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는 없다?
2000년대 초 연구소 초창기, 당시 내가 B형 간염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어느 신자로부터 건강에 좋은 교육이라며 ‘아바타’라는 코스를 소개받았다. 평소 신망도 있던 분이고 또 설명도 그럴 듯하여 나는 고비용의 교육비를 감수하면서까지 냉큼 접수하였다. 교육은 여러 강사들에 의해 이론과 실습을 번갈아가며 이루어졌는데, 내용이 깊어질수록 좀 교묘한 방향으로 흘렀다. 거기에는 기성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은근한 부정이 숨겨져 있었다. 그 요지는 이랬다.
“기성종교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에게 죄의식만 조장한다. 본래 ‘선’도 없고 ‘악’도 없다. 그러니 ‘죄’도 없다. 없는 것을 종교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놨다. 그래야 종교인들이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선’이 있다면 그냥 자기 본능대로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선이요, ‘악’이 있다면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거나 않는 것’이 악이다. 이것이 왜곡되니까 불행해 지고, 건강도 잃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종교에 속지 말고 ‘자기 뜻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교육과정이 뉴에이지 계열(아마도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서는 일단 ‘사이비 영성’이라고만 언급해 둔다)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체험을 계기로 나는 내친김에 뉴에이지의 실체를 탐구하였다. 그 결과 그 이론적 기초로서 심리학의 창시자 프로이드의 이론이 원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프로이드는 많은 환자를 상담한 결과 질병, 특히 정신 질환의 주요 원인이 ‘죄의식’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죄의식이 인간의 ‘원초 본능’(id 또는 libido)과 ‘초자아’(super ego)의 갈등에서 생긴다고 봤다. 그가 말하는 초자아는 전통, 관습, 종교 등이다. 인간의 본능이 이런 것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때 죄의식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의식을 벗어나는 것이 살길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초자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프로이드는 결론 내렸다. 요컨대, 종교(전통, 관습)가 사람에게 죄의식을 자아내기 때문에 아예 종교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이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대목이다. 다른 게 아니라 “죄는 없다”는 주장들이 학문과 힐링 프로그램을 통해 두루 퍼지고 있다는 사실! 이는 더 이상 한낱 시도요 추세가 아니다. 이미 문화화 되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판공 시즌이 되어 마음먹고 자녀들에게 고해성사를 권했다가 괜히 다음과 같이 된서리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게까지 들린다.
“엄마는 맨날 옛날 십계명 구닥다리 갖다가 나 보러 자꾸 죄 지었다고 하고, 숨도 못 쉬게 만들어. 이게 뭐 죄라고. 십계명은 그때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던 거지, 이 시대에 이게 무슨 죄야? 다들 자기 식으로 맘대로 사는데, 왜 나만 갑갑하게 살아야 되냐구?”
과연 이런 항변에 우리는 무슨 신통한 말을 줄 수 있을까?
■ 죄에 대한 변론
사실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전통적으로 ‘죄의식’ 에 대한 저항감 내지 부담감을 소재로 한 성찰은 풍요롭게 있어왔다. 그 일례로, 앤드류 마리아가 쓴 「지혜의 발자취」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탄은 지옥 회의를 소집해서 악마들에게 연간 보고를 하도록 요구했다. 그가 악마들에게 일렀다.
“너희 공적을 알고 싶다. 공이 가장 큰 악마에겐 상을 내리겠다.”
악마 1호가 일어나 말했다. “사탄 마왕님,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육욕의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녀석들 타락하고 말았지요.”
악마 2호가 일어나 말했다.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오만의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녀석들 생명을 잃고 말았지요.”
악마 3호가 일어나 말했다.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탐욕의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고통을 겪더군요.”
마지막으로 악마 4호가 일어나 말했다. “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죄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잘했다. 악마들에겐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업적이니라. 인간들에게 죄 같은 건 아예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 말 이다.”
이 예화의 요지는 명쾌하다.“죄는 없다”고 하는 주장 자체가 사탄의 유혹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이미 그 꾐에 넘어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다소 해학스런 이 이야기로 “죄는 없다”는 주장에 종지부가 찍혔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보다 논리적인 해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죄’라는 말뜻 자체에 “죄는 있다”는 진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의미로 ‘죄’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타(hata)와 그리스어 하마르티아(hamartia)는 본래 ‘과녁’을 벗어난 상태, 곧 어떤 기준을 비껴간 상태를 뜻한다. 사람들은 당연히 하느님 또는 계명을 그 기준으로 보아, 이를 ‘거스르는’ 행위를 죄라고 일컬었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말할 때, 하느님이 존재하는 한 ‘죄’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는 한자 풀이로도 가능해 진다. 한자로 죄(罪)는 씨줄과 날줄로 이루어진 그물(四)의 벼리(綱)가 ‘아닌 것’(非)을 의미한다. 여기서 벼리(綱)는 천륜(天倫)과 인륜(人倫)을 뜻한다. 강상죄인(綱常罪人), 즉 ‘삼강오륜을 범한 죄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천륜과 인륜에 어긋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죄’의 성립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척도가 되는 하느님의 존재 여부, 그리고 천륜과 인륜의 보편타당성 여부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죄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계명(천륜과 인륜)이 보편타당하다면 죄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들을 거스르는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존재하신다. 부인하는 이들도 적지는 않지만 인류의 절대 다수가 이를 믿어 왔다. 또한 양심, 계율, 천륜과 인륜 등을 동서고금의 사람들이 인정해 왔다. 오늘날 비교종교학의 연구 결과는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죄는 있다.
■ 거스름과 자유의 문제
방금 (절대)기준을 거스르는 것이 (절대적)죄임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 거스름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지다. 따라서 죄의 문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자유의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 본디, 인간의 자유는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이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창세 2,16) 하고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창세 2,17) 하고 ‘조건’이 따라왔다.
여기서 잠깐! 이를 두고 이렇게 반문하는 이도 있다. “그 선악과는 왜 만들었냐! 그것만 안 만들었으면 죄도 안 짓는 건데, 그러니까 그건 하느님 책임이다! 그거 만드는 바람에 우리가 요 모양 요 꼴이 된 거 아니냐?”
그런데 이 ‘조건’에 대해서 우리는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딱 주시고 나서, 그 자유의지에 적어도 합의된 선이 필요했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창조주고, 너희는 피조물이다. 딴 건 몰라도 요 관계만은, 뒤집지 마라” 하고 만드신 것이 선악과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무리 가깝고 민주적이라 하더라도 자녀가 ‘부모의 자리를 넘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인간으로 머물자는 것이 선악과의 취지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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