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우울의 시대를 살아간다. 하늘엔 정보의 비가 가득 내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우산을 쓰려하지 않는다. 어항 속 물고기처럼 헤엄치며 뻐끔뻐끔 공기방울을 내놓는다. 글쎄 한 때 푸대자루같은 옷을 입고 나타난 자가 있었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당신은 그 어부를 언젠가 봤을지 모른다. 야자나무 아래 그물을 깊는 노인을. 어부의 햇살을 피해 하릴없이 시간을 바느질하고 있었다. 그는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기다림으로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여유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노인의 바다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아마 당신은 쉽게 예수라는 청년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을 낚으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자본의 자유를 추구하는 시장사회가 아닌가? 세상의 온갖 것들이 상품으로 둔갑해서 매매된다. 심지어 자선과 봉사까지. 섹스와 음식 등 사람을 자극하고 호객하는 영상이 가득하다. 아마도 현대인은 시장이라는 우리에서 길러진 욕망의 짐승들일 것이다. 그곳에서 능숙한 낚시꾼들은 쉽게 백만 천만의 사람들을 낚는다.
그런데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축이라면 이 어부가 앞의 어부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기야 예수는 성전 앞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저주하였으니 돈을 목적으로 호객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각설하고, 우리 실존은 주체와 분열자의 선택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맥락 없이 내리는 정보의 비 속에서 욕망의 먹이를 받아먹는 분열자로서 살아갈 것인가? 그것을 응시하고 상대화하며 주체로 살아갈 것인가? 분열자의 삶이 쾌락의 연속 같지만 쾌락 뒤 찾아오는 공허와 불안 그리고 무의미를 피할 수 없다. 주체 또한 완전할 수 없어서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우산을 받고 자신의 목적지를 잊지 찾아 걸어가야 할 피곤함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려고 노력할 것이다. 둘 다 실체는 아니다. 항해의 조각일 뿐이다.
아침에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갑자기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혁명적인 발명품은 가죽의 조각들을 이었던 뼈바늘이었다고 생각한다. 도끼든 칼이든 죽이고 분해하는 힘을 통해 자연의 지위를 얻은 인간은 바늘을 통해 죽이고 분해한 것들을 다시 이어 삶을 가꿀 수 있었다.
무엇이 바늘이고 무엇이 실일까? 나는 야자나무 아래 그물을 깁던 노인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