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언어와 풍습
몽골어는 기본적으로 어순이 우리말이나 일본어와 같고 문법관계를 조사와 어미로 나타내는 것도 우리말과 동일하고 관계대명사·관사·부정관사·성(性)과 수(數)의 일치가 없는 것도 우리말과 같다. 몽골어는 성조의 강세가 없다. 이 또한 한국어와 같다. 몽골 사람들은 120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거의 7백여 년을 전통 몽골문자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전통문자는 우리말과 같이 실제 생활에 나타나는 많은 것들을 생생하게 발음할 수가 없다. 그래서 러시아의 키릴문자에 두 글자를 첨가하여 오늘날과 같은 문자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몽골의 나이 관념은 우리와 흡사하다. 우리나라는 한국나이라는 이상한 나이 개념이 있다. 그런데 이런 한국나이 개념이 몽골과 똑같다. 몽골은 여자가 임신하는 순간부터 태아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간주한다. 천손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게 된다. 그래서 몽골인의 나이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사람들보다 한 살이 많게 된다. 중국과는 다르다. 아이를 기를 때는 실이나 천으로 천막의 기둥과 기둥을 묶어서 흔들거리는 장치(요람)에다가 둔다.
의복 생활에 있어서도 몽골은 한국과 유사한 측면이 아직도 남아있다. 몽골은 외투도 무릎 아래로 내려가는 법이 없어서 매우 간편하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말 타기에 편하게 만든 것이다. 여자의 치마도 주름을 잡아서 둘러 입는데 이것은 한족들에게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중국인과는 달리 주름치마를 즐겨 입는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는 것을 좋아한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상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것은 신체적인 접촉을 싫어하는 중국인들과는 많이 다르다. 몽골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 친밀감을 표시한다. 이것은 북방민족의 특징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몽골은 설날에 서로 껴안고 인사를 나눈다고 말했다.
만주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주족의 인사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만나면 머리를 숙여 인사한다. 이것은 요즘 한국인들이 하는 것과 동일하다. 둘째, 친구나 연인을 만났을 때 반드시 얼굴을 껴안고 얼굴을 맞댄다. 이것을 포견례(抱見禮: 허리를 끌어안고 서로 좋아하는 것)라고 한다. 셋째, 부녀자가 집안에서 서로 만나면 무릎을 꿇어 앉아 오른 손가락을 눈썹 끝에 갖다 댄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이 가운데 만주족의 가장 보편적인 전통 인사법은 바로 포견례(抱見禮)라고 기록 되어 있다.
몽골에서 가장 보편적인 놀이는 씨름이다. 우리나라도 30~40년 전까지는 가장 일반적인 놀이였다. 씨름은 흉노나 고구려의 벽화에도 등장하는 북방고유의 무술이다. 즉 씨름은 북방 기마병들이 육탄전을 벌일 때 쓰는 무술인 것이다. 일본의 스모나 한국의 씨름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 몽골어에서 ‘쉬룬’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뜻은 ‘격한, 포악한’ 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쉬룬(몽골) - 씨름(한국) - 스모(일본) 등의 변화 과정 속에서 씨름은 다소 변형되어 정착한다. 1931년 요나라 동경(東京遺址)에서 팔각형 백색 도관(陶罐)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의 8면에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요나라를 이은 금나라에서도 여전히 이 씨름은 크게 유행했다.
금(金)나라 때는 주류민족이었던 여진(=만주족)은 물론 피지배층이었던 한족(漢族)들도 씨름을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씨름이 일종의 전투무술이었기 때문에 한족들이 씨름에 몰두하는 것을 금나라 조정에서는 크게 우려했다. 그래서 금나라의 장종(章宗: 1189~1208)은 여진인들만 씨름을 하라는 칙령을 반포하여 중국에서는 씨름이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금나라에서 씨름은 현재의 태권도와 같은 국기(國技)였던 것이다. 그 후 이 씨름의 전통은 몽골이 계승하게 된다. 결국 부여-고구려-발해-거란-금-몽골의 씨름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전투무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