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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시대는 구리 시대와 같이 시작합니다. 5000년전 치우가 중국에 쳐들어갈 때에 이미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 머리는 구리 투구로 가리고 이마는 철편으로 가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철을 두번 제련하여 강철을 만들어내고, 단조 기술 개발로 철검 시대가 됩니다. 부여 문명은 빛이었습니다. 지금도 빙산같은 욕심을 태우는 촛불입니다. 43세 단군 물리 때에 우화충의 반란으로 인하여 가리 마한이 전사하고 단군 물리도 배를 타고 해두(海頭)로 피난하여 죽습니다. 해모수(解慕漱)는 47세-2333년 단군시대를 종식시켰다. bc.239년, 해모수는 본래 고리국(藁離國) 사람으로서 군대를 일으켜서 부여의 고도, 옛서울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하고, 웅심산(熊心山) 난빈(蘭濱)에 궁실을 지어 북부여라 하였습니다. 해모수의 4세인 단군 고우루(高于婁) 때에 한무제(漢武帝)의 조선정벌이 있었습니다. bc.86년에 고두막한은 북부여 수도로 입성하여서 북부여 단군 제위를 계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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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부여 창도 문화 (장당경과 해성) 상춘(常春)의 구월산(九月山, 古歷山) 장당경(藏唐京)은 뒤에 44세 단군 구물에 의해 대부여조선의 수도가 된다. 개원시(開原市) 북쪽 창도현(昌圖縣) 노사평(老四平)의 일면성(一面城)이 요나라 통주(通州)로서 옛 부여국왕성(夫餘國王城)이있었다고 [요사지리지]에 전한다. 창도(昌圖)의 옛이름은 몽고어로 상달(常達 額勒克 - 녹색 초원의 의미)이었다. 에리케(額勒克)는 아리목성(哀里木城)이었던 이수현(梨樹縣) 편검성(偏臉城)을 보면 고대 아리물과 관련된다. 대창홀아하와 소창홀아하와의 사이에는 팔면성(八面城 650M x 680 M)이 있다. 따라서 팔면성이 창홀의 뿌리로 고려된다. 팔면성은 금나라 한주(韓州) 치소였다가 유하현(柳河縣)이 되었다. 금나라 한주자사(韓州刺史), 동경과 유하현(柳河縣) 기물이 발굴되었었다. 금나라 한주는 이수현(梨樹縣)의 구백해영(九百亥營)에 다시 옮겨 세워졌다. 단, 한주라는 지명은 원래 고리국(藁離國) 고지였던 요하 서쪽 과이심좌익후기(科爾沁左翼後旗) 구릉지대 호단(浩壇)에서 옮겨온 이름이다. 호단으로부터 요나라 때부터 세번 옮겨서 한주는 이수현으로 갔다. 따라서 팔면성이 장당경이었고, 대창홀아하와 소창홀아하가 발원하는 동쪽 탑자산(塔子山, 400M)이 구월산이었을 것이다.탑자산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고대 탑이 있었다. 상춘 구월산 장당경 대부여 도성은 팔면성이다. 단군 구물은 해성(海城)에 이궁을 지어 평양이라고 불렀는데 보을 단군 때에 평양성으로 천도했다. [요동지]에서 요해(遼海)가 개원성 서북쪽 250리에 있었다. 동요하와 서요하가 만나는 곳이 요해였다. 팔면성의 남쪽 사면성(四面城)은 과거 편성구(偏城溝)로 불리었으며 사각형의 4000M의 성둘레를 가졌는데 동남쪽 하이대자향(下二臺子鄕)의 광정자산(光頂子山)에는 삼선묘(三仙墓)가 있다고 했는데 삼성사(三聖祠; 환인, 환웅, 치우)일수 있다. 광정자산도 궐(闕)산의 표기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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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부여 육가자 문화 북부여 도성 천안궁이 세워진 웅심산(熊心山) 난(蘭)변(濱; 물가 빈)은 옛서울 백악산 아사달이고 부여의 고도라고 하였는데 이는 신시였던 천산(天山)을 가리킨다. 천산의 이 시기 유물은 파림좌기(巴林座旗) 북쪽 30km 지점인 남양가영자(南楊家營子) 유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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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부여 난릉 문화 해모수의 4세인 단군 고우루(高于婁) 때에 한무제(漢武帝)의 조선정벌이 있었습니다. 북부여가 고두막한에게 밀려나 옮겨간 곳은 분릉(盆陵)이다. 분릉은 부여가 좋아하는 내린천, 즉 나린하(拉林河)가 있는 흑룡강성의 난릉(蘭陵)이 된다. 분릉을 경계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이 갈린다. 난릉과 서란 사이에 유수시가 있고 그 유수시 남단은 송화강과 붙어있는데 여기 노하심(老河深) 유적지의 시기는 동부여 시기와 비슷하고 숙신 유물로 알려져왔다. 본래 부여와 숙신은 말도 안 통하는 사이였지만, 동부여의 이주로 억지로 결합했는데 유수현 노하심(位于榆树县的老河深屯)에서는 한나라 시기 묘장이 131좌, 발해 시기 묘장이 139좌가 나온다 발해 구국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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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졸본부와 홀본 서성과 홀본 동강, 홀한성 [광개토왕비문]에는 추모왕에 대하여 다음 기록이 있다. 동명향 서북 마을에 "다바투(打[]陀)"라고 민간에서 부르는 칠과수유지 (七果樹遺址) 는 200m x 300m 규모로서 청동기시대 이후 유적지인데, 고주몽이 임시 도읍하였던 비류성으로서, 고주몽이 눌현(訥見)으로 천도한 후에는 [다물도]라고 고쳐 부르던 곳으로 추정된다. [요사지리지]에서 봉주(鳳州)가 고리국 고지(藁離國故地)라고 했다. 봉주는 한주(韓州) 북쪽 200리였다. 그런데 한주가 최소한 세 번을 옮겨다녔고 가장 먼저 위치로는 과이심사지 안의 과이심좌익후기 동남쪽 호단(浩但)이다.
고구려 천리장성은 고구려 부여성에서 남해까지였다. 장춘시 농안현의 북쪽에서 천리장성 흔적이 발굴되고 있다. 이 농안의 부여성은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부여국왕성이 아니라 발해 부여부 부주성(扶州)이다. 고주몽이 눌현(訥縣)에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홀본 동강이 눌현일 것으로 추정한다. 눌현은 회덕진 진가둔 고성(秦家屯 古城)이 가장 근접하다. 진가둔 고성은 성둘레 3370m이다. 본래 이름은 신집고성(新集古城)인데 제사를 지내던 고성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홀본 동강, 고주몽이 승천한 곳으로 고려된다. [후한서]<부여전>을 보면 고주몽이 색리국(索離國)에서 도망쳐서 부여에서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고주몽이 왕이 된 부여성은 바로 이 홀본 동강의 부여다. [요사지리지]에서 장춘시 관성자에 있던 발해 중경현덕부에 대해 홀한성이자, 고평양성이라고 하였다. 중경현덕부의 고평양성은 바로 고주몽의 신도읍인 홀본 동강의 눌현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신집고성이다. 참고로 장춘시에는 가로 3.5km, 세로 2km, 도합 11000m의 성둘레를 가진 대성이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그 이름은 관성자(寬城子)다. 지금도 장춘시에 관성자 역이 있지만 기록상의 관성자터는 러시아군 주둔지 쪽이다. 관성자는 청나라가 세웠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데 그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이 장춘시 관성은 기록상으로 존재하며 만주에서 3번째 규모이니, 1번째는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 동경성이고, 2번째는 발해 상경성이던 하얼빈 아성의 상경성이고 그 다음 3번째이다. 따라서 이 관성자가 [대원일통지]에서 말한 발해 홀한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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