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고종 19년; 임오년) 음력 6월에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옛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이다. 1873년 이래 대궐에서 사용되는 비용은 끝이 없었다. 호조나 혜청에 저축해 온 것 모두가 바닥나 경관의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으며 5영 군사들도 자주 급식을 받지 못했다. 개화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5영을 파하고 2영으로 개편했는데 이때 쫓겨난 노약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무력으로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1]
10년간 월급이 체불되었고 나중에는 군대에서 쫓겨나게 되자 사람들의 분노와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고, 열악한 재정상황과 동시에 전임 선혜청 당상인 김보현, 당시 선혜청 당상인 민겸호, 선혜청 창고지기인 민겸호댁 하인의 착복과 축재 사실이 병사들에게 드러나면서 이들은 난을 일으키고, 급기야는 민겸호, 김보현, 흥인군까지 살해된다. 전란 초반에는 우발적이었으나, 조정이 민겸호 등을 옹호하면서 병사들의 감정은 격화되었고, 나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7월 19일(음력 6월 5일), 전라도 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되자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옛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혜청 고직(庫直)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 아니라 두량(斗量)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이에 격분한 무위영 군병들은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시비를 따지게 되었다. 민겸호의 하인인 군료 지급 담당자가 불손한 언동까지 하자 군병들은 격노하였다. 옛 훈련도감 포수(砲手)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 등을 선두로 한 군졸들은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營官)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때렸으며, 도봉소를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를 도봉소 사건(都捧所事件)이라 한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민겸호가 주동자 체포령을 내렸고, 곧 김춘영·유복만 등 4, 5명의 군인이 포도청에 잡혀갔다. 직후 그들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 중 2명이 곧 사형되리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3] 이 소문을 접한 군병들은 김장손(金長孫)·유춘만(柳春萬 : 유복만의 동생)을 필두로 투옥된 군병의 구명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통문을 작성하였다.
7월 22일(음력 6월 8일), 이최응이 별파진(別破陣)을 동원하여 폭동을 진압할 것을 국왕에게 건의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건에 가담한 군병들은 더욱 흥분하였으나, 일단 7월 23일(음력 6월 9일), 김장손과 유춘만을 선두로 한 무위영 군병들이 무위대장 이경하(李景夏)의 집에 가서 민겸호의 불법과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경하는 군료 관할의 권리가 없다는 것을 내세워 편지 한 통을 써주고 민겸호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하였다. 이 시점에서 이경하는 폭동을 일으킨 군인들의 직속 상관이었으나, 자신이 처리해야 할 문제를 회피해 버린 셈이다. 민겸호의 집 앞에서 군병들은 문제를 일으켰던 도봉소 고직을 발견하여 민겸호의 집안으로 난입하게 되었으나 민겸호와 고직은 찾지 못한 채 가재도구와 가옥을 모두 파괴했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군병들은 본격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민씨 정권의 보복을 예상한 김장손과 유춘만 등은 운현궁으로 달려갔다. 흥선대원군을 만난 그들은 사정을 설명하고 자신들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는 시아버지(흥선대원군)와 며느리(명성황후)의 갈등이 일개 군병까지도 그 사정을 다 알 정도로 심했음을 증명하기도 한 것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군민의 소요 사태에 대해 무위영 군졸 장순길(張順吉) 등에게 명하여 표면상으로는 효유선무하는 태도를 취하여 밀린 군료의 지급을 약속하며 해산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김장손과 유춘만 등을 불러 밀계(密啓)를 지령하고 심복인 허욱(許煜)을 군복으로 변장시켜 군민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대원군과 연결된 군민들은 좀 더 대담하고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하여 일부는 동별영(東別營)의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약탈하여 포도청에 난입한 후 김춘영·유복만 등을 구출하고 이어서 의금부를 습격하여 척사론자(斥邪論者)인 백낙관(白樂寬) 등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다른 일대는 경기감영을 습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나머지 일대는 강화유수(江華留守) 민태호를 비롯한 척신과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 파괴하였다.
그날 저녁에는 일본 공사관을 포위 습격하였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등 일본 공관원 전원은 인천으로 도피하였고, 공사관 건물은 불타버렸다. 또 한편의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 하도감(下都監)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공병 소위를 살해하고 일본 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하는 등 일본 공사관 습격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날의 폭동은 끝났다.
음력 6월 9일 경영군이 시끄러웠다. 1873년 이래 대궐에서 사용되는 비용은 끝이 없었다. 호조나 혜청에 저축해 온 것 모두가 바닥나 경관의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으며 5영 군사들도 자주 급식을 받지 못했다. 5영을 파하고 2영만 남겨두었는데 이때 쫓겨난 노약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무력으로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1] 이때까지 군사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않은 것이 6개월을 경과하였다. 때마침 호남 세선(세금을 받은 양곡을 실어 나르는 배) 수 척이 경창에 짐을 풀었는데 그는 그것으로 먼저 밀린 월급을 지급하라 지시했다.[1]
그러나 혜청 당상 민겸호 집안의 하인이 혜청 창고지기가 되어 지출을 담당했었다. 그 하인은 겨를 섞어서 미곡을 지급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는데 이것을 눈치 챈 사람들이 크게 노하여 그를 구타했다.[1] 그러자 민겸호는 주동자를 잡아서 포도청에 가두고는 죽이겠다고 하자 여러 군인들은 원통하고 분함을 참지 못해 칼을 빼어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1]
“ | 굶어죽는 것이나 법에 따라 처형당하는 것이나 죽는 것은 똑같다. 마땅히 죽일 놈은 죽여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겠다.[1] | ” |
이들은 날을 정해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여서 크게 외친 후 곧바로 민겸호의 집을 점령했다. 그의 집 창고에는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4]
“ | 1전이라도 집어가는 자는 죽인다.[4] | ” |
폭도로 변신한 군인들은 그런 후 빼앗은 재물들을 마당에 한꺼번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4] 기름을 끼얹자 재물들은 활활 타올랐고, 성난 병사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민겸호는 미리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자신도 숨었다가 도피하였다.
매천 황현의 목격담에 의하면 '비단, 주옥, 패물들이 타 불꽃에서는 오색이 나타났고, 인삼, 녹용, 사향노루가 타면서 나오는 향기는 수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4]'라고 진술하였다. 민겸호는 담장을 넘어 도망쳐 대궐에 숨었다.[4]
7월 25일(음력 6월 10일)은 흥선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돈령부 영사 흥인군(興寅君) 이최응과 호군(護軍) 민창식(閔昌植)을 살해하고, 창덕궁 돈화문에 육박한 후 곧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궐내로 난입하였다. 난군들은 궐내 도처에 흩어져 명성황후와 척신들을 수색하던 중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을 발견하여 살해하고 계속 명성황후의 행방을 찾았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 홍계훈(洪啓薰)의 도움으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군민들의 난동을 조정에서는 민겸호의 보고에 의해 단순한 도봉소의 군료분쟁으로 생각했으나 척신들의 집들이 습격·파괴되고 군민이 대거 폭동에 참가하게 되자 무위대장 이경하를 동별영에 보내어 진무시켰으나 실패하였다. 뒤늦게 조정은 사태의 책임자를 문책하여 선혜청 당상 민겸호, 도봉소 당상 심순택(沈舜澤), 무위대장 이경하, 장어대장 신정희(申正熙) 등을 파직시키고 무위대장 후임으로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李載冕)을 임명하였다(그러나 이미 민겸호는 살해된 뒤였다). 일단 이렇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상호군 조영하(趙寧夏)의 제안에 따라 별기군 영병관 윤웅렬(尹雄烈, 윤치호의 아버지)을 통해 일본공사 앞으로 서한을 보내어 군변사실을 통고하고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이미 공관원 전원은 인천으로 탈주한 뒤였다.
사건의 와중에 민겸호는 강압적으로 진압시키려다 실패하고 다시 피신한다. 그러나 피신하던 중 민겸호는 한성부 도심에서 난병에 붙잡혔다. 결국 민겸호는 전임 선혜청 당상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보현(金輔鉉)과 함께 포승줄에 묶여 궁중에 끌려갔다가 중희당(重熙堂) 아래에서 난병에 의해 칼로 살해되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하면서 흥선대원군을 쳐다보며,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말하였다.[5] 그는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밑에서 그를 죽이고 총칼로 시체를 난도질했다. 또 "중궁은 어디 있느냐"며 소리쳐 언사가 좋지 않았고, 처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5]
임오군란이 터지자 김보현은 경기 감영에 있다가 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예궐을 서둘러 승정원에 들렸다.[6] 조카 김영덕이 승지로 입직하던 중이었는데 가지 못하게 말렸다.[6]
오늘의 사변을 알지 못하고 들어가시렵니까?[6]
그러자 김보현은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나오면서 말했다.[6]
내가 재상의 위치를 갖추었도 또 직책까지 맡고 있는데, 국가에 변이 생기면 비록 죽는다고 해서 회피하면 되겠느냐?[6]
그런 뒤 입궐하려다가 돌층계에서 맞아서 죽었다.[6] 흥선대원군을 보자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으나 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를 외면하였다. 입궐 직전 김보현은 당일부로 경기도관찰사에서 해임되고 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난민들이 궐내로 진입을 하게 되자 국왕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대원군의 입시를 명하였고 이에 따라 대원군은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와 장자 이재면을 대동하고 입궐하였는데 이때 허욱의 지휘하에 구 훈국병(舊 訓局兵) 200명이 대원군을 호위하였다. 대원군은 사태수습의 책임을 맡고, 왕명으로 사실상의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곧이어 국왕의 자책교지(自責敎旨)가 반포되어 군변의 정당성이 합리화되었고,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군인들을 무마하여 사태수습에 나섰다.
우선 군병의 요청에 따라 무위영·장어영과 별기군을 혁파하고 5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으며,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혁파하고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하였다. 또한 군병들에 대해 군료의 지급을 공약하고 척족의 제거를 위한 인사조치를 단행하여 이재면으로 하여금 훈련대장,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을 겸임하게 하여 군사력과 재무 권력을 장악하게 하고 중앙의 각 부서와 지방의 관찰사 등 수령들에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였다.
흥선대원군이 기용한 인물은 대개 남인 계열의 노정치가들이며 인재의 보충을 위해 투옥되었거나 정배당한 죄수들을 석방시키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한편 일부 군인들이 명성황후의 처단을 주장하고 해산을 거부하자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실종을 사망으로 단정하고 명성황후상(喪)을 공포하였다.
한편 명성황후의 국상을 강제 진행함에 따라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실권은 단축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청나라는 종주국으로서 속방(屬邦)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마침 임오군란 당일인 7월 24일(음력 6월 10일) 지방으로 도망갔던 명성황후와 그 일족이 개화파 관료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을 청나라로 보내 청나라에게 원조를 요청한 것(음력 6월 19일)을 핑계로, 음력 6월 27일에 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육군 4,500명이 육로로, 8월 20일(음력 7월 7일) 청나라 해군 제독 오장경(吳長慶)이 정여창(丁汝昌), 김윤식을 대동하여 남양만으로 상륙해 조선에 진주하였다.
오장경은 8월 25일(음력 7월 12일) 흥선대원군을 병영으로 초청하였다가 군란 선동의 배후자라 하여 톈진(天津)으로 납치한다. 대원군 납치 후 다시 민씨 정권이 부활하였고, 청군은 8월 29일(음력 7월 16일)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를 공격하여 170여 명을 체포하고 11명을 사형시키는 등 군란 진압에 나섰다.
한편 일본에 도착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병력 차이로 인해 대항하지는 못했다. 이때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 공사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 병력이 서울로 진주한 것은 음력 6월 29일이었다. 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조선측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책임을 물어 조선과 일본 간에는 8월 30일 (음력 7월 17일)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민겸호는 난병들에 의해 총칼로 시체를 난도질했다.[5] 난병들은 또 김보현의 시체를 발로 차고 입을 찢어 옆전을 집어넣고 총의 개머리판으로 마구 쑤셔 넣자 돈이 가슴으로 튀어나왔다고 한다.[6] 그의 시체는 민겸호의 시체와 함께 한성부 궁궐 개천에 버려졌다.[6] 그때 큰 비가 내려서 물에 개천이 가득찼으며 날씨까지 흐리고 더웠다.[6] 매천 황현에 의하면 '이런 시기에 시체가 개천에 수일 동안 버려져 있었는데 살이 물에 불려서 하얗고 흐느적거렸는데, 고기를 썰허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 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고 한다.[6]'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자들의 말로라며 조롱했고, 어린아이들 조차 시신들을 쳐다보며 비웃었다. 시신은 한참 뒤에 수습되었다.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개입을 확대시키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대가로 청나라의 숱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 또 일본과는 8월 30일 (음력 7월 17일) 임오군란의 뒤처리로 손해배상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함으로써 자주권을 더욱 잃게 되었다.
청나라는 이후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한다. 곧, 원세개(袁世凱)가 지휘하는 군대를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건상(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여하였다. 또, 조선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경제적 침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이 후원한 갑신정변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청일전쟁 때까지 청나라의 독주를 지켜봐야 했다.
2006년 7월 1일, 명성황후의 피란 행적이 적힌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가 발견되었다.
피란 당시 명성황후를 호종한 누군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일기에는 1882년 음력 6월 13일부터 1882년 음력 8월 1일까지 51일간의 기록이 담겨있는데, 명성황후의 숙소와 일정, 건강 상태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중 청군이 서울에 입성한 음력 7월 16일의 기록에는 '명성황후가 사람을 시켜 경성에 붙은 방문을 베껴오도록 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이는 명성황후가 청에 연락을 취해 개입을 유도했다는 기존의 학설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현재 이 자료는 대전광역시 한밭도서관 대전광역시향토사료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2008년 12월 2일 은진 송씨 제월당가 기탁유물 특별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민간에 공개되었다.
출전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