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많이 마셨다. 시장의 선술집에서 몹시 취해 비틀거리며 나온 기억은 나는데 언제 어떻게 방에 들어 왔는지 도무지 기억에 없다. 목이 타고 소변이 마려워서 어절 수 없이 일어나 옥상에 나와 보니 이미 한낮이다.
이를 닦으며 거울을 보니 퀭한 눈이며 덥수룩한 수염이며 손톱 밑에 낀 때며, 영락없는 주정뱅이 몰골이다. 거울 속의 그 주정뱅이가 나를 향해 히히히 웃는다. 마음에 안 들지만 주정뱅이에게 딱 어울리는 웃음이다.
식당에 내려가 티베탄 국수 뚝바를 주문했다. 다바 구릉은 내 기색을 살폈다. 말 안 해도 안다. 내 광고를 보고 특별한 반응을 보인 손님은 전날에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닷새 전, 내가 붙인 벽보를 붙이자마자 맨 처음 그걸 읽은 사람은 당연히 다바 구릉이었다. 나는 '김인애'가 사촌 동생이며 그녀의 아버지인 내 삼촌의 부탁으로 찾아 나섰다고 둘러댔다.
다바 구릉은 '네 동생이면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어째서 사진이 없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캘커타에서 실리구리로 오는 기차에서 가방과 함께 도난 당했다고 둘러댔다.
다바 구릉이 차를 가져다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어제 밤 기억 나냐? 너는 이 식탁에 엎드려 잤다.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더라. 내 아내와 나 그리고 내 딸까지 셋이서 너를 들어다 네 침대로 옮겼다. 굉장히 힘들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계단에 뒤통수를 찧었던 기억이 난다. 만져 보니 과연 혹이 나 있다.
"정말 어제는 너무 마셨다."
"뭘 마셨냐?"
"위스키. 그리고 시장에서 락시......"
"오, 저런. 독을 마셨구나. 시장에서 몰래 파는 락시는 아주 나쁘다. 빨리 취하라고 술에다가 농약을 탄다. 조금만 마셔도 간에 치명적이다. 그 술 마시는 사람들은 금방 죽는다. 얼굴이 꺼멓게 되고 퉁퉁 부어서 죽는다. 내 외삼촌도 그래서 죽었다. 위스키도 못 믿는다. 봐라. 내 식당에서는 위스키나 락시를 안 판다. 맥주만 판다. 마시고 싶으면 맥주나 조금씩 마셔라."
맥주 이야기를 듣자마자 또 갈증이 난다. 독과 다름없는 락시를 많이 마셨으니 맥주를 마셔서 소변을 촉진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맥주를 한 병 시키자 그는 '괜찮겠냐'면서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다.
그는 '정말 괜찮겠냐'면서 맥주를 컵과 함께 탁자에 놓고서는 다시 '딱 한 병이다'라면서 마개를 딴다. 그는 맥주를 마시는 내 모습을 보며 쯧쯧 혀를 찬 다음에 천천히 말한다.
"어제 이곳 경찰 간부인 내 친구가 왔다가 네 벽보를 봤다. 그가 말하기를 네 나라 대사관을 통해서 정식으로 요청을 하면 인도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더라."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수속이 복잡하고 시간이 너무 걸린다. 델리까지 언제 갔다 오겠냐.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나라 정부나 경찰이 성의 있게 도와주겠냐 하는 점이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내 경찰관 친구는 개인적으로 좀 도와 줄 수 있다고 하더라."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냐?"
"우선 산닥푸와 씨킴 쪽 경찰 체크 포스트에 비치된 통행자 명부에 네 동생 이름이 있는지 체크해 보겠다고 한다. 그러면 최소한 네 동생이 이 지역에 왔던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다."
"그 경찰관은 믿을 수 있는 친구냐?"
"물론이다. 그는 내 불알 친구다. 다만 어느 정도의 수고비를 줘야할 것이다. 여긴 통신 사정이 안 좋아서 사람을 보내 일일이 확인을 해야 한다."
"얼마면 되겠냐?"
"글쎄......"
"좋다. 우선 1천 루피를 주겠다. 대신 지난 1월1일부터 최근까지 두 달 동안 그 체크 포스트에서 체크한 모든 한국인 명단을 날짜별로 뽑아 달라고 해라. 내 친구들도 그 중 몇 군데 체크 포스트를 통과했으므로 거기엔 반드시 그들의 이름도 들어 있어야만 네 경찰 친구가 일을 한 것으로 인정하겠다. 그걸 내일부터 3일 안에 내게 주면 3천 루피를 더 주겠다. 그러나 3일이 넘으면 하루에 5백 루피 씩 감한다. 어떠냐?"
다바 구릉은 신중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말한다.
"김, 너는 보기보다 똑똑하다. 좋다. 그러나 나도 조건이 있다. 내가 현금보관증을 써 줄 테니 3천 루피를 나에게 맡겨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좋다. 너를 믿겠다. 그러나 네 경찰관 친구가 가져온 명단 중에 내가 아는 한국인 통행자들의 이름이 없으면 무효라는 점을 네 친구에게 확실히 전해라."
"염려 마라. 그러나 일이 잘 안 되어도 선금 1천 루피는 돌려 줄 수 없다. 대신 내가 위로주를 사주마. 됐냐?"
화장실에 들어가 전대를 끌러 4천 루피를 꺼내 다바 구릉에게 줬다. 다바 구릉은 선금 1천 루피를 제한 나머지 3천 루피에 대한 보관증을 써줬다. 우리가 새삼스러운 악수를 나눌 때 다바 구릉의 아내가 주방에서 뚝바를 내온다. 뜨듯한 국물이 뱃속에 들어가자 취기가 다시 돈다.
광장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늘었다. 말에 올라앉아 기념 사진을 찍는 인도인 신혼부부들,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걷는 중년 부부들, 양털로 짠 스웨터를 입은 서양 커플들, 벤치에 앉아 햇빛을 즐기는 노인들, 길바닥에 앉아 손을 벌리는 걸인들......
산책 삼아 순환도로를 한바퀴 돌고 나자 어제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낀다. 안개 속에서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은 현실감이 없다. 꿈 속 같다. 안개 속에서 나타난 예쁜 거지 소녀는 이미 구면이라고 쌩긋 웃는다. 속눈썹에 여전히 안개 이슬이 잔뜩 달려 있다. 안개에 젖은 그녀의 손바닥 위에 2 루피 짜리 동전을 놓아준다.
시장 통으로 내려간다. 비탈진 좁은 골목길 양쪽으로 상점들이 늘어 서 있다. 옷가게에는 제법 손님이 많다. 서양 여행자들이 양털로 짠 스웨터, 양말, 모자들을 고르고 있다.
터미널로 나가는 골목에서는 티베탄 난민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있다. 구호품으로 보이는 헌 옷가지, 중국제 밥그릇, 암염, 빨래 집게, 빗, 머리 핀...... 암염과 한약재를 파는 노파 역시 구면이다. 그녀가 내게 티벳 말을 하며 웃는다. 동네 사람으로 착각했나 보다. 나도 그 티벳 아주머니가 결혼식장에서 만났던 먼 친척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고려 시대를 살던 내 조상 중에는 몽고를 거쳐온 티벳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러 터진 토마토가 굴러다니는 질척질척하고 좁은 채소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니 티베탄 식당들이 나온다. 대부분 만두와 뚝바집이다. 티베탄 할머니가 찜통의 뚜껑을 열자 하얀 김이 뭉실뭉실 피어난다.
티베탄 상인들의 모습은 내가 어렸을 때 본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 또는 부산 국제 시장에서 장사하던 이북 피난민들 같다. 어렸을 때 어머니 따라 몇 번 가 본 종로 4가 시계 골목의 '곰보 냉면집'에서 냉면을 먹던 이북 사람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반찬 가게에서는 스쿠티라고 부르는 말린 생선과 말린 우거지도 판다. 우리나라 청국장 같은 것도 있다.
인애도 나도 시장 구경을 좋아했다. 둘이 여행을 가면 반드시 그 동네 시장에 들렀다. 시장은 어떤 축제보다 더 활기에 차있고 풍성하고 싱그럽다. 우리는 이따금씩 우리 둘 사이에 끼어 드는 우울이나 권태를 시장을 돌아다니며 잊곤 했다. 싱싱한 야채, 비릿한 생선, 콤콤한 젓갈들, 그리고 구수한 순대국 냄새와 억센 아주머니들은 우리를 아주 열심히 살고 싶게 했다.
인애와 나는 시장에서 털신이나 고무신도 사 신고, 빈대떡도 사 먹고, 펑 터지면서 흩어진 뻥튀기도 주워 먹고, 떡을 사서 배낭에 넣으며 흡족해 했다.
인애 너는 기억 하냐? 설악산에 갔다가 싸락눈 내리는 속초 시장 뒷골목에서 먹은 팥죽과 총각김치를. 그때 그 팥죽 할머니는 우리에게 총각김치는 맨손으로 들고 먹어야 더 맛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어느 해 가을엔 가는 홍천군 서석면 장터 여인숙에서 인절미와 잔치 국수를 얻어먹었다. 그 날 우리는 장날을 전후해서만 문을 여는 마을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다시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비썩 마른 꾸리(짐꾼)들이 트럭에서 짐을 내리는 길모퉁이가 낯익다 싶더니 요 며칠 계속 내가 들렸던 선술집이 그 모퉁이 맞은편에 보인다.
선술집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앉은 사내의 담뱃불이 빨갛게 피다가 진다. 눈이 쓰리도록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도 담배를 피워하는 주정뱅이들, 오줌 지린내 같은 땀 냄새와 쥐가 썩는 것 같은 겨드랑이 냄새, 그리고 주인 여자가 입은 양털 옷에서 나는 비린내도 역겹지만 마침 앉을 자리도 없어서 돌아설까 하는데 옆자리가 비어 있다고 손짓하는 사내가 있다. 이 주막집에서 며칠 계속 봤던, 어제는 잠시 합석하여 통성명한 기억이 나는 사내, 이름이 미쉘이라고 했던가? 티베탄 어머니와 프랑스계 아버지와의 혼혈이라는 주정뱅이 교사다.
"오늘도 지독한 안개다."
내가 악수를 청하자 그는 왼손을 내민다. 어제는 멀쩡했던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손 다쳤구나?"
"마누라가 의자를 던졌다. 그걸 막다가 다쳤다. 몹시 아프다. 뼈가 부러졌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어떤 마누라기에 그토록 사나운지 묻고 싶지만 참는다. 마누라 얘기가 나오면 피차 우울해질 테니까.
"술 마시면 안 좋을 텐데."
"하지만 너무 아파. 이 진통제만으로는 효과가 없어."
미쉘은 주머니에서 진통제가 든 조그만 약병을 꺼내 보인다. 서너 알 밖에 안 남았다.
"현명하지 못하다. 진통제와 술을 같이 먹으면 심장에 무리를 준다."
"걱정 마라. 난 칵테일 브러드다. 특별한 인간이지."
"칵테일 브러드라니?"
"어제 말했잖아. 내 혈관에는 티베탄의 피와 유럽인의 피가 섞여 흐른다고."
미쉘은 술에 찌들어 망가지긴 했지만 잘난 사내다. 자세히 보면 체형이나 얼굴 윤곽이 배우 록허드슨을 닮았다. 그는 소주 비슷한 맑은 액체가 찰랑이는 비닐 팩 모서리를 담뱃불로 지져 조그만 구멍을 뚫고는 컵에 짜 넣는다. 맥주 컵으로 한 컵 가득 찬다.
"그래, 한국 친구 넌 뭘 마시겠냐?"
"그게 뭔지 모르지만 너와 같은 걸로 하겠다."
"좋은 생각이다. 헬로 매덤, 여기 이거 한 봉지 더 줘요. 김, 이건 말이 소주지 사실은 공업용 에칠 알코올이다. 45도 짜리야. 락시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 락시에는 농약을 타지만 이건 이 자체가 농약에 버금가는 독성이 있거든. 두어 팩만 마셔도 헬리콥터가 뜨는 거야. 너무 떠서 내일 아침엔 골치가 좀 아프겠지만......."
빈 컵에 비닐 팩을 우겨 넣어 들고 온 주모는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시큰둥하게 묻는다.
"이 술값은 누가 내는 거야?"
미쉘이 자기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게 말한다.
"김, 이건 내가 사겠다."
"아냐, 내 술은 내가 낸다. 넌 네 꺼만 내."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더니 미쉘은 좀 멋쩍은 표정이다.
나는 미쉘 같은 주정뱅이들을 많이 겪어보았다. 그들은 자기가 술값을 낼 것처럼 떠벌리며 기분을 내다가 결국은 무책임하게 취해버리기 일수다. 그래서 이런 사내와는 엄격하게 선을 그어 놓고 마시는 것이 현명하다. 물론 나 자신을 너무 풀어지지 않게 단속하는 효과도 있다.
나는 비닐 팩 끝을 이빨로 찢은 후 컵 가득 짜 넣는다. 미쉘 못지 않은 술꾼인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잔인한 사내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 사납게 생긴 송곳니를 보여 주는 것이다. 미쉘이 그런 내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음을 나는 안 보아도 안다.
"자, 네 마누라를 위해 건배하자."
"그래 내 마누라를 위해서. 그리고 내 손을 위해서."
술잔을 입에 대자 이마가 지끈할 정도로 역한 알코올 냄새가 풍긴다. 나는 한 모금만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데 미쉘은 목울대를 몇 번 꿀꺽 이는가 싶더니 빈 잔을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아픈 손을 겨드랑이에 넣고 찡그린다.
"많이 아프냐?"
"염려 마라. 곧 괜찮아질 꺼다. 진통제를 한 알만 더 먹으면."
미쉘은 아픈 손을 겨드랑이에 낀 채로 왼손을 사용해 약병에서 빨간색 알약을 탁자에 덜어내 집어먹고는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꿀꺽꿀꺽 물을 받아 마신다. 미쉘은 고통스럽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애써 미소지으며 묻는다.
"참, 너는 몇 살이냐. 그리고 직업은 뭐냐?"
"알아 맞춰 봐라."
"글쎄, 아리송하다. 동양인은 알기가 쉽지 않다."
미쉘은 새삼스럽게 나의 이모저모를 뜯어본다. 그러는 사이 나는 내가 늘 마련해 가지고 다니는 몇 가지 직업과 나이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고른다.
"나는 말이야, 지금은 그냥 떠돌이 주정뱅이지만 전에는 직업군인이었어. 스무살 때, 그러니까 1971년에는 월남전에도 참전했었다."
"1971년에 월남이라......그럼 네가 몇 살이란 말이냐?"
"나는 1951년 생이다. 올해 마흔 다섯 살이지. 믿어지냐?"
"맙소사.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너한테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사람을 죽여봤냐? 월남전에서."
"그건 괴로운 질문이다. 나는 다만 내가 쏜 총을 맞고 죽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늘 하늘에다 대고 쐈으니까. 망할 놈의 하느님 궁둥이를 향해서 말이다."
"으하하, 김. 넌 볼수록 재미있는 인간이다. 잘 만났다."
미쉘은 붕대 감은 손을 겨드랑이에서 빼 내 손을 잡으려고 내민다.
"손 안 아프냐?"
"이제 안 아프다. 약발이 받나 보다. 하지만 악수를 하는 건 안 좋겠지. 한 잔 더 하자."
"좋다."
"너도 군대에 갔었냐?"
"아니, 난 네 나이 때 이미 캘커타에서 멋진 사업을 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줄줄 따랐지. 내 오토바이 꽁무니에는 날마다 다른 여자들이 매달려 다녔어. 그때가 내 황금 시대였어. 술도 오리지널 잉글랜드 위스키 아니면 안 마셨거든."
"교사라 더니? 어제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그 사업이 망했거든. 그래서 할 수 없이 교사 노릇을 시작한 거야."
"어떤 학교냐?"
"기숙사 시설이 있는 학교인데 영어로 수업을 한다. 9학년까지 있어. 내 아버지가 설립한 학교야. 형이 교장이고 나는 교감인 셈이지."
"교감? 교감이 이런 노동자들 속에서 혼자 마시고 있다니 믿을 수 없다."
"그렇겠지. 하지만 이해하게 될 꺼다. 학교는 지난 3년 간 폐교 됐었어. 그러다가 닷새 전에 다시 열었는데 어제까지 학생이 모두 몇 명 왔는지 알아? 겨우 2명 왔어. 10년 전 내가 캘커타에서 돌아왔을 때는 120명이나 있었는데 말야......너에게 내 학교를 보여주고 싶다. 원한다면 지금 가도 좋아. 나는 학교에서 산다."
"네 그 무서운 마누라도 같이?"
"그래, 하지만 오늘 아침에 친정으로 갔다. 며칠 있어야 올 꺼다."
"형은?"
"형은 형네 집에 있어. 형네 집이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의 집이지. 방이 모두 스무 개나 되는 진짜 집이지. 헌데 내게는 방을 안 줘. 난 학교를 지키라는 거야."
"학교에 술 있냐?"
"글쎄...아니, 없어. 어제 끝냈어."
"어쨌든 일어나자. 네 학교에 가보자."
내가 컵에 남은 술을 마시고 일어서려 하자 미쉘이 붙든다. 아직 날이 훤하다는 것이다. 자기는 선생 신분이라 대낮에 술 취해서 거리에 나서는 것은 좀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형에게 들어가면 따귀를 맞는다며 좀 더 마시다가 어두워지면 나가자고 한다.
미쉘은 고기 만두와 비닐 팩 소주를 두 개 더 시킨다. 주인 여자는 더 이상 누가 돈을 낼 것인지 묻지 않는다. 나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 녀석은 왠지 밉지 않다. 나도 미쉘처럼 컵에 따른 팩 소주를 단숨에 마신다. 오늘따라 술을 마실수록 정신이 말똥말똥해 진다. 그러나 이런 날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취기가 갑자기 올라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미쉘, 하나 물어보자. 왜 네 아내가 너에게 의자를 던진 거냐?"
"나는 다만 밥 달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망할 년이 갑자기 의자를 집어 던졌다. 그러구 나서 뭐라구 소리질렀는지 아냐?"
"뭐라구 했는데?"
"나는 네 하인이 아니다라고 소리 질렀어. 그리고는 부엌 물건들을 다 집어 던지고 넘어트리더니 식칼을 들었어."
"그래서?"
"도망쳤지 뭐. 한번 발작하면 우리형도 못 말려."
"......"
미쉘의 아내는 내 아내와 비슷하다. 그것은 미쉘과 내가 똑같이 주정뱅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약하고, 우유부단하고, 끈질기지 못하고, 현실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피하려는 성격. 그래서 날마다 술로 세월을 보내는 주정뱅이들의 아내들은 결국 악만 남는 것인가.
미쉘의 아내가 '나는 네 하인이 아니다'라고 절규했듯이 내 아내는 '밥 먹고 똥만 싸냐'며 화장실 문을 걷어찼었다. 그 전까지는 기껏해야 '남자 돈 못 버는 놈은 여자 못 생긴 것과 똑같다'정도의 욕을 했던 그녀가 마침내 '밥 먹고 똥만 싸냐'면서 남편을 화장실에서 끌어내 현관 밖으로 밀어낸 후 '나가서 뒈져 이 못난 놈아'라고 소리질렀던 것이다.
아파트 전체가 무너져 내릴 듯 큰 소리를 내며 닫힌 현관문을 뒤로하고 나는 뒷산 약수터에 갔었다. 거기 약수터의 평상에 신문지 쓰고 누워있자니 눈물이 흘렀다. 그렇다. 난 참 잘못 살았다.
"미쉘, 마누라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자. 술맛이 떨어진다."
"맞다. 미안하다. 하지만 네가 먼저 물었다."
나는 안개가 스멀거리는 문 밖을 내다보며 담배를 피운다. 미쉘도 잠시 아무 말이 없다. 우리는 모두 마누라 이야기가 드리운 암울한 그림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거다. 지지리도 못난 놈들......
희뿌연 안개를 몰고 한 떼의 술꾼들이 들어서서 앉을 자리를 찾는다. 주막집 주인 여자가 우리를 쳐다본다. 그만 마시고 가라는 뜻이다. 나는 담배를 밟아 끄고 일어선다. 미쉘도 말없이 일어서서 왼손으로 자신의 주머니들을 뒤지며 돈 찾는 시늉을 한다. 그러다 손수건이 나오자 콧물을 닦으며 말한다.
"네가 좀 찾아봐 다오. 어느 주머니에 넣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히 1백 루피 짜리가 한 장 있을 거다. 1백 루피면 내 술 값으로는 충분하다."
나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는다. 미쉘의 1백 루피는 주머니가 아니라 양말이나 허리춤에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쉘을 먼저 내보내고 술값을 치렀다. 우리가 마신 팩 소주는 모두 여섯 개, 나는 팩 소주 네 개를 더 사서 재킷 주머니 양쪽에 두 개씩 넣고 주막집을 나섰다.
안개는 서서히 가시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장거리에는 등불이 켜지고 있다. 미쉘은 어느새 전봇대를 안고 비틀거리며 소변을 본다.
-저 녀석을 저대로 두고 그냥 가버릴까, 학교까지 데려다 줄까. 만일 미쉘이 오줌을 다 누고 바지 자크를 제대로 올리면 데려다 주자.
미쉘이 바지 자크를 올리고 길을 건너 왔으므로 그의 팔짱을 끼고 광장을 향해 오른다. 몹시 숨차하는 미쉘의 빨갛고 뾰족한 코끝에서 콧물이 달랑거린다. 그는 이따금씩 손수건을 꺼내 콧물을 닦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을 하려고 애썼다.
"열다섯 살 때 말야, 우리 반 친구하구 가출을 했거든. 어딜 갔었는지 알아? 티벳으로 갔어. 그때는 차가 없어서 걸어서 갔다구. 여기서 칼림퐁까지 하루, 칼림퐁에서 갱톡까지 또 하루......넷째 날 밤엔가 국경을 넘었어. 6월이었는데 우린 무지무지하게 추웠어. 다행하게도 거기 라마승들의 절이 있더군. 짬바 가루를 뜨거운 차에 타서 마셨지. 이튿날에는 염소 고기를 먹고. 우린 그 절에서 한 달을 살았어."
"국경을 어떻게 넘었냐?"
"국경 초소가 있긴 했지만 그땐 별 문제가 안 됐어. 더구나 난 티벳말도 잘 했거든. 우리 어머니가 티벳 여자니까. 난 외가가 있는 시가체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절에서 라마승들이 하도 잘 해줘서 그냥 머물었던 거야. 외가에 가봤자 반겨줄 사람도 없었구 말야."
"하마터면 라마승이 될 뻔했구나?"
"그럼. 그럼. 그런데 우린 거기서 돈을 훔쳤어. 다질링으로 돌아올 여비를 만드느라구."
"안 들켰냐?"
"들켰지. 라마승들이 쫒아 왔어. 우린 붙들렸지. 그런데 말야, 겨우 그 돈 가지구 어딜 가냐며 돈을 더 주는 거야. 짬바 가루, 말린 염소 고기도 갖구왔더라니까. 내 참."
"참 착한 중들이다."
"다른 여행들은 다 잊고 싶어도 그 여행만은 잊고 싶지 않아. 생각만 해도 즐겁거든."
"같이 갔던 친구는 어떻게 됐냐?"
"몇 년 전에 나갈랜드에서 반정부군의 총을 맞아 죽었어. 그 지역 치안책임자였거든."
"안 됐다."
"나갈랜드는 아직도 치안부재 상태야. 아니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 내 형도 그쪽에서 사업을 하다가 그만 두고 작년에 돌아왔어. 그래서 다시 학교를 시작하는 거야."
광장에 오르자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씨킴 쪽 능선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미쉘은 벤치에 앉아 능선들을 향해 손가락을 뻗친다.
"저기 저 능선 너머가 칼림퐁이야. 좋은 데다. 타고르도 여름철이면 칼림퐁에 와서 쉬곤 했다. 내 어렸을 때 우리 집 하녀가 칼림퐁으로 시집 갔어. 난 요즘도 가끔 그 집에 놀러 가지. 네게 그 집도 보여 주고 싶다. 주말에 같이 가서 며칠 푹 쉬다 오자. 누나는 음식 솜씨가 좋아. 물론 술값도 여기보다 싸다."
남녀 서양 여행자들 서넛이 우리 앞을 지나간다. 그들은 'lonely planet' 출판사에서 나온 가이드 북 '인디아'를 손에 들었다. 미쉘이 그들에게 '굿 이브닝'하며 인사를 건넨다. 그들은 못들은 척 대꾸 없이 앞만 보고 간다. 미쉘이 그들을 향해 빈정거린다.
"과연 론리 프라넷(lonely planet)이군. 겁쟁이 책벌레들."
"무슨 뜻이냐?"
"예수쟁이들이 성경에 끌려 다니듯 '론리 플라넷'이라는 가이드북에 끌려 다니는 꼴이 우습지 않아? 저놈들 여행은 껍데기야, 알맹이가 없어. 어, 저기 또 론리 플라넷들이 오는군. 굿 이브닝 론리 플라넷. 헬로 굿 이브닝 론리 플라넷."
미쉘은 마침 또 지나가는 서양 여행자들을 향해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한다. 아무래도 말려야겠다.
"그만 둬 미쉘, 사람들이 쳐다 봐. 저길 봐. 폴리스도 너를 주시하고 있다."
"폴리스는 걱정 마. 경찰 서장이 우리 아버지 제자야. 게다가 난 이 도시에서 태어나 50년을 살았어. 김, 우리 한잔 더 하자. 집에 가기 전에 조금만 더 마시고 싶어. 근처에 좋은 곳이 있다."
"기다려봐. 내가 이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만."
나는 망설인다. 이쯤에서 저 놈과 작별해 버리는 게 어떨까. 하지만 미쉘은 왠지 끌리는 구석이 있는 놈이다. 저 주정뱅이 놈의 인생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광장 건너편 행상들이 좌판을 걷고 있다. 티베탄 마부들도 말을 끌고 집으로 돌아간다. 행인들은 아까보다 훨씬 뜸해졌다.
내가 담배를 발 밑에 던지자 미쉘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서서 앞장선다. 미쉘은 광장 동쪽 비탈에 있는 공중변소로 간다. 어둑하고 악취가 심한 변소 옆 공터에서 넝마와 종이를 태우며 몸을 녹이는 거지들 중에서 제일 늙은 거지가 미쉘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다. 미쉘도 늙은 거지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둘이 아주 잘 아는 사이 같다.
우리가 공동화장실 뒤로 들어서자 거기 판자로 지은 싸구려 선술집 서너 채가 나란히 있다. 아마도 이 선술집들은 이곳 다질링에서 가장 누추하고 저속한 선술집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쉘이 나를 이런 곳으로 데려와 준 것이 싫지 않다. 미쉘은 내게 자신의 치부부터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게 주정뱅이의 자학이든 아니든......
미쉘이 맨 끝 집의 거적을 들추자 흐린 불빛이 퍼져 나온다. 불빛 속에서 자그만 여자의 얼굴이 나타난다.
"김, 이 숙녀가 바로 내 애인 스바나야. 어서 들어와."
이렇게 말하며 미쉘은 여자의 목을 왼팔로 감으려했으나 여자는 살짝 빠지며 안으로 모습을 감춘다. 그 뒤를 미쉘이 발정한 곰처럼 따라 들어간다. 안에서 여자의 숨죽인 목소리와 함께 실랑이를 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하다. 녀석 참. 어쨌든 끝장을 보자는 생각으로 나는 문 밖에 서서 잠시 기다려 준다.
잠시 후 '쪽'소리가 나더니 미쉘이 거적을 들추고 상체를 내밀고 조그만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김! 김! 아, 있었군. 미안, 미안. 깜빡 했어. 어서 들어와."
녀석은 술이 취했다 깼다 하는 모양이다. 흠뻑 먹여서 아예 쭉 뻗게 해 줄 테다.
실내는 어두컴컴하다. 맨 구석에 나무 침대와 조리대가 있고 긴 탁자와 긴 의자 두 개가 있다. 촛불이 탁자 끝에서 타고 있다. 여자는 스무 살 전후다. 교태스럽게 생겼다. 그러나 낯선 사람 때문에 일부러 무뚝뚝하게 구는 듯하다.
여자는 계란 후라이 두 접시와 락시 한 병, 그리고 컵 두 개를 탁자에 놓고 나무 침대에 걸터앉아 손거울을 드려다 본다. 미쉘이 컵에 술을 따른다. 아침에 다바 구릉이 말해준, 농약을 타서 독하게 만든다는 밀조주가 락시다. 하지만 미쉘에 의하면 이 락시가 아까 마신 팩 소주 보다 차라리 낫다. 팩 소주의 성분은 주정이 아니고 공업용 에칠 알코올이라고 했던가. 내 주머니에는 미쉘의 집에서 마시려고 사 넣은 팩 소주가 네 개나 들어 있다. 만일 이걸 모두 단숨에 들이키면 죽을 수도 있으리라. 나는 팩 소주를 하나만 주머니에서 꺼낸다.
"미쉘, 난 이걸 마실래."
"그건 우리 집에 가서 마시고 이거 마셔. 이 집 락시는 좋아. 농약을 안 타거든. 게다가 기장으로 만든 거야. 우선 맛만 봐. 넌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거야."
"좋아, 마시자. 마시고 개처럼 이 진창을 뒹굴자."
"김, 넌 역시 멋진 술꾼이다. 내가 첫눈에 알아 봤지."
"네 애인 스바나를 위해서 건배하자!"
"그래 스바나와 내가 개처럼 뒹굴기 위해서 건배!"
스바나는 남자들의 짓궂은 눈길이 싫다는 듯 벽을 향해 돌아앉는다.
미쉘의 말처럼 스바나네 락시는 다른 락시와 다르다. 정말 기장으로 만든 것 특유의 향미가 있다. 미쉘은 한 병 더 마시고 싶어했지만 나는 일어선다. 스바나가 미쉘을 향해 '50루피'라고 짧게 말한다. 나는 지갑을 뒤져 미쉘에게 50루피짜리 한 장을 주고 먼저 나온다.
미쉘은 잠시 남아 소곤거리는 듯하더니 아까처럼 '쪽' 소리를 내고 나와서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소곤댄다.
"스바나가 나더러 뭐랬는 줄 알아? 킬킬킬. 오늘 밤 늦게 혼자 오라는 군. 꼭 할 말이 있대."
"그래? 그럼 더 있다 와. 난 그냥 갈게."
"아냐, 아냐. 상관없어. 스바나는 오늘 그냥 사내가 그리울 뿐이야."
"추잡한 놈."
"뭐라구?"
"나 혼자 한 말이야. 상관 마."
"김, 너 지금 한국말로 욕했지?"
"상관 말래두."
짜식 욕하는 건 금방 알아듣는군......
공중 변소 앞에 이르자 미쉘은 오줌이 누고 싶다고 한다. 누라고 하니 심하게 비틀거리며 도와 달라고 한다. 미쉘은 성한 손을 공중변소의 벽에 기대고 다친 손의 팔을 내 어깨에 둘렀기 때문에 나는 미쉘의 바지 자크를 열고 그의 길쭉한 배뇨기를 찾아 꺼내 준다. 미쉘은 무척이나 오래 눈다. 누면서 말한다.
"김, 너 정말 직업 군인이었냐? 정말 월남전에 참전했었냐?"
"미쉘, 넌 정말 열다섯살 때 티벳으로 도망갔었냐?"
"너부터 말해."
"아니, 너부터."
"나중에 하는 거 어때?"
"좋은 생각이다."
미쉘은 변소 앞에서 북쪽으로 뻗은 골목길로 접어들더니 갑자기 어깨동무를 풀고 의젓하게 걸으려고 애쓴다. 미쉘은 골목 끝에 서있는 구라스 나무들 밑의 붉은 벽돌로 만든 이층 건물을 가리키며 '학교'라고 짧게 말한다.
이층 테라스의 난간에 전등불이 켜 있고 거기 'VINCENT MEMORIAL MISSION SCHOOL'이라고 쓴 금속판이 번쩍이고 있다. 물어보지 않아도 '빈센트'는 미쉘의 아버지 이름이리라. 미쉘은 자그만 학교 마당을 성큼성큼 건너가더니 현관 앞 신털이개 밑에서 큼직한 열쇠를 꺼낸다. 미쉘이 현관문을 열자 흰 고양이 한 마리가 달려 나와 마당을 가로지른다. 고양이가 사라진 마당에 달빛이 환하다. 키 큰 구라스 나무 가지 사이로 달이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