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 박사는 없었다 (2), 고대의 한국과 일본은 같은 나라였다.
왕인은 백제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간 이야기
고대에 일본에 천자문을 전하였다는 왕인 박사의 스토리는 일본인만의 기록이며 관심이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왕인이 느닷없이 한국인의 현실세계에 재현하게 된 것은 조선이 멸망할 무렵, 근대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면서부터이다.
실재하지 않았던 왕인의 이야기가 재탄생된 데에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경영정책으로 50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왕인박사의 부활을 위한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가 있었다.
왕인박사비의 건립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전시동원체제가 가속화되던 시대에, 왕인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헌책에서 꺼내어 '내선일체'라는 사상으로 조선인을 속박한 것이다.
일제 50년간의 국가 프로젝트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왕인의 재탄생
왕인박사가 근대에 들어 일본 국책인 내선일체에 동원되어 전면적으로 역사적인 인물로 재탄생하게 되는 과정은, 알려진 것으로만 아래와 같이 세 번에 걸쳐 있었고, 그것은 근대일본의 조선식민지 경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조금만 유심히 보면 드러나는 왕인의 허구성이 완전히 외면되고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로 둔갑한 왕인의 재탄생은,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조선인들을 일본 천황의 황은皇恩에 감화하여 충성을 다한 조상 왕인을 본받는 황민皇民으로 만들려는 조선인의 통치에 그 목적이 있었다.
첫번째: 왕인묘역 확대정화공사, 1899
두번째: 왕인신사봉찬회의 결성, 1927
세번째: 박사왕인비 건립, 1940
첫번째, 왕인묘역 확대정화공사 -1899년
일제 50년간의 국가적 프로젝트 첫번째
1894년 명치明治 천황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노일전쟁에서의 참모총장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발의한 '왕인묘역 확대정화공사'는 일시 중단되었다가, 1899년에 공사가 재개되어 왕인분묘의 대제전이 오사카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데라시마 히코사부로'寺嶋彦三郎라는 사람이 왕인의 묘에 대한 보수 공사를 위해 기부금을 거두었는데, 기부금을 낸 사람에는 '이토'伊藤博文 공작, '야마가타'山縣有朋 공작, ‘카쓰라'桂太郎 후작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의 '이토' 공작은 한일합방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고, ‘야마가타' 공작은 노일전쟁에서 일본에 승리를 가져다준 참모총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이다. 카쓰라’桂太郎 후작은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해 주는 대신 미국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을 묵인하도록 만든 '카쓰라 타로'桂太郎이다.
세계에 이름을 날린 일본 제국주의자이자 한국 침략의 원흉들이 왕인총(塚)의 확대정화공사를 발의하고 또 몇 년 뒤에 이어진 공사의 비용을 조달 기부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그들이 왕인 박사의 위덕을 기리는 목적으로 이러한 사업을 시작하였는가? 그것은 절대 아니다. 이들의 목적은 곧 있게 될 한일합방 이후의 조선식민지의 경영에 왕인 박사를 이용하는 데 있었을 뿐이다.
두번째, 왕인신사봉찬회 -1927년
일제 50년간의 국가적 프로젝트, 두번째
1927년 왕인 신사(神社)를 건립하자는 단체인 '왕인신사봉찬회'가 동경에서 결성되었는데, 회장은 오가사와라小笠原長幹 백작이었으나 '흑룡회'를 창설한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가 부회장으로서 중심역할을 맡았다. 여기에서 '토야마 미쓰루頭山滿'는 고문을 맡았다. 재일사학자 김영달은 그의 저서 '위사조선僞史朝鮮 - 왕인의 묘지와 탄생지'에서 이후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27 왕인신사봉찬회王仁神社奉贊会 결성
1930 왕인신사 건설 봉고제 및 지진제地鎭祭 거행
1940 왕인박사현창회가 '우에노' 공원에 박사왕인비를 건립
1941 왕인사건설의 제일보로서 왕인묘에 담장玉垣을 조영
1941 토쿄 '우에노' 공원에 박사왕인 부비副碑를 건립
1942 '오사카부 협화회'大阪府協会가 왕인신사의 건설 결정
오사카 시에 왕인신사를 건립하자는 계획은 1930년에 고유제와 지진제地鎭祭는 거행되었으나, 중일전쟁과 이차대전의 발발로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담장과 석등을 조영하는데 그쳤다.
1930년 왕인신사 건립의 봉고제와 지진제
일제가 대대적으로 왕인을 중요인물로 만들어 간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그 당시 행사를 추최한 인물 외에 거기에 참석한 인물들의 프로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인신사 건립의 봉고제와 지진제에서 회장의 축문 외에 다음 사람들의 축사가 있었다.
회장 축문祭文 '오가사와라'小笠原長幹 백작
축사 왕인신사건설대표 '산전칠평'山田七平
축사 문부대신 田中隆三
축사 척무대신 松田源治
또 이때 다음 사람이 축전을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축전 내무대신 安達謙藏
축전 대장대신 井上準之助
축전 조선총독 자작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축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백작 '고다마'兒玉秀雄
위에서 축사와 축전을 보낸 인물들을 보면, 이 봉고제와 지진제가 예사로운 행사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지방의 신사 하나를 짓는데 대신을 포함한 상당수의 일본 거물들이 축사를 읽고 축전을 보낸 것이다.
그것은 이 일을 주도한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와 그가 창설한 흑룡회黑龍會라는 단체의 성격이 밝혀지면, 1927년에 있었던 왕인 박사의 현창사업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치다로 대표되는 일본의 우익은 그야말로 유럽의 파시스트와 같은 집단인데, 이태리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 스페인의 프랑코 등 유럽의 파시스트는 나중에 국가권력의 주체가 되었지만, 일본의 우익은 정부의 막후에서만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국가권력을 넘보지 않은 점 정도가 차이점일 것이다.
일본 우익의 기원 - '우치다 료헤이'와 흑룡회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때 '이토'의 정식 수행원으로 조선에 발을 디딘 인물이 흑룡회의 창시자인 '우치다 료헤이'이다.
흑룡회(黑龍會 Black Dragon Society)는 1901년에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 등이 한반도ㆍ만주ㆍ시베리아 일대의 낭인들을 모아 결성하였으며, 근대일본의 제국주의 대외침략 시대인 '메이지明治ㆍ다이쇼大正ㆍ쇼와昭和'의 3대 천황에 걸쳐 활동한 일본 우익의 전통적 원류를 이루는 단체이다.
‘흑룡'이라는 기관지를 간행하였고, 정탐 요원을 양성 및 파견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여 만주ㆍ한반도ㆍ중국 등지에서 대 러시아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일본의 정치가들에 강력한 외교 정책을 펴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흑룡회는 대아시아주의를 지원하여, 손문孫文이나 필리핀의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같은 혁명가들에게 자금을 빌려주기도 하였다.
러일전쟁에서는 일본제국 육군이 흑룡회 조직을 첩보, 사보타주, 암살 등에 활용하였다. 흑룡회는 거짓 정보와 선전을 퍼뜨려 일본 군부와 관련된 심리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흑룡회는 한국병탄에 앞장섰는데, 1907년에 그 영수인 우치다는 일진회의 고문으로서 한일합방 운동을 추진하였다. 1909년에는 우치다 등이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조종하여 ‘일진회회장 이용구 및 백만 회원’의 이름으로 ‘한일 합방 건의서'를 한국 황제 순종, 한국통감인 '소네 아리스케'曾禰荒助, 수상 이완용에 제출하여 한일합방을 성사시켰고, 그 공로로 우치다는 일본우익의 대표인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병탄 이후, 흑룡회의 영수 우치다는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한국인 학살을 주도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였으며, 적극적인 대외팽창론자로 활약하였다.
1937년에 우치다는 죽었으나 그후에도 흑룡회의 활동이 계속되었고, 패전후 1946년에 미국 점령 당국에 의하여 최고로 위험한 국가주의 단체로 규정되어 해산되었으나, 1961년 우치다의 사망 25주년제를 계기로 하여 "토야마 미쓰루頭山滿와 우치다 료헤이의 사상을 계승하고 보급한다"는 취지 하에 다이토주쿠大東塾 숙장 '가게야마 마사하루' 등이 제창하여 '흑룡 구락부'가 재결성되어 흑룡회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음모와 폭력의 상징 - 일본 흑룡회
흑룡회는 일본의 영토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선인 흑룡강까지 확대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이유로 '흑룡회'라고 이름지었다.
중국 안휘성의 매상유梅桑楡라는 작가가 쓴 아래의 글은 흑룡회의 성격을 잘 요약하고 있는데, 아래에 일부를 인용하였다.
제목: 음모와 폭력의 상징: 일본 흑룡회
"음모와 폭력의 상징이며, 신비적 요소와 막강한 세력의 흑룡회는 1901년에 성립되었다. 흑룡회는 일본 비밀결사의 시조인 현양사玄洋社에서 갈라져 나왔다...
유명한 낭인의 왕 '토야마 미쓰루'頭山滿가 흑룡회의 창시자이자 회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토야마'는 흑룡회의 창시자도 회장도 아니다.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흑룡회의 창시자이고, '토야마 미쓰루'는 그 막후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흑룡회는 일본의 당장의 급선무는 러시아와 전쟁을 선포하고. 그후에 만주, 몽골 및 시베리아로 쳐들어가 대륙경영의 초석을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현양사('토야마'가 지도)와 흑룡회 등의 비밀조직들이 이 전쟁에서 선동역할을 하였다.
이때 흑룡회는 시베리아와 중국의 만주지방에 대규모 첩보대를 파견하였으며, '우치다' 자신도 직접 시베리아에 들어가서 러시아의 각종 정보를 정탐하는 것을 지휘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전쟁인 '만주사변'이 있었고, 그해 우치다 료헤이는 대일본생산당大日本生産黨이라는 파시즘의 정당을 창당하였다. 1500명에 이르는 당원을 가진 전국적인 규모였는데, 바로 다음해에는 16,000명의 당원으로 팽창하였다.
그러니까 '우치다 료헤이'는 창당자(黨祖)이자 초대 총재가 되고, '토야마 미쓰루'가 고문을 맡았다. 당의 목표를 "대일본생산주의를 국가정책으로 삼는다"로 정하고 "환태평양공영권의 확립"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중국의 지도자인 손문까지 언급하며 만주침략의 역사적 근거로 삼으려 외교문서를 날조하여 공표한 적도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신해혁명(1911) 후, 흑룡회의 우두머리인 '우치다 료헤이'는 이 기회를 틈타 일부 유명한 낭인들과 함께 중국에 들어와 혁명당과 관련을 맺었다. 이들이 혁명당을 지지한 목적은 혁명당의 승리 후 만주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우치다 료헤이'는 그의 '일본의 아시아'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손중산(손문)은 그와 얘기를 나누는 중 구두로 승락하였다. 중국혁명이 승리를 거둔 후 만주·몽고를 일본에 할양하겠다고."
이 책은 1932년 흑룡회에서 출판된 후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저작에 인용되었는데, 손중산이 확실히 우치다에게 '승락, 양해' 혹은 '신사협정'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흑룡회의 중국에서의 활동경비는 일부는 일본정부와 재벌이 지원했고, 일부분은 만주, 화북 및 내몽고 등지에서 마약거래, 사창가妓院 개설 등으로 얻은 수입이었다.
흑룡회는 일본 국내에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서적을 간행하는 외에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민중대회도 개최하였고, 정부에 중국파병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테러활동도 빈번히 일으켰는데, 암살대상은 은행가, 실업가, 내각의 대신, 심지어 수상에까지 이르렀다.
흑룡회와 그것을 창설한 '우치다 료헤이'의 행적은 한말에서부터 일제의 전기간을 통하여 조선과 만주를 무대로 휩쓸고 다닌 일제의 역사적 활동이었으며, 이들의 행태는 1927년 왕인 신사를 건립하려고 만든 '왕인신사봉찬회'가 지향하는 목표를 뚜렷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일본 우익의 거물이 주도한 '왕인신사봉찬회'의 목적이 순수한 왕인의 문화업적을 현양하는 목적과는 한참 먼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우치다'와 그의 흑룡회가 추진한 '왕인박사의 현양사업'도 이들의 주 업종인 협잡과 음모, 획책, 암살과 테러, 상대국의 내부 교란 등으로 상징되는 흑룡회 활동의 연장선 위에서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왕인 박사는 가짜다』, 2010, 곽 경, 37~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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