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회] 전두환, 5공 제물로 김근태 구속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3 09:50 김삼웅
신변의 위기를 느낀 김근태는 제5차 민청련 총회도 참석하지 않고 은신하다가 8월 24일 옷을 갈아 입고, 민통련 이창복을 만나기 위해 다시 집을 나서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의 미행을 당했다. 오랜 세월 수배 과정에서 피신에 이골이 난 김근태는 지하철을 타면서 경찰을 따돌리고, 민청련 사무실에 들렸다가 장충체육관 근처 커피숍으로 이창복을 만나러 갔다. 5공 정권은 10월 29일 학내외의 각종 시위와 위장취업 등 노사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학생들의 지하 단체인 서울대 ‘민주화추진회’(민추위)라는 조직이 있음을 밝혀냈으며, 이 단체의 위원장 문용식(26, 서울대 국사학과 졸)과 문용식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38, 전 민청련 의장) 등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주석 7) 정부당국의 날조된 발표는 순치된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어용신문들은 “학내외 시위와 노사분규를 배후 조종”한 “자생적 사회주의 집단”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김근태의 정체가 ‘적색분자’라고 매도하였다. 김근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밖에서는 언론에 의해 인격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빨갱이, 용공좌경, 종북, 적색분자라는 낙인은 사회적 매장을 의미하는 사형선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밖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신문과 방송을 도배질하는 시간에 김근태는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절망적인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김근태는 민청련 활동 중에 여러 차례 정보기관의 간부와 요원으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기관지 <민주화의 길>이 대학근처 서점을 통해 학생들 손으로 들어가고, 학생운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 민청련의 성명서와 선언문 내용이 점차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 미국의 정책에 대한 비판, 노동문제에 너무 자주 그리고 깊이 개입한다는 등의 이유였다. 김근태는 그럴 때마다 당당하게 해명하면서 민청련의 활동을 늦추지 않았다. 여러 통로를 통하여 다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민주운동단체의 대표였던 사람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당당하지 못한 태도는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피신으로 인한 긴장과 불안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며 정말 내키지도 않았습니다. 어려움은 오지 않을 것이며 설사 온다고 하더라도 김병곤 씨나 황인하 씨 경우처럼 된다면 최악의 경우 감옥에서 휴식을 취하고 마음을 오히려 깊게 하는 시기로 삼자는 은밀하면서도 야무진 계획조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주석 8) 김근태는 5공세력의 야수성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박정희 체제의 국군보안사 출신 전두환과 그 일당이 저지른 12ㆍ12하극상, 광주학살, 삼청교육대, 양심적 언론인, 정치인 탄압 등 잔인무도함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셈이다. 본인이 당한 끔직한 것이 앞에 있는 줄 알았다면, 선택은 너무나 분명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니 정치군부 자신을 위해서도 피신했어야 했습니다. 저들은 핀으로 본인을 과녁에 고정시켜 놓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칼날을 소리없이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약간의 냄새가 나는 것으로 단정하고 평상시 키워왔던, 반드시 불온ㆍ불순의 거대한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열망을 확인하는 작업에 돌입한 것입니다. 이 확인 작업을 위해서는 그 무엇을 해도 좋고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주석 9) 김근태는 5공 권력이 자신을 정치적 ‘과녁’으로 삼는 이유를 대강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보복이며, 그 대상으로 본인이 찍힌 것입니다. 85년 5월 학생들의 미문화원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정치군부는 학생운동에게 그리고 민주화운동에게 복수하고자 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소위 학원안정법 제정기도였습니다. 그를 둘러싼 권력 내부의 복잡한 전개도 문제였지만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반대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회의적 반응 때문에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타협과 양보가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정치군부는 오히려 수치나 치욕으로 강팍하게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의한 표적으로서 희생양으로서 본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주석 10) [24회] ‘인면수심’의 경찰관들, 짐승이 되다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4 08:00 김삼웅
고문(Torture)은 '몸을 비틀다'라는 라틴어 ‘torquere'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고문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짐승의 행위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마ㆍ야만의 행위다. 그래서 국제법과 국내법은 고문을 금지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상호간에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 세계인권선언 제1조.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 대한민국헌법 제11조 2항. 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좌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형사피의자 또는 기타 사람에 대하여 폭력 또는 가혹행위를 가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 대한민국 형법 제125조. 전두환 정권의 들러리 국회라는 평이 따르는 제11대 국회는 1983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제14조 2항에서 “고문을 하여 사람을 치상케 한 때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고 치사케 한 때에는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법을 개정하였다. 국제엠네스티는 1973년 <고문폐지를 위한 국제엠네스티선언>에서 “고문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범죄”라고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1. 고문의 사용은 인간의 자유 및 생명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간주된다. 2. 고문은 여하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고문을 통한 효력의 폭력은 누증적 악순환을 초래한다. 고문은 전염병처럼 이 나라 저 나라로 퍼져 나간다. 고문은 고문당한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고문하는 사람을 야수화한다. 3. 인류의 양심에 부합하는 견해를 표명하고 이러한 악을 근절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의무이다. 우리는 모든 정부가 고문을 금지하는 국내법과 국제법을 존중하고 또한 이를 개선할 것과 유엔결의 3059호를 수호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또한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및 직업상의 책무를 가진 제 인사 및 조직들이 전세계적인 고문폐지운동에 대하여 능동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를 요청한다. 한국에서는 대한제국 말기의 <형법대전>에 따르면 죄인에게 채찍(볼기를 치는 작은 대)과 혁편(革鞭, 종아리를 치는 가죽띠)을 사용하는 정도의 고문이 있었다. 그러다가 국권을 빼앗기면서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여 수많은 항일지사들을 죽였다. 병탄 초기의 105인사건과 일제말기 한국어학회사건 등이 대표적인 고문 사례로 꼽힌다. 이승만의 친일파 중용으로 일제의 악질 경찰이 그대로 국립경찰로 들어오면서 고문의 악습이 전해지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특무대 요원, 경찰 등 3천명을 뽑아 중앙정보부를 창설하면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기술은 이들을 통해 오롯이 5공으로 전수되었다. 김근태가 서부경찰서에서 잠을 깬 것은 1985년 9월 4일 새벽 5시 반, 9월의 이 시각은 아직 미영(未明)이다. 이 시간 이후 김근태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야수, 악마들에게 사지가 찢기고 영혼이 파괴되는 한 마리 희생양이 되었다. 출감 뒤 그가 생생하게 기록한 <남영동>을 대본으로 그가 당한 고문의 실상을 재구성한다. 이 부문은 좀 지루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었으면 한다. 오늘 우리가 이 정도나마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게 된 것은 김근태 등 민주인사들의 희생과 투쟁의 댓가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근태와 이근안을 착각하는 세대는 이것이 ‘신화’가 아닌 불과 30여년 전의 현실이었음을 인식했으면 싶다. 비가 내리는 새벽 5시 반, 유난히 껌껌했습니다. 대략 남영동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아무리 꼽아봐도 가슴 속만 저려올 뿐이었습니다.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기만 하고.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어떤 의경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내보내 주는구나, 고마움조차 느끼며 옷을 주섬주섬 끼어 입고 유치장을 나섰습니다. 지긋지긋했던 7차례의 유치장 신세, 또 체포, 연금, 이 모든 것으로부터 얼마간은 남남이 될 수 있겠구나. 지난 2년 동안의 민청련 의장으로서, 민주화운동 대열의 책임을 짊어진 사람으로서 가져야 했던 외로움과 중압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오늘이다. 무엇보다 잠은 실컷 잘 수 있겠지. 하늘을 올여다보고, 바람 소리에 마음을 실어서 흘려보낼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유치장 문을 나섰습니다. 몇 번 유치장 문을 되돌아보기도 하구요. 서부경찰서 유치장은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주석 11) 혁명가들 중에는 낭만주의자들이 많은 편이다. 계산하고 타산에 밝은 사람은 혁명가가 될 수 없다. 속된 이해와 이문을 따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낭만주의자들은 물질적 셈법보다 하늘의 별을 헤고, 호수의 포말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가망이 없는 혁명도 꿈꾸게 된다. 반독재 민주화운동가 중에는 낭만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김근태의 심중에도 낭만성이 켜켜이 쌓였다. 학창시절 그는 문학서적을 끼고 살았다. 신새벽 의경의 깨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고서도 김근태는 자신이 풀려나는 것으로 알았다. 여전히 짐승들이 지배해온 5공의 권력 구조를 자세히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깨닫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사과 사무실을 지나 복도에 나서는 순간 스산한 어둠이 확 덮쳐 왔습니다. 7~8명의 정사복이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아찔하더군요. 다리도 후들후들해지고, 여러 번 체포당했었지만 이번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허를 찔린 것입니다. 고무풍선이 바늘에 찔려 별안간 바람이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도 몸도 모두 쭈글쭈글해지더군요. 이미 꿈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김근태 씨죠? 같이 가봐야겠소.” 경상도 사투리의 거한 한 사람이 내 앞을 막고 나섰습니다. 순간, 이건 구속이구나, 그쯤은 판단했습니다. 이 동행 요구에 강력하게 저항할까도 생각했지만 거기서 저항은 결코 앙탈에 지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초라하거나 추하게 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소, 어딘지 가봅시다.” 보호실 쪽으로 뚫린 좁은 복도를 지나 마당으로 나서니 거기 포니 자동차가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주석 12) [25회] 남영동 대공분실의 인간말종들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5 08:00 김삼웅
경찰관의 잠바로 얼굴이 덮힌 채 30~40분쯤 어디론가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 5층 15호실, 이 건물 왼쪽 맨 끝방이었다. 이곳에서 야만적으로 김근태를 고문하고 지휘한 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과 과장(일명 사장) : 총경 윤재호 1과 전무 : 경정 김수현 1과 전무 : 경정 백남운 1과 ? : 경감(?) 고문담당 전문가 1과 상무 : 경위 김영두 1과 부장 : 경장 정현규 1과 부장 : 경장 박병선 1과 부장 : 경장 ? (주석 13) 김근태는 자신을 체포해온 이 자들은 “무슨 열정에 불타오르는 모습도 아니고 눈빛에도 오직 회색빛의 냉담함,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더군”이라고 뒷날 회상을 할만큼 이들은 외견상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순수하다는 인간의 본성을 믿었다. ‘수심(獸心)을 간직한 인면(人面)’ 만을 본 것이다. 백남운은 김영두, 정현규, 최상남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옷을 벗기라고요. 처음에는 약간 저항을 하였으나, 몰려서이기도 하지만 아직 살아남은 오기가 발동하여 스스로 옷을 벗었습니다.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었습니다. 초라함, 빈약함이 덮쳐오더군요. 추워지기도 하구요. 아직 한창 남은 더운 여름이고 더구나 골방에 갇혀 있어 절대로 추울 수가 없는데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데도, 가슴의 한기가 온몸에 퍼져 버렸습니다. 발가벗었을 때 오는 당황함과 이 한기가 뒤섞여 몸을 오그라들게 하더군요. 이 사람들 분주하게 들락날락했습니다. 6시 반쯤, 정리된 것처럼 조용해지면서 위험이 닥쳐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김수현이 들어와서 “진술 거부를 잘 한다지, 여기서도 할거야? 경찰과는 달라.” 이어 본인에게 “당신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 데 어디가 아픈가?”라고 물었다. “피로의 누적이다. 또 방금 구류 살고 나오는 길이어서 더욱 그렇다. 민청련 대표직을 그만두어서 어디 휴양지로 가서 몇 달 쉬려고 하였다.”하자 “그렇다면 그 몸으로 견딜 수가 있겠는가. 당신 많이 깨져야겠구먼” 하였습니다. “내 의지가 살아 있는 한 진술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석 14) ‘수심(獸心)’들은 김근태의 팬티만 남기고 옷을 벗긴 채 무릎을 꿇렸다. 거부가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넓은 밴드로 눈을 가렸다. “늦가을 초겨울 문턱에서 바싹 마른 낙엽들이 바람에 휘날려 올라가다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발자국에 밟혀서 바스라지는 것이 자주 어른거리기도 했고”, “김근태는 고문 초입의 심경을 이렇게 그렸다. 그는 낭만파 시인이었다. 그리고 순간, 아우슈비츠, 나치 수용소에 갇혀 고문 당한 유태인들을 떠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김근태는 이때까지도 저들이 정말 고문을 감행하지는 못할 것으로 믿었다. 겁주기 위한 협박 정도로 인식하고 어떤 협박에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하였다. 그는 순결한 휴머니스트였다. 김근태가 이 당시 남영동 인간 도살장에서 당한 고문은 많이 알려졌다. 해외에는 국제인권단체를 통해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재정권의 잔혹성,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독재정권의 야만성을 다시 살피고,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이 참담한 고문을 어떻게 견뎌 왔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추상을 벗고, 구체적인 실상을 추적한다. 나치독일의 비밀경찰이 유태인과 사회주의자들을 고문 집단학살하면서 고전음악을 듣거나, 일요일에는 오페라 구경을 가자고 가족과 약속했듯이, 한국의 고문 기술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왈츠를 듣거나, 군대 나간 아들 걱정, 박봉에 대한 불평, 대학진학을 앞둔 자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등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 600만 명의 학살 책임자 아이히만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였던 점에서 ‘악의 평범성’을 지적하였다. (주석 15) ‘악의 평범성’은 히틀러 독일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박정희ㆍ전두환 시대의 한국에서도 벌어진 현상이었다. 김근태는 1985년 9월 4일부터 22일 동안 10차례에 걸쳐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을 당했다. 김근태를 고문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되는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21) 군을 고문으로 죽였다.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등이 고문살해범이다. 김근태 고문 뒤에라도 야수적인 고문이 근절되었다면 박종철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칠성대 위에 올려져 눕혀진 나는 순식간에 완전 결박되었습니다. 머리가 핑 하면서도 “저, 그래 견뎌 보자. 견디는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닥쳐올 것이라고 각오했던 바가 아니냐.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그랬고, 저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던 그것이 오고 있는 것이다”라고 속으로 되뇌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별 설득력이 없더군요. 목이 쉰 것 같기만 하구요.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해. 결국 큰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고 말걸. 이걸 너희들도 알고 있을거야. 클라이맥스에 중지하게 될 거야. 틀림없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대화니 화해니 말해온 것을 싹 지울 수는 없지. 오리발을 내밀어도 유분수지”라고 떠올리고, 여기에 매달리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썩은 동아줄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여지없이 뚝 끊어졌습니다. 협박자들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물고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백남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따라 얼굴에, 눈이 가려져 있는 내 얼굴에 수건이, 노란 세수수건이 덮어 씌어지고, 세상은 희뿌옇게, 누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머리 양쪽으로 정현규와 최상남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을 주어 고정시키고 그 위에 수도 꼭지를 틀어 샤워기 아가리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육척 거구인 김영두가 그 샤워꼭지를 잡고서 사정없이 물을 들이댔습니다. 그러는 한편 주전자에 물을 담아 동시에 쏟아 붓고 또 쏟아 부었습니다. 처음에는 칼을 갈면서 견디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은 견딜 수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숨을 어떻게 몰아쉬고 또 안 쉬고 또 몰아쉬고요. 하지만 애당초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숨이 탁탁 막히고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안간힘일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덮쳐오는 것이었습니다. 신 냄새 나는 짙은 껌껌함으로 뒤바뀌고 속은 메슥꺼워지다가 완전히 뒤집히고 콧속에서는 노린내가 치솟고 물이 쏟아지는 그 속에서 불길이 솟고 콧속으로 불길이 솟고요. 온몸을 버둥거리고 혼신의 힘으로 뒤척이고 하여 칠성대로 기우뚱하였지요. 몸은 완전히 땀으로 젖어 버리고 담요도 땀으로 물컹해졌습니다. (주석 16) [26회] “이래도 진술 거부할 거야?”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6 08:00 김삼웅
고문 조사실로 향하는 회전식 철제계단. 사진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두번째 고문은 이날 저녁 8시경부터 자행되었다. 다시 옷을 벗기고 고문대 위에 칭칭 묶었다. 그리고 오전과 같은 고문을 또 시작했다. 고문자들은 점점 크게 보이고 그럴 듯해 보이더군요. 당당하고 의젓하게 보이기도 하구요. 물론 무조건 고문을 하는 것이지요. 요구사항은 없었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얼마가 지났는지 어떻게 되는 건지 합리적 사고나 대응 같은 것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학대와 능욕을 어느 만큼 가하고 나면 그러나 고문자들은 뭔가를 반드시 제기하는 것이더군요. 이번에는, ① 폭력혁명주의자임을 자백하고 ②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자백하고 ③ 각 민주화운동 부문에서 움직이는 핵심적 인물을 대라. 김근태와 민청련이 제일 과격하고 제일 먼저 움직여서 오늘 같은 사태를 가져왔다. 우선 학생운동과 노동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을 대라.(…) 얼마 동안은 사실 끈덕지게 버텼었습니다. 허나 안 되더군요.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구체적인 것의 시인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고통에 못이긴 굴복에의 유혹이 머리를 쳐들더군요. 나는 인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배후가 이범영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사실 나로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지만 누군가를 꼬집어서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당시 이범영 씨는 이미 경찰의 수배를 받아서 피신중이었기 때문에 거짓으로 얘기해도 별 피해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 두번째 물고문도 대략 5시간 걸렸습니다. 끝난 것이 5일 새벽 1시경이었으니까요. 9월 4일의 두 번에 걸친 물고문, 그것만으로도 본인의 인간적 주체성은 크게 동요되고 일관성 있는 인격은 와해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강제되는 것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음을 처절하게 느끼게 된 것이지요. 이 만화 같은 현실에 머리를 숙여야 했지만 그러나 아직은 자신의 주체성, 그것을 다 포기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두꺼운 모직 겨울 잠바, 검정색과 붉은색의 체크무늬 잠바를 남영동 그곳을 나올 때까지 줄곧 입고 있습니다. (주석 17) 세번째 고문은 9월 5일 저녁 8시 반부터 다음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전기고문이었다. 완전히 발가벗겨졌습니다. 팬티도 남김없이 날라가 버리고요. 이곳에서 무슨 수치심 그런 것을 여밀 계제는 전혀 아니었지요. 그러나 팬티조차 벗겨지고 보니까 더욱 당황케 되면서 이제 모두 빼앗겨 버리고 말았구나, 그래도 아직 남은 것이 있고 소극적 저항의 표시물인 것처럼 느껴졌던 팬티마저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칠성대 위에 또 다시 꽁꽁 묶여진 다음에 고문자들은 발바닥과 발등에 붕대 같은 것을 여러 겹 감았습니다. 새끼 발가락과 그 다음 발가락 사이에 전기 접촉면을 끼우고, 그것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 같았고 이 붕대도 전기담요처럼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다음 발에, 사타구니에, 배에, 가슴에, 목에, 그리고 머리에 물을 주전자로 들어부었습니다. 그때 물의 섬뜩함은 귀기가 살갗에 달라붙는 바로 그것이었지요. 고문기술자는 뭔가 쉴새없이 떠들고 겁주고 협박을 하였는데 이제 전기가 통하면 회음부가 터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팬티를 벗겼다고 하였습니다. 우선 물고문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다만 그 강도는 물고문만 할 때보다는 못했지만 공포나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은 더욱 깊어만졌습니다. 소스라쳐 놀라게 되고 머리를 힘껏 움직이게 되지요. 어느 정도 물고문이 진행되어 몸에 땀이 나는 것 같게 되면, 그때부터 전기고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짧고 약하게, 그러다가 점점 길고 강하게, 강력하게 전류의 세기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중간에는 다시 약해지고, 가끔씩은 발등에 전기를 순간적으로 대기도 했습니다. (주석 18) 전기고문은 뒷날 상처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고문자들이 즐기는 수법이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핏줄을 뒤틀어 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렸습니다. 온몸이 저리고…” (주석 19) 김근태는 온 몸에 전류를 받으면서 신체의 마비와 정신적 착란상태에 빠져들었다.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어느 틈에 사그라졌다. 이성이 마비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