 페스트팔렌 가문에 들어왔다. 그녀는 숙식을 제공받았지만 임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1845년, 결혼한 딸이 안쓰럽고 걱정스러웠던 남작부인은 스물두 살 난 딸의 일을 좀 덜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렌첸을 예니 마르크스에게 보냈다. 렌첸은 1890년에 숨을 거둘 때까지 마르크스 집안에 남았다. 엘리노어는 그녀를 “다른 사람들한테 너무나도 상냥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대단히 금욕적인 사람”이라고 칭했다. 그녀는 지독할 정도로 부지런히 일했다. 요리와 설거지뿐 아니라, 예니가 영 재주가 없던 생활비 관리까지 도맡았다. 마르크스는 그녀에게 동전 한 닢도 주지 않았다. 마르크스 가족의 생활이 암흑기를 겪던 1849-1850년에 마르크스의 정부가 된 렌첸은 아이를 임신했다. 갓난아기 기도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된 때였지만, 예니 역시 다시 임신을 했다. 온 가족이 방 두 개에서 살고 있던 상황에서, 마르크스는 렌첸의 상태를 아내뿐 아니라 끝없이 발길이 이어지는 혁명가 손님들에게조차 숨겨야 했다. 결국 예니는 그 사실을 직접 알게 됐거나, 누군가에게서 얘기를 들었다. 그녀는 고통은 이 시점에서 극에 달했다. 마르크스를 향한 그녀의 사랑이 종지부를 찍은 것도 이때였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의 사적이고 공적인 슬픔을 한없이 커지게 만든 사건이기는 했지만, 내가 자세히 털어놔서는 안 될 사건”이라고 불렀다. 이 문장은 그녀가 1865년에 쓴 자서전의 초고에 들어 있는데, 이 자서전은 37페이지 중에서 29페이지가 남아 있다. 그녀가 마르크스와 다툰 광경을 묘사한 나머지 부분은 파기됐는데, 엘리노어가 그랬을 것이다.
렌첸의 아이는 1851년 6월 23일에 소호의 딘 스트리트 28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들이었는데, 헨리 프레데릭 데무스로 출생 신고가 됐다. 마르크스는 그때나 이후에나 자기 책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가 아이의 친아버지라는 소문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도 루소처럼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거나, 영원히 다른 집에 입양을 보냈으면 하고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렌첸은 루소의 애인보다 강했다. 그녀는 자기가 아들을 떠맡겠다고 고집했다. 아이는 루이스라는 노동 계급 집안에 맡겨졌는데, 마르크스 집안을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현관문을 이용하는 것은 금지됐고, 부엌에서만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마르크스는 프레디의 아버지라는 것이 밝혀져서 혁명지도자 이자 예언가로서의 지위에 치명적 타격을 받을까봐 기겁을 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그의 편지에 이 사건에 대한 모호한 언급이 한 차례 등장한다. 다른 언급은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해 은폐됐다. 마르크스는 결국 엥겔스를 설득했다. 프레디를 엥겔스의 자식으로 인정하는, 가족에게만 둘러댈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엘리노어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엥겔스는 공동작업을 위한 마르크스의 요구에는 그대로 따를 준비가 돼 있었지만,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엥겔스는 1895년 8월 5일에 인후암으로 사망했는데,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엘리노어(그는 그녀를 투씨라고 불렀다)가 그녀의 아버지를 결백한 존재로 계속해서 믿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석판 위에다가 글을 썼다. “프레디는 마르크스의 아들이다. 투씨는 아버지를 영웅시하고 싶어한다.” 엥겔스의 비서 겸 가정부인 루이제 프레이버거는 아우구스트 베벨에게 보낸 1898년 9월 2일자 편지에서 엥겔스 본인이 그녀에게 진실을 말했다고 쓰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프레디는 웃길 정도로 마르크스를 쏙 빼닮았어요. 전형적인 유대인 얼굴과 푸르고 검은 머리카락을 볼 때, 맹목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만이 그가 장군(그녀가 엥겔스를 부를 때 쓴 호칭)과 조금이라도 닮았다고 할 거예요. “엘리노어도 프레디가 자기 의붓 오빠임을 인정했고, 그와 친하게 지내게 됐다. 그녀가 그에게 보낸 편지 아홉 통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의붓 오빠에게 조금의 행운도 안겨 주지 못했다. 애인 에이블링이 프레디가 평생 모은 돈을 빌리고는 갚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렌첸은 마르크스가 잘 알고 지냈던 유일한 노동 계급 인물이었고, 그가 실제로 접촉했던 단 한 사람의 프롤레타리아였다. 프레디는 두 번째 존재가 될 뻔도 했다. 노동 계급의 남자로 자란 그가 서른여섯 살 때인 1888년에 몹시도 바라던 정비공 자격증을 땄기 때문이다. 그는 거의 평생을 킹스크로스와 해크니에서 살았고, 엔지니어 연합의 정규 회원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를 전혀 몰랐다. 두 사람은 딱 한 번 만났는데, 아마도 프레디가 부엌에서 집 밖으로 나오던 계단에서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혁명적 철학자가 친아버지라는 사실은 조금도 몰랐다. 그는 1929년 1월에 사망했다. 그즈음,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전은 구체적이면서도 소름 끼치는 형태를 갖췄고, (마르크스가 열망하던 절대 권력을 완성한 지배자인) 스탈린은 러시아 농민 계급을 향한 비극적인 공격에 착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