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시대조선-출생 1790년(정조 14) 06월 18일- 사망1834년(순조 34) 11월 13일- 본명 이공(李玜)- 본관 전주(全州)
목차
접기 어린 왕의 즉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다
벽파의 몰락과 안동 김씨의 집권
세도정치의 폐단과 농민반란
순조, 안동 김씨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다
순조의 가계도
어린 왕의 즉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다
순조는 1790년(정조 14) 6월 18일에 정조와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가 후사를 잇지 못하고, 의빈 성씨가 낳은 첫째 아들 문효세자는 5세의 어린 나이로 일찍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순조는 왕실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정조는 효의왕후로 하여금 순조를 아들로 삼게 하고 1800년(정조 24) 1월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휘(諱)는 공(玜)이며, 자(字)는 공보(公寶)이다.
1800년(정조 24) 6월 28일에 정조가 갑자기 죽고 그해 7월 4일 순조가 즉위했다. 당시 순조는 11세의 어린 나이였다. 따라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대표적인 공한파 김한구(金漢耉)의 딸이자 김귀주(金龜柱)의 동생으로, 정조 즉위 후에는 노론 벽파를 옹호하며 시파와 대립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자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았다. 정조가 고수했던 탕평의 원칙은 사라졌고, 정조와 시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장용영은 혁파되었다. 다만 임오의리에 대해서는 왕실의 권위를 지키고자 했던 정순왕후의 뜻에 따라 정조가 천명한 바를 따랐다. 그러나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정적인 시파, 그중에서도 남인 시파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맨 먼저 문제 삼은 것은 천주교였다. 이가환(李家煥)을 비롯해 정약용,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3형제 등 남인에는 유독 천주교 신봉자가 많았다. 결국 시파 제거를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그 규모가 점점 확대되어 희생된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당시 은언군(恩彦君)과 그의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 등 왕실 일족,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洪樂任) 등도 천주교와 관련된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 밖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던 순조 재위 초기에는 공노비의 혁파, 서얼 소통의 시행 등 조선 사회 신분 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주요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순조는 1802년(순조 2) 10월에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를 왕비로 맞이했다. 정조가 생전에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기 위해 재간택까지 해 놓은 상태였지만, 김조순이 시파였기 때문에 노론 벽파들은 김조순의 딸을 순조비로 삼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정조가 정해 놓은 일을 쉽게 저버리지 못했다. 결국 안동 김씨 집안과의 국혼이 성사되었고, 이것이 이후 3대에 걸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순원왕후는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와 3명의 공주를 낳았으며, 24대 헌종은 효명세자의 아들로, 순조의 손자이다.
벽파의 몰락과 안동 김씨의 집권
1803년(순조 3) 12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14세가 된 순조가 친정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순조의 정치력은 여전히 미약했다. 이러한 가운데 정권을 잡은 것은 외척인 김조순의 집안이었다. 시파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일가는 비변사를 장악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한편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노론 벽파는 '김달순(金達淳)의 옥사'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관주(金觀柱)를 비롯한 노론 벽파는 후원자인 정순왕후가 죽자 앞날이 걱정되었다. 순조가 벽파에 대한 보복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김관주는 순조가 장성하기 전에 사도세자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관주는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조카 박종경(朴宗慶)을 만났다. 그리고 박종경에게 영조 때 사도세자의 잘못을 간했던 박치원(朴致遠)과 윤재겸(尹在謙) 두 사람을 포상하도록 주청할 것을 시켰다. 그렇게 해서 사도세자가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덕이 있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후 김관주의 추천으로 우의정에 오른 김달순이 순조에게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면 그것으로 사도세자에 대한 벽파의 입장이 정리될 것이라고 했다. 박종경은 이 말에 동의하고 김관주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박종경이 입궐하려는 날, 공교롭게도 박종경의 아버지 박준원(朴準源)이 이러한 계획을 알게 되었다. 박준원은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해 박종경의 입궐을 막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우의정 김달순은 김관주의 계획대로 박종경이 이미 순조를 만나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는 순조에게 〈영남만인소〉의 주모자인 이우(李瑀)를 처벌하고 박치원과 윤재겸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려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순조는 김달순의 주청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우상의 거조 가운데 이우, 박하원(朴夏源) 등의 일은 바로 근래에 관계되는 일이니, 으레 상량(商量)해 처분해야 한다. 그리고 박치원, 윤재겸의 일에 이르러서는 오래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크게 의리(義理)에 관계되는 것이니, 상세히 살펴서 조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를 일컬음)이 간언을 용납한 성덕(聖德)에 대해서 내가 진실로 흠앙하지만 조(祖), 자(子), 손(孫)은 본래 일체(一體)인데, 선조(先朝)께서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일을 내가 어떻게 오늘날에 와서 포증(褒贈)할 수가 있겠는가? 경 등은 모두 선조의 구신(舊臣)들이니, 모쪼록 차례대로 상세히 진달하는 것이 옳겠다. - 《순조실록》 권 8, 순조 6년 1월 6일
순조는 박치원, 윤재겸 두 사람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릴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임오의리는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므로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평소 김달순과 정적 관계였던 김명순(金明淳)이 김달순을 비난함과 동시에 조득영(趙得永)으로 하여금 김달순을 탄핵하게 했다. 결국 김달순은 유배되었다가 그해 4월에 사사되었다. 김달순의 처형으로 김관주, 심환지(沈煥之) 등 벽파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권력에서 밀려나고 시파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벽파의 몰락과 시파의 집권은 사실상 안동 김씨 세력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는 또 다른 외척인 반남 박씨 세력과 풍양 조씨 세력의 협력을 얻어 권력을 장악했다.
정조 때 홍국영의 세도정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도정치 아래서는 정승을 비롯한 모든 관료들이 세도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국가의 모든 사무와 결정도 세도가를 통해야만 왕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홍국영의 경우에는 그런 세도가 불과 3년 만에 끝이 났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는 대를 이어 60년간 계속되었다.
안동 김씨는 충절과 학문을 숭상해 온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형제의 집안으로, 대대로 명문가로 명성을 이어 왔다.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김좌근(金左根), 김문근(金汶根), 김병기(金炳冀)로 이어졌다. 그들은 조정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을 행사했다.
세도정치의 폐단과 농민반란
조선의 지배층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을 시작한 이래, 당쟁은 당파들 간의 지나친 반목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의 실정을 견제하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에서는 그들의 실정을 바로잡을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왕권조차 세도가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견제 세력이 없는 권력은 결국 부패하기 마련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순조 재위 기간 동안 삼정(三政, 전정·군정·환정)이 문란해지고 지방관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다.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고, 세도가들은 부패한 관리들의 뇌물로 가산을 늘렸다.
이런 가운데 전국적인 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811년(순조 11)에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대표적이다.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군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스로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고 병서를 익힌 홍경래는 뿌리 깊은 조선 조정의 서북인 차별과 부패한 관리들의 가혹한 착취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는 우선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새롭게 성장한 부호 세력, 즉 상업과 광산업의 발달로 탄탄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과 천민들을 모아 봉기를 준비했다.
1811년(순조 11) 12월 18일, 홍경래는 우군칙(禹君則), 김창시(金昌始) 등과 함께 거병해 10여 일 만에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했다. 반란군은 1812년(순조 12) 1월에 정주성을 함락하고 남진을 시도했다. 그러나 정부 토벌대의 공격에 막혀 정주성에 고립된 채 4개월가량 버티다가 섬멸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평정되었지만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조선 시대 내내 모순된 신분 제도와 세금 제도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삶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피폐해졌다. 순조 대 이후 빈번해진 농민들의 무력봉기는 불만이 극에 달한 백성들의 저항의식이 표출된 것이었다.
순조, 안동 김씨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순조는 병중에 있었고, 김조순과 박종경이 함께 의논해 정사를 처리하고 있었다. 당시 박종경은 훈련대장으로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호조판서에 올랐으나 조득영이 반남 박씨의 부정부패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자 스스로 물러났다. 이때부터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하지만 순조는 안동 김씨 세도에 점차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1827년(순조 27)에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김으로써 세자의 처가인 풍양 조씨 가문을 안동 김씨 가문의 견제 세력으로 키우고자 했다.
효명세자는 1809년(순조 9)에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812년(순조 12)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1819년(순조 19)에 풍양 조씨 조만영(趙萬永)의 딸과 혼인했다. 대리청정을 시작하며 집권한 효명세자는 자기 세력을 요직에 등용했다. 김노(金路), 홍기섭(洪起燮), 이인부(李寅溥), 김노경(金魯敬) 등이 권력의 핵심 기구인 비변사를 장악했다. 이들은 모두 안동 김씨 세력의 반대파였다. 또한 조만영을 비롯한 풍양 조씨들이 측면에서 세자를 도왔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에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고 노력했던 효명세자가 죽으면서 안동 김씨가 다시 득세하게 되었다. 안동 김씨 세력은 세자의 측근 세력인 김노, 홍기섭, 이인부, 김노경을 4간신으로 몰아 유배시켰다.
한편 효명세자의 죽음으로 위축되었던 풍양 조씨 세력은 1832년(순조 32)에 순조가 조만영의 동생 조인영(趙寅永)에게 세손(훗날의 헌종)의 보도(輔導)를 맡김으로써 다시 한 번 회생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후 조인영을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 가문은 헌종의 즉위와 함께 세도정치를 펼치게 되었다.
순조는 1834년(순조 34) 11월 13일에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먼저 죽은 효명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왕위를 물려받으니, 그가 24대 헌종이다.
순조는 검소하고 덕이 높으며 학문을 사랑한 왕이었다. 그러나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밀려 제대로 된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34년의 통치 기간 동안 잦은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은 고통스러웠으며, 신유박해와 농민반란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다. 능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인릉(仁陵)이다.
순조의 가계도
제23대 순조(純祖, 1790∼1834년)
제23대 순조(純祖, 1790∼183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