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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심판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마태 12,38-42)
At the judgment,
the men of Nineveh
will arise with this generation
and condemn it,
because they repented
at the preaching of Jonah;
and there is something
greater than Jonah here.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고발하신다. 이 고발은 판결문을 불러 주는 재판관의 행동이 아니라, 상대방과 송사를 놓고 다투는 계약 당사자의 행동이시다. 이스라엘이 계약을 위반하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계약을 파기한 백성에게 무엇을 요구하시지는 않고, 다만 참다운 예배, 공정의 실천, 신의를 사랑하기만을 바라신다(제1독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메시아 입증의 기적을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신다. 어떤 기적도 그들의 신앙을 일깨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유일한 표지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다. 요나가 선포한 참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
오늘의 묵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이나 욕망에만 집착하여 충족시키려 듭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예수님을 메시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개탄해 마지않으십니다. ☆☆☆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 몇몇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긴가민가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표징은 기적입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기적을 보여 주신다면 스승님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 우리는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어떤 기적을 일으켜 주시길 청할 때가 많습니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참회를 촉구한 예언자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그의 예언자적인 경고를 듣고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 참회 행렬에 동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배려해 주시지만, 우리는 세속적인 이기심과 허영심에 빠져 그분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신 우리는 자신과 세상의 죄를 갚고자 더욱 희생하고 보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그분께서 마련하신 부활의 삶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요나의 표징’ 말고는 보여 줄 게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는 예언자의 소명을 받지만 귀찮아하며 달아나지요. 그러한 그를 주님께서는 풍랑을 일으키시어 큰 물고기를 시켜 삼키게 하십니다. 요나는 그제야 뉘우치고 소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요나를 모를 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요나처럼 어정쩡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적은 온몸을 던졌을 때 주어지는 은총이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표징은 이미 주어져 있다. 요나의 기적 이야기를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기적이 신앙인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기대를 겁니다. 기적을 보면 믿음이 확고해지고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아무리 기적을 보더라도 뿌리가 내리지 않으면 순간적 믿음으로 끝납니다. 중요한 것은 평소의 신앙생활입니다. 믿는 눈으로 바라보면,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아이들의 건강한 웃음소리를 듣는, 이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인받고 싶은 까닭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까닭입니다. 어떤 일본 신자가 “하느님, 저에게는 기적을 보이시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충분히 주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앙입니까? 우리가 세심하게 관찰하면 우리는 날마다 기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수많은 질병과 악들 가운데 오늘 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때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실 자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의학적 지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수억 대 일의 경쟁을 거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우리 가까이에서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표징을 굳이 보지 않고도 - 나명옥 신부-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은 과연 기적을 보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을까요 ?
그들은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떠보기 위한 잔꾀와 술수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서는 증오심과 적대감으로 굳어진 고정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놀라운 표징을 보여준다 해도 예수님께 대한 신앙심이 생겨 날 리 만무합니다. 이 점을 아시고 주님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나의 기적은 바로 말씀만 듣고도, 표징을 굳이 보지 않고도 하느님을 믿고 마음과 태도를 바꾼 모든 니네베 사람들의 진정한 회개입니다.
진정한 신앙과 이성은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성이나 지성만을 가지고 신앙심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신앙이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만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신앙만이 가능하게 합니다. 보아야 믿는다는 과학을 넘어설 때 믿음의 궁극적 목적과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늘을 보며 살아가는 존재인 우리는 나를 창조하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께 되돌아갈 때 가장 순수하고 영적인 상태에 머물게 되고 그때 새로운 눈이 열리며 주변의 모든 것이 경이와 감사로 가득한 기적임을 비로소 깨닫는 참 믿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 저는 우리 성당 주일 학교 선생님들 MT에 함께 했습니다. 강원도 홍천에서의 1박 2일간의 일정이었지요. 비록 본당 미사 때문에 주일 새벽에 혼자서 돌아와야 했지만, 오랜만에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혼자서 운전을 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인상 깊은 일을 하나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 가장 큰 기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허영업 신부-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예전에는 기적이란 인간의 이성이나 자연 과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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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학교 선생님들의 숙소를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길가에서 차를 기다리는 어떤 할머니 한 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 시골길이라서 그냥 지나가면 마냥 차를 기다리실 것 같더군요. 더군다나 그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차를 세워 할머니께 물었지요.
“할머니, 어디까지 가세요?”
할머니께서는 “대면 성당까지만 태워 주시겠어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마 주일미사 참석을 위해서 길을 나서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할머니께서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크게 이야기해도 “뭐라고?”만 외치실 뿐이었지요. 따라서 초행길인 제가 대면 성당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물어 물어 대면성당이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글쎄 차로 가도 2~30분 되는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께서는 주일 미사 참석을 위해서 매번 2시간을 걸어서 가는데 오늘은 마침 저를 만나서 이렇게 편하게 간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이렇게 제게 축복의 말도 해주셨습니다.
“총각, 복 받을 거야.”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한 신앙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제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미사 참석자 수도 팍 줄지요. 또한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그 일이 먼저가 되고 주님의 일은 늘 뒷전이 됩니다. 즉, 주님의 일은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야 하겠다는, 그저 할 일 없을 때 덤으로 하는 일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달랐습니다. 그렇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일이 첫 번째 일이기에 성당까지 가는 길을 선택하신 것이었지요. 복을 받을 분은 제가 아니라, 할머니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늘 이런 식이었지요.
“예수,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확실한 것 하나 보여 달라!”
즉, 그들은 편한 신앙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주님께 다가가기 보다는 주님께서 먼저 내게 다가오기를 원하는 그러다보니 눈에 보이는 놀라운 기적만을 믿겠다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우리들도 이러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편안 신앙이 아닌,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내가 먼저 찾아가는 신앙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말합니다.
“오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편한 신앙만을 추구하지 맙시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불완전합니다.
기적은 신앙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한번 생각해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늘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기적의 현장을 체험했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이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심지어 왜 예수님을 떠났을까요?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적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도와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적 자체에 매달리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한 보증을 기적으로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내게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식 말입니다. 믿음이 없고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나도 믿음은커녕 오히려 혼란스럽게 될 뿐입니다.
기적은 믿음의 결과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1코린 1,22-2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바로 기적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때까지 멀쩡하던 저는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두렵고 초조해졌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아직 준비가 안 됐어.”라지요. 저는 준비가 안 된 정도가 아니라 준비할 마음도 먹지 않은 채 살았습니다. 죄는 늘 다른 사람 탓이고, 악행은 습관이 되어 나날이 되풀이되었습니다. 몇 분 사이에 ‘어쩌지?’ 하는 생각에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본색이 들통 날 메일도 지워야 하고, 저한테 사기를 치고 도망간 어느 인간에게 마지막 저주의 말도 들려주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백만 년은 된 것 같은 마지막 고해성사 이래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네 이놈, 우주 어디를 영원히 떠다녀라.” 하신대도 스스로가 ‘그래, 요렇게 될 줄 알았다.’라고 할 판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는 곳으로 그냥 사라지는 거라면 그나마 낫겠다는 마음에, 이 나이에 쉽게 갈 길이 아니지 않느냐는 볼멘 심사가 섞였습니다. 한 번이라도 그 모습을 보이시거나 소리를 내어 “나 여기 있다.” 하셨으면 진즉에 정신을 차렸을 텐데, 하는 마음에 억울하기까지 했습니다.
분주하던 응급실이 좀 조용해진 틈에 살짝 졸고 있자니, 의사 한 사람이 다가와서 여전히 불규칙한 바이탈 사인을 지켜보고는 잠시 제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고는 들릴락말락 몇 마디 웅얼거리더니 사라졌습니다. 그의 손에서 얼핏 묵주반지를 보았습니다. 얼마가 남았는지 모를 누군가의 생명을 위해, 아니 그의 죽음을 위해 기도하는 손이었습니다.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이 누추한 지상 삶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사람들의 기도가, 그들의 손길이 바로 하느님의 작디작은 표징이 아닌가, 하는 작은 깨달음이 가슴을 채웠습니다. 그래도 그때뿐 좀 살 만해지면 다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로 변하는 저를 오늘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단단히 꾸짖으십니다. 꼭 버선목을 뒤집듯이 보여줘야 알겠느냐고 말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원초적 자유> 저희 청소년 캠프장이 있는 관계로 태안엘 자주 가는 편입니다. 갈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기적이 따로 없습니다. 물론 아직도 보상 문제 등 산적한 문제가 남아있지만, 몇 달 전을 생각하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초스피드’ 복구를 위한 지역주민들의 눈물겨운 노력,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땀이 이루어낸 기적입니다. 피서객들이 주로 찾는 해수욕장들은 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떤 곳은 집중적인 청소로 오히려 전보다 훨씬 깨끗해졌습니다. 이번 여름, 부디 태안으로 많이 와주시기바랍니다. 태안 주민들이 받았던 충격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태안 주민들의 그 오랜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태안 주민들의 고통에 함께 하는 마음으로 많이 와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어제도 한 작은 해변에 나갔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입고 있는 옷이 다 젖을 것 같아 얼른 옷을 벗어 큰 바위 밑에 넣어두었습니다. 어디까지 벗어야하나 고민하다가, 주변을 한번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며 ‘홀라당’ 다 벗었습니다. 그리고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온몸위로 굵은 빗방울의 감촉을 느끼며 정말 특별한 수영을 했습니다. 이런 것도 범법행위가 되어 출국금지 조치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수영복이라도 하나 걸치는 것과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것, 그 차이가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습니다. ‘원초적 자유’ ‘대자유’란 말이 실감났습니다. 잠시나마 모든 부담과 짐으로부터 훨훨 날아오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한 마디로 지금 즉시 자신들 눈앞에서 기적을 한번 해보라는 요청입니다. 예수님을 갖고 놀고 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기적을 볼 수 있습니까? 어떤 방법으로 내 삶 안에 표징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어려운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내려놓음’입니다. 억압과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나는 완벽해야해!’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성공해야 해!’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되!’ ‘내가 설정해놓은 이 목표, 절대로 무너트릴 수 없어!’ ‘우리 아이는 꼭 이 길을 가야만 해!’ ‘내가 맡은 우리 반 아이들 중에 꼴통이란 있을 수 없어!’ 이런 무거운 부담감을 내려놓기 시작할 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기적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를 괴롭혔던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워질 때, 짐스럽기만 했던 일상이 기쁨의 원천으로 뒤바뀌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위선의 꺼풀을 벗겨버릴 때, 고통 자체였던 이웃들이 ‘사랑덩어리’까지는 되지 않겠지만 ‘견딜만한’ ‘봐줄만한’ 존재로 탈바꿈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 우리가 기대해야할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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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가장 완전한 하느님의 표징
-김찬선신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복음을 보면 이들이 끊임없이 주님께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찾아오는 이유가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믿기 위해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또 치유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 시비를 걸거나 시험하러 찾아오고, 그래서
주님과 논쟁을 벌이거나 꾸중을 듣고 돌아갑니다.
제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저 같으면
자기 동료들이 그렇게 꾸중을 듣고 창피 당하였다는 얘길 들으면
찾아가지 않을 텐데 또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무관하고 무관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온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조금 특이합니다.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주님께 어떤 표징을 요구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종신 서원을 앞두고 30일 피정을 할 때입니다.
저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너무 많은 외부활동을 하였습니다.
결핵환자들을 위한 일,
버스 안내양들을 위한 야학,
넝마주의자들을 위한 일 등을 아주 열정적으로 하였습니다.
일에 빠져서 공부도 기도도 소홀히 하였지요.
그러니 종신 서원을 앞두고 있는데도
저의 영적인 상태는 메마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 같이 무미건조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체험을 진짜 찐하게 하지 않으면
종신 서원을 포기하겠다는 마음으로 피정에 들어갔고, 그러기 위해
단식 피정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단식을 하니까 잠이 일찍 깨는 것이었습니다.
10여일이 지난 어느 날도 잠이 일찍 깨어 형광등 불을 켰는데
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 방의 형광등은 전에도 제멋대로였기에
머리맡에 초와 성냥을 늘 준비해놓고 있었는데
이날 성냥을 더듬어 찾아 불을 켜는 순간
악마적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느님 당신 계시다면, 그리고
저를 사랑하신다면
제가 성냥불을 켜는 순간 저 형광등이 동시에 들어오게 하십시오.”
그런데 그렇게 성냥불을 켜는 순간 정말 형광등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 너무나 놀라 꼼짝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
물이 사면에서 엄청난 압력으로 누르는 것과 같은
엄청난 압도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는 중에도
제 머리 속에서는 계속 이 생각, 저 생각이 끊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기적이다, 아니다.
기적이다, 우연이다.
기적이다, 내가 모르는 과학 현상일 뿐이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그런 상태로 있다가
해가 떴을 때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게 깨달음이 온 것은 그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저 해가 바로 기적, 하느님의 표징이 아닌가?
나는 왜 지금까지 해 뜨는 것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했는가?
내가 저 해를 만든 것도 아니고
인간 누가 만든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저 해가 하느님 표징이 되지 못하는가?
가만히 성찰해 보니
매일 뜬다고 거기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나의 불감증,
그것은 저의 완고함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아침기도를 하며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기도를 하면서도
완고한 마음 때문에 감각이 무디어져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나,
이 완고한 마음을 깨기 위해 특별한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똑 같은 마음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 하십니다.
자기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자기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회개,
이것이 어떤 기적보다도 기적이고,
이렇게 될 때 하느님의 널려있는 표징들을
우리는 만나게 된다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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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육체의 욕정을 이겨내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미카는 다른 예언자들처럼(이사 1,18; 3,13; 41,1)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과 소송을 하도록 요구한다. 하느님께서 몸소 피고가 되시고, 산과 언덕을 재판관으로 삼으시어 재판하도록 하신다(이사 1,2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 앞에서 할 말이 없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어 나라를 세우도록 하셨다.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함께 계시고 이끌어주셨다. 하느님은 그처럼 약속에 충실하시고 신실하신 하느님이시다.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께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
신실하신 하느님께 대한 보답으로 그들은 하느님께 합당한 예배를 올려야 마땅하다. 하느님께 올리는 합당한 예배는 정의를 실천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고,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제물을 봉헌하는 제사로서 하느님을 예배하려 하였을 따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마음 없이 봉헌하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당신의 모습대로 당신을 닮도록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정의와 공평, 사랑과 자유가 그것이다. 사람에게는 정의와 공평, 사랑과 자유에 대한 한없는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 그 목마름은 곧 하느님께 대한 목마름이기도 하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자신의 본모습인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목말라 한다. 사람이 하느님을 그리워함은 하느님 안에서만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이를 행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을 그리워하지만, 동시에 진흙으로 빚어졌기에 흙을 -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동물처럼 본능과 육에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동물처럼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 탐욕과 이기심이 세상 것에 집착하도록 하고,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가리고 흐리게 한다. 옳은 것을 행하고 그른 것을 피해야 함이 마땅하고, 이를 잘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한다. 이것이 육과 영혼을 동시에 지닌 인간의 갈등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뽑으신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을 수없이 체험했다.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이끄시고 구해주시는 하느님이심을 깊이 체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과 여러 차례 계약을 맺으면서 하느님께 충실하고 하느님의 법을 지키며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하느님의 법과 말씀을 따르지 못했다. 그것은 인간의 허약함과 부족함 때문이기도 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연약한 사정을 익히 아시고, 그 때마다 속죄의 제사를 봉헌함으로써 하느님과 다시금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셨다. 속죄의 제사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마음을 봉헌하지 않고 제물만 바침으로써 진정한 회개의 표시로 제사를 봉헌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이 없는 제사도 겉으로는 분명 제사임에 틀림없지만, 하느님께는 제사로 봉헌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제물을 가져가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받아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허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한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지만, 이를 빙자한 탐욕과 이기심을 받아주시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죄를 강하게 고발하며 회개를 촉구했던 것이다. 진정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도록 외쳤던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흙이며 먼지에 불과하다. 육신의 욕구인 탐욕과 이기심 역시 흙과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인 영혼은 하느님께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욕구에 굴복하지 말고, 그 욕구를 이겨내도록 하자.
“육체의 욕정을 채우려 하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스릅니다.”(갈라 5,16-17)라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에 따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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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신앙을 낳지 않는다.
-오남주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기적은 신앙을 낳지 않는다’란 제목으로 이 시간을 통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복음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어느날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 달라고 청을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구세주 하느님이심을 증명할 수 있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왜 이와 같은 요청을 했는지 두가지 내용으로 갈라 짐작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이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만일 주님께서 기적을 보여 주실 경우에는 예수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믿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둘째의 해석은 이들은 처음부터 주님에 대해 온갖 편견과 오만심으로 꽉 차서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청도 진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어떤 난처한 입장에 빠트리기 위한 잔꾀와 술수를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행태를 놓고 볼 때 둘째의 해석이 맞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이나 놀라운 행적을 몰라서 주님께 기적을 보여 달라고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내린다면 이들에게는 신앙심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쇠귀에 경읽기란 말이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서는 증오심과 적대감으로 굳어진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놀라운 기적 표징을 보여 준다 해도 예수님을 향한 신앙심이 생겨 날 리 만무합니다. 이 점을 꿰뚫어 보신 주님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 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는 하느님의 법과 가르침을 공부한 학자들이었습니다. 요사이 말로 하면 하느님에 관한 것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입니다. 또한 바리사이들 역시 학자 무리에 속하지는 않지만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엘리트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 증오심과 적대감을 가졌던 것은 진정한 신앙심이 아닌 인간적인 이성과 독선으로 포장된 종교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과 이성은 서로 반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성이나 지성만을 가지고 신앙심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마르코 12, 3에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과연 목숨까지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신앙이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만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신앙만이 가능토록 합니다.
현대 사회의 물질 만능주의와 과학기술을 절대화하는 맹신에 빠진 사람들에게 초자연적인 가치의 세계인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는 결코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비록 보이는 물질세계의 일부인 육신을 갖고 물질세계에서 살아가지만 최고의 가치와 근본은 영성적인 데에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순수해지고 영성적인 가치로 바뀔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원래 모습 대로 돌아갈 때입니다.
코헬렛 12, 7에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감은 나를 창조하고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감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주님께 표징, 즉 기적을 보여 주신다면 마치 주님을 믿을 것처럼 취한 언행은 신앙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신앙의 출발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께로 투신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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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기적은 나의 변화
- 조욱현 신부-
1고린 1,22-23에서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 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이라고 할만큼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파견된 자라고 할 때, 의례히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것이 진정으로 기적을 바래서가 아니라, 모함하여 없애버리려 하는 속셈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예언자는 죽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추종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절개 없는 자들’이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유대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사랑하시어 특별히 그들에게 당신의 권능과 말씀을 주시곤 하면서 마치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아가서에 있는 표현대로, “오, 아름다운 신부여!”하시며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들에게는 오로지 당신께 충실하고 다른 것에 한눈 팔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경우에 우상에 빠지고 사랑하는 남편과 같은 하느님을 배반하곤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나타낼 표적은 선지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없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경고를 듣고 하느님께로 돌아왔고,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하느님의 지혜가 어떠한지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전파한 소식보다 더 크고 기쁜 소식을 전했지만 그들은 보아야 할 마음의 눈을 가리고, 들어야 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서 보고 듣지를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즉, 더 큰 것을 보고서도, 다름 아닌 삶과 죽음의 실권자이시며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 그분을 따르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그들을 바로 니느웨 사람들과 시바의 여왕이 심판 날에 단죄할 것이라고 경고하시고 계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구원상황에 있어 어떠한 부족을 느끼기에 선뜻 그분을 따르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다.
언젠가 TV에서 몸이 아픈 아내와 다리가 안짱다리인 딸을 데리고 살아가는 구두수선공 아빠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이웃, 독거 노인들에게 봉사하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구두 수선하는 곳을 팔아 딸의 수술비를 마련하였으나 부족한 처지였다. 우리에게도 기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기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리고 나 자신의 영적인 삶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나의 인생의 삶의 전환점을 주는 기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기적을 아무리 찾는다 해도 중요한 것은 그 기적이 나에게 어떤 효과를 주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나 자신이 변화되는 기적이다.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기적이 우리 앞에 발생한다 하더라도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유대인들의 그 행위를 반복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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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 김종근 신부-
원고를 넘기기로 한 약속을 못 지키고 억지를 부려 다시 얻은 2차 마감일이 오늘이다. 담당 수녀님의 마음을 더이상 태우지 않으려고 모든 일을 중단하고 원고지 앞에서 몇 시간째 머리를 싸매고 있다. 늘 뒤로 미루는 나의 게으른 버릇을 언제쯤 고치나 한심해하는 것도 그 순간뿐이다. 오늘 복음을 가지고 한 시간 넘게 씨름하고 있는데 군종 신부인 본당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며칠 휴가를 가진다기에 제주도를 권하고 몇 가지 편리를 봐주었는데 휴가를 즐겁게 지내고 있어 고맙다는 전화였다.
내가 부제품을 앞두고 있을 때 신학교 재수생 신분인 그와는 본당 밥을 같이 먹으며 지냈다. 방학 때는 같이 보내는 시간이 가족들보다 더 많았다. 그때 내가 본 이 후배는 무척 게으르고 건방졌으며 게다가 공부도 그리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신학교 생활 1년 버티면 잘하는 거야’ 하고 내심 생각하면서 그가 신부가 된다면 기적이 될 거라며 다른 신학생들과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군대와 신학교 과정을 모두 끝내고 몇 년 전 사제가 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나고만 것이다. 게다가 내가 생각한 게으름은 그의 여유로움을 질투한 것이며, 건방지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그 단호함을 섭섭히 여긴 탓이었다. 지금도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기적은 멀리 있거나 아주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 생각의 틀을 조금만 바꾸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적을 만날 수 있다. 또 나의 구체적인 삶 안에는 기적의 가능성을 지닌 많은 일이 나의 눈에 띄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기적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하기야 늦깎이 신부가 되고, 외방선교사로 살아가는 나를 두고 내 친구들 역시도 못 믿을 일이라 고개 흔들거나 기적이라고들 이야기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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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기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 김경식 몬시뇰-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예수님께 “도대체 당신은 누구냐? 메시아라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라고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행적을 보고 믿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표징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아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자기들의 뜻에 따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예언자 요나의 기적”(39)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하느님을 뜻을 따르기 싫어서 엉뚱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삼 일 동안 바다 괴물의 뱃속에 갇혀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삼 일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살려 높이 들어올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표징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신다면 쉽게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꾀에 넘어가게 하십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 욕심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사고로 예수님을 알고자 하였다면, 예수께서 그동안 행하신 기적들은 메시아로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부터 먼저 생각하는 나쁜 버릇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가려졌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자기 척도, 자기 이익에서 벗어나 주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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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어떤 신부님께서 어느 날 식당에 들어갔다가 그곳 주인이 예전에 신학교 다니다가 나온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식당 주인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래요.
“신부님, 신학생 중에서 이 교회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면서 그만 두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직의 길을 포기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다양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성직의 길을 포기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바라보니 모든 것이 불만투성인 것이지요. 교회에 대한 불만, 사회에 대한 불만, 심지어 같이 공부하고 있는 동료 신학생과 교수 신부님께 대한 불만, 본당 신부님에 대한 불만 등등…….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수도자가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은인이 그를 찾아와서 아주 좋은 책이라고 하면서 얇은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었어요. 그는 그 책을 읽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 수도자가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뒤, 쥐들이 그 책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도자는 쥐를 쫓기 위해 고양이 한 마리를 키웠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고양이에게 먹일 우유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암소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는 많은 짐승을 혼자 돌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돌봐 줄 여자를 구했습니다. 이렇게 숲 속에서 2년 동안 지내는 동안, 커다란 집과 아내, 두 아기와 고양이와 암소들에게 둘러싸게 되었지요. 그러자 그는 그것들을 보살펴야만 했고, 그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수도자는 지난날 자신이 혼자 살 때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대신 아내와 아이들과 암소와 고양이들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요.
바로 책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책이라고 받은 책, 그래서 이 책을 지키겠다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것의 원인은 이렇게 간단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른 것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했고, 그러다보니 이 세상은 각종 핑계가 무성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깜짝 놀랄만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적해주십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놀랄만한 기적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아주 작은 것 하나도 기쁨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것이 가장 큰 기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 마음에 생깁니다.
나는 얼마나 기도하고 있나요? 핑계를 대고 있는 나, 불만을 던지고 있는 나……. 이는 곧 기도하지 않는 나의 모습입니다.
핑계와 불만을 던지려 할 때... 먼저 기도하십시오.
빠다킹신부
표징
- 여성국 신부-
요즘 여러 매체에 점 보는 광고가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과거보다 사회가 복잡다단해지고, 또 한동안 경기가 침체되어 살기가 어려워져서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여러 매체에서 무속의 시장 가치가 수 십 조 원에 이르고 있고, 이 시장이 점점 커져간다니 실로 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나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점을 봤다며 고해성사를 하시는 분들이 심심찮게 있고, 많은 교우분들이 점 보는 것에 대해서 묻곤 합니다.
그런 교우들을 대할 때마다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으면 점을 다 봤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점을 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점만 보지 않는다고 다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 신앙 곳곳에 기복적인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으니 말입니다. 점점 우리 사회는 하느님의 뜻과는 달리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복적인 점을 보고, 우리 신앙인마저도 신앙생활 안에 기복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 오늘 예수님의 탄식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참된 신앙을 유지해야겠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께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한다는 탄식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정원순 신부-
◆마르 8,11-12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표징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사실 예수께서는 믿음 없이 기적을 요구하면 냉정히 물리치시지만 믿음으로 구마나 치유를 빌면 들어주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대하기보다는 의심의 눈으로 대하기에 개탄하신 것이다. 예수께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체험이란 자신의 주관이 변하지 않는 어떤 태도를 유지하는 일로 본다면,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표징만을 쫓아다닐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표징이 없으면 믿음의 대상을 쉽게 떠날 것이 분명하다. 자고 일어나면 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믿음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히브 11,1.3에는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의 확증이며,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빠르고 급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믿음을 갖고 사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예수께 대한 변하지 않는 태도를 지니면서 사는 일은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도전이기 때문이다.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기쁜 얼굴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양승국신부-
제가 수사님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 교육시키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온 종일 아이들 사이에서 숨 가쁘게 움직여야 하는 활동수도자들입니다. 영성생활에서 특별한 그 무엇을 찾지 마십시오. 짜릿한 그 무엇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대신 매일 주어지는 일상적인 전례나 미사, 성무활동 안에 들어있는 보화를 찾으십시오. 미사 때 제발 졸지 마십시오. 금쪽같은 묵상시간 제발 허송세월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해서든 깨어있으십시오. 집중하십시오. 몰입하십시오. 몸과 마음, 눈과 귀, 외적인 태도 등 모든 기능을 총동원해서 미사에 푹 잠겨 드십시오. 미사의 동작 하나 하나, 전례의 표지 하나 하나, 경문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의미에 온 신경을 집중하십시오.
매일의 성체성사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이요, 표징 중의 표징입니다. 매일 되풀이되는 아침, 저녁기도는 우리를 순간순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가장 은혜로운 도구 중의 도구입니다.
매일의 미사, 그것보다 더 큰 은총은 없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되풀이되는 홍해의 기적을 체험해야 합니다.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로 건너가는 파스카 신비를 온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부디 타성에 젖은 얼굴로, 귀찮은 얼굴로, 짜증나는 얼굴로, 그저 주어진 의무이니 온다는 얼굴로 미사에 오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순간이니만큼 최대한 기쁜 얼굴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감사와 감동의 마음으로, 깨어있는 자세로 미사에 오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표징을 보여 달라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사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요나 예언자의 표징에 대해서는 수백, 수천 번도 더 들어온 바이므로 스토리를 너무나 잘 꿰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빤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요나 이야기(하느님의 부르심을 계속 거부하고 도망가다가 결국 고래 뱃속까지 들어가 보고 나서야 회개한),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멸망한 니네베사람들의 이야기를 언급하십니다.
하늘아래 벌어지는 모든 일들 사실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태도 역시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내리시고, 영원한 상급을 선물로 주십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이승에서도 고달프지만, 다른 세상에서 겪게 될 고초가 클 것입니다.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조상들의 역사와 하느님께서 자기 민족에게 베푸셨던 자비와 사랑, 진노와 벌을 생각하면 답은 너무나도 명확한 것입니다. 굳이 ‘이거다’하는 징표를 요구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와 니네베 사건을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영적생활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어둠과 슬픔, 나약함, 방종한 습관 등으로 인해 괴로울 때도 그 모든 감정들을 감추지 말고 솔직히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 우리가 믿는 바대로 우리를 짐스럽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 놓인다 하더라도, 또 어떤 좋지 않는 결과가 초래된다 할지라도, 오늘은 우리가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께 더 잘 봉사하도록 배려된 하루임을 잊지 마십시오.
-구경국 신부-
앤소니 드 맬로라는 신부님께서 적은 글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밤이 이슥할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이웃 사람 하나가 가로등 아래 쭈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열쇠를 잃어 버려 그것을 찾고 있다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 대답을 듣고 집으로 가던 그 사람도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같이 찾았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쭈그리고 앉아서 잃은 열쇠를 한참을 찾았지만 열쇠를 찾지 못하자 그 사람이 이웃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열쇠를 어디서 잃어 버리셨는데요?"
이웃 사람이 "가로등 저 쪽 어두운 데서 잃어버렸습니다"하고 대답했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서 찾고 있습니까?"하고 재차 물으니 이웃 사람이 대답하길: "여기가 더 밝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밝은 곳에서와는 무엇이든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어두운 곳에서 무엇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찾는 것도 역시 어두움 속에서 무엇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것보다는 쉬운 것을 선호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혼돈하여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어려운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나에게 쉽고 다가오고 좋게 보이는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진리인양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예수께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의 권능을 통하여 당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보여주심으로써 사람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로 믿도록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들 중의 한가지에 불과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어지러운 오늘의 세태를 반영이나 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기이한 현상들이나 환상들을 찾아다니는 행동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마치 그러한 행위 없이는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그러한 현상들로 인하여 하느님의 손길을 직접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자신의 신앙을 키워나가고 스스로의 생활태도를 조용히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계기로 삼기보다는 하느님께로부터 더욱 큰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직접 행하신 기적의 의미에도 맞지 않는 것일 뿐더러, 그 사람 개인의 신앙을 위해서 실로 염려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적으로 불릴 수 있는 현상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한 현상이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경우는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우리의 삶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기적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한다는 것은 결코 내가 초자연적인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제시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믿음에 근거를 두고 행한 나의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곤경에서 벗어나 주님의 거룩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은 믿음을 통하여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의 또 다른 형태로 이해될 수 있으며, 어쩌면 오늘날 더 많이 요구되어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형태의 기적일지도 모릅니다.
기적은 믿음을 굳건히 해주는 수단이며, 믿음이 굳건한 사람은 또 다시 이 믿음은 초인간적인 힘을 우리에게 주어 정상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수 있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신앙으로 인하여 나의 삶의 근본태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신앙과 사랑의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통하여 예수를 참으로 그리스도로,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참다운 경신례(敬神禮)
-이수철신부-
300년 역사도 못되는 미국이 위대한 것은
훌륭한, 존경받는 대통령들을 수두룩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70년대 인권 문제로 우리 박대통령과 아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독실한 침례교 신자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을 기억하실 겁니다.
얼마 전 결혼 50주년 금경축을 맞아
지미 카터가 부인에 대한 반성의 말이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결혼 초기, 해군 장교 시절
부인에게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했던 것을
퍽이나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바로 이 지미 카터가 대통령 취임 선서 시 택했던 성구가
오늘 미카 예언서 6,6-8절 말씀입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화려한 경신례나 전례가 아니라,
공정과 신의, 그리고 겸손의 삶이요, 이게 참다운 경신례 라는 것입니다.
어느 어른의 무심코 던진 말씀도 생각납니다.
“영성(靈性)에 앞서 삶의 기본부터, 예의부터 갖추라고 해라.”
말은, 잠시의 전례 행위는 쉽지만
일상의 삶에서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은 힘듭니다.
사실 이런 삶이 없을 때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불건전한 호기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을 향한 주님의 일침,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 같기도 합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 구나!”
정작 영적인 사람들 대부분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만족합니다.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고,
자신에 주어진 일을 피하지도 않고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예언자 요나보다 더 큰 분,
현자 솔로몬보다 더 큰 분,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바라며 섬기고 따릅니다.
오늘 하루도 공정과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걷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주님은 올바른 길을 걷는 이에게 당신의 구원을 보여 주십니다.
아멘.
-이석희 신부 -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어제 오늘의 상황은 아니지만 요사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더욱더 실감하는 현실입니다.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이 변화와 다양함은 더욱더 우리를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누구나 한번쯤 겪는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기적을 베푸시어 나의 미래와 현실에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미래가 불확실하고 나의 신앙이 미지근할 때 더욱더 강하게 다가오는 유혹입니다.
지난 1984년 신앙전래 200주년 행사가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습니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 하늘에서 십자가 모양이 생겼다고 해서 모두들 기적이 일어났다고 환호를 질렀던 상황이 기억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 이상한 일이 조금만 일어나도 찾아가 확인하고 맹신하는 일들이 가끔 있습니다. 마치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고정시켜버리고 쉽게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었고 그리 오래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의 신비는 외적인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말씀과 성체 안에서 더욱더 뚜렷이 드러나고 우리의 신앙을 오랫동안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사실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이 예수께 표징을 요구하였고 그러한 표징이 없으면 믿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청을 받을 때 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조를 모르는 이 세대를 한탄하시고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자렛을 방문했을 때 마을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고 기적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고 한탄스럽게 고향을 떠나가셨습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표징이지만 그 자체로는 올바른 신앙의 길로 들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순한 기적이 항상 인간의 편에서 이해되고 한정지어져 버리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적을 넘어서 새로운 신앙의 눈을 가지게 함이요, 기적의 은혜를 입은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이미 우리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새로운 기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 안에서 기적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 날을 맞이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생명의 시작이요. 기도할 수 있다면 무딘 나의 마음을 변화시킨 하느님의 기적이며 미사 성제를 통해서 감사와 구원의 은혜를 느낀다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입니다. 이러한 일상적이면서도 늘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신앙의 변화가 나의 삶을 이끄는 주님의 은혜로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 것이요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이미 머물러 있는 신앙의 신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조그만 물리적인 변화에 신앙의 촛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 머물러 있는 신앙의 신비에 눈을 열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우리는 참으로 심오한 기적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더 돈독히 만들어 줄 것이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 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사람
-박상대 신부-
오늘복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전에 ‘닐 기유메트’ 신부님께서 쓰신 ≪나와 함께 낙원에≫라는 책에 들어있는 “기적병”이라는 이야기를 먼저 들려 드릴까 한다. 거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메나헴은 항상 기적에 굶주려 있었다. 그가 어느 날부터 광야에 살면서 자기에게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설교를 하여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위대한 고행자 요한 세례자를 따라다닌 이유는 놀라운 기적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요한 세례자가 설교와 세례를 베푸는 것 외에 다른 기적을 일으키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메나헴은 그를 떠나 당시 한참 인기가 높아져 가고 있던 나자렛 출신인 예수의 문하로 들어갔다.
예수의 추종자가 된 메나헴의 첫 주간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일련의 기적들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병환자가 단번에 깨끗하여지고, 중풍병자가 일어나 누워있던 요를 걷어 통째로 매고 가며, 절름발이가 걷게 되고, 반벙어리가 다시 말을 하고 들으며, 수천의 군중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가 터질 만큼 먹고, 악령 들린 사람들이 말짱해지는 그런 기적을 자기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했고 예수께 박수를 보냈다. 메나헴도 신이 나서 우쭐거리고 있었다.
그 다음 주간에 예수는 더 놀랄 기적들을 보여주었다. 배를 삼키려드는 거센 풍랑을 호통 쳐 가라앉히는가 하면, 보이지도 않는 데서 병자를 원격치유하고, 급기야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는 것이었다. 메나헴의 하루하루는 너무 행복했다. 기적들 가운데 간간히 섞여 들려오는 예수의 가르침에는 아랑곳없이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한편의 영화가 되어 상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메나헴은 예수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 예수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자신을 증명하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그 때 메나헴은 이제야 기적의 최고절정을 보게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의 청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고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구약성서의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 달리 보여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제는 예수의 기적이 그의 눈에 시시하게 여겨졌고, 더 이상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보따리를 싸들고 더욱 더 짜릿하고 스펙터클한 기적을 찾아 떠나가는 메나헴을 우연히 만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라훔이었다. 라훔은 메나헴이 왜 예수를 떠나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어떤 기적도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일세.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자네의 마음일세. 자네 마음을 한번 변화시켜보게나!”하고 말이다. 라훔은 메나헴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보내고 말았다.
우리는 지난 주간 금요일과 토요일 복음을 통하여 마태오복음사가가 예수님께서 구약으로부터 이스라엘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강조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비단 마태오뿐 아니라 다른 복음사가들도 예수님의 “메시아-신학”을 단번에 보도하지 않고 복음전체를 통하여 점층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은 세 가지 측면에서 주의 깊게 고찰되어야 한다.
① 첫째는 예수님 스스로의 메시아에 대한 자의식(自意識)이다. 하느님 편에서 볼 때 말씀이신 성자는 육화(肉化) 사건으로 말미암아 즉시 이 세상의 메시아로 계시된다. 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메시아성은 인간 예수의 자의식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성숙, 즉 ‘되어 가는 것’이다.
② 둘째는 복음사가들의 편집사적 노력이다. 예수님을 더 이상 물리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신약성서 시대에 예수의 목격자인 사도들과 그들의 증언을 기록한 복음서는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복음사가들은 저마다 고유한 편집의도를 가지고 “메시아-신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구상은 대략 “나자렛 출신 예수 -> 선생, 랍비 -> 위대한 선생 -> 예언자 -> 대예언자 -> 메시아 -> 그리스도” 라는 도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결국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를 메시아요 그리스도로 피력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말이다.
③ 셋째는 예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이는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인지에 대한 인간의 수용여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내심 가득 찬 메시아적 자의식으로 군중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메시아적인 업적을 보이며, 또 복음사가들이 위에서 말한 편집의도를 가지고 청자(聽者)와 독자(讀者)들을 유인한다 하더라도 마지막 결정은 인간 스스로가 내린다. 이 결정에는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그들 고유의 메시아 관(觀), 또는 메시아 상(象)도 함께 작용한다. 그래서 복음서는 예수께 대한 인간의 다양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태도는 마지막에 가서 수용(accept)과 거부(reject), 나아가 신앙(belief)과 불신(unbelief)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세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한다면 오늘 복음은 쉽게 이해된다. 사람들이 예수께 ‘자신을 메시아로 증명할 수 있는 기적’을 요구한 것은 예수를 메시아로 수용(受容)하고 신앙(信仰)하기 이전에 그에 합당한 자료를 요구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구약성서 시절에 있었던 요나의 기적(요나 3장)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나의 기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요나의 설교를 듣고 죄악에 빠져있던 니느웨 사람들 모두가 회개하였다는 것이다. 즉 기적이 아니라 오직 설교만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고 자신들을 내적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외적인 기적은 결코 믿음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진정한 기적은 바로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누구도 종용할 수 없는 나 자신 스스로의 변화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전정 예수님을 주님이요 메시아로 믿고 고백할 수 있으며, 이 믿음이 가져오는 엄청난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