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위반 구속자 가족에
세계급식선교회 원조금 빼돌려”
중정 ‘무죄 선고 할라’ 판사 압박
부활절 예배 ‘내란음모죄’ 적용도 유신에 맞서는 기독교인들
유신정권은 반독재운동에 나선 청년학생들을 좌경용공으로 몰았지만, 종교인들마저 빨갱이로 모는 것은 곤란했다. 그래서 유신반대운동의 핵심들에게 횡령죄를 적용하여 파렴치범이라는 낙인을 찍으려 한 것이다. 박세경 변호사의 변론처럼 “9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3·1운동 시기, 신사참배 강요 시기 등에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했던 적은 있으나 4명의 성직자가 파렴치 행위를 한 혐의로 구속”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는 독일의 세계급식선교회(BFW)로부터 빈민지역 선교자금으로 2700만원을 지원받았는데, 검찰은 “피고인들이 비에프더블유로부터 받은 원조자금 중 400여만원을 순수한 선교 목적을 떠나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가족생계비로 지출한 것은 배임행위”라며 기소했다. 이 사건 수사는 서울시경에서 담당했지만, 배후에는 정보부가 있었다. 조승혁 목사에 따르면 서울지검 공안부 이재권 검사는 수사 초기에 “오늘 조사는 다 끝내고 오늘밤 석방될 것입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라고 인사까지 했는데 그때 “중앙정보부 문호철 검사”가 이 검사의 방에 왔다가 이 말을 듣고 이 검사에게 “당신이 뭐냐, 당신이 정치하는 것이냐, 엔시시 횡령사건을 누가 석방시키라고 그래”라고 거세게 항의해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정보부는 자기네가 손댄 사건은 재판 진행에도 깊이 간여했다. ‘구호금 횡령사건 담당판사 ㄱ 동향보고’라는 1975년 5월22일자 정보부 문서에 따르면 사건 담당 ㅇ검사는 5월21일 오후 2시께 서울형사지법 복도에서 “우연히 ㄱ판사를 만나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는데, ㄱ판사는 ㅇ검사에게 “엔시시 사건 담당이냐”며 “피의자들을 보석시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해결(공판)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공소장을 보니 무죄가 되기 쉽겠더라는 등의 언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ㄱ판사의 언동 내용을 분석컨대 동 사건을 무죄선고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판단되며 만약 무죄가 될 경우” 사건 관련자들이 “의기양양하여” 이 사건에 대해 “국제기구를 통해 악선전함으로써국위 손상이 우려”되고, “종교 탄압의 인상을 짙게 하며”, “반체제 위해분자(교계) 등의 대정부 비난구호로 삼을 계기가 조성될 우려”가 있다고 예상했다. 중앙정보부의 공판개입 이 사건은 변호인들 주장처럼 “검사의 공소장에도 피해자가 나타나 있지 않아 횡령과 배임죄는 성립될 수 없으므로 공소 기각을 해야 마땅”한 사건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진상조사단의 폰 바이제커 목사도 “어린애라도 30분이면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건”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정보부가 개입하면서 재판은 자꾸 지연되었다. 정보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은 5월6일 “서울형사지법 13부 단독 재판장 ㄱ판사가 지정”되어 첫 공판이 “5월30일 개정(당초 6월3일)될 예정”이었다. 공판기일이 6월3일에서 앞당겨진 것은 “75년 5월28일부터 6월2일까지 동 사건 진상조사차 더블유시시 대표 바이제커 등 4명이 내한”하기 때문에 변호인들이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정보부는 이들이 “체재하는 기간에 동 사건 공판 개정(5월30일)이 우연히 일치됨으로써 담당 변호인 등의 작용으로 동 조사단이 공판 상황을 방청하여 사건 전모를 파악케 될 것으로 예상됨”이라고 우려했다. 6월3일에서 5월30일로 앞당겨졌던 첫 공판은 정보부의 개입으로 더블유시시 진상조사단이 한국을 떠난 뒤인 6월10일에야 열렸지만, 장내 소란을 이유로 5분 만에 폐정되었다. 7월5일 3회 공판에는 돈을 준 비에프더블유의 사무총장 슈미트 목사가 증인으로 출석하여 그 돈은 원래 인권운동에 쓰라고 준 돈으로 아주 만족스럽게 쓰였다고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이렇게 되자 정보부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보부는 ㄱ판사에게 공판 진행을 늦추도록 압력을 넣으면서 유죄의 증거를 보강하려 했다. 7월25일 5회 공판 때는 피고인과 증인을 호명만 하고 끝냈는데, 기독교계 자료는 “판결공판을 연기하기 위한 재판부의 저의에서 나온 처사”라고 비난했다. 8월2일 6회 공판에서 검찰은 김관석 징역 3년, 박형규 5년, 조승혁 4년, 권호경 5년을 구형했다. 8월16일 7회 공판에서 재판부는 선고 대신 갑자기 직권으로 증인 2명을 채택하면서 변론재개를 선언했다. 구형까지 마친 상태에서 변호인의 요청도 없이 재판장 직권으로 변론재개를 선언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네 명의 성직자를 파렴치범으로 몰기 위해서는 선교자금의 지출 명세(내역)를 기록한 장부가 있어야 했는데, 당시 선교위원회의 회계 실무자가 장부를 갖고 도망쳤기 때문에 검찰은 배임·횡령의 피해자가 누구인지조차 오락가락해 변호인들의 조롱을 받았다. 이에 정보부는 김동완 목사와 허병섭 목사를 연행해, 검찰 쪽이 찾고 있던 회계 실무자의 행방을 추궁했다. 이때 “이들 성직자들은 수차에 걸쳐 심한 구타”를 당했는데, 허병섭 목사는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다. 8월30일 8회 공판에서는 전과 똑같은 구형이 되풀이되었다. 선고공판은 구속 5개월이 지난 9월6일에야 열렸다. ㄱ판사는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 중 업무상 횡령 내지 배임 부분에 있어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으나 피고인들이 빈민구호를 구실로 받은 외국원조자금을 국가보위를 해친 긴급조치 위반자들의 뒷바라지로 사용해 긴급조치 위반자를 도운 것은 엄벌해야 한다”면서 박형규 징역 10월, 권호경 징역 8월, 김관석, 조승혁에게는 징역 6월을 선고했다. ㄱ판사에 대한 뒷조사 ‘ㄱ판사 비위 첩보에 대한 관련자 조사 결과보고’라는 1975년 8월27일자 보고서는 정보부가 ㄱ판사가 이 사건에 무죄를 선고할지 모른다는 첩보를 처음 입수한 후 석 달이 넘게 그의 ‘비리’를 뒷조사했음을 보여준다. ㄱ판사는 7월28일 위증교사로 구속된 조 아무개를 보석으로 석방했는데, 정보부는 ㄱ판사가 뇌물을 받고 보석을 허가한 것으로 보았다. 정보부는 조아무개와 사건을 변호사에게 의뢰한 그의 매제뿐 아니라 2년여 전에 자갈 채취 허가 관계로 조 아무개와 접촉했던 인물까지 잡아와 조사했다. 그러나 ㄱ판사와 이들 사이에 보석과 관련한 “금품 부정거래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이들을 훈방했다는 것이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ㄱ판사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ㄱ판사는 당시의 일은 “생각만해도 괴롭다”며 면담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조승혁 목사에 의하면 당시 ㄱ판사는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두 번 가택수사를 당하는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의 변호인 홍성우 변호사는 “ㄱ판사의 시골 처가까지 압수수색을 하는 등 압력을 가해서 ㄱ판사가 울기도 참 많이 울었대요. 그때 ㄱ판사는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후에 저에게 말하더군요”라고 회고했다. 홍 변호사는 필자와의 면담에서 ㄱ판사가 당시 외부 압력이 하도 심해 “대법원 앞에 가서 목을 매고 죽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가슴아파했다. 유신시대는 검찰의 구형량이 곧 선고 형량이라 ‘정찰제 재판’이라는 비아냥을 받던 시기였다. 이 사건에서 ㄱ판사가 구형량의 5분의 1도 안 되는 형을 선고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는 아주 낮은 형량이었겠지만, 무죄와 유죄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질질 끄는 공판 진행으로 형기를 거의 다 마친 김관석 목사는 더 이상의 재판이 무의미하다고 항소를 포기해 9월17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구속될 때 “억울합니다”라고 외친 조승혁 목사는 항소했지만, 법원은 “원심의 실형 만기가 훨씬 지난 조 목사가 ‘실형 만기 신청’을 할 수 없도록 재판부 형성을 지연”시켰고, 뒤늦게 사건을 배당받은 항소심 재판부도 재판이 진행중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그를 계속 구금하고 있다가 12월13일 원심과 같은 형량을 선고했다. 이 때문에 조 목사는 원심 형량보다 두 달 더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