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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아름다운 교회 | |
연합의 3가지 목표 비전 Vision |
①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과의 연합(요15:5,17:11) ② 주님처럼 섬김의 본을 위한 연합(요13:14-15) ③ 선함과 아름다운 실현을 위한 연합(시133:1-3) |
1. 교회 행사 및 소식
➊ 오전예배후 이어서 임시 제직회가 있습니다. 제직원들께서는 다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➋ 오후예배후에 구역장, 부구역장 구역공과 모임이 있습니다.
-모임장소: 청년부실
➌ 김광은 집사님 차녀 조현경자매가 (주) 미트뱅크에 취업하여 인천으로 올라갔습니다.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주전 170년대에 많은 유대인 (Diaspora Jew : 로마에 의해 가나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다소로 이주해 왔다. 이때 그곳의 거주민들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주었고 그 이유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바울의 조상도 로마시민권을 이렇게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
➍ 김현우 집사님 장모님(황순옥 권사)께서 집으로 퇴원하여 통원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위해서 기도 많이 해 주시기 바랍니다.
➎ 다음주일에는 당회원, 교사 모임 및 생일축하행사가 있습니다.
➏ 목사님 위임식이 11월 02(토) 오전 11시에 있습니다.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➐ 예배시간 10분 일찍 와 주시고, 오후찬양 예배시간에도 일찍 오셔서 다함께 찬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❽ 예배 후 사용한 곳 정리정돈 및 전원상태를 꼭 확인 해 주시기 바랍니다.
▲ 다소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문' 기원전 41년경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찾아와 만난 곳이 바로 이곳 다소이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만남은 그후 지중해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
2. 노회․총회 행사 및 소식
➊ 2013 총회 신학원 가을 수련회
-일시: 10.21-23(월-수)
➋ 2013 영남노회 은퇴 목사, 장로 위로연
-일시 : 10.31(목) 오전 11시 30분
-장소 : 대우부페(055-267-7770)
아라랏산
터어키의 동부 아르메니아 지역, 소련과의 국경지역에 아라랏(Ararat) 이라 불리는 산이 있다.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는 성서뿐 아니라, 아르메니아, 바빌론, 메소포타미아등 중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기원전 3천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난 수메르 (Summer)의 서사시, '길가메쉬의 서사시' 가운데 200행에 가까운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있으며, 기원전 1700년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때의 점토판에도 '7일 낮 밤 큰비가 땅 위로 쏟아져 내렸으며, 큰 배가 바다로 떠내려 가자 태양신이 나타나 하늘과 땅에 빛을 내려 주셨다'고 씌어 있다. |
***** 식사 및 설거지 봉사자
<금주> 정지영, 임은득, 자원자
<다음주> 서은영, 임소을, 자원자
탐사의 시작
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방주를 찾아 보려는 일은 19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조직적으로 시도되기 시작했다. 1829년 10월 독일의 파로트(Parrot) 교수가 처음으로 아라랏 산 꼭대기에 올랐으나 방주는 찾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54년 뒤인 1883년 5월, 지진피해를 조사하던 터키 관리들이 빙하에 드러난 나무로 된 검은 물체를 발견했다. 거의가 얼음에 묻혀 있었으므로 전체 모습과 크기를 알 도리는 없었지만, 그 안에는 높이 5 m 짜리 칸막이가 줄지어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그 물체가 드러누워 있는 모양으로 보아 산등성이를 빙하와 함께 미끄러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 했다. 온 세계가 놀랐지만, 사진이 없었으므로 미심쩍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방주 이야기는 1차, 2차 세계대전을 앞뒤로 해서 많이 쏟아져 나왔다. 주로 전쟁터에 나갔던 조종사들의 목격담이었다. 1916년 늦여름, 아라랏 산에서 북쪽으로 40 km 떨어진 곳에 있는 러시아 제국 제3 코카서스 항공 분견대에 근무하던 블라디미르 로스코비카(Roskovitsky) 중위는, 어느날 새 비행기를 시험하느라 아라랏 산 근처에 다녀왔던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 눈 덮인 산꼭대기를 몇 킬로쯤 돌아서 남쪽으로 날아가니 사파이어처럼 푸른 호수가 나타났다. 산 그늘 쪽은 아직 얼어붙어 있었다. 호수 위를 지나친 나는 한번 더 살펴보려고 기수를 돌렸다. 그때 뒷자리에 탄 동료가 뭐라고 소리치며 호수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둥그스름한 지붕으로 덮인 묘하게 생긴 배 한 척이 얼음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낮게 떠서 그 언저리를 몇 번이나 맴돌았다. 그 배는 엄청나게 컸다. 뱃머리에 가까운 한쪽옆은 많이 뜯겨져 있었고, 그 반대 쪽에는 7m 는 됨직한 큰 문이 나 있었다. 우리는 기지로 돌아오자마자 대장에게 그 일을 알렸다. 대장은 자기를 그곳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나를 따라 호숫가의 배 모양을 살펴 본 대장은 부대로 돌아오면서 그것은 틀림없는 노아의 방주라고 말했다. 1년중에 두 달만 조금 드러나고 열 달은 얼음에 묻히므로 썩지 않고 5천년간 버텨왔을 거라는 것이 대장의 의견이었다. 대장은 이 사실을 로마노프 황제에게 보고 했다. 황제는 얼마 안있어 2개 중대를 보내왔다. 우리는 탐험대와 함께 산기슭 벼랑을 따라 길을 만들며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배 있는 곳까지 닿은 때는 한 달이나 지나서였다. 우리는 그 배의 크기를 재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배 안은 몇 백 개나 되는 칸막이로 나뉘어 있었는데, 어떤 방은 아주 크고 천장도 높았다. 마치 코끼리 같은 큰 짐승을 넣으려 만든 것처럼. 또 어떤 방에는 바구니가 겹겹이 줄지어 있어 새들을 넣어두는 방같기도 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구석구석에 촛농 같은 것이 두텁게 발라져 있었는데, 선체는 잘 썩지 않는 소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는 근처의 봉우리 꼭대기에서, 배의 한쪽에서 떨어져 나간 나무들을 찾았다. 그것들은 일부러 그곳까지 옮겨져, 방 하나짜리 작은 신전을 짓는데 쓰였다. 그 신전은 불에 타 거의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1917년 봄 탐험대장은 사진과 함께 자세한 보고서를 황제에게 보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제국은 볼세비키 혁명으로 무너졌다. 황제는 그들에게 사로잡혔고, 탐험보고서와 사진들은 신을 믿지 않는 볼세비키 들의 손에 넘어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 뒤 우리 항공대의 몇몇 사람들은 아르메니아를 거쳐 자유 세계로 빠져 나왔다" 로스코비키라는 조종사의 이름은 그가 공산당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거짓 이름을 쓴 것이므로,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꾸며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는 몇몇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 육군 장교들이 아라랏 산의 큰 봉우리와 작은 봉우리 사이 낙타등처럼 움푹 들어간 기슭으로 파견되었다는 말은 사실이며, 그때 비행사의 이름은 사보로키 중위와 레이진 중위, 지휘관은 콜 대령으로 알려지고 있다. |
**** 주일오전예배 /사회자 / 한용균 목사
묵상기도 ᠁᠁᠁᠁᠁ /늘은혜 성가대
예배의 부름 ᠁᠁᠁ / 요15:16
신앙고백 ᠁᠁᠁᠁᠁ / 사도신경
기원 ᠁᠁᠁᠁᠁᠁᠁ / 사회자
※. 찬송 ᠁᠁᠁᠁᠁ / 27장
성시교독 ᠁᠁᠁᠁ / No. 20
찬송 ᠁᠁᠁᠁᠁᠁᠁ / 214장
기도 ᠁᠁᠁᠁᠁᠁᠁ / 이덕기 장로
성경봉독 ᠁᠁᠁᠁ / 요한복음 5:30-31 (신약.151)
특송 ᠁᠁᠁᠁᠁᠁᠁ / 늘은혜 성가대
미국과 소련의 탐사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소련 공군 마스케린 소좌가 1916년의 기록을 확인하려고, 부하로 하여금 아라랏 산을 정찰 비행토록 하였다. 이 배는 소련 쪽 기슭에 있었으므로 소년공군 조종사들은 많은 자료와 사진을 가자고 있었으나, 단 한 장도 미국인들에게 나눠 준 적이 없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과 소련은 동맹국이었으므로, 미군 조종사들은 1942년 '군사 원조 비행'때 아라랏 산 위를 날 수 있었다. 이때 찍은 사진들이 미군 잡지 '성조지'에 실렸으나 거의가 빨리 지나치면서 얼핏 찍은 사진들이어서 알아보기 어려웠다. 배 모양을 보았다는 몇몇 미국인들 가운데, 1959년 터키에 머물렀던 미공군 제 428 전술 비행 중대의 슈잉하머(Schwinghammer) 소위가 제일 믿음직한 사람으로 꼽힌다. "터키인 한 사람과 내 친구와 나는 F-100 전폭기를 몰고 아라랏 산으로 갔다. 며칠 전 미국인 교수에게서 노아의 방주가 그 산에 있다고 들었으므로 그 말이 진짜인지 알고 싶었다. 그곳은 소련 국경 근처인데다가, 얼마 전 C-130 수송기가 격추된 일이 있는 터라 우리는 조심스럽게 시계 바늘과 반대로 아라랏 산을 돌았다. 그러자 낙타등과 같이 생긴 산등성이 밑에 배같은 보양이 드러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 모양으로, 너비는 12m 쯤이고 길이는 얼음 위로 드러난 것만 30 m 가 넘었다. 우리는 1,200m 높이에서 빠르게 지나쳤으므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U-2기 조종사가 그것을 촬영했다는 말을 어디선가들은 적이 있지만 사진을 본 일은 없다. 그날 우리는 소련 국경을 넘지 않으려고 서둘러 돌아왔지만, 우리가 본 물체는 틀림없이 네모난 배 모양이었다." 영원한 수수께끼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기독교 교단들은 앞을 다투어 탐험대를 아라랏 산에 보냈다. 그들은 방주를 찾아내어 성경의 기록을 증명하려 하였으나 아직 아무도 방주를 찾은 사람은 없다. 영국과 미국은 몇 차례 대규모 탐험대를 보냈지만, 정보부의 끄나풀이란 핑계로 소련과 터키로부터 번번이 등산 허가를 받지 못했다. 1974년 ERTS (지구 자원 탐사 기술 위성) 가 아라랏 산 위 740 km에서 어렴풋한 물체를 찍어 보내왔다. 미국의 모스 상원 의원은 이것의 크기나 모양이 방주와 꼭 같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주 아라랏 산을 비행기로 측량해온 터키 정부는, 그것은 화산암이 침식되어 우연히 배 모양을 나타낸 데 지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 과연 노아의 방주가 아직 남아 있을까? 지금도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라랏 산에 대한 현대적인 과학탐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 노아의 방주는 인류의 가슴속에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
설교 ᠁᠁᠁᠁᠁᠁᠁ / “내려놓음”
봉헌찬송 ᠁᠁᠁᠁᠁ / 213장
봉헌기도 ᠁᠁᠁᠁᠁ / 한용균 목사
교회소식 ᠁᠁᠁᠁᠁ / 이덕기 장로
※. 찬송 ᠁᠁᠁᠁᠁ / 32장
그리이스의 수도인 아테네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전체 인구의 약 1/3 이 모여 사는 대도시이다. 약 2500년 전에 있었던 페르시아나 스파르트와의 싸움 때 도시국가들의 리더 였고, 시의 중심에 있는 아크로 폴리스의 언덕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의 문화재 제 1호인 파르테논 신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그리이스의 심벌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그리이스의 심벌은 헌법 광장인 신타그마로서 관공서나 현대적 건물들이 모여 있다. 아크로폴리스 폴리스(도시국가)의 중심이었던 언덕으로 폴리스의 수호신을 제사 지내는 신들의 구역이었다. 고대 그리이스의 전성기에는 많은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이 나타났지만, 아크로 폴리스 중심에 있는 파르테논은 BC 438년에 완공된 도리아식의 거대한 신전으로 아테네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세워졌다. 아테네 여신은 여러 가지 역할이 많은 여신인데 특히 문명 생활의 수호신이며 또 그리스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올리브 나무를 준 여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정의의 수호자 이기도 하다. 헌법 광장 아테네의 중심이 되는 광장. 신타그마란 헌법이란 뜻이며 광장 앞에 옛 왕궁인 국회의사당이 있다. 카페가 광장을 둘러싸고 호텔이나 상점이 즐비한 번화가로 아테네의 얼굴이다. 무명용사 전사비 국회 의사당 앞에 있으며, 독립 전쟁 이후에 있었던 여러 번의 전쟁에서 전사, 행방 불명 된 병사들의 비. 1923년의 작품으로 항상 2명의 위병이 여름에는 순백, 겨울에는 짙은 곤색의 중세 이래의 전통의상을 입고 서 있다. 올림픽 경기장 고대의 판아테네 대 축제의 경기장이었던 곳이며,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 대회가 열렸던 곳이다. 알렉산더 출신의 대부호 아베로프가 사재를 털어서 재건했다. 아고라 일찍이 아테네 시민의 정치, 철학, 문화, 인생을 논하거나 상업 정보를 교환하던 광장, 1931년 부터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벌어져, 아타로스의 스토아가 복원되어 박물관이 되어 있고 여기서 발굴된 것이 진열되고 있다. 제우스 신전 104개가 있던 돌기둥 가운데 15개만 남아 있는 코린트 양식의 건축,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그리이스 최대의 신전, 근처에 아드리아누스의 문이 있고 이 문 서쪽은 구 아테네, 동쪽은 신 아테네라고 한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 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 110:1) 우리가 그의 성막에 들어가서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리로다 (시 132:7)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3)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히 1: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히 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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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도 ᠁᠁᠁᠁᠁ / 한용균 목사
폐회 ᠁᠁᠁᠁᠁᠁᠁ / 성도의 교제
※. 표는 일어 서시기 바랍니다.
**** 주일오후예배 ****
오후3시 사회/ 한용균 목사
찬양 ᠁᠁᠁᠁᠁᠁᠁᠁᠁᠁᠁᠁᠁᠁ 주사랑 찬양
기도 ᠁᠁᠁᠁᠁᠁᠁᠁᠁᠁᠁᠁᠁᠁ 이세진 집사
성경 ᠁᠁᠁᠁᠁᠁᠁᠁᠁᠁᠁᠁᠁᠁ 누가복음 14:15-24(신약.119)
현재 고린도라고 하는 시는 신 고린도로 1858년과 1928년의 대지진 후에 세워진 곳으로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0 Km 되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도했던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아카 지방의 수도였던 고린도는 번창한 항구 도시 였으나 심한 빈부의 차이와 퇴폐적인 윤리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제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3년동안 머물면서 고린도전서를 집필했고, 57년 경 그리이스 북부 마케도니아에서 후서를 써 보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내용은 교우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고 사목적인 대답을 해 주기 위해 쓰여졌다. 이 서간에서 다룬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린도 신자들 중에는 의붓 어머니와 동거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이를 방관만 하고 있었고 (고린도전서 5:1-13), 어떤 교우는 자유를 구실 삼아 창녀와 관계를 맺었고 (고린도전서 6:12-20), 또 성행위라고 하면 무조건 죄악시 하는 극단적인 사람이 있었다. (고린도 전서 7:1-10).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결혼, 이혼, 독신 등 성윤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외에도 교우들 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이교도 법정에 가서 소송하는 문제 (고린도전서 6:1-11),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 (고린도전서 8:1-11), 성찬의 전례시 부자들은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배불리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은 사례도 있었기에 올바른 성찬례를 가르쳐 주고 (고린도전서 11:17-34), 그 외에도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고린도전서 14장), 부활 신앙을 부인하는 (고린도전서 15:12) 사례를 그리스도 부활의 근거로 삼아 주장하며 가르쳤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들간의 분쟁과 파벌 의식 이었다. 신자들 간에는 바울파, 아폴로파, 그리스도파 등이 조성 되었다. 이러한 파벌 의식이 만연되었다는 교회의 소식을 듣고 바울은 이 서간에서 그들이 전해 듣고 받아들인 복음을 상기 시키면서 교회 공동체가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역설하였다. 둘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는 첫째 편지를 발송한 다음에 고린도에 거짓 선교사들이 와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부인하였다. 사태가 다급함을 인식한 바울은 직접 고린도 교회를 찾아 갔지만 이미 대부분의 신자들이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동조하여 그를 맞아 주지 않았다. 바울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에베소에 돌아와 '번민과 비통한 마음을 안고 울면서' 매우 격앙된 어조로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고린도 교회로 보낸 '눈물의 편지'이다. (고린도후서 2:4).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어 이 눈물의 서간을 보내고 그 사이에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지도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디도를 만나 고린도 신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사도에게 순종하고 모든 적들을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약속을 들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신으로 나온 편지가 고린도후서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 고린도후서는 사도직에 대한 편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도직의 본질과 역활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겸허한 태도로 자신의 약함 안에서 힘차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높이 기리고 있다.코라의 구세주 교회, 터키어로 카리예 사원으로 불려진다. 이곳은 건물 보다도 훌륭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로 더 유명하다. 이 교회는 1500년에 회교 사원으로 개조 되었다가 , 1984년부터 1954년에 걸쳐 미국의 비잔틴 협회에 의해 정리 보존된 후,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교회의 작품들은 예술적인 면에서 비잔틴 문예 부흥기의 초기 예술성을 잘 반영해 주는 작품들로 정평이 나있다. <사진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프레스코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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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창 ᠁᠁᠁᠁᠁᠁᠁᠁᠁᠁᠁᠁᠁ 하승룡 집사
설교 ᠁᠁᠁᠁᠁᠁᠁᠁᠁᠁᠁᠁᠁᠁ 한용균 목사
내 집을 채우라
기도 ᠁᠁᠁᠁᠁᠁᠁᠁᠁᠁᠁᠁᠁᠁ 한용균 목사
찬송 ᠁᠁᠁᠁᠁᠁᠁᠁᠁᠁᠁᠁᠁᠁ 가서 제자 삼으라
주기도문 ᠁᠁᠁᠁᠁᠁᠁᠁᠁᠁ 오직 믿음으로
데살로니카는 기원전 315년 경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동생 카스텔이 대왕의 누이동생이며, 지기 아내인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이다. 현재에는 인구 100만 정도의 그리이스 제2의 도시이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카에 간 것은 50-51년경의 제2차 전도 여행 때였다. 그는 필립피에서 설교를 하다가 투옥을 당하고 해당 당국에서 그 도시를 떠나 달라고 종용하자 그 곳을 떠나는 참이었다. 데살로니카서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신자 생활을 성실히 이행하는 그곳 신자들이 처음 신앙 생활할 때를 회상하며 계속 열성으로 정진할 것과 그 중에서도 종말을 떳떳이 맞이 할 수 있는 건전한 생활 (데살로니카전서 5:6, 4:3, 2:12-13) 을 하도록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해서 였다. 동시에 신설교회에 목자로서의 끊임없는 배려와 종말이 임박해 있는 것으로 믿는 그곳 이방인 신자들이 제기한 죽은 자들의 운명과 자신들의 처신에 관한 문의 (데살로니카전서 4:13)에 답하기 위해서 였다.
1. 박해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믿음을 굳게 지키도록 신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함이다. 2. 재림에 선행되어야 할 사건들이 아직 성취 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어 주의 날이 임했다는 잘못된 생각을 정정 시키기 위함이다. 3. 절제 없는 난잡한 생활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엄한 훈계로 교회를 충고하기 위한 것이 이 서간의 목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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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예배 및 기도회 2013. 10.23 저녁7시 30분>
설교자 : 한용균 목사
성경본문 : 잠언 3:1-10 (구약. 912)
설교 : 그리하면
지금은 어지간한 지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도시로 데살로니카 북서쪽에 있는 카발라에서 20 Km 떨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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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주 예배 봉사위원
주일오전기도 : 이종운 장로
주일오후기도 : 조연신 성도
주일오후찬양 : 박성희 집사
**** 중보기도하기
카타콤바의 어원 카타콤바라는 말은 옛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섞여진 '카타쿰바스'(구덩이 또는 동굴의 옆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로마의 가난했던 사람들은 그들 가족을 위한 무덤을 땅 위에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동굴도 거의 다 무덤으로 차 버리자, 그때부터 땅을 파고 지하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세기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로마의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네크로폴리' 즉 죽은 자들의 장소라고 불렀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무덤을 '체메테리움'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잠자고 있는 중 또는 쉬고 있다는 뜻이다. 이 체메테리움(현재는 이탈리아어로 치미테로라고 부름)이라는 말은 초기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지어 낸 말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덤이 이교도들이 사용했던 '네크로폴리'라고 불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 필요성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종교의 자유를 얻은 것은 313년이다. 그 후 교황 성다마수스(366-384)가 아피아 가도 주변에 있던 성세바스티아누스의 무덤을 포함해서 그 일대의 지하 공동묘지를 재정비하고, 이곳을 성세바스티아누스의 지하 공동묘지라고 명명하면서 처음으로 '카타쿰바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 후 중세기 때부터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지하 공동묘지(주로 1세기에서 4세기 초까지) 전체에 대해 일반적으로 카타콤바라고 널리 사용하면서 현재까지 내려온다. |
① 하나님의 손이 성도의 삶과 가정과 생업과 재정 가운데 함께 하시고, 늘 하
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게 하옵소서.
② 온 성도들이 성령충만하여 주의 뜻을 분별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며
거룩한 삶에 힘쓰고 능력있는 전도자로 쓰임받게 하소서.
③ 교회안 밖으로 회심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④ 질병으로 고통받는 분들의 치유,건강 회복,믿음과 예배생활의 회복을 위하여
⑤ 교회를 멀리 한 성도와 군복무중에 있는 형제, 유학중에 있는 성도를 위해
⑥ 심방을 통해 모든 가정이 축복되게 하소서.
⑦ 담임목사의 목회사역을 위해
이 밧모섬은 묵시록의 저자인 요한이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유배가서 묵시록을 기록한 장소로 알려진 섬이다 (묵시 1:9). 이시기를 대개 94-96년 경으로 보고있다. |
➇ 나라(안보,평화,전쟁 막아주심,경제회복,사회안정)와 북한(무력도발,공산체제,
신앙자유,복음으로 통일)과 한국교회와 재건교단의 신앙의 회복,하나됨,복음능
력회복을 위해
➈ 새로 등록한 교우들이 잘 정착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맛보며
경험하게 하소서.
➉ 임신중에 있는 성도와 태아의 건강을 지키시고, 잘 자라서 순산케 하소서.
⑪ 김현우 집사님 장모님(황순옥 권사)께서 신장이식수술후 고신대병원 1인 무
균실에 입원치료중입니다. 빠른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위해서
⑫ 황갑득 성도님게서 미국에 잠시 가셨습니다. 다녀오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함께 하도록
***** 2013년 10월 추천신앙도서
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 / 팀 체스터 / IVF / 11,000원
카타콤바의 역사와 시대적 배경 네로 시대의 박해를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첫 박해를 전후하여 초기의 선교활동은 로마 근교에 살던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계층 사람들에게 주로 많이 행해졌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은 주로 테베레강 어귀와 아피아 가도 주변이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신자들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모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자연히 신자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로마의 성 밖에서 은밀히 모였는데 그 중에서도 아피아 가도 주변에 많이 있던 지하 무덤 안이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급기야는 신자들의 무덤도 그 안에 마련되면서 지하 무덤, 즉 카타콤바의 면적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모진 박해 속에서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의 보금자리와 휴식처는 오직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의지하는 길밖엔 없었다. 카타콤바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인 피난처였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예절을 행할 수 있었던 교회였고, 또한 죽어서도 가까이 있고 싶어했던 그들만의 보금자리였다. 1세기-3세기 로마에서 순교한 사도 베드로는 바티칸 골짜기에, 사도 바울은 오스티아로 가는 길 주위에 있던 이교도들의 무덤 사이에 묻혔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두 사도가 순교했던 1세기에는 아직도 그리스도인들만의 전용 묘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선교의 대상이 주로 경제력이 없던 가난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묘지와 같은 공동체의 공동 재산을 마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2세기에 들어오면서 선교의 대상이 중류 또는 상류 계층까지 확대되면서, 차츰 그들의 소유하고 있던 로마 근교의 별장, 과수원, 또는 농장을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희사함으로써 비로소 공동체 전용 묘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난했던 당시의 공동체는 희사 받은 땅 위에 무덤을 세울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가장 경제적인 방법은 땅을 파고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카타콤바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3세기는 순교가 가장 많았던 시대이기도 하다. 로마의 황제들 중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가장 심한 박해를 가했던 황제는 카라칼라와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이었다. 그 중에서 발레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의 지하 공동 묘지를 색출하여, 묘지 출입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의 박해 시기는 로마의 역사가들이 '피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한 시기였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이 313년에 선포되면서, 장구한 세월 동안 박해받던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이제 땅 밑에서 땅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당시 로마 전역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의 지하 공동묘지는 모두 교회의 공적인 재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 신자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땅 위에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지하에 묻혀 있던 성인과 순교자들 무덤 옆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묻히기 위해 계속 그들의 무덤을 지하에 만들었으며, 이러한 일은 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5세기-9세기 그리스도교가 자유를 얻는 313년부터 시작된 카타콤바 성지 순례는 거의 400년 동안 계속되었다. 현재 발견된 카타콤바에 가 보면, 그 당시 성지 순례를 하던 신자들이 성인이나 순교자의 무덤이 있던 벽 위에 새긴, 그분들의 전구를 빌었던 기도문 등이 남아 있다. 반면에 네 차례에 걸쳐 로마가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곳 지하 무덤도 예외 없이 그들로부터 약탈을 당하였다. 옛 로마인들의 장례 풍습은 사람이 죽게 되면 평소에 지녔던 모든 금붙이 또는 패물 등을 그대로 관속에 넣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 때문에 무덤은 로마에 침입한 이민족들의 중요한 약탈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어느 지하 무덤에 가 보더라도 관 뚜껑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파괴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8세기 부터는 그때까지 카타콤바에 남아 있던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유골을 로마의 성 안쪽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순교자들의 유골이 성 안의 기념 성당으로 모두 이전되자 순교자들의 발길은 카타콤바에서 점점 멀어졌으며, 이때부터 카타콤바는 역사 속에서 차츰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10세기-16세기 이 시기는 카타콤바가 완전히 잊혀진 시대였다. 카타콤바라는 말 자체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시대이다. 17세기-18세기 17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당시 고고학 분야의 대가 였던 안토니오 보시오(1575-1629)의 연구에 의해 약 삼십여 곳의 카타콤바가 로마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19세기-현재 보시오 이후 약 2백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예수회 신부이자 고고학자였던 주세페 마르키(1795-1860)가 카타콤바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강의를 듣던 제자들 중 조반니 바티스타 데 로시(1822-1894)는 마르키 신부의 수업 중에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 로마에 남겨 놓은 교회 유적'이란 제목의 강의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 감동이 거의 천 년 이상 역사에 묻혀있던 카타콤바를 다시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데 로시가 없었더라면 카타콤바도 없었을 것이다. 이 젊은 고고학도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연구했던 대상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위해 숨어들었던 지하 무덤, 즉 카타콤바에 관한 것이었다. 어렵고도 끈질긴 인내를 요구하는 이 작업은, 1854년 로마의 남쪽 성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들판의 땅 밑에서, 3세기 때의 교황 무덤과 체칠리아 성녀의 무덤을 발견함으로써 오랫동안 역사에 묻혀 있던 카타콤바의 존재를 그 중요성과 함께 세상에 드러냈다. |
***** 2013년 10월 요절 암송 요절(사랑) *****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
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한일서 4:20>
카타콤바의 형태 로쿨로 카타콤바 내부에 가장 많은 무덤 형태로, 내부의 지하 통로 양쪽으로 벽처럼 되어 있는 곳에 직사각형으로 구멍을 파 놓은 것이다. 이러한 무덤은 관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죽은 사람을 구멍 안에 눕혀 놓고, 그 위에 천만을 덮고는 무덤을 가리기 위해 뚜껑으로 막았다. 이 뚜껑은 주로 기왓장이나 벽돌을 사용했으며, 간혹 대리석을 얇게 잘라서 사용하기도 했다. 포르마 이는 순교 성인의 무덤이 있는 곳과 규모가 제법 큰 공동 무덤이 있는 곳의 땅에 마련된 무덤들로서, 관의 뚜껑은 주로 대리석을 사용하였고 간혹 큰 기왓장을 만들어 덮기도 하였다. 아르코솔리오
카타콤바 내부에 있는 무덤들 중 가장 아름답게 꾸며진 무덤이다. 벽을 넓고 깊게 파서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아치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형태의 무덤은 주로 3-4세기에 많이 만들어 졌다. 쿠비콜로 이 무덤 형태는 주로 가족묘지에 사용되었으며, 장방형의 방(보통 2-3평 정도의 넓이)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먼저 소개된 무덤의 형태, 즉 직사각형 모양의 로쿨로 또는 아치로 장식된 아르코솔리오,그리고 바닥에는 포르마라고 일컫는 무덤들이 간혹 자리 잡기도 한다. 이곳의 내부 벽 위에는 벽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벽화들의 내용은 주로 구약의 요나 이야기, 신약의 세례받는 예수님의 모습과 기적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크립타 카타콤바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소이며, 이곳에는 주로 순교자 교황 또는 성인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공간이 넓었기 때문에 카타콤바 내부에서 교회와 같은 역할도 했다고 한다. |
*****믿음의 절정....
- E.M 바운즈 목사 -
믿음으로 살아서 승리를 얻은 사람들의 기록을 읽을 때 우리는 “믿음이 신뢰에 흡수된다”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거의 모든 경우에 믿음이 신뢰와 섞여 있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다. 믿음과 신뢰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믿음이 그것의 역할을 다 수행하여 쉼을 얻게 되는 시점이 반드시 도래하는 것도 사실이다. 바꿔 말해서, 신뢰가 찾아와 믿음에게 “당신은 당신의 역할을 다했소. 이제부터는 내가 맡겠소”라고 말하는 시점이 반드시 도래한다는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사건을 통해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의 놀라운 힘을 가르치셨다. 그들이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마21:20)라고 소리쳤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1,22)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큰 믿음을 갖게 된다면 그는 절대적 신뢰의 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카타콤바의 소개 로마주변에는 약 60여개의 카타콤바가 현재까지 발견되었다. 그중 중요한 몇 곳을 소개한다. 성칼리스투스의 카타콤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한창이었던 2세기말에서 3세기 초, 당시 교황 제피리누스(199-217)는 로마의 명문이었던 체칠리아 가문으로부터 이 지역의 땅을 희사받게 되었다. 교황은 자신의 부제였던 칼리스투스에게 명하여 이곳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초기 교회 공동체의 정식 관리를 받게 된 첫 번째, 공적 재산이었으며, 동시에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인의 지하 공동 묘지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이곳은 현재 발견된 모든 카타콤바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지하 5층까지 개발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한 통로는 2킬로미터 정도나 뻗어 있다. 모든 카타콤바는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 이름들은 카타콤바 안에 있는 성인이나 또는 땅을 희사한 봉헌자들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이 카타콤바 역시 순교자 교황 성칼리스투스(217-222)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다. 순교자 교황 성칼리투스는 부제가 되기 전, 유대인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이탈리아 지중해 바다 가운데 있는 사르데냐 섬의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중노동을 하다가, 로마의 귀족 부인이며 신자였던 마르치아의 도움으로 자유를 얻어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그 이후 당시 교황 제피리누스의 부름으로 부제가 되어 약 20년 동안 이곳 카타콤바의 관리 및 교황의 보조자로 일했다. 제피리누스 교황이 서거하자 교황으로 선출되어 양떼들을 보살피는 목자의 역할을 하다가 순교하였다. 교황들의 무덤 카타콤바 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장소가 바로 3세기에 만들어진 교황들의 무덤이다. 이곳에는 모두 아홉 분의 성인 교황들이 안치되어 있는데, 그 중 세 순교자 교황은 다음과 같다. 성폰시아누스(230-235) 그 와중에 교황 폰시아누스는 자신의 양떼들을 보살피다가 체포되어 종신 중노동형에 처해졌고, 사르데냐의 탄광으로 추방되었다. 광산의 중노동자로서 힘든 일을 하던 교황은 탄광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시신을 몇 년 후 광산 주변에서 찾아 내어 이곳에 안치하였다. 성파비아누스(236-250) 교황은 14년간 재위하면서, 막시미누스의 대박해시기 때 순교했던 교황 성폰시아누스의 시신을 찾아내어 카타콤바로 옮기는 등, 그 당시 순교자들을 위해 특별한 일을 많이 하였다. 막시미누스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박해는 데치우스(249-251)가 황제로 오르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부르며, 옛날 자신의 선대들이 하던 식대로 신전 안에 석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 꿇고 축복의 주문을 읊도록 명령하였다. 교황 파비아누스도 끌려가서 주문을 읊는 것뿐 아니라 배교하도록 강요받았는데, 이를 거부하자 즉시 신전 밖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그때가 250년 1월 20일이었다. 성식스투스 2세(257-258)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253-260)때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의 공적인 교회 묘지였던 카타콤바에 대해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리스 태생의 교황 식스투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안에서 교회 전례 모임을 갖다가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고, 그 역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258년 8월 6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
***** 헌신... (막10:28)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 (82)
제자로서의 헌신이란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지 다른 무엇을 얻으려고 헌신을 해서는 안됩니다. 흥정하려는 장사꾼의 심정을 가진 헌신을 언제나 조심하십시오. 참된 헌신이란 뭔가를 보상 받으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상업주의 속에서 사는 우리들은 뭔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이 있을 때 주께 헌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닙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위하기 보다 제 자신을 더 위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깨끗하게 되길 원하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길 원합니다. 저는 주님의 전시장에 놓여져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들이랍니다.” 그러나 참된 헌신은 하나님 그분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를 얻으려고 헌신한다면 그러한 헌신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장사속 마음일 뿐입니다. 참된 헌신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을 내 모든 인격 속에서 최고로 사모하는 것입니다. 주를 향한 헌신은 언제나 그 어떠한 인간 관계보다 앞서야 합니다. 주님께 헌신하다가 중도에 멈추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실제로는 헌신하지 못하고 비전만 갖다가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체칠리아 무덤 성녀로 익히 잘 알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2세기 때, 로마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남편 발레리아누스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으며, 초기 공동체를 위하여 많은 헌신을 하던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황제대 일어난 박해 때 두 사람 다 순교하였다. 성녀는 죽기 전에 자기 가문의 소유지를 공동체에 기증하였고, 그녀 자신도 순교 후 이곳에 묻혔다. 821년 교황 파스칼리스 1세(817-824)가 그의 시신을 로마 시내의 테베레 강 옆에 있던 성녀의 생가(이곳은 5세기 때 이미 성당이 되었음)로 이전할 때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성녀가 어떻게 순교하였는지 잘 보여 주고 있는 이곳의 석상은, 17세기 초 카를로 마데르노라는 유명한 대리석 조각가가 1599년 성녀 체칠리아의 기념 성당에서 성녀의 유해 보수 작업을 위해 처음으로 관을 열었을 때 보았던 모습을 스케치하였다가, 나중에 조각하여 성당 지하에 있는 성녀의 무덤 앞에 봉헌하였다. 현재 이곳에 있는 석상은 그 작품을 그대로 복사하여 놓은 것이다. 목 부분을 잘 보면 잘린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있다. 성녀는 순교사상 처음으로 뜨거운 목욕탕에서 증기로 질식시켜 죽이는 방법으로 처형당했으며, 이 방법이 여의치 않자, 다시 참수형을 받아 처참한 순교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녀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오른쪽 손가락 셋을 펴고 있고, 그 위에 왼쪽 손가락 인지 하나를 포개고 있는데,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일체라는 것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표현한 것이라 한다. |
2013년 10월 20일 창원 아름다운교회(055-283-3450)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49-7
아름다운교회/한용균목사
마라나타(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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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과 벽화-초기 기독교 미술 성녀 체칠리아의 무덤 왼쪽 벽 위에는 순교자 교황이었던 성우르바누스(222-230)와 그리스도가 비잔틴 양식의 벽화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사이에 그려졌음이 전문가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를 비롯해 카타콤바 내부에는 성서 내용을 주로 한 벽화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초기 신자들은 자신들의 관이나, 관 뚜껑에 그리스도인 이었음을 나타내는 상징들을 부조 또는 조각 해 놓았다. 이러한 상징들은 그 무덤의 주인이 신자였는지 아닌지를 가리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반드시 죽은 날짜, 그리고 시간까지 정확히 새겨 두었다. 대표적인 벽화들과 부조, 조각은 다음과 같다. 선한 목자
선한 목자는 어깨에 양을 메고 있는 모습인데 구세주 그리스도와 그가 구원한 영혼을 상징한다. 이 상징물은 특히 벽화에 자주 등장하고 석관의 부조에도 많이 나타난다. 석상이나 무덤을 덮은 비석에 새겨 넣은 문각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기도하는 사람 이 형상은 대개 두 팔을 벌려 들어올린 모습인데 이미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서 사는 영혼을 상징한다 모노그램 (Monogramm)
그리스어 알파벳 Χ(키)와 Ρ(로)라는 두 글자를 합성한 것으로 그리스도(Christus)를 발음하는 그리스어 단어 ΧΡΙΣΤΟΣ의 처음 두 글자를 나타낸다. 이 모노그램이 어느 무덤에 새겨져 있으면 그 고인이 그리스도인 이었음을 가리킨다. 요나의 이야기 거의 모든 가족 무덤에 빠지지 않고 요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요나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두려워 도망을 가다가 고래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난 예언자이다. 요나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신앙의 표상이었다. 그들은 죽음이란 다만 부활을 대비한 잠자는 상태 또는 쉬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바다의 큰 괴물의 뱃속에서 삼일 낮과 밤을 지내고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았던 요나의 모습은 그들에게 바로 희망 그 자체였던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40절을 보면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사흘만에 부활할 것임을 미리 예고편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명이었더라"(막 6:41-44) 성서에서 밝히고 있는 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사람들에게 떼어 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에 관한 그림은 대부분 식탁을 앞에 놓고 일곱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일곱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것으로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물고기 그리스어로는 물고기를 ΙΧΘΥΣ(ichtous: "익투스"라고 읽는다)라고 한다. 이 단어들을 위아래로 나란히 늘어놓으면 ΙΗΣΟΥΣ(Iesus: 예수) ΧΡΙΣΤΟΣ(Christos: 그리스도) ΘΕΟΥ(Theou: 하느님의) ΥΙΟΣ(Uios: 아들) ΣΩΤΗΡ(Soter: 구세주) 첫머리 글자들과 맞아떨어진다. 이런 단어를 합체문자(合體文字: 그리스어로 acrosticos)라고 한다. 어떤 단어들이나 문구들의 첫 글자들을 따서 합성하는 단어이다. 물고기를 그린 이 형상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가장 널리 보급된 상징이었으며, 어쩌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요 표징이라고 하겠다. 그리스도 그리스 말의 크리스토스(xpiotos)에서 나온 상징으로, X는 '크'의 발음이며, P는 '로'의 발음이다. 즉 그리스도를 뜻하는 합성문자이다. 닻
구원의 상징이자 무사히 영원한 항구에 접어든 영혼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는 신자들에게 내세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상징한다. 당시 신자들은 하나님나라로 가는 것을 일종의 먼 여행으로 생각했으며, 그 시대의 여행수단은 배밖에 없었다. 닻이 주는 의미는 배의 안전과, 천국에 도착했을 때 여행이 끝남을 뜻한다. 즉 이 닻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안전하게 도달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비둘기
주둥이에 올리브 가지를 물고 있는 형상인데 하느님의 안식에 든 영혼을 상징한다. AΩ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글자와 마지막 글자이다. 그리스도가 만유의 시원이요 종국임을 의미한다 불사조 아라비아에 산다는 전설적인 이 새(Pheonix)는 죽은지 여러 세기가 흐르면 자기의 잿더미에서 되살아난다는 것이 고대인들의 믿음이었다. 그래서 부활의 상징물이 된 것이다. |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특징은 바로 ‘기도’이다.”- E.M 바운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