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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3:17,18) 예정 구원이 가장 공평하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12)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7,18)
믿지 않고 죽은 부모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존경을 받는 니고데모가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무래도 자신이 하나님께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없어서, 바꿔 말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한 족속으로서 그분께 많은 이적으로 은혜를 입었고 거룩한 율법을 수여받은 유대인이라면 함부로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의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영원한 언약 백성이라는 징표로 할례를 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구원에 대해서 의심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들의 민족적 자부심은 물론 정체성까지 무너트리는 이단아가 됩니다.
그럼에도 유대 공회원이자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잘 지켰던 니고데모가 그런 갈급함을 가졌다면 많은 사람이 그와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복수 주어를 사용해서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기처럼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또 있다는 뜻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틀에 박힌 비난이 두려워서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어쨌든 니고데모가 혼자서라도 유대 주류 사회가 이단시하며 배척했던 예수님과 그 문제를 의논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며 그만큼 그에겐 절실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구원에 대한 확신보다는 갈증만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주님은 한마디로 밝혀주었습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영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현재의 그가 비록 율법을 잘 지키며 선행을 많이 해도 영이 거듭나지 않았기에 아무리 해도 영적으로 갈급하고 허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로선 생전 처음 듣는 가르침으로 면담 내내 그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을 것이지만, 주님으로선 절대적인 진리인 데다 얼마 후에 니고데모도 성령을 받으면 깨달을 것이므로 일단 곧바로 그렇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당신을 믿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주님의 이어지는 가르침도 그로선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므로, 너의 영적인 고뇌를 해소시키려면 다른 방안을 찾지 말고 단순히 당신을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사렛 출신의 인간 랍비 예수가 바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거나 그분과 동격임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로선 혹을 떼러 왔다가 하나 더 붙인 꼴이 되어버렸는데, 성령을 받기 전이고 신약성경도 완비되지 않아서 틀림없이 더 혼란스러워졌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신구약 성경 66권이 정경으로 완비된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가 이런 면담을 해야 하는 니고데모처럼 곤혹스러운 심정으로 예수님을 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구원 진리가 어려워서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한다면 성경을 계속 더 깊이 배우고 성령의 거듭나게 해주는 역사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정작 문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잘 믿고 있는 신자 가운데도 끝내 풀지 못하는 큰 숙제가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성령의 역사로 예수를 믿게 되어서 너무나 다행이고 감사하지만, 아직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적인 부담감과 책임감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불신자 부모님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며 전도 했는데도 전혀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왜 빨리 성령이 역사해서 구원해 주지 않는지 하나님이 마냥 갑갑하고 불안하다 못해 너무 야속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다가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고 돌아가시면 세상에서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착하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준 의인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해 주지 않았는지 원망을 넘어서 분노마저 생깁니다. 부모님은 지옥에 떨어지고 나 혼자 천국에 가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믿음을 포기하고 싶기도 합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의심과 원망에 대한 답변이 됩니다.
동전의 양면 같은 구원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 직접 오신 목적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고 먼저 명확히 밝혔습니다. 모든 사람을 몽땅 구원해 줄 테니까 심판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만약 그러면 언젠가는 구원받으니까 미리부터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으므로 안심하고 세상 쾌락을 즐기자고 덤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 날의 재림 때까지 심판을 미루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만약 심판이 마지막 날까지 미뤄져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을 필요성은 크게 줄어듭니다. 지구 시간으로 따지면 수천수만 년 후일 수도 있는데, 즉 죽은 후에도 꽤 오랫동안 심판 없이 잠만 잘 것이므로 굳이 지금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그때가 닥쳐서 심판받게 되면 어쩔 수 없다는 심보입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아주 게으르기에 먼 장래에 일어날 일은, 그것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선 별로 염려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망상에 빠져서 불안장애 등이 생기지 않는 이상 그저 눈앞의 재미에 빠져 놀기에 바쁩니다. 믿음이 있는 신자마저 새벽 기도 때마다 당장의 고난에서 어서 빨리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떼쓰는 것도 사실은 자신이 게으르다는 증거입니다. 고난 없이 평안하게 지내겠다는 것은 뒤집으면 하나님의 일은 굳이 서두르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는 것은 당신의 인간을 향한 기본적인 심정이기도 하지만, 이번 초림으로는 구원 사역만 직접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에 구원받지 못한 자는 굳이 따로 심판하지 않아도 당연히 심판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아주 단순 명료한 영적 진리인데도 신자들마저 잘 모르거나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전에 앞면과 뒷면 둘만 있지 다른 면은 없듯이, 인간의 영원한 운명도 구원과 심판 둘로만 나뉩니다. 둘이 함께 겹쳐지는 운명,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정쩡한 회색지대는 절대로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편에 붙거나 그 반대쪽 사탄 편에 붙는 것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주님은 지금 당신을 믿으면 하나님 편에 붙게 되고, 믿지 않으면 하나님 편에 절대 붙을 수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성령이 간섭하여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서 구원의 확신이 생긴 신자는 이미 영생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않으면 원죄 하에 태어나서 사탄의 조종 아래에 있는 상태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따라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은 구원 안에 이미 들어왔거나 구원으로 인도 받고 있는 중인 사람과, 심판에 머물면서 심판으로 걸어가는 사람, 두 부류로만 나뉩니다. 주님으로선 심판을 직접 따로 하실 필요 없이 구원 주실 자만 구원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무 말씀 없이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올라가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앞으로 올 모든 세대를 포함해 천하 만민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 둘로만 나뉘니까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는 뜻도 됩니다. 비유하자면 그 십자가는 아파트 단지 사무실에서 단지 내의 공원에 몇 시까지 오시는 주민에게 점심 도시락을 무료로 제공한다고 공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시간 안에 도착한 주민은 도시락을 받고, 그 공지를 예사로 여기고 공원에 가지 않거나 늦게 도착한 주민은 도시락을 받지 못합니다. 이처럼 끝까지 예수님을 완악하게 거부한 자는 자기 잘못으로 심판받을 뿐, 주님이 추가로 심판의 벌을 준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 선택
이 비유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동네 주민이어야만 공짜 도시락 선물을 받을 수 있지 남의 동네 사람이 와선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적용하면 하나님의 택함에 들어야만 성령이 역사해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준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그분의 택함에 들지 않은 자는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니까,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외부에선 구원으로 택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편애하여 특혜를 준 것 아니냐는 반발이 나오게 됩니다. 십자가상의 강도처럼 아무리 흉악한 살인 죄인이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준다는 기독교는 불공평 독선적 배타적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기독교를 풍자 비판한 ‘밀양’ 같은 영화가 크게 히트친 것입니다.
그런 반발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 진리를, 바꿔 말해서 인간의 영적인 실상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죽기까지 스스로 죄를 이겨낼 영적 실력이 안 되므로 죄에서 절대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무리 의롭게 산 불신자도 죽기 직전에는 심판에 대해 걱정하고, 믿음이 좋은 신자도 평생토록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간구합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죄에 대해 죽기까지 무력, 무능합니다.
편애나 특혜는 남들보다 훨씬 못하는 자를 그에 걸맞지 않게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것입니다. 에컨대 부모가 권력자나 부자라서 성적이 훨씬 떨어지는 학생을 선생이 매번 칭찬하면서 반장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선택이 만약 그렇다면, 즉 이방 종교처럼 인간이 바치는 헌금 헌물 치성 등을 바탕으로 구원이 이뤄진다면 차별적인 특혜입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내세울 만한 자격 조건 능력 성품 선행 공로 등이 없습니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선언합니다.(렘17:9) 모두가 원죄 하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심판을 받아 죽어 마땅할 뿐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구원 선택은 선생이 볼 때에 학생 모두가 똑같이 어리석고 놀기만 좋아하는 게으름뱅이인지라 당신의 담임선생으로서 절대적 주권으로 반장, 부반장, 미화부장 등을 지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학생들 사이에 차등을 두고 판단할 기준이나 근거가 하나도 없기에 편애나 특혜가 개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에게 예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어야만 그런 감정도 생길 텐데 아예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커멓게 더럽혀진 누더기를 똑같이 덮어쓴 거지 중에서 구원으로 택해 주었기에 순전히 그분의 은혜일 뿐입니다. 택함을 받은 자는 믿음으로 그분의 택함을 순전하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언제든 양껏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쌓인 창고를 가르쳐 주는데도 믿지 못해 가지 않은 거지는 평생 거지를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섭리
그런데 주님이 직접 심판하지는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따져 택함에서 누락된 사람은 하나님이 차별한 것이라는 또 다른 반발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무조건 당신의 절대 주권만으로 선택하고 그친다면 독선적, 일방적, 배타적이라는 비판은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항은 인간이 원죄 하에 태어나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상태가 생각보다 아주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최고로 높이려는 헛된 욕심이 너무 강력해서 자신의 영적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모두가 나는 아주 의로운 사람이라고, 최소한 평균 이상의 선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므로 구원받아야만 할 죄인이라고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속을 까뒤집어서 솔직하게 알아보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아예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중에는 세상을 통치하는 절대적 존재를 믿으며 이런저런 종교를 가진 의로운 자들도 많으나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는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훌륭한 도덕 선생이지 영원한 구원을 주관하거나 관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영적 실체가 시체이므로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또 자기 죗값이 완전하게 갚아져야 한다는 절대적 전제를 아예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전도하면서 그 사실을 가르쳐 주어도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여서 성령으로 간섭해 주기 전 자연인의 상태에선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거나 찾는 자가 한 명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물론 자기가 도덕적으로 완벽하지는 않다고 인정은 해도, 구원 얻기 위해서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십자가에 실현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라는 권면은 자기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 기독교 특유의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교리일 뿐이라고 여기고 아예 귀를 닫아버립니다.
바꿔 말하면 모든 사람의 심령이 자기중심으로 확고히 굳어져 있기에, 하나님이 구원으로 택한 자라도 실제로 거듭나게 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께서 구원할 자를 택하기만 하고서 마냥 방치해 두지 않으며 당신만의 열심과 수고가 동원됩니다. 성령이 택한 자에게 초자연적으로 역사해 단번에 “뿅”하고 십자가 구원 진리를 깨닫는 그런 믿음을 심어주지는 않습니다. 죄인 쪽에서의 자발적이고도 진실한 각성과 회개도 없이 하나님만의 일방적인 구원은 결코 이뤄지지 않습니다.
택함 받은 자 역시도 아주 완악한 죄인으로서 평소에 예수님을 믿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의 삶과 인생의 여러 측면에서 하나님이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간섭하여서 골고다 십자가 앞으로 기어이 끌고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의 끈질긴 노력과 뜨거운 열정으로 그를 쳐서 항복시키는 과정이 선행됩니다. 그 과정과 일정은 각 사람마다 각기 다르지만, 각 사람에게 가장 합당하고 가장 빠르고 가장 온전한 방식으로 진행하십니다.
하나님으로선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어서 죄를 멀리하는 자로 세워야 하지만, 택함을 받은 자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대체로 세상 쾌락과 죄악을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래서 대체로 실패와 고난을 주어서라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재점검하게 만듭니다. 자기 삶에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자신이 소망 의도 계획 노력하고 있는 방향과 모습이 아닌 쪽으로, 그런데 그쪽이 훨씬 더 거룩하게 인도한다고 느껴지게 만듭니다. 신자로선 그런 초기에는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인 줄 미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 성령은 반복되는 실패와 고난을 자기 내면과 연결시키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자신의 영적 실체가 스스로 자부했던 만큼 절대 의롭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아주 치사하고 추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조금씩 깨닫게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철천지원수였던 자를 당신께 완전히 항복시켜서 당신의 자녀로 온전히 받아주는 일이,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으로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단번에 쉽게 변화시켜 버리면 그 믿음이 견고해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온전한 믿음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선 아주 번잡하고 귀찮은 일을 기꺼이 행해주시는 것입니다.
간혹 위급하고 큰 고난에서 초자연적으로 구출 받아서 단번에 예수를 믿은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난 삶을 곰곰이 되씹어보면 하나님이 세밀하게 개입하여서 당신의 살아 계심과 그를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해주는 은총을 끊임없이 베푸셨음을 그 본인은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본인이 너무 모르고 지나치므로 구원해 주어야만 할 때에 확실하고도 결정적으로 간섭하여 단번에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택하기만 하고서 줄곧 외면하고 있다가 마치 로또 당첨되듯이 큰 은혜를 주어서 예수를 믿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으로 택정하신 자를 어떻게 전혀 모르는 척 내내 방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려면 아예 택하지도 말았어야 합니다.
이처럼 구원으로 택한 자를 하나님 쪽에서 그 삶에 세밀하게 간섭하여서 기어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게 만드는 것을 그분의 “완벽한 섭리”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절대적 주권”만으로 선택하고 치우면 일방적 독선적 하나님이지만, 완벽한 섭리로 당신 쪽에서 이끌었기에 그분의 택함에는 일방적인 편애나 특혜가 개입될 소지가 없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택함 받은 바울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으리라고는 전혀 계획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유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단으로 간주하고서 미워했기에 그들을 처단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서 극렬하게 핍박했습니다. 그러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로 대면함으로써 사흘 간 장님이 됩니다. 사방이 캄캄하게 막힌 흑암 가운데 나름의 영적인 씨름을 거치면서 예수가 생전에 스스로 선포한 대로 죄인을 구원하러 하늘에서 오신 독생자 하나님이었고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직접 보낸 평신도 아나니아가 안수 기도해 주자 시력이 회복되었고, 그 즉시로 신자들을 핍박하려고 갔던 바로 그곳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거꾸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언뜻 예수님이 그에게 믿음을 순간적으로 심어주신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팔일 만에 할례받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바리새파의 가마리엘의 수제자 랍비였으며, 율법으로는 흠이 없을 정도의 의인이었습니다. 평생을 니고데모처럼 율법과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으며 구약성경의 최고 전문가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운동이 유대인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게 되자 아마도 영원한 구원에 대해 성경을 새롭게 연구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그 이단의 평신도인 스데반을 신성모독 죄로 처형하는 일을 주도했는데,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천국을 실제로 바라보면서 전혀 고통 없이 평안한 가운데 감사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자신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영적 현상이라 너무 부러웠는 데다, 그가 자기 스승인 예수처럼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을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 와중에 자기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것입니다. 천상의 영계에 계시면서 자기를 사흘 간 장님으로 만들 정도의 능력을 가진 분이라면, 당신의 제자들을 죽이려 혈안이 된 자기를 순간적으로 죽일 수 있는데도 살려 주었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라는 막중한 소명까지 주었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에 틀림없이 그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해서 예수님에 대한 영적인 분별력과 함께 그분께 순종할 믿음이 생기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모세 율법과 대조하여서 에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정확하게 가르칠 당신의 종으로 택하여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완벽한 섭리로 그때까지의 삶에 세밀하게 간섭하셨던 것입니다. 그로 모세 율법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도록 해서 나중에 진리를 알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인간적 의인 줄 알도록 해준 것입니다. 또 그에 비해 십자가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온전한지 깨달아서 평생토록 복음만 전하고 가르치게 하려는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하게 된 것은 그런 섭리가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결정적 조치였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라고 당당하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를 다메섹 도상에서 비로소 구원해 준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이미 구원으로 택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다소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부모 아래 태어나 헬라어에 능통했고 힐렐 학파의 바리새인이 된 것들이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었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 부모로부터 베냐민 지파, 아브라함의 후손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자신의 창세 전부터 그분의 절대적 선택과 완벽한 섭리 안에 있었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끝까지 완악한 거역
그런데 하나님의 그런 완벽한 섭리도 결국은 택함 받은 자에게만 해당되므로 계속해서 그분의 특혜일 뿐이라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8절이 그런 비난은 전혀 타당성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심판의 원인이 된다고 말해 줍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님은 초림하셔서 구원받기 원하는 인간들에게 믿음 외에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선행을 많이 쌓으라고, 제물을 최대한 바치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삼 년이라는 짧은 기간만 공사역을 하셨으나 당신께서 하나님이심을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주님과 같은 존재는 그전에도 그 후에도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론 도덕과 종교 계명에서도 당신처럼 가르치는 스승은 전혀 없었고, 주님의 그 권세 있는 가르침을 받는 자에게 큰 영적 울림이 생겼습니다. 어떤 불치병과 불구는 물론 죽은 자도 말씀 한마디로 단번에 완쾌시켜 주었습니다. 나아가 자연 재앙마저 말씀으로 명령하여서 잠잠하게 했으며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이만여 명을 먹였습니다. 무엇보다 당신께서 예언한 대로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니고데모에게도 당신이 구원하러 온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라고만 했습니다. 또 그렇게 믿을만한 근거와 증거를, 특별히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사흘 만의 부활을 통해서, 차고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인간들에게 오직 선한 일만 베풀었지 단 한 번도 악한 일은 물론 시기 질투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에서 가장 천대 받고 소외된 자들을 더 큰 사랑으로 품어서 위로하고 치유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상 최고로 억울한 죽음으로 이끌려 가도 한 마디 반발 변명 대꾸하지 않았고 오히려 원수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죄로 타락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데도 당신이 지으신 인간인지라 아무 조건 없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다 보여주셨습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으로선 당신의 독생자의 목숨까지도 인간을 위해서 내어주었기에 당신의 사랑을 그 이상 보여줄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믿으라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를 인정하고 그 계명대로 따르라는 단순한 뜻이 절대 아닙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이 땅에는 없는 하늘의 사랑을 온전히 또 겸허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마저 끝까지 싫어서 거부한다면 더 이상 구원의 다른 방도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처음부터 심판 아래 있었기에 그 위에 형벌이 따로 추가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여야만 구원받는다는 권면이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라고 당신의 부활로 확증해 주었습니다. 끝까지 이런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랑 밖에 영원히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믿지 않는 부모에게 복음을 전하고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끝까지 믿지 않는 것은 그분들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끝내 거부한 채로 죽어서 그 이후로도 그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설명드린 대로 자기는 선하므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조건 없는 용서가 자기에겐 전혀 필요 없다고 고집한 것입니다.
기독교 밖에 있는 자들은 자기에겐 하나님의 택정하심이 필요 없다고 끝까지 고집합니다. 그래 놓고서, 다른 이를 구원으로 선택했다고 탓하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아파트 사무실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점심 도시락은 필요 없기에 그 시간에 공원에 가지 않았으면서 다른 주민이 도시락 받아먹은 일을 잘못했다고 야단치는 꼴입니다.
끝까지 믿지 않는 불신자를 탓할 의도는 전혀 없고 그저 불쌍할 따름입니다. 자신이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고 그분께서 끈질기고도 신묘한 은혜로 일일이 간섭하여서 골고다 십자가 앞에 엎드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신자가 꽤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을 확신하는 신자만이 그분께서 완벽한 섭리로 천국 가는 그날까지 자신에게 세밀하고도 풍성하게 간섭해 주시리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출발이 되는 택함 받았다는 믿음이 없거나 그런 원리도 모르면 교회를 아무리 다녀도 사소한 고난에도 그저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그래서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실현된 주님의 사랑이 지금도 또 죽기까지 단 한 치의 가감 없이 완벽하고도 충분하게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의 열정과 끈기가 나의 하나님을 향한 그것들과는 아예 비교도 안 된다는 사실을 언제 어디서나 잊지 않는 것입니다.
(4/6/2025)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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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수코리아 카페에서 알려드리는 글입니다
도움을 주셔야만 문서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한분이라도 도와주시길 거듭 부탁드립니다..
카페에 후원이 필요합니다 카페지기는 아주 어렵게
지냅니다 투병중에 생활고로 어렵습니다
도와주신 분들께 박경옥 전도사가 하루 두번
기도해드리고 있습니다 다
먹을것도 없습니다 한 분이라도 도와주셔서...
용기릏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후원이 없다 보니 공과금도 못내고 먹을것도 못삽니다
1만원 이라도 도와주시면 카페지기는 큰힘을 얻습니다
건강문제로 박스나 고물도 줍지 못합니다
앿값이 없는데 먹을것을 사야합니다 오늘은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먹을것도 못사고 공과금도 밀리고 치료비도 없습니다
공지글에 수급자에서 탈락되는 이유를 올렸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이체 회원이 없습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카페후원계좌-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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