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 신호등
유병덕
<수필과 비평> 등단
행정학박사, 공주시 부시장 역임
장롱면허다. 운전경험이 없다. 집 가까이에 사무실이 있어서 걸어 다녔다. 가끔 출장 갈 일이 생기면 관용차를 탔다. 그래서인지 교통신호에 대하여 잘 모른다. 신호는 적색과 녹색만 있는 줄 알았다. 적색불이 들어오면 서고 녹색불이 켜지면 갔다. 사무실이 먼 곳으로 이전하면서 운전을 해야 했다. 새 차를 하나 사서 운전대를 잡았다. 황색 신호등에서 어리바리하다가 저승사자에게 잡혀갈 뻔했다.
차를 가져온 첫 날밤이다. 꿈속에서 운전 연수를 했다. 동살을 보며 일어나 한적한 시골길로 향하니 새벽부터 농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초보운전이라 두려운 마음에 땅바닥에 붙어 기어가듯 했다. 뒤에 따라오던 경운기가 답답했는지 탕탕거리며 추월해간다. 앞질러 가는 경운기를 보며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서툰 운전이라 어쩔 수 없었다. 순간 알 수 없는 물체가 길을 가로막았다. 경운기 소리에 놀란 고라니 같다. 깜짝 놀라 깨어났다.
다음 날 아침 운전을 하려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차를 세워두고 지인 차에 동승하여 출근했다. 그와 함께 가며 지난밤 꿈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마침 그가 주말에 찾아와 운전 연수를 시켜주겠다고 하여 그를 믿고 운전대를 잡았다. 차를 몰고 시내로 들어서니 도로에 차가 가득하다. 중고차 시장을 방불케 한다. 멀리 신호등이 보이는데 차가 밀려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차들이 썰물처럼 쑥쑥 빠져나간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속도를 내려는 찰나에 앞차가 급정거다.
“꽝, 꽈 광”
앞 차 뒤꽁무니를 치받았다. 이어 뒤따라오던 차가 세차게 내 차를 때린다. 순간 저승을 한 바퀴 돌아온 듯했다. 마음을 진정하고 보니 앞차 범퍼가 일그러졌다. 번쩍거리는 외제 차다. 긴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앞차 문이 열린다. 까만 선글라스를 쓴 젊은 여자가 껌을 짝짝 씹으며 나온다. 그녀의 영혼이 화산처럼 폭발한 것 같다. 삿대질하며 뭐라고 소리치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옆에 앉아 운전 연수를 시키던 그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에게 황색신호인데 교차로 안에서 차를 세우면 어떻게 하느냐고 한마디 하니, 그녀는 멀쩡히 서 있는 차를 왜 받았냐고 막무가내다. 그가 실랑이하는 사이에 스마트 폰을 꺼내 자동차보험 회사에 연락했다.
보험사 직원이 골목길에 숨어 있다 나온 것 같다. 바로 나타났다. 이어 교통경찰 차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큰 교차로에서 차들이 엉켰으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지나가는 이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졸지에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듯했다. 경찰이 내게 와서 경례를 붙이더니 운전면허증을 내놓으란다. 미안하다고 조아리며 면허증을 건넸다. 그는 내 차에서 블랙박스 칩을 꺼내 확인하더니 혀를 끌끌 찬다.
“황색 신호등에 진입하셨군요.”
교통경찰이 면허증을 돌려주며 피식 웃는다. 교차로 앞에서 신호가 황색으로 바뀌었는데 멈추지 않고 달린 것이 내 불찰이란다. 이를 지키지 않아 보험처리가 되지 않고 형사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엄포다. 어쨌든 몸은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황색 신호등은 애매하다. 황색신호에 걸리면 가던 속도대로 빨리 지나가야 하나, 아니면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나 망설이게 한다. 황색신호 구간은 애매하여 일명 딜레마 존이라고 부른다. 교통사고를 당하며 한 가지 얻은 게 있다. 녹색 신호 뒤의 황색신호는 녹색 신호의 연장이 아니라 적색신호를 알리는 멈춤의 예비 신호라는 걸 알았다. 곧 적색신호로 바뀌니 속도를 줄이라는 의미다. 이미 교차로에 진입한 차는 신속하게 교차로를 빠져나갔어야 했다. 요즘 교통사고 판독은 과학이다. 병원에서 최첨단 장비가 병명을 찾아내듯 차에 부착한 블랙박스가 정확하게 알려준다.
인생길도 신호등이 있는 것 같다. 열심히 달려 나가라는 녹색신호가 있고, 정지하라는 적색신호가 있다. 또 주위를 살피며 멈추어야 하는 황색신호도 있다. 아직 내 가슴에 피고 지는 꽃이 부지기수다.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앞만 보고 달려왔던 관성이 노년까지 남아 있다. 하나 마음만 청춘이지 몸은 아니다. 여기저기서 황색 신호등이 들어오고 있다. 눈이 침침하고 귀가 어둡고 목에서 쉰 소리가 난다. 이는 위중한 병에 걸리기 직전에 나타나는 황색신호 같은 전조증상일 거다. 나이 탓으로 치부하고 무심코 지나친다면 큰 병으로 이어져 노년이 불행해질 듯하다. 갑년이 지나니 황색 신호가 무섭다.
황색 신호등은 성찰의 신호다. 황색 신호에 멈추지 않고 달리면 교통사고를 당하듯 우리 인생도 매한가지다. 자칫 저승사자의 먹잇감이 될지 모른다. 인생 백세시대라고 하나 칠순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는 지인이 있다. 그는 황색신호를 무시해서다. 젊은 날 질주하던 관성을 그대로 가지고 천상으로 갔다.
황색 신호등이 들어왔다. 나를 슬프게 하는 일이다. 체지방이 높고 근육량이 감소하고 골밀도가 떨어졌단다. 자칫 잘못하면 중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다.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운동하라고 권한다. 지난 교통사고보다 더 두렵다. 가는 세월 앞에 질병은 속수무책이나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신발 끈을 조여 매고 길을 나선다.
첫댓글 유병덕 수필가님 수필 잘 읽었습니다.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