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州試)를 탁방(坼榜 : 합격자 발표)하는 날 선발에 합격한 사람을 포정사(布政司)에 올려보내어 향거원(鄕擧院)에 개장해서 고강(考講)하는데, 고시관 중에 한 사람은 서울에서 오고 두 사람은 이웃 성에서 뽑아온다.
개장하는 날에는 겨우 주시에 뽑힌 사람이 일제히 오는 것을 뽑을 뿐이니 주시를 마친 날에서 멀어도 열흘을 넘기지 않는다(航州에서 咸興까지, 江州에서 寧州까지도 열흘을 넘지 않아서 도착할 수 있음).
서울에서 내려오는 고관은 다 하대부(下大夫)로써 하며, 동고관(同考官)은 모두 이웃 성에서 뽑는다(위의 법과 같은데 지금 청국 법도 이와 같음).
고강하는 것은 본 식년에 강습한 경ㆍ사를 고시하는데 두 경서를 강(講)함에는(子年에는 《시》ㆍ《서》를 강함) 경서 대문 500여 자를 대면해서 외며(돌아앉아서 외지 않음), 음두(音讀)에 차착(差錯)이 없는 자를 뽑아서 문의(文義)를 토론하는데 무릇 9조목을 번갈아 뽑아 묻고, 세 고관이 각각 한 찌(栍)를 내어서 차례를 정하며, 모든 문답은 필담으로 하여 생을 그 끝에다 적는다.
무릇 거인이 강하는 책에는 주석과 음두가 없고 경문만 있는 책으로 하며, 고관은 주소와 대전과 언해 등 책을 갖추고, 뽑아서 묻는 것도 일정한 방향이 없이하여 거인에게 평소 공부한 것을 발표해서 답하도록 한다.
무릇 생(栍)에는 상ㆍ중ㆍ하 세 가지 생(通ㆍ畧ㆍ粗 세 가지 생이 있음)이 있는데 상생은 2분을 주고, 중생은 1분을 주며, 하생은 1분을 준다. 세 고관이 한 생씩을 내어서, 9분을 받은 자는 상지상이 되고, 8분을 받은 자는 상지중이 되며, 7분을 받은 자는 상지하가 되는데, 이렇게 차례로 내려와서 1분을 받은 자는 하지하가 된다. 두 고관이 모두 생을 내지 않은 것은 분이 없는 것이니 분이 없는 자는 3장에 응시하지 못한다. 모든 표ㆍ책 여러 문체를 고시하는 데도 그 법이 모두 같다. 두 경서 중에 한 경서에 분이 없으면 한 경서에는 비록 9분을 받았더라도 3장에 응시하지 못한다.
생각건대, 성시(省試)에는 순찰사를 고관으로 삼음이 마땅하나 본래 그렇게 않는 것은, 시원(試院)은 엄밀해야 하는데 순찰사는 순찰사대로 기무(機務)가 있어 쇄원(鏁院 : 과거 성적을 발표하기 전에 시관이 시험장을 떠나지 못하던 일)할 수 없으므로 고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전일(前日) 서읍(西邑)에 있으면서 황해도 고관이 되었을 때에 순찰사 이의준(李義駿)이 주고관(가정 정사년 가을)이 되었었는데, 과연 기무 때문에 쇄원 할 수가 없었다. 감사가 성시의 주시관이 되는 법도 얼마 있지 않아서 폐지되었다.
어떤 이는 “무릇 개장하는 데에 폐해가 있으므로 옛날에는 여러 고을에 돌려가며 시행했었는데 지금은 포정사에게 폐해를 홀로 감당하라 함이 가하겠는가?” 하나 나는 “주시에 인원이 가장 많아 봤자 100여 명에 불과할 것인데(사천성), 이것으로써 폐해를 당할 이치는 없다.”고 하겠다.
역사 세 가지를 강하는 것은(卯年에는 《한서》ㆍ《북사》ㆍ《元史》를 고시함) 사서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뽑아서 300여 자를 면강하도록 하며, 음두에 어긋남이 없는 자를 뽑고 이에 문의를 토론하는데 아홉 조목을 뽑아서 묻는다. 세 고관이 한 생씩을 내는 것은 위의 법같이 하며(아홉 등으로 가름) 문답도 필담으로 한다. 국사를 강하는 것도(午年에는 《동국통감》과 《동문선》을 고시하도록 함) 사기를 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다. 사기 세 가지와 국사에서 모두 1분도 얻지 못한 자는 3장에 응시하지 못한다.
고강을 마치면 이에 3장을 개설하여 모두 아홉 문체의 강(講)과 제(制)를 시험하여 통계해서 그 중 잘한 자를 뽑아, 성시 정원에 충수한다.
제 1장에는 경의 일도(묘년에는 《의례》와 《주례》에서 출제함), 사서의 일도(두 가지 예에서 의문을 들어서 묻는데, 지금의 四書疑와 같게 함)를 시험하며 그 문장은 모두 100자를 넘지 못하게 한다(넘는 것은 격식을 어긴 것이므로 뽑아버림). 사론 일도(자년에는 《사기》ㆍ《남사》ㆍ《요ㆍ금사》에서 문제를 냄)도 그 문장이 300자를 넘지 못하게 한다.
생각건대, 지금 경의라고 이르는 것은 7절(節)로 나누어 머리말 외에는 모두 미친 말과 망령된 얘기이고, 사서의 또한 그러하니, 이제 과조(科條)를 엄밀하게 세워서 많아도 100자를 넘지 못하게 하며, 지리하고 필요 없는 말은 없애고 오직 근엄함을 주로 함이 마땅하다. 만약 유년(酉年)을 만나면 그 경의는 《예기》에서 출제한다.
제2장에는 시 한 편(다음에 자세히 적었음), 조ㆍ제ㆍ표ㆍ전 중에서 한편(四六文도 가함), 물리론(物理論) 한 편(天文ㆍ曆法ㆍ農殖ㆍ器用으로서, 무릇 이치를 밝히는 학문이면 모두 논함이 가함)을 시험한다. 오언 율시(律詩)는 여섯 운(韻)을 넘지 못하며, 칠언 율시는 네 운을 넘지 못하며, 물리론은 많아도 300자를 넘지 못한다.
생각건대, 과거를 실시해서 사람을 뽑는 데에 반드시 시를 시험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국에 사신가거나 혹 빈접(儐接)과 더불어 화답해서 뜻을 전도(傳導)하기도 하니 여기에 대해 익힘이 없을 수 없으나, 이른바 과시(科詩) 20운 같은 것은 어떤 물건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또한 어디에 소용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니,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살피건대, 사륙문체(四六文體)는 그 격률(格律)이 엄정하기가 근체(近體) 율시와 같아서 고려 사람 및 국초 명신(國初名臣)의 지은 것이 모두 이와 같았는데 중세 이래로 이 법이 갑자기 크게 어지러워져서 과장(科場)은 고사하고 비록 비명(碑銘)과 상량문(上樑文)도 전혀 격률에 맞지 않는다. 근래에 중국에서 쓰는 표ㆍ전을 보니 그 성률(聲律)이 예전보다 더욱 엄격한데,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조회할 때에 쓰는 표ㆍ전문은 홀로 성률에 맞지 않으니, 그 대방(大方 : 식견이 훌륭해서 큰 도를 아는 사람)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이제 그 더러움을 한번 변화시켜 격률을 엄격하게 함이 마땅하며, 우물쭈물하며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총괄하건대, 여러 문체에 반드시 그 자수를 제한하는 것은, 과장(科場)에서 시험하는 데에는 다만 그 공부한 바를 알고자 하는 것이니, 정약(精約)한 중에서 그 지취(志趣)를 살핌이 마땅하며 거칠고 잡스러운 말은 취하지 말 것이다(무릇 하루에 세 가지 기예를 시험하면 試券 석 장을 갈라서 바치고 한 편에 연속하는 것이 아님). 제3장에 고책(古策 : 고금의 치란과 득실을 물음) 일도를 시험하는데 제목은 200자를 넘지 않으며, 대(對)는 100자를 넘지 못한다(적어도 700자 이하는 불가함). 시무책(時務策 : 그 자수는 위와 같이 함) 일도, 이문 일도는 본 식년에 독습(讀習)한 국사에서 출제하는데(子年에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동사집성》에서 출제하며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음), 500자를 넘지 못한다.
고책은 그 체재가 지금 집책(執策 : 考官을 執事라 일컬으므로 고관이 묻는 것을 집책이라 일컫는 것임)과 같으며, 시무책은 체재가 지금 전책(殿策 : 임금이 직접 策問하는 것을 전책이라 일컬음)과 같다. 이문(吏文)이란 주문(奏文)ㆍ자문(咨文 : 大國에 쓰는 것), 국서ㆍ예서(禮書 : 예조의 공문으로서 일본에 보내는 글), 주장(奏狀)ㆍ서계(書契 : 本國에 쓰는 것), 보장(報狀)ㆍ이문(移文)이 모두 이것이다. 가령 《삼국사기》에서 출제한다면 그 제목은 “마한 왕이 표공(瓠公)에게 양위하면서 신라왕에게 보내는 답서를 모방함. 고구려에서 당 태종에게 군사를 돌려주기를 청하는 주문을 모방함. 백제 신하 흥수(興首)가 백마강과 탄현(炭峴)을 굳게 지키기를 청하는 주장을 모방함. 신라 장군 의복(義福) 등이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에게 반군(叛軍)을 받아들인 사건을 변명해서 답한 이문을 모방함” 따위인데,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다.
생각건대, 근세에 책문(策問)의 제목이 혹 수천 자가 넘으니 학식이 얕은 선비는 다만 두사(頭詞)만 짓고 그 다음은 제목에 따라 엮어서 그 편을 완성하여 천 편이 똑같은 투(套)여서 가려 뽑을 수가 없으니 이제 과조를 엄하게 세워서 제목은 100자를 넘지 말게 함이 마땅하며, 그 대(對)는 옛 투를 죄다 없애고 한결같이 소식(蘇軾)의 문체를 따름이 거의 좋을 듯하다.
살피건대, 나라에 쓰이는 것은 이문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다른 것은 모두 겉치레이고 이것이 그 실지이다. 우리나라 제도에도 이문 제술이 원래 과목에 있으니 힘쓰지 않을 수 없다.
시권(試券)은 백면지(白綿紙)를 사용해서, 길이를 서권(書卷) 같게 하며 글자의 크기는 바둑돌만하게 한다. 무릇 비평은 모두 해서로 정결하게 하고, 세 고관이 각각 등제를 적는다.
종의 길이는 주척(周尺)으로 1척 5촌으로 해서 혹 두 폭을 연하기도 하며 혹은 3~5폭을 연하기도 하는데, 문장의 길고 짧음에 따라서 한다. 무릇 고시에 권점하는 데는, 주고관은 주색 붓, 부고관은 청색 붓, 참고관(參考官)은 자색 붓을 사용하여 시권 끝에다 비평을 적으며(비평은 墨書로 함), 각자 이름을 적어서, “아무 벼슬 신(臣) 아무는 삼가 비평한다.”라 하고 이에 상ㆍ중ㆍ하등을 각각 적으며 혹은 외(外)자를 쓰기도 한다. 방(榜)을 낸 다음 시권을 여러 유생에게 널리 보여서 공의를 들으며, 비록 물리침을 당한 시권이라도 모두 널리 보여준다.
살피건대, 지금의 시권은 모두 대추지(大硾紙)를 사용해서 쇠가죽보다 두꺼우며, 길이는 판자 문짝 같고 글자 크기는 주먹만하다. 황토(黃土) 물에다 붓을 담가, 점을 찍는 데는 매똥[鷹屎]같이 하며 작대기를 치는 데는 마류(馬柳)같이 하는데, 비(批)도 평도 하지 않고 바로 등을 기록한다. 한번 물리친 다음에는 그 시권을 5군문에 나누어주어서 유막(油幕)을 만들게 하거나 혹은 조지서(造紙署)에 보내어 곧 물에 담가 재생한다. 그리하여 떨어진 자는 그 잘못된 곳을 알지 못하고 불법으로 합격한 자는 드디어 그 자취를 숨기게 되니 법으로서 소략함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다.
또 두 과장(科場)에서 수납하는 시구가 많을 때는 7천~8천 장에 이르기도 하는데 방을 내는 기한은 종장(終場)을 마친 이틀 뒤이니, 고관이 비록 이주(離朱)와 유목지(劉穆之)같은 총명함이 있더라도 자세히 볼 수는 없어 100장밖에는 비록 비단 같은 문장이 있더라도 많이 떨어짐을 당하며, 기구(起句)에 한 작대기 먹으면 언뜻 보고 외(外)자를 써버린다. 유사는 망령되게 바치고 고관은 망령되게 상고하여서, 혹 보잘것없는 문장이 앞에 있으면 뒷사람의 좋은 문장마저도 함께 버림을 받게 되니 법의 어지러움이 이런 극도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그 까닭을 거슬러 생각해보니, 반드시 두꺼운 종이에다 글자를 크게 쓰도록 하는 것은 그 서법을 아울러 살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문사(文詞)와 필한(筆翰)은 그 길이 같지 않은 것이니,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 같은 글씨라도 나쁜 시를 썼다면 장차 뽑겠는가? 구양수(歐陽修)와 소식(蘇軾) 같은 글을 우연히 나쁜 글씨로 썼다 하여 물리칠 것인가? 진실로 그런 뜻이 있다면 별도로 한 권(券)을 주어서 서법을 고찰함이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과거에 엷은 종이를 쓰면 유막(油幕)은 장차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나, 이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말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정당한 세(稅)를 평균하게 부과하면 온갖 용도가 넉넉해질 것이다. 지금 중국에는 시권이 매미 날개같이 엷어도 유동(油幢)과 전장(氈帳)으로써 비와 눈[雪]을 막고 병력이 천하에 막강한데도, 우리 법이 가장 좋다 하겠는가?
방(榜)을 낸 지 30일 만에 여러 시권을 조정에 올리며, 이것을 공거원(貢擧院)에 회부해서 여러 학사에게 회의하도록 한다.
사흘을 기다리는 것은 거인들이 시권을 모두 보아서 공의에 결정됨이 있게 함이다. 시권은 합격한 것과 낙방한 것을 막론하고 모두 조정에 올린다. 공거원 여러 학사가 회의해서, 만약 그 합격시키고 떨어뜨린 것이 정당한 것은 시권 끝에 ‘공거원 제준(貢擧院題準)’이라 쓰고, 만약 함부로 합격시킨 것이 있으면 의논해서 떨어뜨리고, 만약 원통하게 낙방된 것이 있으면 의논해서 올리고, 그 고관은 논죄(論罪)한다.
생각건대, 지금 법은 오직 1등 세 사람의 시권만을 조정에 올리고, 향시에 지은 것은 으레 반포하지 않으며 또 회의하는 법도 없으므로 향시의 고시관이 방자해서 거리낌이 없다. 1등 시권 3장 외에는 와번인사(蛙翻蚓死)의 글일지라도 간사함을 적발하지 못할 것이니 공거원에서 회의하는 것을 어찌 그만두겠는가? 사람이 두려워하는 바는 공론이니 비록 돈과 비단이 앞에 무더기로 쌓인다 하더라도 몸과 명예를 돌보고 아껴서 반드시 지금같이 방자한 행동을 못 할 것이다.
모든 향시의 시관은, 비록 세 사람이 동석(同席)하나 두 사람은 들러리[伴食]가 될 뿐으로, 비록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시관의 인원을 갖추는 본래의 뜻이겠는가? 각자 등제를 매기게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
3장을 다 마치면 또 한 장(場)을 개설해서 병서(兵書)ㆍ산서(算書)ㆍ율서(律書)를 강하고, 이에 활쏘기 두 순(巡)을 시험한다.
병서는 《손무자(孫武子)》와 《삼략(三略)》이고, 산서는 《해도산경(海島算經)》과 《매문정(梅文鼎)》ㆍ《필산(筆算)》이며, 율서는 《대명률(大明律)》과 《대전통편(大典通編)》으로 한다.
매양 두 책에서 한 책을 뽑아서 100여 자를 면송(面誦)하는데, 음두에 차착이 없는 자를 뽑으며, 고관은 세 가지를 뽑아 묻고 각자 한 생(栍)을 낸다(위의 법 같이 함). 활 쏘는 데는 소후(小帿)와 관혁으로 하는데, 점수(畫) 계산은 원제와 같다.
생각건대, 홍무 연대(洪武年代)의 제도는 문과에도 기사(騎射)를 시험했으니, 이것은 왕자의 떳떳한 법이다. 기추(騎芻)와 조총(鳥銃)도 함께 익힘이 마땅하나 유습이 반드시 불편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시사(試射) 두 순은 폐지하여서는 안 된다. 이에 여러 가지 기예의 산(算 : 점수)을 통계해서 잘한 자를 뽑은 다음 시액(試額)에 충수해서 조정에 올린다.
여러 가지 기예란 1. 《시경》, 2. 《서경》(子式年), 3. 중국사, 4. 국사, 5. 경의, 6. 서의, 7. 사론, 8. 시율(詩律), 9. 표ㆍ전, 10, 물리, 11. 고책(古策), 12. 시책(時策), 13. 이문, 14. 병서, 15. 산서(算書), 16. 율서(律書), 17. 사후(射帿), 18. 관혁 등 모두 18가지 기예인데, 그 획수를 계산해서 차례를 정하여 정원이 차면 그만둔다(점수가 같은 것은 여러 시권을 考檢해서 일찍 바친 것이 많은 자를 첫째로 하는 것임).
향시 방식(鄕試榜式)
광주(光州) 거인 이응회(李應會), 《시경》 3분(하ㆍ하하)ㆍ《서경》 4분(하ㆍ하중)ㆍ《남사》 5분(중ㆍ중하)ㆍ국사 2분(하ㆍ하)ㆍ경의 4분(하ㆍ중하)ㆍ사서의 7분(상ㆍ중중)ㆍ사론 7분(상ㆍ상하)ㆍ율시 6분(중ㆍ중중)ㆍ사표(謝表) 7분(상ㆍ중중)ㆍ이론(理論) 8분(상ㆍ상중)ㆍ고책 6분(중ㆍ중중)ㆍ시책(時策) 9분(상ㆍ상상)ㆍ이문 3분(하ㆍ중)ㆍ병서 3분(하ㆍ하하)ㆍ산서 7분(상ㆍ중중)ㆍ율서 3분(하ㆍ하하)ㆍ사후 2분(邊 2中)ㆍ관혁 1분(변 1중) 모두 87분이니, 고찰해서 제 1을 정한다. 나머지도 이와 같다.
다음해 봄에 12성 거인을 다 서울에 모아 춘분 날에 공거원에서 합시(合試)하는데 고관은 5명이고, 고강(考講)ㆍ고예(考藝)하는 것은 모두 향시의 법과 같다.
다음해란 자ㆍ오ㆍ묘ㆍ유년이다. 춘분 날에 다른 연고가 있으면 춘분 전후 수일을 이용함이 마땅하다. 고관은 중대부 1명, 하대부 2명, 상사(上士) 2명인데, 시ㆍ원임(時原任) 제학ㆍ부제학ㆍ대사성ㆍ교리ㆍ수찬으로서 중한 명망이 있는 자는 열서(列書)하여 장망(長望 : 인재를 구하기 위하여 3명 이상을 추천하는 것)을 만들어 입계해서 낙점을 받는다(6경이 회의해서 추천함). 고관이 5명이면 권점하는 데에 셋째 고관은 담홍색 붓을, 넷째 고관은 청색 붓을, 다섯째 고관은 녹색 붓을 쓰며, 상ㆍ부 고관은 앞 예와 같다. 고관이 5명에 상 세 고관은 등차(상ㆍ중하)를 매기고, 하 두 고관은 다만 권점을 매기고 끝에다 비평을 적을 뿐이며 등은 매기지 않는다.
중외(中外 : 서울과 지방)에서 회시(會試)하는 사람들이 880명이니 그 반을 뽑아서 진사를 삼는다. 18기예의 획수를 통계해서 등차를 고정하는 것은 모두 향시하는 법과 같다. 1등 3명, 2등 9명, 3등 27명, 4등 81명, 5등 120명이다.
살피건대, 중국의 법은 한 번 향시에 합격하면 그 다음에는 으레 회시에 응시한다. 저들은 대개 하갑 진사(下甲進士)로도 출신이 되기 때문에 향시도 따라서 귀하게 여겨지나 우리나라에서는 진사는 출신이 되지 못하고 오직 도시(都試)에 응시하는 이점이 있을 뿐이다(도시에 대한 것은 다음 조목에 있음). 향시에는 합격했으나 회시에 낙방한 자는 돌아가서, 오직 거인이 되는 것뿐이다.
그 반을 물리쳐서 본향(本鄕)으로 돌려보내고, 그 중에서 또 반을 물리쳐, 모두 거액(擧額)에서 떨어뜨리면 거인(擧人)도 되지 못한다.
그 반이란 240명이고(혹 사고가 있으면 240명이 못 되기도 함) 또 반을 물리치는 것은 120명인데, 다시 물리치는 사람은 얻은 점수가 가장 적은 사람들이다. 무릇 거액에서 떨어진 자는 모름지기 본읍에서 다시 천거해야 이에 과장에 나갈 수 있으며 천거에 떨어지지 않은 자는 그대로 거인이 된다. 무릇 그대로 거인이 된 자는 주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성시(省試)에 나간다(주시 방 끝에다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서 주시 정원에 충수함). 지난 세 방(榜)의 진사와 신방(新榜)에 뽑힌 240명을 3소(所)에 분배하여 다시 도시(都試)를 설시하는데 청명(淸明) 날을 이용한다.
지난 세 방이란 가령 올해가 갑자년이라면 지난 신유ㆍ무오ㆍ을묘년 방에 합격한 사람이 모두 120명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지난 세 방에 급제한 사람, 죽은 사람, 상(喪)을 당한 사람, 나이가 넘어서 자격이 상실된 사람(나이가 40세인 자는 자격이 없음), 병이 생겨 폐인이 된 사람, 벼슬길에 들어서 벌써 중사로 승진한 사람(무릇 중사가 된 자는 科場에 나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음), 원점(圓點)이 미만된 사람이 있어 실제로 도시에 오는 사람은 3분의 2도 되지 않는다.
3소에 분배한다는 것은 공거원(貢擧院)을 1소, 태학(太學)을 2소, 예빈관(禮賓館)을 3소로 하여 을묘방 및 신방(新榜)에 합격한 80명은 1소로 가고(1등 첫째 사람, 2등 상 3명, 3등 상 9명, 4등 27명, 5등 40명) 무오방 및 신방에 합격한 80명은 2소로 가며(1등 둘째 사람, 2등 차 3명, 3등 차 9명, 4등 27명, 5등 40명) 신유방 및 신방에 합격한 80명은 3소로 가는데(1등 셋째 사람, 2등 하 3명, 3등 하 9명, 4등 27명, 5등 40명) 소마다 320명이다. 그러나 묵은 방에서는 응시하지 않는 자가 많을 것이니 3소 거인이 각 240명을 넘지 않는다.
공거원에서 거인의 명록(名錄)을 받아서, 만약 3소(所)에 거인의 다소가 10명 이상의 차이가 나면 서로 옮겨보내기를 주청(奏請)하여 많은 데는 줄이고 적은 데는 보태서 고르게 한다.
살피건대, 네 방이 모두 모이면 700~800명은 된다. 이 정도로 많다면 한 곳에서 자세하게 시험할 수 없으므로 3소로 나누는 것이다.
생각건대, 지난 방에 오른 사람을 세 방만으로 한정하는 것은 지난 세 방에서 진사가 된 자는 자ㆍ오ㆍ묘ㆍ유 네 식년을 지나게 되니 그 사이가 12년이나 된다. 12년이면 천도가 한 차례 변하는데 네 번씩이나 도시에 응시하여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면 역시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천하 일에는 한계와 절도 있음을 귀히 여기는 것인데 종신토록 과거에 얽매여 쉴 줄도 모르고 흰 머리로 분주하게 목숨을 걸고 힘껏 싸우는 것은 군자의 행실이 아니니 나라에서 사(士)를 대우하는데 어찌 군자로 표준을 삼지 않겠는가?
한번 향시에 합격한 다음 도시에 네 번씩이나 응시하고도 합격하지 못하였다면 역시 끝내 되지 않을 것이니 호연(浩然)한 마음으로 전원에 돌아가서 실덕(實德)을 닦고 실행을 실천해서 제 몸을 위하는 학문에 전심하고 죽는 날까지 천명을 순히 하여 부지런히 선을 행하면 늙음이 장차 오는 줄도 모를 것이다. 전원에 농사하고 꽃과 과실을 심어 자손에게 물려주며, 자손을 훈계해서 자신이 누리지 못한 복을 기대해보는 것이 또한 좋지 않은가?
하물며 치선(治選)하는 법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 모든 사람을 다 참여시키는 것이니 네 번 응시했다가 물러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당세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과만을 하지 못할 뿐이니 어찌 한할 것인가? 무릇 진사로서 네 번씩이나 도시에 응시했으면 으레 그만두게 해서 돌려보내야지 너그러이 보아주어서는 안 된다(만약 喪故를 당해서 도시에 네 번 응시하지 못한 자는 啓請해서 응시하도록 허가함).
원점의 법은 원근으로써 차별함이 마땅하다. 무릇 한 식년동안에 서울 유생은 300점을 기준해서 도시에 응시하도록 하고 100리 안은 200점을, 300리 안은 100점을, 900리 안은 60점을 기준으로 하며, 이 이외에는 30점을 기준으로 해서 도시에 응시하도록 허가한다. 무릇 신방에 오른 진사는 원점에 상관 없이 도시에 응시할 수 있다. 무릇 상고(喪故)를 만나서, 복을 벗은 뒤 날짜가 원점 받기에 부족한 사람은 날짜를 계산해서 면제해주어 도시에 응시하는 것을 허가한다.
도시 고관은 5명인데 하루 안에 세 가지 기예를 아울러 시험하고, 240명을 뽑아서 도회에 응시하도록 한다. 고관의 품계는 모두 회시(會試)와 같으며 비평하는 법도 같다. 하루 안에 세 가지 기예를 시험한다는 것은 시 한 편, 표ㆍ전ㆍ조ㆍ제(表箋詔制) 중에 한 편, 시무책 일도이다(세 가지 시권을 모두 각각 나누어 바치고, 연달아서 한 편으로 하지 않음). 240명을 다섯 등으로 나누는 것은 진사 방과 같다.
생각건대, 하루에 세 가지 기예를 시험해서 마치는 것은 도시(都試)가 과시(科試) 중에 가장 중요하므로 털끝만큼의 사의가 있어서는 안 되고 신속히 함으로써 공정함을 삼는다. 하루에 세 가지 기예를 시험하면 재주가 우수한 자는 뜻대로 될 것이나, 힘이 모자라는 자는 추졸(醜拙)함이 드러날 것이니 그 감별하기가 지극히 쉬울 것이다.
생각건대, 중국 제도는 하갑진사(下甲進士)도 또한 출신되므로 과거에 다시 응시하지 않으나 우리나라 법은 이른바 진사도 백도(白徒)와 털끝만큼의 차이가 없으니, 만약 입사(入仕)하는 것이 영예라면 백도도 일찍이 입사하지 못할 것이 아니며, 만약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치욕이라면 진사도 일찍이 과시에 응시하지 못할 것이 아니니, 진사란 중간에 쓸데없는 자리이다. 이제 진사를 급제하는 계제(階梯)로 해서 무릇 진사를 거치지 않은 자는 급제가 될 수 없게 한다면 진사라는 자리를 설시한 것이 명분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ㆍ구 진사가 아울러 도회에 응시하면 정밀하게 선발할 수 없으므로 도시에서 초선(初選)하고 도회에 재선해서 급제를 삼아야 한다.
도회(都會) 고관은 일곱 사람인데 그 방식은 모두 회시와 같으며, 40명을 뽑아서 급제 출신을 준다. 고관은 상대부 1명, 중대부 2명, 하대부 2명, 상사 2명인데 상대부는 시ㆍ원임(時原任) 대제학 중에서 의망(擬望)하고, 없으면 시ㆍ원임 제학 중에서 뽑는다. 고관이 본래 아홉 사람이지만 그 중 두 사람은 감찰이다.
고관 일곱 사람 중에서 상 세 사람은 비평해서 등을 매기고, 다음 두 사람(하대부)은 비평만 하고 등을 매기지 않으며(例는 앞에 말했음), 다음 두 사람은 비도 등도 하지 않고 끝에다 오직 평만 기록한다.
무릇 한 기예의 획수는 9분(3上이 9분)을 넘지 않으며, 권점하는 채색(彩色)은 다섯씩을 넘지 못한다. 고강(考講)을 마치면 3장에 아홉 가지 기예를 시험하고 또 한 장을 개설해서 병(兵)ㆍ산(算)ㆍ율(律) 세 가지 글을 시험하며, 활(射) 두 순(巡)을 시험하는데 모두 향시ㆍ회시의 규정과 같다(자세한 것은 앞에 말했음). 40명 중에 1명은 장원이고, 3명은 갑과(甲科)이며, 9명은 을과(乙科)이고 27명은 병과(丙科)이다.
생각건대, 수는 하나에서 시작해서 셋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 3을 곱해서 9가 되고 또 3을 곱해서 27이 되는 것은 자연의 수리(數理)이다.
방(榜)을 낸 사흘 뒤에 전정(殿庭)에서 친시(親試)하는데, 오직 시무책 일도만을 시험하여 잘한 자에게는 상이 있다.
무릇 갑ㆍ를ㆍ병과 등제는 도회에서 정한 서차대로 하고, 정시에서 첫째 한 자에게는 별도로 상사(賞賜)해서 영예롭게 할 뿐이다.
만약 이유 없이 예백(曳白 : 백지로 그냥 가지고 나옴)한 자는 그 과거에서 제명하고, 도회에서 낙방한 사람 중에 첫째인 자를 뽑아서 보충한다.
생각건대, 중국 제도와 우리나라 제도가 모두 정시로서 갑ㆍ를ㆍ병 차례를 정한다. 그러나 공거원 시험이 전후 5일간 18가지 기예의 시험을 거쳐, 점수의 많고 적음이 모두 정식과 표준이 있는데 정시가 비록 중하기는 하나 1장의 잘잘못으로서 사품(士品)을 정하기에는 부족하다.
그 다음날, 3관(館) 학사가 일제히 조당(朝堂)에 모여, 새로 급제한 40명을 불러서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학술을 탐문하는데, 명목을 조고(朝考)라 한다.
조고하는 법은, 경서 세 문제, 사기 세 문제, 시무 세 문제, 시율(詩律) 세 수(6언시 두 수, 7언시 한 수)이다. 을ㆍ병과 36명은 이 날로 3관에 배정하는데 경술(經術)이 넉넉한 12명은 국자감에 소속시키고 문학이 넉넉한 12명은 교서감(校書監)에 소속시키고 계획(謀畫)이 넉넉한 12명은 승문감(承文監)에 소속시켜서 초사를 소속시키는데, 귀족ㆍ천족과 문지(門地)를 비교하는 법은 없앤다(이미 序官에 말했음).
조고를 마친 다음 정조(政曹)에 명해서 관직을 제수한다. 장원(狀元) 한 사람은 바로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제수하고, 갑과(甲科) 세 사람은 바로 홍문관 부정자(副正字)에 제수하며, 을ㆍ병과(乙丙科) 36명은 3관에 나누어서 제수하는데 천관 수제에 말했다.
치선의 정원(治選之額)
치선하는 법은 과거라는 명목만으로는 나라 인재를 다 뽑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과거는 뜻있는 선비들이 매우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중세 이전에는 과거 규칙이 무너지지 않아 행실을 조촐하게 닦는 선비가 힘써 응시했으므로 조(趙 : 趙光祖)ㆍ가(李 : 李珥) 등 여러 선정(先正)이 모두 과거의 명목으로 출신했는데, 인조조(仁祖朝) 이후로는 과장이 더욱 흐려져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모두 장옥(場屋 : 과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리하여 경술이 넉넉하고 행실이 돈독하다는 지목은 산림으로 돌아갔고, 과거 출신은 다시 감히 유자로 자처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예와 지금이 다른 점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지금 과목으로 망라할 수는 없다. 하늘이 인재를 내는데 생태(生態)가 억만(億萬)으로 다른 것이니 대저 뿔(角)이 있는 놈은 이빨이 없고 깨물지 못하는 말은 달리지도 못하며 얼룩소는 때에 따라 음흉한 너구리[貍]에게 양보하고 난봉(鸞鳳)은 쥐의 성냄은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다. 과목으로 어찌 족히 망라하겠는가?
세상에는 진실로 정심한 학식이 무리에서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ㆍ부ㆍ표ㆍ책을 짓게 하면 도리어 경박한 어린아이가 보잘것없는 재주를 부리는 것보다 못한 사람도 있다. 전일에 한 선비를 보았는데 6경을 널리 꿰뚫고, 여러 사서에도 거침없이 통했으며 역상(曆象)에 정통하고 수리(數理)에도 밝아서 털을 가르듯, 까끄라기(芒)를 쪼개듯, 미세한 경지에 들었으며 언변이 하수 같아서 4좌(座)가 얼굴빛을 가다듬는다. 그러나 다만 문학의 재주가 지극히 졸렬하고 거칠어서 종일토록 창자를 쥐어짜도 두어 편의 문장도 이루지 못하니 이런 사람을 굳이 과목으로 개괄(槪括)하려 한다면 비록 학식이 천ㆍ인(天人)을 관통하고 재주가 관ㆍ갈(管葛 : 管仲과 諸葛亮)과 비교된다 하더라도 끝내 버려진 인물이 되고 말 뿐이다.
내가 이런 사람을 직접 보았으므로, 과거로 어진 사람을 다 뽑아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물며 효우하고 돈박(敦朴)한 선비는 으레 문장(文章)에 능하지 못하고, 거룩하고 우뚝한 사람은 본래 조전(彫篆 : 문장을 교묘하게 꾸미는 것)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긴다. 이것은 모두 성명한 임금이 매우 급하게 여겨야 할 것인데 유사가 매양 빠뜨리고 있다. 비록 무과로써 말하더라도 발로 쇠뇌를 벌리고 뛰어넘으며, 굳센 활을 당겨 굳은 것을 뚫으면서 한 사람 대적하는 것을 스스로 영웅으로 여김을 호걸이라면 혹 부끄럽게 여길 자가 있을 것이다.
가슴에는 손(孫 : 孫臏)ㆍ오(吳 : 吳起)의 책략을 쌓았고 마음에는 한(韓 : 韓信)ㆍ팽(彭 : 彭越)의 계획을 포치(布置)하여, 치거(輜車)에 누워 꾸민 꾀가 적을 격파하기에 충분하나 끝내 갑옷 하나 뚫는 활 솜씨를 이룩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이와 같은 사람을 모두 버릴 것인가? 또 무릇 산야 사람은 경상(卿相) 집 자제를 자세한다고 지목해서 매양, “고기 먹는 자는 꾀가 없고 비단 옷 입는 자는 식견이 적다.”라고 한다. 그러나 어릴 때 배우고 아이 때에 익히는 것이 관방(官方)의 일이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은 묘모(廟謨)에 익숙하므로, 순(荀)ㆍ범(范)집 아이는 모두 4방에 전대(專對)하기에 족하고,왕(王)ㆍ사(謝)집 자제는 끝내 보통 백성과 달랐다.
특히 그 문정이 매우 분주하고 수응하는 것이 호번해서 과거 공부에 전심할 수 없으니, 갑자기 장옥에 들어가서 한미한 집에서 열심히 공부한 선비와 힘을 겨루고 능함을 다툰다면 진실로 적수가 될 수 없거니와, 직을 맡겨 벼슬에 있게 하여 국론을 결단하고 국정을 시행하는 데에는 패연(沛然)해서 강하를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반드시 과거로서 얽어매려 한다면 마침내 말라서 죽을 것이고 벌레가 잎사귀를 새기듯, 범을 수놓듯하는 작은 재주가 묘당을 차지하게 되면 그 인재(人才)를 거두어서 치화(天工)를 밝힘에 또한 소홀할 것이므로 치선의 조목을 적게 여겨서는 안 된다.
치선(治選)하는 법은 남행(南行)으로 벼슬길에 들어서는 자를 위한 것이나, 표준하는 데가 아주 없으면 남을 권하여 몸을 닦도록 하기에 부족하다.
생각건대, 남행으로 벼슬에 들어가는 길이 해마다 증가하고 날마다 넓어져서, 오늘날에는 그 직을 맡아서 관청에 있는 수효가 문신(文臣 : 문과 출신한 신하)과 비교하여 3~4배나 되는데, 그 벼슬에 들어가는 법은 선(選)도 천(薦)도 아니며 과(科)도 시(試)도 하지 않고 오직 전관(銓官)의 한때 사정으로써 주의(注擬)해서 낙점을 받아서, 청환(淸宦)이 되고 요직에 등용되며 웅대한 주ㆍ부(州府)를 맡기도 하니, 법의 소홀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이제 치민하는 재주를 선거의 조목으로 삼아, 선발하고 천거하되 그 법례를 엄하게 해서 남행으로 입사하는 문을 만드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 생각한다. 그러나 척리(戚里) 자제에게 은명(恩命)으로 벼슬을 제수하는 것은 차한(此限)에 두지 않는다. 이제 그 인원을 정하되 매양 식년 봄이 되면 모두 60명을 뽑아 정조(政曹)에 회부한다.
경성 6부에 치선 정원은 본래 480명(地官 敎民條에 있음)이나 천단(薦單)에 그 반수를 뽑기 때문에 320명이다. 시년(試年) 추분(秋分) 날이 되면 서울은 여러 방(坊)에서 6부에 천보(薦報)하고, 외방은 여러 현에서 각자 관할 주에 천보한다. 주시(州試)는 문거(文擧 : 문과시험) 날에 서울은 6부에서, 외방은 목사가 그 반수를 공정하게 뽑아서 6학과 포정사에 천보한다. 향시는 문거 날에 서울은 6학에서, 외방에는 그 도 감사가 그 반수를 공개적으로 뽑아서 이ㆍ병조에 천보한다. 회시 날에 이ㆍ병조가 합의하여 공정하게 그 반수를 뽑아, 상부(相府 : 의정부)에 천보한다. 도회 날에 정부의 삼공과 삼고는 삼사 장관과 함께 가부를 회의한 다음 공개적으로 그 반수를 뽑아서 임금에게 천문(薦聞)하고 정조(政曹)에 회부해서 수용에 대비한다.ㆍ각 지방의 치선(治選) 정원
(단위 : 명)
960
480
240
120
60
읍천(邑薦)방천(坊薦)
주천(州薦)부천(部薦)
성천(省薦)상천(庠薦)
조천(曹薦)
회천(會薦)
경성6부(京城六部)
320
160
80
40
20
봉천성(奉天省)
80
40
20
10
5
사천성(泗川省)
112
56
28
14
7
열동성(洌東省)
48
24
12
6
3
송해성(松海省)
48
24
12
6
3
완남성(完南省)
64
32
16
8
4
무남성(武南省)
48
24
12
6
3
영남성(嶺南省)
64
32
16
8
4
황남성(潢南省)
64
32
16
8
4
패서성(浿西省)
32
16
8
4
2
청서성(淸西省)
32
16
8
4
2
현도성(玄菟省)
32
16
8
4
2
만하성(滿河省)
16
8
4
2
1
40명 중에 첫째로 천거된 네 사람은 불차탁용(不次擢用)으로써 대우하고, 36명은 예에 의하여 남행 초사(南行初仕)에 붙인다.
첫째로 천거된 1명은 바로 경연관으로 제수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보임하고, 그 다음 3명은 바로 경연관으로 제수하여 경전사 주사(經田司主事)에 보임하고, 나머지는 정조(政曹)에 회부해서 36자리에 보임한다. 전편에 남행으로 입사하는 법은 “정부와 추부(樞府)가 합동해서 36명을 선발한다.”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천거하는 법이 소략하므로 이와 같이 개정했다.
향시 요언(鄕試堯言)
경시(京試)에서 생기는 폐단은 지금은 우선 생략하고(科制에 대해서는 별도 저술이 있음), 향시에서 생기는 폐단을 시험삼아 말하겠다. 향시란 바로 하나의 전장이다. 무릇 응시(應試)하고자 하는 자가 글을 사고 글씨를 사는 것을 지금에는 큰 문제로 삼지 않는다.
장사(壯士)를 모집하고 무뢰한(無賴漢)을 모아서 선접군(先接軍)이라 부르는데, 나무를 베어서 창을 만들고 대[竹]를 깎아서 긴 창을 만들며, 우산대 끝에 쇠를 씌우고, 발사(茇舍)의 서까래 끝을 칼처럼 뾰족하게 하고서, 거적자리를 지고 새끼를 허리에 동이며, 등을 들고, 깃발을 드는데, 부릅뜬 눈이 방울처럼 불거지고 거친 주먹은 돌이 날 듯한다. 머리에는 검은 종이로 만든 건(巾)을 쓰고, 몸에는 붉은 천으로 기운 저고리를 입어, 형용은 강도와 다름없는데 칭호는 문서 없는 노유(奴儒)라 한다. 나는 듯 장옥에 달려들면 형세가 풍우 같아 경관(京官)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겁을 먹고, 금관(禁官)은 머리를 감싸고 숨을 곳을 찾는다. 당당한 예의지국에서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것이 바로 나라에서 어진이를 조정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이르니 또한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수십 년 이래로 부역이 번거로워서 백성의 재물이 날로 줄어들어 고가유족(古家遺族)과 전야 한사(田野寒士)가 십중 팔구는 굶주려 죽었고, 죽다 남은 인생도 쓸쓸하고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비록 몸에는 서(書)를 통달하고 입은 6체(體)의 글을 토해낸다 할지라도 노자를 마련하여 시장(試場)에 나올 수 없어서 홀몸으로 걸어서 가며, 겨우 붓과 종이를 사서 자신이 짓고 자신이 써서 어지러운 시축(試軸) 속에 던져넣으니, 오직 서리(胥吏)의 족속과 장사치의 자식과 재물 많은 큰 부자로서 한 도에 지목되는 자라야 바야흐로 과거에 마음을 두게 된다.
매양 6월 보름이면 송도 상인과 의논하여 환전(換錢) 100~200냥을 얻어서 큰 말에 높은 안장으로 우쭐대면서 서울에 올라간다. 이웃 마을 사람이 와서 물으면 “근래 과거는 동(銅)이 아니면 안 된다(銅은 돈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방언에 절(節 : 뇌물)을 동이라 이르는 것임). 내가 지금 상경하면 시관을 묶을 터이다. 내 돈 100냥으로 당자(當者 : 시관)에게 미끼로 주고 또 반백(半百 : 50냥)으로 지금 재상에게 뇌물하겠다. 이렇게 되면 시관은 겉으로는 재상의 부탁에 순응하면서 내심으로는 뇌물 생각에 끌리게 될 것이니 대저 이런 다음이라야 나의 일이 염려 없게 된다.”라고 한다. 이에 좌석이 시끄럽게 웃으며 당연한 말이라 한다.
10년 전에 시호(詩豪)ㆍ부객(賦客)의 글값은 그래도 비싸서 선금으로 반백을 주고 해액(解額)에 참여하게 되면 또 반백을 주었었는데, 수년 이래로는 시가 비록 강백(姜柏) 같고 부가 남국(南國) 같아도 두 장 값이 닷냥을 넘지 않는다. 이와 같음은 어째서인가? 글을 사는 자의 말은 “내가 응시하는 데에 특히 네 글을 믿는 것이 아니다. 글은 겨우 모양과 틀만 갖추면 문득 방(榜)에 참여하게 되어 있으니, 잘하고 잘못함은 본래 물을 것도 없다. 네가 만약 좋아하지 않는다면 우리 집에서 먹여주는 훈장 이(李) 아무도 한편쯤은 지을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너만 찾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면 사방에서는 서로 찬성하며 통달한 언론이라 한다. 대저 시골 유사가 글 공부를 하는 것은 혹 과거를 해서 제 몸을 일으키거나, 혹 글을 팔아서 제 집을 넉넉하게 하기 위함인데, 지금은 두 가지 희망이 모두 끊어져서 구족이 다 비웃는다. 비록 향시하는 해를 당하나 과거를 위해 공부한 사람이 아주 없으니 이것으로써 세상 변해가는 꼴을 볼 수 있다. 놀랍고 부끄럽고 걱정스런 말을 한입으로는 말하기 어렵겠기에 지금은 아울러 생략한다.
대략 과장에 들어오는 사람이 적으면 과장 비용이 가벼워진다. 지금에 첫째 요무(要務)는 거원(擧員 : 과거에 응시하는 인원)을 깨끗하게 도태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 조흘강(照訖講)이 본래 좋은 법은 아닌데, 더구나 지금 기강이 해이해졌으니 어떻게 시행하겠는가? 우리나라에 과거가 시작되기는 고려 광종(光宗) 때부터였다. 시주(柴周) 사람 쌍기(雙冀)가 사신을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가 병이 나서 돌아가지 못하고, 드디어 과거하는 법을 우리나라에 전했다. 중국에서 시행하는 과거 규정은 당나라 초기부터 벌써 향거(鄕擧)하도록 했고, 천거가 있은 다음이라야 과거에 응시했으므로 응거(應擧)라고 이른 것인데, 지금 우리나라 사람은 천거도 없이 응시하면서도 외람되게 응거라 하니 명실이 서로 맞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다. 옛적에는 공적을 아뢴 다음이라야 공적을 고찰했는데 지금은 아뢰지 않아도 고찰하니 이것도 한 가지 잘못이다(수령이 공적을 아뢴 다음 조정에서 공적을 고찰함은, 거자가 試券을 바친 다음이라야 시관이 시권을 고찰하는 것과 같음).
중국에는 천거를 받은 다음이라야 응거(應擧)하는데, 지금은 천거하지 않아도 응시하니 또 하나의 잘못이다. 그러나 지금 향거하는 제도를 창설하고자 한다면, 온 나라가 눈이 둥그래져서 옛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말로써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지금 경시관(京試官)이 내려오는 날이면, 군현에서는 으레 응시하는 사람의 명단을 꾸미고 별도로 책을 만들어서 경시관에게 보고하는데, 다만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조금은 증거 할 수 있다.
비국(備局)에서 논계하고 대신이 연주(筵奏)해서 이에 8도에 행회(行會 : 공문을 보내서 알림)하기를, “향거하는 법을 비록 갑자기 논의하기는 어려우나, 응시하는 자의 기록은 마땅히 확실하게 하라. 거자(擧子)는 본래 정원이 있으니 절제(節制)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 본도(本道)의 세 차례 식년방(式年榜)을 가지고 여러 고을에서 발해(發解)한 총수를 조사한 다음, 그 배수를 더해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한다.”라고 한다.
가령 전주부(全州府)에, 기사년(己巳年) 가을 양장(兩場)에 발해한 자가 30명, 임신년 가을 양장에 발해한 자가 24명, 을해년(乙亥年) 가을 양장에 발해한 자가 26명이었다면 그 총수는 80명이다. 그 배수를 더하면 160명인데, 이 160명을 전주에 응시하는 정원으로 정한다.
가령 순창군(淳昌郡)이 기사년 가을 양장에 발해한 자가 7명, 임신년 가을 양장에 발해한 자가 3명, 을해년 가을 양장에 발해한 자가 4명이라면 그 총수는 14명이다. 그 배수를 더하면 28명인데 이 28명을 순창에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정하는 것이다.
가령 강진현(康津縣)에 세 차례 식년 양장에 발해한 자를 도합해도 3명에 불과하고 배수를 더해도 6명이니, 이 6명을 드디어 강진에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하는 것이다.
가령 광양현(光陽縣)에 세 차례 식년 양장에 발해한 자를 도합해도 2명에 불과하니 그 배수를 더해도 4명뿐이다. 특히 1명을 보태서 5명을 광양현에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하는 것이다.
가령 진도군(珍島郡)에 세 차례 식년 양장에 발해한 자를 도합해도 1명에 불과하고 그 배수를 더해도 2명뿐인데, 특히 2명 보태어서 4명을 진도군에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정하는 것이다.
만약 한두 고을이 세 차례 식년에 발해한 자가 도통 없으면 특히 3명을 허해서, 이 3명을 그 현에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정한다.
무릇 세 차례 식년, 발해한 방에 비록 1명이 세 번 합격했더라도 3명으로 계산하고 1명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이와 같으면, 전라도 한 방 두 장(場)에 각 90명이고, 세 차례 식년을 통계하면 그 발해한 자가 540명(6×9=54)인데 그 배수를 더하면 1천 80명이다. 또 영쇄하게 증가되는 수를 보태더라도 전라도에서 응시하는 인원은 도합 1천 100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 곱하는 외에는 정원을 증가할 필요가 없다. 전주ㆍ남원(南原)ㆍ광주(光州)ㆍ나주(羅州) 등 정원이 많은 고을에서 각각 4~5명을 삭감하여, 진도(珍島) 등 구석지고 작은 고을에 약간 증가해주어 전라도의 응시하는 인원이 끝내 1천 80명을 넘지 않도록 한다.
7도 유생으로서 비록 경시(京試)에 발해한 자가 있더라도 통계해서 증원하는 것을 허하지 않으며 서울 유생으로서 향시에 와서 해액(解額)을 차지한 자가 있는 것은 조사해서 제외하지 말고 그대로 본도 해액으로써 계산한다. 다른 도도 모두 이와 같다.
《대전(大典)》에 향시 정원이 초장(初場)과 종장(終場)에, 충청도와 전라도는 각 90명이고 경상도는 100명이며, 강원도와 평안도는 각 45명이고, 황해도와 영안도(永安道)는 각 35명이었다.
외방 7도는 양장에 초시 정원이 도합 880명인데, 세 차례 식년을 통계하면 2천 640명이고 그 배수를 더하면 5천 280명이다.
이 5천 280명을 외방 7도의 향시에 응시하는 정원으로 한다.
《대전》에, 경시(京試) 정원이 초장과 종장에, 한성시(漢城試)는 각 200명이고 경기는 각 60명이어서 도합 520명이다. 세 차례 식년을 통계하면, 1천 560명이고 그 배수를 더하면 3천 120명이다. 이 3천 120명을 경시에 응시하는 정원으로 한다.
경기 4도(都)와 여러 고을에 한 방(榜) 두 장 정원이 모두 120명이니 세 식년을 통계하면 360명인데 그 배수를 더하면 720명이다. 이 720명을 경기에서 응시하는 정원으로 한다. 경기에 응시하는 정원은, 발해(發解)의 많고 적음으로써 그 문풍(文風)을 분별할 수는 없으니 묘당에서 회의하여 그 정원을 정한다. 송도(松都)는 몇 사람, 심도(沁都)는 몇 사람, 화성(華城)은 몇 사람, 광주(廣州)는 몇 사람 여주목(驪州牧)은 몇 사람, 인천부(仁川府)는 몇 사람, 양근군(楊根郡)은 몇 사람, 과천현(果川縣)은 몇 사람으로 하느냐 하는 것은 세 차례 식년 방목(榜目)을 가지고 대략 근거로 하고 참작해서 논의한 다음 결정한다.
송도와 심도 같은 데에는 한결같이 세 차례 식년 방목에 준해서 응시하는 정원을 정한다.
한성부는 한 방 양장(兩場)에 정원이 공 400명이니 세 차례 식년을 통계하면 1천 200명이다. 그 배수를 더하면 2천 400명이니 이 2천 400명을 한성의 정원으로 한다.
한성에 응시할 정원 2천 400명을 묘당에서 회의하고 48방에 나누어 배정한다.
이에 48방에 그 인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천주(薦主)의 원수를 정하는데 거자 5명마다 천주 1명을 둔다.
가령 명례방(明禮坊)에 거자 정원이 50명이면 천주 10명을 두고, 반석방(盤石坊)에 거자 정원이 45명이면 천주 9명을 둔다.
천주는 본방에 현재 거주하는 사람으로 초계(抄啓)하는데, 먼저 승지(承旨)ㆍ옥당(玉堂)ㆍ춘방(春坊)을 뽑고, 다음은 양사(兩司)와 한림ㆍ주서(注書)를 뽑으며 다음 낭서(郞署 : 낭관)를 뽑는다. 만약 문신만으로 부족하면 음관(蔭官) 중에 생원ㆍ진사로서 벼슬길에 들어서서 문명(文名)이 있는 자를 천주로 삼는다. 가선(嘉善) 이상의 품계는 천주가 될 수 없다.
천주 한 사람이 다섯 사람씩을 천거하는데 중복 천거된 자가 있으면 물리치고 다시 추천해서 그 수효에 보충한다. 경기에는 모두 그곳 수령에게 기록해서 천거하게 하는 것이 외방 7도의 예와 같다.
무릇 천거하는 법은 먼저 경기 천장(薦狀)을 받으며, 다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이에 48방에 천거 단자를 바치도록 한다.
무릇 경기에서 올린 천거 단자에 기록된 자는 다시 서울 천거 단자에 들지 못한다.
경기에서 올린 천거 단자는 세 차례 식년 호적을 고찰하고 서울에서 올리는 천거 단자는 호적을 관계하지 않는다.
먼 곳 수령 중에 혹 선거를 공정하게 하지 않아서, 문장에 능숙한 선비가 천거 단자에 누락되었으나 고소할 곳이 없다면 또한 생각할 바이다. 매양 초시할 시기를 당하면 세 달 전에 비천당(丕闡堂)에다 시장을 개설하고, 7도에서 빠진 선비로서 스스로 와서 시험해보기를 청하는 자와 원통함이 있는 자를 시험하여, 본도에 행회(行會)해서 녹취(錄取)하게 한다.
재사를 시험해서 혹 굉장한 문사(文詞)와 박흡(博洽)한 학식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가 있으면, 그 고을 수령을 파직시킨다. 만약 그 사람의 문사가 졸렬해서 원통하다 이를 만하지 못한 자가 이 시험에 함부로 왔으면 매양 10여 명을 뽑아, 먼 변지(邊地)에 충군(充軍)시켜 글 못하는 자가 함부로 응시해서 요행으로 합격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혹자는 빠진 재사를 시험하는 데에도 제 마음대로 응시하도록 함은 불가하고 원통함을 일컫는 자도 먼저 토정사에 가서 호소하도록 함이 마땅하며, 관찰사가 면시(面試)하여 몇 사람을 뽑아서 원안을 고침이 가하다 한다.
또 여러 도에 유시하기를, “이번에 이 향시 정원을 임시로 이와 같이 정한다. 그러나 이번 식년 방이 나온 다음에는 다시 계유년 방과 병자년 방을 통계해서 세 식년(式年)으로 하고 그 동안에 발해한 인원의 많고 적음으로써 거액을 개정할 것이다. 그리고 오는 임오(壬午) 식년에 향시 방이 나온 다음에 또 개정해서 영구한 정원으로 할 것이다. 이후에는 혹 30년에 한번 고쳐서 그 문풍의 성쇠를 징험할 것이니 모름지기 각자 힘써서, 오늘날 정원의 많음을 믿지 말고 오늘날 정원의 적음을 염려하지 말라” 한다.
혹자는 “수령이 사람을 천거하면서, 혹 권문(權門)의 청탁을 받고, 혹은 사사 뇌물의 다소를 보아서, 고기 눈깔을 취하고 구슬은 버리며, 무부(珷玞 : 옥과 비슷한 돌)를 품고 옥을 버린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한다. 나는 답하기를 “진실로 이런 폐단이 있다. 그러나 수령된 자가 비록 방자해서 꺼림이 없으나 또한 백성의 기림을 기뻐하고 백성의 원망을 괴롭게 여기지 않는 자는 없다.형 되기도 어렵고 아우 되기도 어려우며 노(魯) 같고 위(衛) 같은 자는 혹 청탁과 뇌물로써 뽑기도 버리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한 고을의 큰 재주로서 무리 속에 빼어나서, 거벽ㆍ교초(翹楚)인 자를 수령이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매양 보면 수령은 비록 글 못하는 사람이라도, 사사로 읍자(邑子 : 白日場)를 시험하는 데에도 반드시 물색하고 염방(廉訪)해서 명사를 뽑고자 하는데, 하물며 이제 새 영(令)이 나온 처음, 그 거인을 천거하는 데에 어찌 사정에만 따를 이치가 있겠는가? 혹 손을 쓰는 것은 이 사람을 뽑아도 되고 저 사람을 뽑아도 될 경우에 불과할 뿐이니 설령 요행으로 방(榜)에 참여되는 것이 있더라도 오늘날 어지럽게 응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 했다.
혹자는 “수령이 선발하는 날에 그 기예를 사사로 시험하면(백일장) 어떻겠나?” 하고 묻기에 답하기를 “한 장의 잘잘못으로서 문품(文品)을 정하기에는 부족하니, 사시(私試)가 공천만 못하다. 고을 수령이 고을 안 문사 중 60세 이상으로 과업(科業)을 그만두고 퇴로(退老)한 열 사람을 뽑아 향교에 모으는데 수령이 주벽(主壁)이 되고 열 사람은 동서로 벌여앉은 다음 권점해서 뽑는다.” 했다.
가령 창평현(昌平縣)에 거액이 12명이면 먼저 노유(老儒) 열 사람에게 각각 세 사람씩을 천거하도록 하는데, 그 중에도 나이가 많은 여섯 사람은 한 사람씩을 더 천거하여 36명의 성명(姓名)을 열기(列記)하고 그 사람의 이름 밑에 공론에 따라 권점한다.
한 사람마다 각각 열두 사람을 권점하여 권점이 끝나면 고을 수령에게 올린다. 수령은 또 스스로 열두 사람을 권점하는데, 노유가 권점한 것은 한 권을 1분으로 셈하고 수령이 권점한 것은 한 권을 3분으로 셈해서 수령의 권한이 중하도록 한다. 이에 36명을 모두 조사하여 권점이 많은 열두 사람을 뽑아서 시장(試場)에 나가도록 한다.
가령, 남원부에 거액이 60명이면, 먼저 노유 열 사람에게 각자 18명씩을 천거하도록 해서, 통계 180명의 성명을 열기하고 180명의 이름 밑에다 공론에 따라 권점하기를 위에 말한 법대로 하면 노유 한 사람이 각 60명을 권점하게 된다.
경성 48방(坊)에서 권점해서 완천(完薦)하는 것도 군현에서 하는 법과 같다. 혹자는 “경성에는 거자의 정원이 너무 적으니 조금 넓혀야 다툼이 없을 것이다. 시골 선비는 비록 다투더라도 수령이 진정시킬 수 있으나, 경성 귀족의 아들은 문벌과 덕망이 비슷하여 상하를 따질 수가 없는데 하나라도 빠진다면 누가 진정할 수 있겠는가? 시골에는 당론(黨論)이 심하지 않으나 경성 사환하는 집은 당하는 풍습이 이미 고질이 되었다. 그 뽑고 버림이 반드시 공평하지 못한데 거액이 너무 적음은 다투게 되는 단서이니 그 정원을 조금 넓힘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한다.
혹자는 “경성 거액만을 특히 조금 넓혀준다면 시골 선비들의 원망이 어찌 없겠는가?” 하기에 답하기를 “시액(試額)을 조금 넓히는 것이라면 시골 선비들이 원망하는 것도 가하나 거액을 조금 넓히는 것이 시골 사람에게 무슨 해가 되겠는가? 필경에 뽑는 것은 경시 정원에 넘지 않으니, 시골 선비에게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원망할 것이 없다.” 했다.
대저, 거액을 배정하는 데에 위의 법을 쓰면 큰 폐단이 없을 듯하다. 설령 작은 폐단이 있더라도 반드시 오늘날의 난잡한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다만 초장(初場)과 종장(終場)에 네 가지 체로 시험하고 대과ㆍ소과로 나누어 두 가지 시험으로 하는 것은 모두 중국 법이 아니다. 중국 법은 예부터 그렇지 않았는데 우리나라 법은 어디에 의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과장에서 마땅히 시험할 것은 첫째 책(策), 둘째 논(論), 셋째 표ㆍ전, 넷째 경의(經義), 다섯째 시율(詩律), 여섯째 잠ㆍ명(箴銘)이고, 이외에는 모두 무익한 글이다. 여섯 체 글을 3장으로 나누어 첫날에는 시율 세 수, 잠ㆍ명 한 수를 시험하고, 둘째 날에는 경의 삼도(三道), 표ㆍ전 일도를 시험하며, 마지막 날에는 사론(史論) 삼도, 대책 일도를 시험하는데, 대ㆍ소과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고 매양 300명을 뽑아서, 60명은 문과로, 240명은 진사로 하고, 3년 만에 대비하는 외에는 비록 나라에 경사가 있더라도 경과(慶科)를 설시하지 않는다. 모든 증광(增廣)ㆍ별시(別試)ㆍ정시(庭試)ㆍ알성(謁聖)ㆍ절일제(節日製)ㆍ춘추도기(春秋到記)ㆍ황감시(黃柑試)ㆍ승보(陞補)ㆍ학제(學製)ㆍ사서(四書)ㆍ소학(小學) 시험도 공도회(公都會)ㆍ도과(道科) 따위는 하나같이 모두 정파한 뒤라야 과규(科規)가 크게 바로잡아 질 것이나, 이것은 쉽지 않으므로 지금은 우선 생략한다.
경성의 경상 집 자제로서 능히 과문 공부를 못한 자를 위하여 음사(蔭仕)하는 법을 조금 변경한다. 음사 중에 세마(洗馬)ㆍ교관(敎官) 두 자리와 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 한 자리를 음사의 자리로 한다. 무릇 음관으로 이 세 자리를 거쳐서 벼슬길에 들어선 자는 헌부(憲府)와 이조와 경연과 동궁(東宮)의 관직도 얻지만, 또 산림(山林)이라 지목하지 않으면 인재가 막히지 않고 선거도 깨끗해져서, 차작 진사(借作進士)ㆍ차작 급제의 폐단이 지금같이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혹자가 “과문 여섯 가지 체(體)를 한 사람에게 두루 익히도록 한다면 어찌 응시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기에 답하기를 “국가에서 과거를 설시하는 것은 본래 사람을 얻고자 함이니 반드시 학식이 넓고 문장이 굉장해서 무리에서 뛰어난 뒤라야 바야흐로 등용하는 것이니 능하지 못한 사람을 어디에 쓰겠는가? 지금 시골 어리석은 아이가 겨우 《소미통감(少微通鑑)》 서너 권과 당시(唐詩) 수십 수(首)를 읽고는 항우(項羽)와 패공(沛公)을 제목으로 한 시 50~60수를 짓는데 미친 말과 망령된 이야기로 마음을 놀라게 하고 눈을 참담하게 한다. 이런 한 가지 재주를 가지고 망령되게 과거에 붙은 자가 대부분이니 반드시 여섯 가지 체를 두루 시험하고 또 하루 안에 각각 삼도ㆍ사도를 시험한 다음이라야 능하지 못한 자는 그만두게 되고 뛰어나게 총명한 한 사람이 그 사이에 나오면 구족이 힘을 합하여 거인이 되도록 해야 바야흐로 중국 풍속과 같이 문풍이 성해질 것이다.” 했다.
과거법만으로는 천하 인재를 다 취할 수 없다. 산림에서 글을 읽고 비상한 재능을 품었으나 거인이 되기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천진(薦進)하는 길을 열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사람들에게 세마(洗馬)ㆍ교관(敎官)ㆍ학정(學正)이 될 수 있도록 한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어진이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나 지금은 우선 생략한다.
만약 과규(科規)가 크게 바로잡아지면 응시하는 연령을 40세로 한정함이 마땅하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55세로 제한함이 마땅하며, 56세 이상은 응시하는 것을 허하지 말 것이다.
혹자는 “평생토록 공부해서 늙은 것도 불쌍한데 갑자기 나이를 제한해서 응시하지 못하게 한다면 또한 비참하지 않은가?” 하기에 답하기를 “나라에서 중하게 여기는 바는 사유(四維)뿐이니 예ㆍ의ㆍ염ㆍ치(禮義廉耻)를 기르지 않을 수 없다.” 했다(쌍기가 과거법을 세운 것이 현덕(顯德 : 後周 世宗의 연호, 954~958) 5년 무오(戊午)였으니, 가경(嘉慶 : 淸 仁宗의 연호, 1796~1820) 22년 정축(丁丑)까지는 8백 50년이 됨).
[주D-001]유목지(劉穆之): 남송(南宋) 사람.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있으면서 안으로 조정을 총괄하고 밖으로 군수(軍需)를 공급했는데, 결단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해서 일에 막힘이 없었음.
[주D-002]순(荀)ㆍ범(范): 순숙(荀淑)과 범방(范滂)을 이름. 순숙은 후한 사람인데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고, 일에 임해서는 명쾌하게 처결했다. 그의 아들 8형제도 모두 덕업을 성취해서 세상에서 순씨 8룡(龍)이라 했음. 범방은 후한 사람. 효렴광록(孝廉光祿) 4행(行)으로써 천거되어 청조사(淸詔使)로써 기주(冀州)에 나갔는데 수레를 타고 고삐를 잡자 개연히 천하를 맑게 할 뜻이 있었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