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분...”, “환자분...”, “환자분 눈을 떠보세요...”, “환자분 눈을 떠보세요...”
아주 멀리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리려 하지만 쉽게 눈을 뜰수가 없다. 가까스로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유리로된 방 한가운데에 누워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깨어나셨군요. 수술 후 24시간 만에 깨어나는 거예요. 수술 3일전부터 간성혼수로 정신을 잃으셨으니 6일만에 깨어나신 거네요.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눈을 뜨자 옆에 서있던 간호사가 반가운 듯 이렇게 말을 한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수술이라니?’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잠시 복잡한 생각을 하던 중 몸을 움직이려고 하니 내 몸이 자유롭지 못함을 발견하고, 나의 몸 상태를 살펴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양쪽 팔과 다리는 침대에 묶여 있었고, 코에는 인공호흡기가 꽂혀져 있었고, 머리맡에는 10여개의 링거병과 혈액봉지에서 나온 튜브들이 각종 기계를 통하여 가슴 쪽으로 연결이 되어 있고, 복부에는 6~7개정도의 튜브들이 꽂혀 있어 배속에 고인 피와 이물질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는 환자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의료진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에 잠긴다.
병원에 오기 전까지 나는 나름대로 건강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큰 병치레를 하지 않았고 병원도 치과치료를 제외하고는 거의 출입하지 않았다. 두어 달 전에 회사에서 실시한 건강검진에서도 초음파 검진까지 받았지만 결과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나는 자동차회사에서 신차 개발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2003년 하반기부터 새로이 출시될 차량의 개발 때문에 2002년 하반기부터는 무척이나 바쁜 생활을 하였다. 특히 2002년 10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연구소부문에 파견근무를 하면서 더욱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때 유난히 몸이 피곤함을 느꼈고 예전에는 없던 변비와 설사증세가 반복적으로 계속 되었으며 소변의 색깔이 붉은색을 띄어 몸에 무슨 이상이 있다는 것을 감지 하였지만,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바쁜 업무에 묶여 있어서 병원에 갈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11월30일 나의 눈자위가 노랗게 변한 것을 발견한 회사동료는 깜짝 놀라 병원을 찾아가 진찰을 해보라고 이야기하였고, 나는 저녁 늦게 가까운 병원의 응급실을 찾아가서 대수롭지 않게 나의 증상을 이야기하고 검사의뢰를 하였다. (이날도 무척이나 피곤하고 귀찮은 마음에 병원에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묘한 기분이 들어 병원에 들른 것이었다. 지금 생각 해보면 이때 병원에 가지 않았다면 정말로 큰일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간단하게 피검사를 위하여 채혈을 한 후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후 내 혈액샘플이 잘못된 것 같다고 재검사를 요구하여 다시 채혈을 한 후에 결과를 기다리던 중 깜빡 졸았다.
“이거 뭐가 잘못된 것 아냐?” “아까도 이렇게 나와서 다시 검사를 한거야.” 잠시후 의사와 간호사들의 웅성거림에 잠에서 깨었다. 의사는 현재 간의 효소치인 GOP/GPT수치가 2000 이상(정상수치는 40미만) 상승 되어 매우 심각한 상태이므로 즉시 입원치료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난생처음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앞으로 시작될 기나긴 투병생활의 시작이 될줄을 이때까지도 생각하지 못했다.
의사들의 심각한 말과는 달리 처음 입원할 때 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 피곤하여 발생된 병이니 이번 기회에 며칠 푹 쉬고 나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런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나의 몸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 되어갔고, GOP/ GPT수치를 낮추기 위하여 투여한 약품도 별 효과가 없이 더 나빠지기만 하였다. 입원한지 이틀째 되던 날 주치의는 이곳에서 치료가 어려우니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옮기라고 권고를 하였다. 주치의와 가족들이 상의하여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치료 받기로 결정을 하고 즉시 구급차로 긴급이송을 하였다.
12월 3일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후 혈액 검사를 해보니 GOP/GPT수치는 더욱더 악화 되어있는 상태였고, 검사결과를 확인후 주치의는 조심스럽게 간이식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미리 준비를 하시라고 가족들에게 말을 하였다. 입원후 계속되는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더욱 악화 되어갔다. 며칠이 지난 후 난 주위가 뿌옇게 보인다는 것을 느꼈다. 집중을 하고 사물을 보면 잠시 사물의 윤곽이 보였다가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치의는 간 때문에 시력의 저하가 올수는 있지만 이렇게까지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경우는 없는데 이상하다며 안과검진을 의뢰하였다. 다행히 시신경은 손상되지 않았다는 검사결과를 받았으나 수술 후 시력회복 여부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입원후 4일째 되던 날 계속 악화되던 병세 끝에 간성혼수가 왔다.
장내에서 음식물이 분해 되는 과정에서 암모니아와 같은 유독물질이 만들어 지는데, 이러한 유독물질은 간에서 해독을 한 후 소변을 통하여 몸 밖으로 배출이 된다. 간부전등 심각한 간 기능 장애가 오면 유독물질인 암모니아는 간에서 제대로 해독을 하지 못하고 뇌에서 흡수를 하게 되어 암모니아 중독으로 간성혼수에 빠지게 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계속적인 관장을 통하여 장내의 변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 당시 나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관장을 한 후 배변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집에 가야 한다는 둥, 화장실에서 배변을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가족들이 애가 탔다고 한다. 계속 악화되는 병세 때문에 결국 간이식수술이 결정이 되었고 가족과 친지 친구들 중에서 기증자 선정을 하였다.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혈액형이 같은 아버지와 아내가 이식을 위한 검사를 받았고, 남편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아내가 기증을 하기로 용기 있는 결정을 하였다.
기증자를 찾는 과정에서 급한 소식을 들은 교회의 목사님께서 기증을 자청을 하고 병원에 찾아오셨고, 사촌동생과 친구 몇 명 또한 기꺼이 기증을 하겠다고 병원에 찾아왔었다. 수술후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아무 주저함 없이 간을 제공하여 진정한 부부애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부인과, 진정한 동료애가 무엇인지 보여준 목사님과 동생, 친구들 때문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보통 간이식 수술은 위험이 많이 따르는 복잡한 수술이기 때문에 많은 검사를 마친 다음 환자의 몸 상태가 안정된 상태에서 실시가 되지만, 계속된 간성혼수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체온도 높아져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기 때문에 12월 10일로 수술이 결정이 되었고, 난 무의식상태에서 수술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술은 예상보다 힘이 들었는지 수술시간은 오래 걸렸고 밖에서 기다리던 식구들은 수술실 상황판만을 보며 불안하고 초조하게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보통 10시간정도 걸리는 수술이 13시간이 넘게 걸려 끝이 났고, 수술 후 나와 부인은 중환자실로 이송이 되었다.
나는 마치 꿈속을 헤매듯이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에 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 누워 있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고, 나는 이때 끌려가면 정말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부인과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필사적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또한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나는 중국과 일본 프랑스 등으로 이동을 하며 수술을 하였고, 각국에서는 특이한 방법으로 치료를 하였다. 이때의 기억들이 너무도 생생하여 의료진들과 이야기한 대화내용조차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간이식 수술의 경우 수술자체가 환자에게 워낙 큰 스트레스를 주어 환자들 대부분이 이런 비슷한 경험을 겪는다고 하며, 이를 의학적으로는 싸이코시스 라고 한다.
머리맡의 기계에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요란한 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에 눈을 떠보니 기계를 점검하기 위하여 간호사가 들어와 있었다. 나는 간호사에게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여기가 어딘지를 물어 보았고 그제야 아내가 나를 위하여 간을 제공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고생만 해오던 부인이 남편을 위하여 간까지 떼어주고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아내의 상태를 물으니 다행히 아내도 수술을 잘 마친 후에 회복실에서 회복 중이라고 하였다. 잠시 후 의사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수술은 잘 되었고 수술시 쪼그라든 폐를 펴기 위하여 기침을 하여 가래를 끌어올려 뱉으라고 하셨다. 그런 후 나의 눈 상태를 점검 하였다. 나의 시력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의사선생님께서는 다행이라며 기뻐해 주셨다. 수술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기침을 하면 배가 아파서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하루가 지나자 유리밖에 부모님과 동생, 이모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난 눈물이 별로 없는 편이었는데 쏫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인터폰을 통하여 수고했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목이 메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나는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면회시간만 되면 눈물을 흘렸는데 한번 눈물이 터지면 좀처럼 그칠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때 흘린 눈물이 몇 주전자가 되리라. 얼굴의 혈색이 돌아오고 몸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간호사는 TV리모컨을 주었고 TV를 볼 수가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TV인 것처럼 모든 것이 신기했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뉴스를 보았다.
그렇게 좋아지던 병세가 수술 후 4일이 지나자 갑자기 악화되기 시작되었고 결국엔 다시 혼수상태까지 되고야 말았다. 간 이식 수술 후 드문 경우에 거부반응이 오는데, 간 조직검사를 하자 최악의 결과인 거부반응으로 진단이 내려졌다. 아마도 지금의 상태가 좋지 못하여 재수술을 하여야 할것 같다고 주치의께서는 아버지에게 말씀을 하셨다. 힘들게 수술을 하여 이제는 살았다고 생각을 했는데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리는 아버지에게 너무나도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지만 다시금 식구들을 모아 대책회의를 실시하였다. 그러던 중 기적과 같은 일이 발생을 하였는데 뇌사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뇌사자의 장기이식 관리는 국립장기이식관리기관(KONOS)에서 관리를 하는데 서울의 서너 개 병원만이 이러한 뇌사자의 장기를 제공 받을 수가 있다. 마침 그때가 강남 성모병원이 뇌사자의 장기를 기증 받을 순번이었는데 검사를 해보니 나와 혈액형과 조직이 비슷하여 이식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사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장기기증이 활성화 되지 못하여 기증자가 거의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시기와 조건이 맞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긴급히 12월 17일 오후에 다시 이식술이 시작되어 13시간이 지난 새벽에서야 수술이 끝났다. 수많은 의료진이 투입된 복잡한 수술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감염된 혈액이 수술 후에도 계속 배어져 나와 이를 제거하기 위한 또 한차례의 수술이 12월 19일 이루어 졌다.
다시 또 꿈을 꾸었다. 수술후 나는 많이 호전이 되어 스위스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부인과 아들과 요양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예전에 찾았던 스위스의 인터라켄이 꿈에 나타난 것 같다.) 푸른 잔디밭 위에서 아내와 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환자분...”, “환자분...”, “환자분 눈을 떠보세요...”,“환자분 눈을 떠보세요...”
하이톤의 여자목소리에 나는 다시 깨어났다. 간호사는 그간의 일들과 재수술과정을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제야 난 첫 번째 수술후 중환자실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있던 중환자실이 아니었다. 지난번 내가 누워있던 병실은 저기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첫 번째 수술후 몇 개 제거되었던 튜브들이 다시 꽂혀있고 이제 처음부터 다시 회복 과정을 밟아야 한다. 가래침을 계속 뱉어내고 숨쉬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아내가 휠체어를 타고 면회를 왔다. 수술을 한뒤라서 그런지 헬쓱한 했지만 그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나는 목이 메어 한참 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울먹인 후 간신히 서로의 상태를 물었고 다행히 상태가 좋다는 대답에 안심을 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중환자실에서 순조롭게 회복을 하던중 갑자기 한기가 들며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였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고 열이 39도까지 올라갔다. 또 거부반응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거부반응은 아니었고 엑스레이 판독결과 폐에 물이 찼음을 발견하였다.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오른쪽 옆구리에 손가락 굵기의 튜브를 삽입하였다. 저녁 9시경에 튜브 삽입시술을 하였는데 삽입하는 순간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고, 이후 숨쉴 때(특히 들숨시) 너무 아파서 숨을 쉬기가 너무 괴로웠다. 진통제를 두 번이나 맞았으나 소용이 없었고 밤새도록 한숨을 못자고 숨을 헐떡이면서 밤을 지새웠다. 아마 이때가 가장 힘든 순간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다음날이 되자 고통이 점점 줄어들었고 병세도 호전이 되어갔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드디어 중환자실에서 나와서 7층의 1인용 무균실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지내면서 별 문제없이 회복이 되었고 복부에 있는 튜브들이 하나씩 제거되면서 정말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다. 특히 옆구리의 튜브를 제거할 때는 너무 좋아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1인실로 옮겨지고 며칠 후에 입원하고 처음으로 거울을 볼 수가 있었다. 거울을 보는 순간 난 깜짝 놀랐다. 수술 전 90kg에 가깝던 몸무게가 불과 한달 만에 25kg이나 줄어들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거울 속에 있었다.
1인용 무균실에서 일주일 동안 회복후, 4인용 무균실로 자리를 옮겼다. 의사 선생님은 이제부터 퇴원하기 위하여 운동을 하라고 하였다. 퇴원이라는 소리는 너무나도 반가운 소리였고 이를 위하여 열심히 운동을 하였다. 이렇게 별다른 문제없이 회복이 되어 갔고, 드디어 의사 선생님께서는 1월 18일에 퇴원을 해도 좋다고 하였다.
퇴원일 아침에 약제실에서 선생님이 오셔서 복용약품의 종류와 복용방법에 대한 교육과 퇴원후의 식생활 방법과 외부 출입시 마스크 착용건, 자외선차단과 각종 세균감염에 주의해야 하는등 생활방법에 대하여 교육을 해주셨다. 나는 너무 기쁜 마음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간호사 선생님들과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들의 축하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40여일 만에 병원에서 퇴원하여 그토록 그리던 집으로 갈수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며칠 전에 아버지와 동생이 퇴원후 나의 감염을 우려하여 미리 청소와 소독을 하여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으며, 안방에는 병원과 같이 외부에 유리로 된 덧문을 설치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해 놓았다. 이렇게 다시 살아 돌아온 집은 너무 반가웠고, 내가 쓰던 집기하나하나가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고, 4일후인 1월 22일 혈액검사를 위하여 병원에 방문을 하였다. 혈액검사후 7층 무균실과 간호사님들 그리고 장기이식센타를 들러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1월 23일 아침에 일어나니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아침식사를 하고 잠시 누워 있는데 울렁거림이 점점 더 심해져 갔다. 병원에 전화를 해서 상태를 말하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하여 다시 병원으로 출발하였다. 차로 병원까지 가는 동안에 상태는 더욱 악화가 되어 속을 쥐어 짜는 듯한 고통이 왔고 허리를 펼수가 없었다. 병원에 도착한 즉시 다시 입원을 하게 되었고 검사결과 장 유착이라는 검사결과가 나왔다. 장 유착은 개복 수술시 장이 공기에 노출이 되고, 수술중 생긴 피와 같은 이물질들로 인하여 일부의 장벽이 밀착하여 붙게되어 음식물의 통행을 방해하는 증상이다. 입원직후 금식이 실시되었고 콧줄(L튜브)을 삽입하였다. 엑스레이를 찍어본 결과 장유착으로 인하여 위가 엄청나게 늘어나 있는 상태였고, 그날 밤에는 엄청난 양의 위액을 토해 내었다. 장 유착을 풀기 위하여 관장과 걷기 운동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2주가 지나도록 차도가 없었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다시 엑스레이 조영 검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소장의 유착으로 인한 완전폐색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결국엔 2월 6일 소장 박리수술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수술을 3번이나 했지만 모두 무의식 상태에서 들어가서 수술실의 모습을 알지 못하였다. 수술실로 내려가자 푸른색가운을 입은 의사가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처음 보는 수술실의 광경인데도 의외로 담담하게 볼수가 있었다. 잠시 후 의사는 나의 입과 코에 마취마스크를 씌웠고, 숨을 두어 번 쉬자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수술은 예상보다 빠르게 끝났다. 수술 후 하루 동안 중환자실에서 보낸 후 일반병동으로 다시 올라왔다. 수술 후 하루가 지나자 가스가 나왔고 대변을 볼 수가 있었다. 드디어 그 끔찍했던 콧줄이 제거되자 날아갈 듯이 몸이 가벼웠다. 이후 10일간의 회복기를 거쳐서 2월 17일 드디어 퇴원을 하게 되었다. 퇴원하는 날 간호사 선생님들은 반가와 하며 또다시 들어오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해주었고, 그동안 정들었던 병실을 나오면서 퇴원후 관리를 철저히 하여 다시는 재입원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였다.
사람의 몸에는 면역이라는 자연치유의 기능이 있다. 면역기능은 외부에서 병균들이 침투해 오면 이를 퇴치하기 위하여 항체가 만들어 지는데, 치유된 후 같은 병균에 대해서는 발병을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장기이식자의 경우 이식된 장기는 면역체들이 외부에서 침입한 이물질로 간주하여 공격을 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고자 면역 억제제라는 약품을 복용하여 이식된 장기를 보호해야만 한다. 이 때문에 퇴원후 면역 억제제, 스테로이드, 항바이러스제 등의 약들을 지정된 시간에 맞추어 복용을 하여야 한다. 퇴원하고 처음에는 약의 복용시간을 지키기가 어렵고 순서대로 약을 복용해야 하는데,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무척이나 고생을 하였다. 그래서 일자별, 시간대별 약품 복용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약을 복용한 후 체크를 하여 이제는 별 차질 없이 약품을 복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정확한 시간을 맞추어 약품을 복용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이제 퇴원한지 4개월이 지나가고 있다. 몸의 상태도 많이 좋아졌고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근처의 공설운동장에서 아내와 아들과 걷기운동을 하고 있다. 퇴원시 65kg이었던 몸도 이제는 75kg까지 복구가 되었다. 이제는 꾸준한 운동과 식사조절로 이 정도의 몸매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번 병원생활을 하면서 나에게는 너무나도 좋은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과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려운 때 나를 도와준 친구들과 직장동료들 가족들이 있었기에 그 힘든 과정을 헤치고 나올 수가 있었다고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도 오직 남편을 살리고자 아무 주저함 없이 간을 기증한 아내는 진실한 부부애가 무엇인가를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내가 무엇을 하여도 그녀가 보여준 사랑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앞으로 더욱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그녀에게 받은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을 하려 한다.
그리고 자식의 죽음이라는 비통한 상황에서도 다른 생명을 위하여 장기기증이라는 큰 결단을 해주신 뇌사자 가족 여러분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이런 커다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앞으로 열심히 사회에 봉사를 하며 살아가는 길뿐이라고 생각이 든다.
또한 갑작스러운 자식의 병으로 인하여 너무나 큰 충격을 받으셨지만, 슬기롭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결국엔 자식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내신 아버님과 자식의 병세를 호전시키기 위하여 다니시던 직장까지 버리시고 입원기간 내내 자식의 병간호를 하셨던 어머님. 부모의 한이 없는 사랑을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저의 수술을 집도하시고 치료해주신 김동구 교수님, 윤승규 교수님, 최종영 교수님, 김세준 선생님, 김신선 선생님, 고윤석 선생님, 뇌사자 장기 확보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해주신 장기이식센터의 전희옥 코디네이터 선생님, 힘든 여건 속에서도 항상 다정하게 치료를 해주신 중환자실과 7층의 간호사선생님들과 나의 회복을 위하여 도와주신 강남 성모병원의 의료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입원중 거의 매일 사위를 보기 위하여 찾으신 장인. 장모님, 누구보다도 많은 힘을 주었던 동생내외, 내게 큰 힘을 북돋아 주셨던 이모님들, 항상 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주신 목사님과 교회 성도님들, 모두 자신의 일처럼 걱정의 해주신 일가친척들, 초등학교 친구들,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교 친구들, 회사 동기들, 공장 사무실과 현장의 직원들, 연구소의 직원들 등 나의 회복을 위하여 너무도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이러한 많은 분들의 걱정과 염려덕분에 내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 나올수 있었던 것 같다.
요즘에는 보이는 하늘의 구름이 예전같이 무의미하게 보이지 않는다.
요즘에는 들려오는 새소리가 예전같이 무의미하게 들리지 않는다.
요즘에는 불어오는 바람이 예전같이 무의미하게 느껴 지지 않는다.
하마터면 다시는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할 뻔했던 소중한 것들이다.
약 70여일 동안 생과 사를 넘나드는 병원생활을 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가 있었다. 먼저 그 동안 간과하며 살아왔던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너무나도 어렵게 다시 찾은 나의 삶을 위하여 앞으로는 더욱 소중하게 가꾸며 살아갈 것이다. 또한 나의 주위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을 해야겠고, 나아가서 이 사회를 위하여 무언가 이바지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다.
'지선아 사랑해'해 대한 곽석자님의 글
====================================
.................
작가를 무심히 쳐다보며 힘든 세월을 이겨내고 있는
꽃같은 젊은 나이의 한 여자의 인내를 뭉클하게 가슴깊히 느꼈다.
나도 서가에서 그의 책을 우선 빼어 들고 다음으로 ‘닮은꼴...영혼’ 그리고 ‘콘돌리자 라이스’를 택했다. 아직도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그에 관련된 책을 골르며 쓸쓸히 발길을 돌린다.
이세상은 그래도 아직 따뜻하게 정을 전해주고 받는 곳이라는 증명을 보여 주는듯 현장에서 다소곳이 앉아 열심히 싸인하고 있는 ‘이지선’과 대학생, 젊은 직장인 그리고 꼬마 아이들을 다리고 온 주부들이 주고 받는 짤막한 대화와 정겨운 싸인 문체를 어깨 넘어로 기웃거리며 나는 그곳을 떠날줄을 몰랐다.
그의 책에서 인용하면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습니다.
제가 당한 일이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고난을 어떻게 이기는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때로는 고난 자체가 가장 큰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삶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열매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저는 이제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제 얼굴과 짧아진 손가락들, 치료실에서 보낸 수많은 낮과 밤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지금 제 안에 담겨 있는 고난이 가져다준 축복의 보물들은 정말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 안에 있습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지금은 상상치도 못할 일들이 앞으로도 펼쳐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첫댓글 소인의 부족한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이 부럽네요..
저희랑 비슷해서..마치 저희 얘기를 읽는 것 같았어요..앞으로는 더더욱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cine100님 진짜진짜로 축하드립니다.^^*
저도책을 읽어보았습니다 다들 투병기가 상당하내요 저는거기다대면 아무것도아님니다 다주님의은촣이 함께하나봐요
고생하셌읍니다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눈물이 앞을 막네요 행복하세요
가끔씩 까페에 들어오지만 댓글남김은 처음이네요.^^(오늘에서야 총무님의 감동적인 글을 보았습니다) 저도 수술후 장기이식센터에 인사드리러 갔을때 총무님 건강한모습만 봐서 몰랐는데 이런사연이 있는줄은 몰랐네요 가장최근에는 12월송년모임에서 뵙고^^ 처음 이식센터에 인사갔을때는 프로그랍도 나눠먹었었는데^^ㅋㅋ 동인회위해 늘 수고하시는 총무님 언제나 건강하시고 주님안에서 행복하세요~~
너무많이고생하셨네요.의사분들사랑하는아내분여러분들수고하셨어요.다들건강하시고행복하세요.
눈물이나네요.저두아내가기증자 나서요.
읽는 내내 가슴이 뭉클하네요. 저두 어제 이식해야한다고 의사선생님이 야기 해주셨는데 맘이 찹찹합니다. 건강해지셔서 용기가 나네요.
이식하고 입원중인 초봅니다
주시는글 한자속에 저를끼워
함께 울었습니다
울지않을수없는 기억들이니까
이식하신분은 다 아실겁니다
지난 수술후의 과정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건강하게 행복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