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부터 깡보리밥만 먹고 자라온 어른들은 보리밥을 증오하다시피 했다.
'똥구멍 째지게' 가난했던 어린시절의고향, 꿈에나 그리던 '하얀 이밥에 고깃국'.
지금이야 보리밥이 건강식이지만, 그 때 보리밥은 지긋지긋한 가난의 상징이었다.
먹고 살만해진 뒤에도, 잡곡밥이 몸에 좋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어른들은 한사코 흰쌀밥만을 찾았다.
어머니는 밥을 지을 때, 보릿쌀을 솥 한쪽에 따로 안쳤다. 한 쪽은 흰 쌀밥, 한 쪽은 거무튀튀한 깡보리밥.
그 명료한 흑백의 대비! 어머니는 흰 쌀밥 쪽에서 아버지 밥을 먼저 푸신 뒤 보리밥과 쌀밥을 섞어 아이들 밥을 푸셨다.
솥에 남은 시커먼 깡보리밥, 그 것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그 깡보리밥을 양푼에 퍼 고추장에 썩썩 비벼 잡수시며,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보리밥이 소화가 잘돼 좋아' 하셨다.
하긴 보리밥이 소화가 잘되긴 잘되는지, 골목길 달음박질 한번에 아이들의 배는 꺼져버렸다.
풀반찬만 먹다가 오랜만에 고등어나 꽁치조림이 밥상에 올라오면 아이들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가운데 도막 덥썩 집어다 먹었으면 원이 없으련만! 아이들은 슬금슬금 아버지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는 엄했다. 특히 먹을 것이 귀하던 때라, 밥상머리에서 제멋대로인 아이들에게 그냥 오냐오냐 하시질 않았다.
밥상이나 밥사발에 남아있는 밥풀은 반드시 주워먹거나 싹싹 긁어먹게 했다.
또한 '일시일찬(一匙一▦)', 밥 한 술에 반찬 한 젓갈이 원칙이었다.
밥은 안먹고 반찬에만 젓가락을 들락거리는 아이는 밥상머리에서 '퇴출'당하기 십상이었다.
밥상에서 쫓겨나 식구들 밥 먹는 모습을 멀건히 바라봐야 하는 심정, 아이들에겐 세상이 무너지는 설움이었다.
그래서 밥상머리에선 특히 조심을 했다.
어머니들 몫은 항상 '생선대가리'였다.
'어두일미' 혹은 '어두육미(魚頭肉尾)'라고 하지만 돼지머릿고기 누른 것도 아닌데 거기에 뭐 살점이나 붙었겠는가.
그래도 어머니는 '생선은 대가리가 제일 맛있지'하며 그 알량한 살을 발라 잡수셨다.
맛없는(?) 생선 가운데 토막은 아버지 앞에 놓였다.
어머니는 아예 생선대가리를 통째 입에 넣으시고는 밥사발 뚜껑에 보기좋게 뼈만 뱉아놓으셨다.
아이들은 아무리 따라해도 살과 뼈가 발리지 않았다.
우물우물 입속에서 생선대가리를 발라보지만 뼈를 뱉으면 입 안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긴 어머니들이 평생 배워온 그 기술(?)을 어찌 흉내나 낼 수 있으랴.
하루종일 이불을 펴놓는 아랫목에 밥사발 뚜껑 덮어 파묻어 놓으면 그런대로 최소한의 보온은 됐다.
'나간 사람 몫은 있어도 자는 사람 몫은 없다'고 하시면서도 어머니는 잠자는 아이의 밥사발을, 아직 돌아오시지 않는
아버지의 밥사발과 함께 아랫목에 묻어놓았다.
아랫목은 또한 바깥에서 놀다들어온 아이들이 언 몸을 녹이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흥부네 아이처럼 옹기종기 이불 속에 배 깔고 엎드려 만화도 보고 장난도 쳤다.
장난을 치다 아이들은 곧잘 밥사발을 발로 차 뒤집어놨다. 그러면 이불이고 발이고 밥풀이 더덕더덕, 아랫목은
온통 밥풀난리가 났다. 들킬새라 아이들은 이불과 발바닥에 붙은 밥풀을 부지런히 떼어먹었다.
때딱지 앉은 손으로 주물럭 주물럭 밥사발에 밥을 쓸어담아 놓고는 시치미를 뗐다.
느지막이 들어오신 아버지는 그 밥을 맛있게 잡수셨다. 모르는 게 약!
쇠다리를 접어넣은 호마이카상이 나오기 전, 교잣상같은 큰 상이 드물었다.
아이들이 많은 집이나 할아버지.할머니를 모시고 삼대가 같이 사는 집에선 밥상을 두개씩 봤다.
밥상이 둘 차려지면 대개 여자와 남자가 따로 앉았다. '남녀칠세부동석'이 아니라 '남녀칠세부동상'이랄까.
반찬은 뭐든지 남자쪽 상이 푸짐했다. 여자아이들은 입이 댓발 나왔고, 할머니는 습관 때문인지 굳이 여자상에 가서 앉으셨다.
호마이카 상도 한 집에 하나 뿐이어서 잔치가 나면 동네 상들이 모두 잔치집으로 징발됐다.
일회용 숟갈은 없던 때라, 잔치용 수저를 공동으로 사놓고 쓰기도 했고 아니면 이웃집 수저를 빌려썼다.
어머니는 잔치품앗이 가고 집엔 상도 수저도 없으니 천상 잔치집에 가서 밥을 먹어야 했다.
그 때는 어쩔 수 없이 잔치가 나면 동네잔치였다.
엄모자부 요즘이야 어머니가 혼내면 아빠한테 쪼르르 달려가는 엄모자부(嚴母慈父)지만 그 때는 엄부자모(嚴父慈母)였다.
아버지가 혼내면 어머니는 아이들을 치마폭에 감싸안고 '어이구, 내 새끼'하고 토닥이는 그런 식이었다.
아버지가 예절과 예의, 참는 법 등을 가르쳤는데 부부간의 자연스러운 자식교육 역할 분담이 아니었을까?
밥상머리 예절도 아버지가 가르쳤다. 어른들이 수저를 든 뒤 수저를 드는 것, 한 손에 숟갈과 젓갈을 함께 쥐지 않는 것,
숟갈을 상 위에 내려놓는 건 밥을 다먹었다는 표시라는 것, 국이나 찌개는 '건더기낚시' 젓갈질을 하면 안된다는 것,
아직 밥 먹는 사람이 있는데 밥상머리에 드러누우면 안된다는 것, 숭늉은 물론 찬물도 순서가 있다는 것,
맛있는 반찬만 먹거나 음식을 남기면 안된다는 것, 등등등.
어머니도 항상 아버지가 수저 드시길 기다렸다. 아이들 교육의 역할분담이 그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버지 권위를 세워줘야, 아이들 교육 중 억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테니까.
아무리 사랑이 넘치고 넘치는 부부도 아이들 앞에서 '야, 누구' 하는 식으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것도 서로 상대방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진지, 아빠는 밥 '아버지'가 사라졌다.
화장하는 나이가 되도, 턱수염 까칠까칠 났어도 여전히 '아빠'다.
'아빠!'하고 부르니 당연히 뒤따라 나오는 말은 '진지드세요'가 아니라 '밥 먹으세요'나 '식사하세요'다.
외식업이 발달한 뒤로 식사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 같다.
식당에서 '밥 시키세요' '진지 시키시겠습니까?' 할 수는 없으니 궁여지책 '식사 주문하세요'라고 한 것 같다.
그 땐 어른 앞에서 '밥'의 'ㅂ'자만 꺼내도 혼구멍이 났다.
'아버지'들이 진지는 다 드시고 떠났는지, 지금의 '아빠'들에겐 밥과 식사만 남았다.
첫댓글 호호호아랫목 풍경은 어느 집이나 다 같았군요
너무 상세하고 재미나게 표현을 해 주셔서 조정환님의 글을 보고 얼른 단숨에 읽었다네요.밥상머리 풍경은 우리집과는 조금 다른점이 있지만 말이지요..가끔씩 드나드시던 우리 외할머니께서(돈도 많고 조금 사셨다는..
) 밥상예절을 주로 가르치는 편이었고..울아부지는 아이들 크는데 맘껏 못먹이는게 맘 아프셔서 였는지..어머니,아버지 두분다 자식들과 똑같이 
평등이었다는..
(그 외할머니만..큰손주만 따로 좋은거 사다 먹이고..따로 데리고 나가서 뭐 사주고
)..헌데 지금 생각해 보니..그제나 지금이나 생선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제가 울엄마몫까지 다 먹어치웠던건 아닌지

생선뱃살부분,내장,머리까지 꼭 씹어먹는 내공이 그 때부터 제겐 있었거든요

제가 말랐지만..생선,고기 이런거 참 좋아해요..어릴 적..된장찌개에 있던 건더기가 고긴줄 알고 덥석 집어 먹었던 기억..
먹거리 없던 시절..엄마가 손수 이스트 넣고 만들어 주시던 밀가루빵이나 찐빵같은게 오늘 생각나네요
'아버지'들이 진지는 다 드시고 떠났는지, 지금의 '아빠'들에겐 밥과 식사만 남았다. -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남습니다. 저희 집은 부모님이 동갑 (아버지가 7살에 입학하셔서 학교는 1년 선배) 이시라 그런지, 부부끼리의 대화도 적당히 반말투였는데다, 아이들도 부모에게 존댓말을 안 썼는데, 그 당시만 해도 그러는 집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존댓말을 써야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진지 잡수세요", "안녕히 다녀오세요"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 안녕히 주무세요"가 그것들이었다는. ^^
식사 예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수저를 한 손에 쥐면 안 되듯이, 양 손에 들고 먹는 것도 보기에... 안 했으면 해요. 저희 엄마는, 식당에서 한 손엔 숟가락을, 또 한 손엔 젓가락을 들고 (주로 뜨거운 면 종류 먹을 때) 먹는 모습을 보실 때마다 아주 못마땅해 하셨거든요. 그리고, 요즘엔 왜 그렇게 젓가락질 하나 제대로 못하는 애들이 많은지... 회사에서도 제 근처에서 밥 먹다가 싫은 소리 들은 직원이 한 둘이 아니라는. 에휴~ 느느니 잔소리...
아닌게 아니라 예전엔 가정교육은 밥상머리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저희 부모님들은 상대적으로 다 온화하신 분이시라 웬만한 건 다 눈감아 주시곤 했는데 어느날 교장선생님이신 외할아버지께서 오셔서
으로 반찬을 이리저리 뒤짚는 절 보시곤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아주 호되게 야단을 치셨던 기억이 납니다.그 때부터 밥상에 앉는 것이 신경쓰이고 조심스러워지더군요.암튼 밥상머리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보장받으셨던 예전의 아버지가 왜 이리 그립고 부러운 건지.에효
나오는 건 한숨 뿐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