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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공연한 책읽기를 깨우침 받았습니다
지난 몇 달 ‘도(道)란 무엇인가?’ 한 줄 문장에 붙잡혀 헤매고 있었습니다. 도교의 경전 몇 권이 입수된 덕에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벽을 만들어주더니 내내 그 모양으로 미로행의 연속이었습니다. 가게에 오시는 분들 중에 유불선(儒彿仙) 삼도(三道)에 두루 통한 분이 있어 가르침을 받아 와공과 태식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는데 분수를 모르는 욕심으로 공연한 짓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남의 흉내 내기를 좋아하는 자신을 조롱하며 노자, 장자, 포박자, 참동계, 혜명경 등의 고전들과 현대의 기공 책들까지 열심히 헤집어 보았지만 도무지 줄기를 잡을 수가 없어 속만 쓰렸습니다.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 (명가명 비상명)
無, 名天地之始, (무 명천지지시)
有, 名萬物之母, (유 명만물지상모)
故常無, 欲以觀其妙, (고상무 욕이관기묘)
常有, 欲以觀其妙, (상유 욕이기관묘)
此兩者, 同出而異名, (차량자 동출이이명)
同謂之玄, (동위지현)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도(道)를 말로 나타낼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말로 부를 수 있다면, 그 또한 이름이 아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원이고,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무(無)에서 만물의 오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有)에서 그 끝을 살피도록 해야 한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은 함께 나왔으되 그 이름이 다르고,
그 같은 바를 현묘(玄妙)하다고 부른다.
현묘하고도 현묘하여 모든 현묘한 이치가 나오는 문(門)인 것이다.
도에 뜻을 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헤매게 된다는 도교 경전의 첫째 관문 도덕경 제1장의 문장인데, 저도 별 수 없는 잡배라서 처음부터 면벽이었습니다. 도대체가 “이것도 이것이 아니고 저것도 저것이 아닌 것이 이것도 이것이 되고 저것이 저것도 되는데 그 모든 것이 그것이다” 이니, 수천 년 전에 이런 알쏭달쏭한 말로 번뇌를 내려주신 노자 할아버지를 원망해보지만 할아버지 왈 “누가 배우라고 시켰냐?”로 시침 뚝 떼고 계시니 진퇴양난입니다. 기왕에 얻은 화두이니 쥐꼬리만큼이나마 답을 찾아보자고 읽게 된 책들은 업으로 작용을 할 뿐 해답은 구해지지 않고 마음만 조급하여 갈수록 오리무중으로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無)는 도(道)의 본체이고, 유(有)는 도(道)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뿌리가 같아, 이름만 다를 뿐 다 같이 현묘하고도 현묘하다.
어떤 책에서 찾은 주해인데 역시 아리송한 말의 연속입니다. 작자는 노자 제1장을 “‘우주만물의 창조와 생성의 근원이 도(道)이다’라고 설명한 말”로 풀었던데, 저는 그 말도 또 그 말 같아 고개만 주억거렸습니다.
깨달음을 일컬어 선도에서는 수심연성(修心鍊性)이라고 하고 유문에서는 존심양성(存心養性)이라 하고 불문에서는 명심견성(明心見性)이라고 한다. 이는 모두 도의 근원을 밝힌 같은 말로 약간의 특색을 가려 구별했을 뿐 삼교의 근본은 하나이다. 마음의 보존이 안 되고서는 마음을 닦을 수 없을 것이고, 마음을 닦을 수가 없고서는 마음을 밝힐 이치가 없다. 본성이든 품성이든 그것을 보거나 드러내지 못하고서 그것을 기른다거나 연마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릇 마음의 길이란 마음을 언제나 중정되게 갖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도록 노력하면서 날로 달로 밝게 하여 마침내 허령통철(虛靈通徹)한 본래의 본체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참동계(參同契) 주해본에 위와 같은 해설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대표적인 세 종교가 도(道)의 정체를 ‘수심연성(修心鍊性), 존심양성(存心養性), 명심견성(明心見性)’으로 정의했다 하니 그런가 싶기는 한데, ‘허령통철(虛靈通徹)한 본래의 본체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다시 근심의 연속이었습니다.
허령통철(虛靈通徹), 국어사전에도 없고 고사숙어사전에도 없고 심지어 도교철학사전에서도 보이지 않는 네 글자를 놓고 다시 씨름을 시작했습니다. 한자 풀이로 “빌 허(虛), 신령 령(靈),통할 통(通), 통할 철(徹)”이니 ‘(마음을) 비우면 뜻이 통하여 신령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 정도의 풀이가 가능하다고 보고 그쪽으로 찾다보니 ‘네이버 지식백과’에 다음과 같은 글이 보였습니다.
이이는 마음의 특징을 '허령'(虛靈 : 텅 비어 신령스러움) 또는 '허명'(虛明 : 텅 비어 밝음) 등의 말로 설명한다. 여기서 마음의 허령함은 곧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렇게 지각을 '허령'으로 규정한 것은 이미 주희에게서 보인다. 주희는 미발의 마음을 '지각불매'(知覺不昧 : 지각이 어둡지 않음)라고 표현했다가, 『대학장구』에서는 이를 '허령불매'라고 바꾸어서 명덕과 연결 짓는다. 그밖에도 주희는 마음을 '허령통철'하다거나, '허명'하다고 표현하기도 하며, '허령지각(虛靈知覺)'이라는 보다 명시적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곧 이이는 마음의 기능을 우선적으로 '지각(知覺)'이라고 보는 것이다.
사물은 치우치고 막혀 있어서 다시 이를 변화시킬 방법이 없으나, 오직 사람은 비록 맑고 흐리고 순수하고 잡된 차이가 같지 않다 하더라도 마음이 허명하여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성학집요』, Ⅴ112)
사람은 오행 가운데에서 정밀하고 빼어난 것을 얻었으므로 그 마음이 허령하여 성인도 될 수 있고 현인도 될 수 있다.(「어록」상, Ⅵ333)
오직 사람만이 바르고 트인 기를 얻었으나, 맑고 흐림과 순수하고 잡됨의 차이가 무수히 많아서, 천지가 깨끗하고 한결같은 것과는 다르다. 다만 그 마음 됨은 허령통철(虛靈通澈 : 텅 비어 신령스럽게 훤히 꿰뚫고 있음)하여 온갖 이치를 갖추고 있어서, 흐린 것을 변화시켜 맑게 만들 수 있고 잡된 것을 변화시켜 순수하게 만들 수 있다.(「답성호원」, Ⅲ53-54)
위대할손, 우리의 선조들이여! 율곡선생이 이미 해답을 만들어 놓고 계셨고 다른 이들은 벌써부터 정의를 얻고 있었습니다. 해서 감탄하며 보고 있는데……또 야단이 났습니다. ‘사람은 오행 가운데에서 정밀하고 빼어난 것을 얻었으므로 그 마음이 허령(虛靈)하여 성인도 될 수 있고 현인도 될 수 있다(通澈).’이시니, ‘오행(五行)에의 입문’이 허령통철의 조건인 모양인데 새로운 숙제라 역서를 뒤져보았지만 또 하나의 오리무중의 길에 들어섰음을 실감했을 뿐 시원한 답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열심히 책들을 학대한 결과 다음과 같은 일절이 그나마 해설이 간략하여 옮긴 후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인간의 생성과 소멸은 우주의 순환이치와 같다. 태양과, 수성, 목성, 화성, 토성, 금성이 달이 지구와 멀고 가까워질 때 생기는 변화에 의해서 우리는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을 구심점으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고 있는 하나의 별이다. 그 별들의 원소는 물(水),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의 오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행이 처음 쓰인 것은 중국 은나라 때 서경에서부터 홍범구주도에까지 기록한다. 홍범은 기자가 무왕에게 간한 글로 전해진다. 여기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오행의 이치는 첫째가 수(水)인데 물은 흘러내리는 곳에 있다 하였으니 높은 산꼭대기에서부터 흘러내리면서 만물을 적시고 만물에게 자기가 가진 영양분을 공급하고 개울로 냇가로 강으로 흘러서 바다에 도달하니 짠맛만 남았더라 하여 물은 흘러내림을 뜻하고 흘러내림은 짠맛을 만들어 낸다.
둘째인 화(火)는 타오르면서 퍼지는 것이며 위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며 열심히 자기 몸을 부풀려 태우고 나니 입맛이 쓰다 하여 쓴맛을 만들어 낸다.
다음의 목(木)은 굽고 곧은 것이 특징이요, 자라남을 뜻하며 위로 올라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나무의 결실은 열매가 달려 무르익으면서 신맛을 내므로 나무는 신맛을 만들어낸다.
금(金)은 넷째인데, 원래 금(金)의 성격은 빛을 내는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고 금(金)의 성질은 변화무쌍하여 우리 인류사회에도 적지 않은 발전을 주었다. 그래서 금(金)의 성격은 변질됨으로써 녹여서 금반지도 만들고 온갖 장식품을 만들어낸다. 금(金)은 매운 맛을 만들어 낸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토(土), 우리 인류는 먼 선사시대부터 흙에 살면서 열매와 식물을 채취하며 삶을 누리고 지혜를 얻어왔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서 삶을 영위하다가 결국은 죽어서 땅속으로 묻히게 되는 대자연의 순환 속에서 이어져왔다. 토(土)에 맞는 맛은 단맛을 내는데 그 뜻이 있다.
이상 다섯 가지로서 과거 철인들은 음과 양 그리고 오행을 만들어 철학적인 학문을 전성케 하였다.
오행에는 음양이 함께 있어서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으며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곧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여기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면 인간의 진리를 알 수 있다…… 율곡선생이 오행을 들어 말씀하신 뜻은 그런 정도의 해석이 가능한 듯 보이는데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라니 다시 난관의 중첩입니다. 해서 선현들의 지혜로운 말씀들 중 자연을 논한 부분만 골라서 찾아보았는데……
자연은 신의 예술이다. (단테)
대자연의 질서는 우주 건축자의 존재 입증이다. (칸트)
자연은 끊임없이 우리들과 말하지만, 그 비밀을 고백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항상 자연에 거역하여 행동하지만 그것을 지배할 아무런 힘도 갖지 못했다. (괴테)
자연은 무한히 분할된 신(神)이다. 신과 자연은 서로 대응하는 두 개의 위대한 힘이다. (실러)
자연은 말이 없다. (老子)
천지는 자연으로 인(因)한 것이다. (淮南子)
天無私覆 地無私載 日月無私照
하늘에 사복(私覆)이 없고 땅에 사재(私載)가 없고 일월(日月)에 사조(私照)가 없다. (孔子/禮記)
자연은 언제나 동정과 선심으로 사람을 대한다. 그러나 그 동정과 선심을 순전하게 받을 수 있는 기력을 사람은 갖추지 못했다. (최남선)
자연에는 진정한 의미의 조락(凋落)이 없다. (김소운)
구구한 답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헌데 역시나 말씀들이 그럴듯하고 당연하게 보일 뿐 해답이 될 명쾌함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노자(老子) 할아버지는 ‘자연은 말이 없다’ 한 마디로 “입 다물어!”하고 호통을 치고 계셨고요. 애꿎은 책들만 괴롭히고 있는 아들이 안쓰러우셨는지 거실에서 성경을 펼쳐놓고 읽으며 텔레비전을 보던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시더군요.
“야, 와 봐라! 바다가 잘 닦아 놨다!”
텔레비전 화면에 바닷가 돌밭이 비친 걸 보시고 감탄하여 아들에게 권유하신 말씀이셨습니다.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밀려간 자리에 어린애 머리통만한 돌들이 흩어져 있는데, 바닷물에 씻겨 상큼한 자태가 드러나 있었던 것입니다.
“야, 와 봐라! 바다가 잘 닦아 놨다!”
어머니가 텔레비전에서 발견하고 아들을 불러 함께 보자 하시던 그 경치……수만 년 바닷물에 씻겨 모서리가 닳은 돌들이 방금 세수를 한 얼굴로 세상에 선보이는 광경을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 보고 있노라니 문득 ‘이 장면의 자연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을 찾을 수 있을까’하고 감탄이 나왔습니다.
태양아
다만 한 번이라도 좋다. 너를 부르기 위하여 나는 두루미의 목통을 빌려 오마. 나의 마음의 무너진 터를 닦고 나는 그 위에 너를 위한 작은 궁전(宮殿)을 세우련다. 그러면 너는 그 속에 와서 살아라. 나는 너를 나의 어머니 나의 고향 나의 사랑 나의 희망이라고 부르마. 그리고 너의 사나운 풍속을 좇아서 이 어둠을 깨물어 죽이련다.
태양아
너는 나의 가슴 속 작은 우주의 호수와 산과 푸른 잔디밭과 흰 방천(防川)에서 불결한 간밤의 서리를 핥아버려라. 나의 시냇물을 쓰다듬어 주며 나의 바다의 요람을 흔들어 주어라. 너는 나의 병실을 어족들의 아침을 다리고 유쾌한 손님처럼 찾아오너라.
태양보다도 이쁘지 못한 시. 태양일 수가 없는 서러운 나의 시를 어두운 병실에 켜 놓고 태양아 네가 오기를 나는 이 밤을 세워 가며 기다린다.
김기림 시인의 시 ‘태양의 풍속’ 전문입니다. 어머니의 권유로 바다가 돌을 씻어 놓은 풍경을 보다가 감탄하여 내친 김에 어머니와 바다와 자연을 아울러 노래한 글을 찾아보니 위의 시가 발견되었습니다. 헌데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뭔가 깊은 뜻이 있을까 읽어보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의 글이라서 또 헝클어져버렸습니다.
도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이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굴레에서 뛰어나가는 일, 사회나 국가가 모든 구성원에게 공평히 갖게 하고 높은 차원의 문화를 함께 누리게 하는 일, 제도와 인권이 서로 상응하여 다 함께 만족하도록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것, 상고로부터 동서양 성현들이 가르쳐온 도(道)의 목적인 것이다. 사람의 뿌리는 심(心)·성(性)·명(命)·정(情)의 정신적인 융합에 있는데 그것을 튼튼하게 하는 방법이 도(道)인 것이다. 이에 대한 학문이 도학(道學)이고 가르치고 닦는 일이 종교이다. 도(道)는 종교에 따라 이(理), 기(氣), 불(佛) 등의 용어로 변화하여 유(儒), 불(佛), 도(道)의 문이 이루어졌다.
도덕(道德)은 모든 종교의 기본 교리이고 우주 본체의 성립 이해의 방법인데 그 자체로 소우주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람의 품성과 심성이 발휘되는 자리라는 의미에서 쓰이는 심(心) 개념은 우주 본체인 도(道)·이(理)·본성(本性)과 같을 수밖에 없고, 현실세계에서 사람의 심리적·생리적 현상의 풀이가 된다. 사람의 생명 상태는 정(精)·신(神)·혼(魂)·백(魄)·의지(意志)의 발현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신과 혼은 품성의 분화, 정과 백은 생명의 분화라고 볼 수 있고 의지는 그들을 통섭하는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품성은 그 안에 우주 본체인 궁극의 진리가 온전하게 녹아 있기 때문에 우주 본체가 삼라만상을 조화시켜 원만한 질서를 세우듯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조화시켜 질서를 세울 수 있고 이러한 작용을 도덕(道德)이라 하는데 특히 품성은 덕성(德性)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덕성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으로 분화되고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성실(誠實)이 분화되고, 정(精)과 백(魄)으로부터는 희(喜)·노(怒)·애(愛)·낙(樂)·욕(慾)이 분화되는데 앞서의 심(心)·성(性)·명(命)·정(情)과 함께 자체로 소우주(小宇宙)인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
참동계의 해제편에서 찾은 도와 덕의 해설입니다. 잔뜩 헤매던 터라 그나마 발견했다고 기뻐하며 읽어보니 그 소리가 그 소리인 것 같아 다시 책들을 학대하여 포박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찾았습니다.
且夫深入九泉之下 長夜罔極 始爲螻蟻之粮 終興塵壤合體 令人怛然心熱 不覺咄嗟
또 말하자면 깊이깊이 구천(九泉)의 아래로 들어가서 긴긴 밤이 끝없이 계속되는 암흑의 세계, 처음에는 루의(螻蟻), 곧 땅강아지와 개미 같은 것들의 양식이 되고 드디어는 흙과 몸이 하나가 된다. 사람으로 하여금 달연(怛然)하고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자기도 모르게 돌차(咄嗟), 곧 한탄하지 않겠는가.
해석해본즉 ‘내 모든 삶의 노력이 구천의 아래에 가는 걸 두려워 한 탓의 돌차(咄嗟)에 지나지 못했다’는 꾸짖음인지라 화들짝 놀랐습니다. 도니 덕이니 실컷 지껄여 댄 것은 죽음에의 회피 수단, 적어도 마음에 위로를 가질 방법을 찾은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達人所以不愁死者 非不欲求 亦固不知所以免死之術 而空自焦愁 無益於事 故云樂天知名 故不憂耳 非不欲久生也
달인(達人)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결코 장생(長生)을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본래 죽음을 면할 방법을 모르는 존재로 태어나 걱정하고 초조해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천(天)을 즐기고 명(命)을 안다고 하면서 걱정을 않는 것이다.
다행히 포박자에는 위와 같은 글도 있었습니다. 달인(達人), 즉 성인조차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애써 걱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개 잡류인 제가 ‘달연(怛然)하여 돌차(咄嗟)했다’한들 부끄러울 리 없으니 변명거리가 만들어진 셈입니다.
중국의 성인을 헤아려 첫째는 단연 공자(孔子), 그의 만년을 기록한 예기(禮記)의 단궁편(檀弓篇)에는 “태산이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냐, 기둥이 썩지 않을 것이냐, 철인이 늙어 쇠퇴하지 않겠느냐”하고 노래한 후 일곱 날 후에 세상을 뜨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과연 성인다운 돌차(咄嗟)인 것 같습니다.
전에 장주(莊周)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것이 분명 나비였다. 스스로 즐겁고 뜻대로라 장주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금 뒤에 깨어 보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장주는 알지 못했다. 허나 만물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지니 이를 물화(物化)라 한다.
유명한 ‘장자의 호접몽’의 번역입니다. 마지막 단락은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인데 장주와 나비의 구분을 예로 들어 모든 사물에 원인과 결과가 있음을 말한 듯 보입니다. 장자는 '있음'은 '없음'이 존재함으로 있음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는 합니다마는.
彭祖言 天上多尊官大神 新仙者位卑 所奉事者非一 但更勞苦 故不足役役 人間八白餘生也
역시 포박자에 있는 글입니다. ‘팽조라는 선인은 도통을 하여 800년을 살았는데 왜 하늘로 가지 않느냐 하였더니 천상에는 존관대신(尊官大神)이 많아 갓 신선에 오른 사람들은 그 신분이 비천한즉 선배 선인들을 모시기에 노고가 많으니 힘든 게 싫어 땅에 머문다’하는 뜻이라는데 재미있어서 옮겨보았습니다. 신선조차도 인간세상이 편하다 하였으니 하물며 범부에 있어서야……‘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하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제가 세상에 연연하는 이유가 조금은 변명이 될 듯도 합니다.
포박자를 남긴 갈홍은 도교 신선 계열에서 대선배에 위치한 갈현(葛玄)의 손자로 참동계를 쓴 위백양과 함께 대신선 중의 한분입니다. 종리권, 육수정, 여동빈 등 많은 신선들이 숱한 일화를 남겼지만 포박자와 참동계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만선(萬仙)의 위인 태상노군(老子)의 도덕경과 노군의 사대제자 중 첫째로 꼽는 남화진군(莊子)의 남화경 바로 아랫자리 정도라고 할 것입니다. (참고로 도교가 주장하는 노군의 사대제자를 밝히면 장자(남화진인), 열자(충허진인), 문자(통현진인), 항창자(통령진인)이 있다 합니다.)
포박자는 인간의 삶을 생명활동 욕구, 즉 욕망의 화신 정도로 본 듯한 느낌이어서 위백양의 참동계에서 발견한 ‘소우주인 인간의 정체 밝히기’의 길로 알았던 도교에 대한 호감이 많이 가셔버렸습니다. 육진(六塵)-‘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정체(晶體)인 인간 본성을 청정하게 하는 게 목적이라는 도(道)를 배워 잘난 척을 해보려던 마음이 연단법과 방중술로 흐르게 되는 신선술(神仙術)을 배우려는 욕심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 그 동안의 책읽기는 도로(徒勞)가 되었습니다.
성명쌍수(性命雙修) : 천성(天性)과 천명(天命)을 아울러 닦아나가는 도교 양생법(養生法). 송대에 이르러 내단양생을 통해 도통신선(道通神仙)과 불로장수(不老長壽)라는 목표를 이루려는 혁신도교에서는 성명쌍수론과 함께 유교ㆍ불교와 회통을 모색하는 삼교동원론(三敎同源論)을 강조하게 되었다. 성과 명을 신(神)과 정(精), 심(心)과 신(身), 또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지탱해주는 것과 신체활동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보고, 이를 아울러 닦아나가야 신선을 이룬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장차 성을 극진히 하고 명을 간직하고자 하면 반드시 정을 기르고(養精) 신을 모아야(凝神) 한다”고 했다.
성명쌍수(性命雙修)는 참동계가 표방하고 있는 도(道)의 연단법인데 우리나라 종교 중 도교에 가장 근접한 원불교대사전에 나와 있는 걸 옮겼습니다. 정신과 신체를 아울러 갈고 닦아야 참된 도(道)가 된다는 데 태식(胎息)이니 기공(氣功)이니 하여 건신술(健身術)의 기법만 받아들이려 하였으니 제 도로아미타불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기독교 전도서 제1장)
저는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의 덕에 자칭 기독교인입니다. 때문에 진작 전도서 제1장에 있는 이 성구를 알고 있었는데 잘났노라 이런저런 책을 읽어 잡념만 키웠던 것입니다. 늦게나마 어머니의 가르침 “야, 와 봐라! 바다가 잘 닦아 놨다!”로 본래를 찾게 되었으니 늦은 후회일망정 그 동안의 공연한 책읽기에 답을 얻은 셈이지 싶어 이상의 기록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첫댓글 긴글 잘 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유무에 치우치지 않아 따로 억지 이름하여 도라 하였다 들었습니다.
인식의 대상이 된다면 이름을 붙일 수 있겠지요. 전자의 위치가 확률적으로 공간에 존재하듯 분명 있으나 알 수는 없나 봅니다.
일본 SF만화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읽었습니다.
"나로 남으려는 집착 때문에 생물체의 '있다'가 성립된다."
버려서 찾을 수 있는 게 도라면, 인간이라는 이름의 생명으로 정의되어 버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도가 있기는 한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려 겨울이 오기전 찾아뵈어야 하는데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를 알지 못하고
인간의 없어질 얕은 지식에 매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제 경우 이 세상의 지식을 쌓는 것 보다 내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신앙의 지식과 지혜를 탐구하도록
노력 하렵니다. 오랫만에 들렸습니다. 요즘 건강하시고
집안도 무탈 하신지요
최근 집안 일이 바빠서 뵙지 못했네요.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지적하신 전도서의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 역시 그 성구를 읽은 후 세상 지식의 헛됨과 신앙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욥기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아온즉 적신이 또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의 성구를 가장 좋아하고 지주로 삼고는 있습니다만, 가끔 분수 모르고 척을 하여 자괴감에 빠지곤 합니다.
아버님이 편찮으시다던데 괜찮으신지요. 저 역시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처지라 늘 조심스럽습니다. 특히 계절이 바뀌는 이때에는....
언제든지 오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전화 주시고요.
@과하객 형님 3가지 암을 앓고 계신 부친은 우선 급한대로 편도암 수술을 돌아오는 목요일에 할 예정 입니다.
담배를 너무 좋아하셨던 관계로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만 형국이지만 이제 집안도 정리되었으니 좀 더
오래 생존하셔서 아들 3형제의 효도도 받으시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리피터 그러시군요. 건강하셔야 하는데.... 걱정이 크시겠네요. 저 역시 같은 처지이지만.... 그저 하나님만 바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분의 뜻이 어디 계시든지 우리는 따를 뿐이지만.... 그래도....
어쩜 성경구절을 줄줄이 외우고 계시네요 ~~ 공감하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저는 제 나이가 나이라서 노부모님들은 다 저 세상으로 가시고 형제 자매들도 한분 두분
생존하신 오빠 언니도 다 노인들이라 건강이 많이 나쁘시답니다 댓글을 다신 모든 분들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
축복의 말씀 고맙습니다. 카롤리나 님께도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저도 위로 누님 한 분을 먼저 보냈습니다. 다행히 부모님은 아직 생존해 계시지만 건강이 여의치 않아 늘 불안불안입니다. 그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기분으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가 않네요. 자꾸 제 주장만 하게 되고....
항상 건강하세요. 좋은 말씀 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잘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글 읽고 갑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좋은 글 참으로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주 들려 주세요.
ㅛ숏
쇼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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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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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인(達人)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결코 장생(長生)을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본래 죽음을 면할 방법을 모르는 존재로 태어나 걱정하고 초조해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천(天)을 즐기고 명(命)을 안다고 하면서 걱정을 않는 것이다. - 이 구절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책을 읽은 흉내만 내보았습니다. 워낙 어렵더군요. 얻으신 게 있다니 감사드립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봤어여 ㅎ
책의수도 인천 화장실에서만 보게되네요 ...
좋은글 잘 읽고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
음
잘읽엇습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
잘 읽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저에겐 참 어려운 내용이네요. 그래도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