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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월 28일 화요일
[(백)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가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한 성인은 삼 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1-10
형제 여러분, 1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만 지니고 있을 뿐
바로 그 실체의 모습은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2 만일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예배하는 이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아
제물을 바치는 일도 중단되지 않았겠습니까?
3 그러한 제물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될 뿐입니다.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지혜 7,7-10.15-16)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 기적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마와 치유의 기원에 악이, 그것도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속성과 구원의 업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 그럴듯하면 그 거짓말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 확신하게 됩니다. 그들이 매우 똑똑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똑똑한 이들도 예외가 되지 않는 ‘거짓말의 신비’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거짓된 이해와 비난이 가족과 친척들조차 장악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그들은 그분에 대하여 들은 것만 가지고 예수님더러 미쳤다고, 마귀가 들렸다고 단정 지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혈연관계라고 해서 죄와 악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고 주님 교회의 일원이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죄악이 저절로 피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거짓과 죄악의 덫에 걸려 비참해진 것을 알고 하느님 자비를 향하여 두 손을 뻗을 수 있을 때, 그리고 용서와 사랑, 구원과 치유를 베푸시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응답하며 걸어갈 때 우리는 빛 안에서 거듭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4).(김동희 모세 신부님)
성모님을 폄하하는 말씀이 아니라 성모님을 극찬하고 칭송하는 예수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 여정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과 기여를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존재, 그분의 탁월한 신앙과 동정성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모님의 동정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는 복음 구절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마르 3,32)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다음 성모님께서는 이제 내 역할은 다 끝났다, 큰 짐 덜었다, 이제는 편안하고 여유 있는 노년을 보내야지, 사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의 안테나는 오로지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습니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몸은 건강할까? 식사는 제때 하고 있을까? 무슨 도움이라도 되어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렇게 노심초사하면서 지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모님에게 걱정스런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나름 시국을 주름답던 주류 세력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대사제들과 맞서서 날선 대화를 주고받는데,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논쟁을 거듭하니, 저러다 제 명대로 못 살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운 성모님께서는 날이 새자마자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성모님 일행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찾아오셨다고.
위 표현에 따라 성모님의 동정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신이 나서 외쳤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 외에도 적어도 아들 2명, 딸 2명을 슬하에 두었다.’ 성모님의 동정성은 허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정통 교부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님 시대 형제, 자매라는 용어는 협의적으로도 사용되었지만, 광의(廣義)적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동일한 부모에게서 출생한 자녀들도 형제 자매라고 불렀지만, 사촌, 팔촌 등 친척들에게도 형제, 자매라고 칭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온 형제들과 누이들은 성모님의 친 자녀들이 아니라 사촌이나 오촌 형제자매들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4-35)는 예수님의 말씀은 걱정이 되어 찾아가신 성모님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억울하고 큰 상처가 될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이 대목을 묵상하다보니,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위 말씀은 성모님을 힘들게 하신 말씀, 성모님을 무시하는 말씀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신앙인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은 성모님을 가장 극찬하고 칭송하는 말씀이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버려야 진짜 나의 삶이 시작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혈육의 관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자유로운 어른’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부모나 가족의 뜻에 휘둘리면 아직 독립한 어른은 아닙니다.
가끔 주위에서 아이들이 가출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왜 아이들이 가출할까요? 어떤 아이는 엄마, 아빠 없는 곳에서 잠시라도 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의 뜻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독립하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가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빚진 게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상 가출해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는 생각에 행복할 수 없고, 자존심 때문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면 나쁜 길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니얼 페리는 웰튼 아카데미의 밝고 열정적인 학생으로, 새로 부임한 교사 존 키팅의 영향 아래 연기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발견합니다. 셰익스피어 공연에 대한 니얼의 열정은 엄격하고 성공을 중시하는 아버지 페리 씨의 기대와 극명히 대비됩니다. 무대 위에서 느끼는 기쁨과, 훗날 의대 진학을 포함해 제대로 된 ”미래를 준비하라는 아버지의 강압 사이에서 갈등하는 니얼은 자기 주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합니다.
니얼이 학교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중요한 역을 맡게 된 순간, 그는 마침내 인생의 목적을 찾았다고 느끼며 벅찬 행복감에 사로잡힙니다. 여기에 힘을 실어준 인물이 오늘을 살고 꿈을 찾으라는 키팅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를 알게 되자 즉시 연극을 그만두고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명령합니다. 니얼은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연극에서 찾은 자유를 놓치기 싫어 갈등하며, 결국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키팅 선생님이 “오늘을 잡아라(Carpe Diem)”라고 격려하지만, 니얼은 아버지의 요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몰래 공연을 강행합니다.
공연이 대성공을 거둔 직후, 페리 씨는 니얼을 나무라며 웰튼 아카데미에서 퇴학시키고 군사학교로 보내겠다고 위협합니다. 깊은 상실감과 압박감에 사로잡힌 니얼은 아버지의 기대와 자신의 꿈을 결코 조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또다시 아버지와 맞설 용기를 내지 못한 그는 파멸적 절망감에 굴복하고,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그의 나약함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에 맞서지 못한 데 있었기에, 그 결말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니얼이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키팅 선생이 아버지를 대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아버지가 주는 것만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른이 되려면 부모보다 더 많이 주는 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로운 어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에릭 리델은 1902년 중국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의 삶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 직접 체험했습니다. 성장하면서 교육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뛰어난 달리기 재능을 발견했고, 곧 ‘나는 스코틀랜드인(The Flying Scotsma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육상계에서 명성을 얻었음에도, 그는 모든 재능이 하느님께서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라 믿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 자격을 얻었을 때, 그가 가장 자신 있던 종목인 100m 경기가 주일(主日)에 열릴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일을 오로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지켜야 한다는 그의 신앙적 확신과 충돌했고, 가족은 물론 영국 대표팀 관계자들도 그에게 종목 포기를 말리고 출전하라고 강하게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여겨, 결국 가장 잘 뛰는 100m가 아닌 400m에 나가 예상을 뒤엎고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에릭 리델을 비난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나를 지으신 하느님께서는 내가 달릴 때 기뻐하심을 보신다.”라고 고백하며,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 기쁨과 위로를 나누었습니다.
올림픽 후에는 세상적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선교사로 지내며, 현지인들과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일본군의 억류 캠프에 갇히는 시련을 겪었을 때에도 함께 수용된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지내며 서로를 돌보았습니다.
1945년 뇌출혈로 사망하기까지, 에릭 리델은 언제나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기대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따랐으며, 같은 뜻을 품은 이들에게 영적인 형제이자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만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는 복음적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난 이들과 사귀어야만 진정한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들이 됩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아직은 모기처럼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친구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을 만나지 진정한 하느님 가족의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관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만이 우리를 독립된 어른으로 만들고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행복해질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말합시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 성당은 48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2년 후면 50년이 됩니다. 교우들은 지금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성당을 기억합니다. 처음 시작은 다운타운에 있는 성당이었다고 합니다. 그성당의 이름을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시내 중심가에 있어서 주차에 어려움이 있었고, 교우들이 늘어나면서 성당 신축과 이전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교우들은 신축하기 전에 임시 성전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 성당의 이름을 ‘창고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창고 성당에서 지내는 동안 지금의 본당을 신축하였고, 본당 설립 40주년이 되는 2017년에 지금의 성당이 완공되었습니다. 성당 신축 과정에서 모든 교우가 마음을 모았습니다. 성당의 건물은 다르지만, 성당의 이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같습니다. 우리는 다운타운 성당이나, 창고 성당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새로운 성당이 우리에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율법과 계명으로 이어지는 신앙을 다시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34년 사제 생활하면서 많은 곳에 있었습니다. 성당은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 적성, 시흥5동에 있었습니다. 많은 추억과 기억이 있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있었고, 고독과 위로도 있었습니다. 교구청에서도 있었습니다. 사목국, 청소년국, 성소국에 있었습니다. 교우들과의 만남보다는 교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제들과의 갈등과 연대가 있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영신 수련’을 공부했습니다. 어느덧 20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공부했던 영신 수련은 제 사제 생활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뉴욕에서는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일했습니다. 뉴욕에서 코로나 팬데믹을 겪었습니다. 신문사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5년의 임기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동북부 ME와 꾸르실료를 맡았습니다. 모든 일에 열정적인 봉사자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작년 2월에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왔습니다. 이곳에서 임기를 마치면 더 이상 새로운 사목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저는 이제 제가 사목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겁니다. 사제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참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겁니다.
예전에 집안 어르신들이 이렇게 이야길 하셨습니다. ‘사제가 될 사람은 이제 집안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사제가 되면 말씀도 높여서 해 주셨습니다. 사제가 하는 일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을 축성하기 때문입니다. 강론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독신을 통해서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고 사목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순명을 통해서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34년간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참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찾았습니다. 신자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외로운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나에게 줄 것이 있는 사람을 형제처럼 대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형제처럼 대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내가 신세를 진 사람을 형제처럼 대하는 것 또한 사람의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가장 굶주리고, 헐벗고, 아픈 사람을 형제처럼 대하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들 또한 형제처럼 대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십니다. 달라스 성당에서는 새 신자 환영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선물도 드리고, 새로 오신 분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식사합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 타 주에서 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고, 같은 신앙을 가졌기에 모두 가족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낯선 곳에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신앙을 가진 분들의 따뜻한 환대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는 모두 같은 형제’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신분 : 신부, 신학자, 교회학자
활동연도 : 1224/1225-1274년
같은이름 : 도마, 아퀴노, 토마스아퀴나스, 토머스
이탈리아 로마(Rome)와 나폴리(Napoli)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Roccasecca) 가족성(城)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퀴노의 백작 란둘프(Landulph)와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불과 다섯 살의 나이로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고, 1239년경에는 그의 교육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나폴리 대학교를 다녔으며, 1244년에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이때 가족들은 그를 강제로 데려다가 15개월 동안이나 로카세카 성에 감금시킨 적도 있었다.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1245년에 다시 수도회로 돌아갈 수 있었고, 1245년부터 3년 동안을 파리(Paris)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프랑스 파리와 독일 쾰른(Koln)에서 성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1월 15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125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250년과 1551년 사이의 어느 때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성 토마스의 스승이었던 성 대 알베르투스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없는 황소는 그의 울부짖음으로 전 세계를 가득 채울 것이다."
그 후 그는 주로 나폴리(Napoli), 아나니(Anagni), 오르비에토(Orvieto), 로마(Roma) 그리고 비테르보(Viterbo)에서 가르쳤으며, 1259-1264년 사이에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Summa Contra Gentiles)을 마무리 지으면서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의 집필에 착수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1269년에는 수도사제와 교구사제간의 논쟁에 말려들었고,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의 시게르(Siger)와 요한 페캄(John Pecham) 그리고 파리의 주교 에티엔느 탕피에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리옹(Lyon) 공의회에 참석하여 동방과 서방 교회의 재일치 가능성을 토의하라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1월 10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리옹으로 가는 도중 테라치나 교외 포사 누오바(Fossa Nuova)에 있는 시토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7일 선종하였다. 1369년 1월 28일 툴루즈(Toulouse)로 그의 유해가 옮겨졌고 그때부터 이날을 성인의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는 1323년 7월 21일에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교황 비오 5세(Pius V)에 의하여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1880년에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에게 붙여진 칭호는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 또는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이다.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에서 모든 신학생들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주요 사상은 곧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자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징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이다.
그의 미완성의 대작인 "신학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들여질 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지적 능력 외에도 아퀴나스는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환시, 탈혼 그리고 계시를 체험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성무일도를 집필했고,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많은 찬미가도 지었다. 또한 그는 주님의 기도(Pater Noster),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 그리고 성서 일부에 대한 주해서를 썼다. 한마디로 그는 지성과 성덕의 금자탑이었다.
빛과 인도를 구하는 기도문
형언할 수 없는 창조주 하느님,
당신께서는 넘치는 지혜로
천사의 세 품을 만드셨고,
하늘의 놀라운 질서를 마련하셨으며,
우주 만물을 각자의 품위대로 배치하셨나이다.
당신께서는 빛과 지혜의 원천이시고
모든 것의 시작이라 불리십니다.
당신의 찬란한 빛으로
저의 지성의 어둠을 밝히시어
타고난 죄와 무지의 두 암흑을 몰아내 주소서.
당신께서는 어린이들의 입에서도
찬양을 자아내시니,
제 혀가 당신의 지혜를 말하고,
제 입술이 당신 축복의
은총을 쏟아내게 하소서.
이해의 명석함을,
보유할 수 있는 역량을,
배움의 방법과 수월함을,
해석에서는 정확함을,
말을 할 때는 충만한 은총을 주소서.
당신 영의 감도로 시작하게 하시고,
도중에 저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며,
마칠 때 완성하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을
주님이시고 사람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는
천주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도
빛과 인도를 구하는
성 토마스의 기도문에서
빛과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
당신의 밝은 빛으로
저의 어두움을 비추시어
제가 지닌 죄와 무지를
없이 하소서.
말할 때는 풍부함을,
해석할 땐 정확함을,
배움은 수월한 방법을,
잊지 않는 능력으로
뛰어난 이해력을 주소서.
저의 모든 시작이
당신의 영으로 있게 하시고
모든 과정의 발걸음을 인도하시어
완전한 마침을 허락하여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설교자회 로사리오 성모 수도원 (수련소)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 사랑 길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 아멘.
성 베드로 놀라스코(Peter Nolasco)
신분 : 설립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1189-1258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 베드로 놀라스코(Petrus Nolasco)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 태생으로 15세 때에 부친과 사별하면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 후 그는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로 가서 막대한 그의 재산을 무어인들에게 포로로 잡힌 그리스도인들의 석방 대속금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는 어떤 환시를 보고, 그 지시에 따라 그리스도인 노예 해방을 위한 수도회 설립을 결정하였다.
그는 성 라이문두스(Raymundus, 1월 7일)의 도움으로 '속량의 성모회'(메르체다리오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도회는 아라곤(Aragun)의 왕 야고보의 지지와 더불어 1235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회원들은 노예 석방을 위한 일은 무엇이든 하였다.
그런 과감한 행동을 하던 성 베드로도 한때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1628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664년 보편교회에서 그의 축일을 기념하도록 선포되었다.
성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Joseph Freinademetz)
활동년도 : 1852-1908년
신분 : 신부, 선교사
지역 : 중국(China)
같은 이름 :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프라이나데메쯔, 호세
성 요셉 프라이나데메츠(Josephus Freinademetz, 福若瑟)는 1852년 4월 15일 오스트리아와 접한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맥의 다섯 가구만 사는 작은 마을인 오이에스(Oies)에서 조반마티아(Giovanmattia)와 안나 마리아 프라이나데메츠(Anna Maria Freinademetz)의 12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남부 티롤(South Tyrol)로 알려진 이 지방은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Austro-Hungarian) 제국의 영토였다. 그는 태어난 날 세례성사를 받고 가족으로부터 단순하지만 독실한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는 브레사노네(Bressanone, 브릭센 Brixen)의 교구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해외 선교사로서 일생을 살아갈 것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1875년 7월 25일 사제품을 받고 고향 인근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공동체로 발령을 받은 그는 곧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살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서품 받은 지 2년째 되던 해에 말씀의 선교 수도회 (Societas Verbi Divini, 신언회)의 모태가 된 ‘성 미카엘 선교 신학교’를 설립한 성 아놀드 얀센(Arnold Jansen, 1월 15일) 신부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
그는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1878년 8월 네덜란드의 슈타일(Steyl)에 있는 성 미카엘 선교 신학교에 들어갔다.
1879년 3월 2일 그는 선교사 십자가를 받고 말씀의 선교 수도회 소속 요한 밥티스타 안제르(Joannes Baptista Anzer) 신부와 함께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5주간의 항해 후 그들은 홍콩(Hong Kong)에 도착해서 2년간 머물며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1881년 그들은 1,200만 명의 인구에 겨우 158명의 신자들이 살고 있는 산둥성(山東省) 남부의 새로운 선교지로 선교 여정을 떠났다.
이는 오랜 시간을 걸리는 힘겨운 여정으로 강도들의 습격을 받으면서도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하나의 공동체가 겨우 형성되었을 때 주교의 훈령이 도착해 그들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특별히 첫 복음화를 위한 교리교사와 같은 헌신적인 평신도들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그는 교리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온 힘을 쏟으며 중국인을 위한 교리교육 책자를 준비하였다.
동시에 주교가 된 안제르와 함께 중국인 사제와 다른 선교사들의 영성적 형성과 지속적인 교육을 준비하는데 온 힘을 쏟아 부었다. 그의 전 생애는 중국인들 안에서 중국인이 되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중국과 중국인을 사랑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죽기를 원하며 그들 가운데 묻혀 안식을 누리고 싶습니다.”
1898년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신부는 후두염을 앓았고, 고된 작업과 다른 많은 힘든 일의 결과로 결핵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주교와 다른 사제들의 권유에 의해 건강을 회복할 희망을 안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서 얼마간의 건강을 회복한 후 그는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완쾌된 것은 아니었다. 1907년 안제르 주교가 유럽에 다녀오기 위해 중국을 떠났을 때 그는 교구의 행정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 기간 중에 심각한 장티푸스 전염병이 발발했는데, 착한 목자인 그는 자신이 감염될 때까지 많은 공동체를 방문하며 지칠 줄 모르는 도움을 제공했다. 결국 그는 주교좌가 있는 산둥의 타이키아(Taikia)로 돌아와서 1908년 1월 28일 눈을 감았다.
그는 선종한 후 십자가의 길 제12처에 묻혔고, 그의 무덤은 곧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순례지가 되었다.
성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신부는 어떻게 하면 중국 문화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깊이 사랑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배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복음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중국인 신앙 공동체들을 양성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화하였다. 그는 활기에 넘친 공동체들이 스스로를 개방해 지역 주민들과 연대하도록 하였고, 중국인 신자들 스스로 교리교사 · 수도자 · 사제로서 자기 민족을 위한 선교사가 되도록 고무하였다. 그의 생애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는 사랑입니다.”라는 그의 모토로 표현될 수 있다.
그는 1975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3년 10월 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아놀드 얀센과 아프리카의 사도인 다니엘 콤보니(Daniel Comboni, 10월 10일) 주교와 함께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복자 안토니오 (Anthony)
활동년도 : 1355-1450년
신분 : 수사
지역 : 아만돌라(Amandola)
같은 이름 :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당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이탈리아의 마르케(Marche) 지방 아만돌라(또는 아스콜리피체노, Ascoli Piceno)에서 태어나 톨렌티노(Tolentino)의 성 니콜라우스(Nicolaus, 9월 10일)의 삶과 설교를 본받고자 톨렌티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자신의 삶의 귀감인 성 니콜라우스를 따르고자 노력하였고, 그의 무덤을 중심으로 일대를 성역화하고 순례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안토니우스는 특히 인내심이 뛰어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으며, 그의 전구로 이루어진 기적들이 수없이 보고되어 있을 정도로 덕이 높았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59년에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