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펼쳐 봐
김 세 지
“엄마! 그거 알아요? 여덟 번 이상 접을 수 있는 건 없대요. 볼래요?”
아이는 넓은 휴지 한 장을 꺼내 접기 시작한다. 정말로 일곱 번을 접으니 너무 두꺼워져 더는 접히지 않는다. 세상 온통 궁금한 것투성이일 열 살 아들은 어디서 신기한 이야기를 잘도 물어온다. 그런 것쯤 몰라도 사는 데 전혀 지장 없을 아이의 이야기는 종종 내가 껴안은 문제와 꿰어지기도 한다.
책을 좋아하지만, 마음만큼 행동은 따라주지 않았다. 휴대전화 메모장엔 읽고 싶은 책 목록이 줄줄이 늘어만 가도, 내게 읽힘을 당하기는 중전으로 간택 받기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독서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세상 전부를 안겨 줘도 모자랄 내 아이에게 책을 통해 더욱 넓게 세상을 볼 수 있음을 알게 하고 싶었다. 독서가 습관이 되고, 덤으로 따라올 언어에 대한 감각은 아이에게 평생의 자산이 되리라 믿었다. 아이에게 책을 읽히려다 보니, 나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책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한번은 네팔에서 NGO 활동을 하는 친구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대번에 한 무더기 주문했다. 왜 그런지 내가 흥분해서는 받자마자 친구에게 인증 사진을 보내고, 축하와 응원을 쏟아부었다. “성공하고 잘사는 친구들 안 부러운데, 정말 진심으로 부럽다.” 정성껏 읽어 줄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다니던 독립 서점에도 몇 권 나누었다. 내 일처럼 좋았지만, 내 안의 뭔가 건드려진 것인지 배가 아프도록 부럽기도 했다.
의상을 공부하고 한때는 국내외 브랜드를 줄줄 꿰던 나였지만, 언제부터인지 겉치장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아름다움에 대한 흥미는 왕성해도, 다른 이가 가진 물질이 부럽거나, 무언가 좋아 보인다고 무리해서 가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어쩌면 내 욕심을 채울 만큼의 돈이 이번 생의 나에겐 생길 턱이 없으니, 진즉에 발을 빼 버린 나만의 생존 본능이었을까?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굴레에서 허우적대는 대신 당장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종종 아들과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 차를 시켜 놓고 마주 앉아 각자 책에 빠져있다가 문득 둘의 시선이 마주칠 때가 있다. 그 순간, 바깥 풍경은 창을 캔버스 삼은 르누아르의 그림이 되고, 잔잔한 음악은 오직 둘만을 위한 연주처럼 귀를 녹인다. 읽던 책은 돈 있어도 못 산다는 명품 백보다 사람을 귀하게 한다. 본 적 없는 커다란 물방울 다이아는 내 손가락이 아닌 아들의 눈 속에 반짝이고 있다. 이런 나름의 사치스러운 시간으로 행복을 확인한다.
책을 읽다 멋진 문장을 만나면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곱씹으며 읽어본다. 눈에 보이는 빙산은 그저 작은 일부일 뿐 아래엔 훨씬 거대한 것을 감추고 있듯, 문장 뒤에 숨은 재기와 심력에 경외심마저 든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 글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나 쓸 수 없는 것 또한 글이라 생각했다. 나와 아들이 읽고 읽게 하는 것으로 충분했고,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감히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 날, 도서관에서 하는 수필 강좌를 수강하게 되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강좌를 신청하려다가 우연히 눈에 띈 수업에 홀린 듯 수강 신청을 하고, 첫 수업 날이 되었다. 고상한 품위가 느껴지는 수강생들의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괜히 옷매무새를 만진다. 아들의 말이 떠올랐다. 되든 안 되든 일단 들어나 보자 했던 마음은 손쓸 새도 없이 접히고 있었다. 강의에 임하시는 선생님을 살폈다. 우뚝 솟은 좁은 바위산 정상에 흰 수염 휘날리며 위풍당당 서 있는 도사 같은 위엄에 압도당했다. 고색 짙은 지팡이라도 있다면 바닥을 쿵 한 번 치기만 해도 천지가 개벽해 버릴 것 같았다. 긴장을 풀어 보려 몸에 힘을 실어 보지만, 하릴없는 마음은 또 한 번 접혀 버렸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에도 다들 짧은 어구에 자신을 녹여낸다. 수줍은 듯하지만, 무리하지 않고도 품은 심지를 느낄 수 있다. 성심을 다해 주어진 시간을 쓰는 모습에 감응하여 나를 돌아보게 한다. 별 기대하는 것 없이 토지나 해리포터 같은 작품을 대충 끄적여 둔 채, 미래에 제2의 박경리나 J. K. 롤링으로 불리게 될 누군가의 역사적인 시작을 내가 함께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상에서 깨어나면 ‘역시 안 되겠어.’ 한 것도 없이 벌써 몇 번째 마음만 접고 있다. 수업 내내 나는 훌륭한 그림에 아무렇게나 휘갈겨진 낙서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더 이상 헤아릴 소용도 없이 꼬깃꼬깃해진 나를 누가 알아차릴까,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일주일 뒤 같은 시간에 나는 이곳에 다시 없다’에 전 재산이라도 걸 수 있었다.
“이런 수업일 줄 몰랐어. 다들 자기소개만 해도 사람 마음을 동하게 한다니까! 심지어 내가 쓴 글로 공부한대. 내가 무슨 글을 쓰고 그걸 또 사람들 앞에 어떻게 내놓겠어?” 수업을 마치고 친구와 통화를 하며, 하지 못할 이유를 대느라 바쁜 내 목소리가 한껏 들떠있다. ‘딱 세 번만 나가 볼까? 그때 그만둬도 되잖아?’
나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세 학기를 지나왔다. 처음 쓴 글을 선생님께 보낼 때는 봐도 봐도 이상하고 불안했다. 기한을 살짝 넘기고도 재수정하고 싶다며 선생님을 귀찮게 했다. 잘하고 싶기야 다들 같을 테고, 모두 나처럼 약속을 어긴다면 어려움이 생기시겠지만, 선생님께서는 지적 대신 나의 열정이라 북돋워 주신다. 더 큰 울림이 되어 어리광부리지 말고 어른답게 해내자 다진다.
나의 글쓰기는 욕심과 싸우는 일이다. 잘하려는 욕심이 앞서면 글은 길을 잃고 만다. ‘왠지 해도 해도 내 맘 알아줄 것 같지 않아서 자꾸 겹겹이 칠하다 덧나기만 하는 상처. 차라리 그것보단 모자란 게 나아.’* 쓸데없는 포장지는 벗겨 내고 밋밋하더라도 알맹이만 남기려 애를 써 본다.
일주일 중 단 하루, 매주 금요일은 글쓰기를 배우러 가는 시간, 그 이상의 의미가 되어가고 있다. 쫓기는 일상에서 분별력이 흐려지기도, 잠시 나를 잊기도 한다.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수업 시간은 내 영혼이 육신을 놓치지 않고 쫓아오도록 기다리는 틈이 된다. 선생님과 문우님들은 겉주머니에 덜렁덜렁 아슬아슬한 내 영혼을 다정히 보듬어 안주머니에 고이 찔러넣어 준다. 덕분에 크게 용쓰지 않고도 반푼이 소리 안 듣고 한 주를 또 살아나간다.
수업 때마다 너도나도 챙겨오시는 간식 또한 나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친다. 선생님과 함께 서로 정을 나누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을 빛나는 정성들은 약속 없이도 끊이질 않는다. 늘 이런 걸 어찌 가져올까 싶다가도 맛나게 드는 모습을 보면 함께 따뜻해지면서도 숙연해진다.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대단치 않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다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일상에서 글감을 찾는 일은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게 하고, 나의 이야기를 글로 다듬으며 나도 몰랐던 뜻밖의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처음으로 확신이 들었다. ‘나도 열심히 살고 있고, 좋아지고 있구나!’ 나를 찬찬히 들여다볼 용기가 생긴다.
거창한 꿈이 있진 않다. 꾸준히 쓸 수 있고, 함께 읽어 줄 문우들과 선생님의 지혜를 빌려 조금씩이라도 나아가 보는 것. 무엇을 더 바랄까? 지레 겁먹고 도망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꼬깃꼬깃 접었던 마음 조심히 열어 그 위에 나를 펼쳐 본다.
“아들아! 엄마가 여덟 번 이상 접히는 걸 찾았어. 그건 바로 마음이야. 도망치고 싶었지만 포기하지 않은 엄마 칭찬해 줄 거지?”
*노영심, Thank you,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