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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전문은
전, 경기대 신겸수 교수께서 2021 김삿갓문학 학술심포지엄(2021.10.02 난고 김삿갓문학관)에서 발표한 논문입니다.
영월에서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발표하셨기에 원문과 시진 그대로 올립니다.
과체시 「충혼응포월산미」(忠魂應飽越山薇)를 통해 본 김삿갓과 영월
신겸수 (전,경기대 교수)
I. 들어가며
난고 김병연(蘭皐 金炳淵 1807-1863)은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영월로 들어와서, 커가면서 글공부도 하고 결혼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입신해보려는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좌절에 빠진 이 청년은 스무 살 초반에 집을 떠나서 57세로 전남 화순 동복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영월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아들 익균에 의해서 그의 유해가 지금의 노루목 묘소로 이장되었고, 정암 박영국 선생 등의 노고로 현재의 묘소가 확인되었으며, 이후 문학관이 건립되는 등, 영월은 김삿갓 문학의 메카로 그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그런데 방랑시인 김삿갓에 대한 관심이 이처럼 높아지고, 영월에 대한 세인들의 발길도 더욱 잦아지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김병연 애호가나 영월군에게는 하나의 유감스러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김병연이 이곳에서 제법 오래 살았다고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월 어느 곳에서 어떻게 얼마 동안이나 살았는지 등, 삶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만한 증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2014년 대학교수 생활을 정리하고, 노년을 김삿갓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김삿갓의 과체시를 수집 연구하는 중, 시인이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영령들을 위한 제사를 참관하고 쓴 것으로 보이는 시가 있어 이 기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II. 김병연 일가의 영월 생활 (추정)
이 발표의 목적이 한 편의 과체시와 김병연, 그리고 영월이라는 3개 테마를 연관짓는 일이므로 일차적으로 시인 자신의 전기적 고찰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김삿갓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대구 선생은 김병연이 10세경 부모와 함께 삼옥리로 들어와 정착하였고, 24세경 집을 떠나 끝내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였고(정대구,『김삿갓시연구』, 숭실대학교 대학원, 1989, 217쪽.),
그의 주장은 대체적으로 큰 반론 없이 수용되고 있다. 이런 추정을 근거로 할 때, 김병연이 영월에 살았던 기간은 대략 14년에서 15년쯤으로 보인다. 이 기간 동안 김병연은 과거시험을 위한 글공부를 하였고, 한 살 위인 장수 황씨와 결혼을 하였고, 학균과 익균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이처럼 인륜대사를 행할 수 있을 정도로 한 청년이 지속적인 체류를 할 수 있었던 지역이 영월의 어느 곳이었을까? 이 소박한 질문은 영월과 김병연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는 매우 중요한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누구도 심도 있는 고민을 하지 않았다. 영월지역 일대에서 김병연과 인연이 있다고 알려진 곳으로는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와 하동면 어둔리 두 곳이다. 김병연이 삼옥리에 살았다는 이야기는 영월군에서 발행한 『김삿갓의 유산』에서 여러 사람들의 현지 제보와 증언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박영국, 『김삿갓의 유산』, 영월군, 1992, 73-75쪽.).
아울러 김삿갓이 삼옥리에서 4km 떨어진 어라연에서 낚시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영월의 유학자 송순철옹이 살던 영흥리로 김병연이 가끔 지나가다 들렸다는 증언도 있어 김병연의 삼옥리 거주설을 뒷받침한다.
정대구 선생의 추정과 안동김씨 휴암공파 족보를 근거로 김병연의 성장 및 결혼, 그리고 가출의 과정을 되짚어 보자.
김병연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은 영조 41년 (1765년 갑신) 출생하여, 24세 때인 1789년(을유)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서북지방 무관으로 발령을 받았고, 홍경래난이 일어나던 1811년(신미) 9월 함흥중군 선천부사로 승진 임명되었다. 아마 이 무렵 김병연의 아버지 김안근 일가도 김익순을 따라 선천으로 들어가 함께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홍경래 난은 발발 다음 해인 1812년 (순조12년 임신), 관군에 의해 평정되고, 그해 9월 2일,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이 행하여졌다. 김익순은 참형에 처해지고, 부인 전주이씨는 관비에 편입되었으며, 아들 김안근은 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때 정황에 대하여 정암 박영국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金삿갓의 조부와 조모 부친은 모두 벌을 받았는데 金삿갓의 모친은 벌 받은 흔적이 없음은 곡산으로 자식들과 같이 피신한 결과라 할 것이고 또 어린것들만 타향에 보낼 리가 없고 보면 삼모자가 같이 가서 은둔하였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아울러 김익순 일족은 폐족이 되는데 이는 향후 김병연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첫 단추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런 처벌은 그리 가혹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의 관례에 의하면 반역자 및 그 협조자는 삼족을 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김익순 일족 중 목숨을 잃은 것은 김익순 한 사람에 그쳤고, 나머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기는 하지만 잡혀서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김익순이 처형되던 날, 큰손자 김병하와 작은 손자 김병연은 자기 집안의 하인 김성수를 따라 곡산으로 피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김병하는 만7세 1개월, 김병연은 만5세 1개월의 나이였다.
김익순 일족이 받은 처벌이 왜 상대적으로 가벼웠는가? 이에 대하여 필자는 당시 조정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홍경래난이 일어날 즈음 조선의 조정에서 안동김씨의 세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다음 해인 1801년(신유), 순조가 즉위한다. 임금이 어리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고, 이 해에 주문모 신부 등 800명의 천주교도들이 학살되는 신유사옥이 발생했다. 1804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종결되고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는데 이 시기부터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金朝淳 1765-1832)이 섭정을 하게 됨으로써 안동김씨의 조정내 입지가 커져가기 시작한다. 김조순은 김익순보다 한살이 어렸고, 1832년(임진), 사망하기까지 조선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사람이다. 그가 살던 집 옥호정(玉壺亭)은 지금의 종로구 삼청동 일원에 있던 저택으로 지금은 없어져서 그 형태를 알 수 없지만, 「옥호정도」라는 그림으로 남아 조선시대 민간정원 후원을 잘 보여주는 좋은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권력의 중심에 있던 김조순과 안동김씨 세도가들에게 홍경래난은 일종의 정치적 오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김조순 섭정 7년 만에 일어난 이 정치적 변고에 김조순의 종형인 김익순이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안동김씨들은 자기 집안 사람이 선천부사로서 반군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일족에 대한 처벌이 부역 당사자인 김익순의 처형 및 아내의 관비 편입, 아들의 귀양 정도로 마무리 짓고 직계 가족은 폐족은 하되 도망가도록 내버려 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김안근 일가는 1814년경 경기도 가평에서 가족이 재결합하였으며, 1816년경 영월 삼옥리에 정착하기까지 약 2년간 경기 강원도 일대를 전전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이동 경로는 가평, 양평, 춘천, 횡성, 평창, 안흥, 주천, 영월 등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사회적 여건을 고려할 때, 그들은 아마도 친척이나 친지가 있는 곳을 찾아 옮겨 살았지만, 한곳에 오래 살지 못하고 자꾸 이동한 것은 폐족이라는 신분이 탄로 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병연의 가족들은 세인들의 눈총을 피해서 더욱더 깊숙한 오지로 쫓겨 갔던 것이다.
필자는 김병연이 글공부를 하고, 결혼을 하고, 가출하기까지 삼옥리에 살았을 것이며, 그의 가족이 어둔리로 이주한 것은 김병연이 가출한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로는 어린아이의 성장, 교육, 결혼, 자녀 출생 등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삼옥리와 같은 일정한 마을 공동체에서만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아들 익균이 살았고, 아버지의 시신을 이장하여 모셨다는 지금의 어둔리 와석리 일대는 당시는 화전민들만 살던 극히 외진 곳으로 위와 같은 인간 주요 활동이 마무리 된 뒤에 김병연 가족이 숨어든 최후의 피신처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아마도 김병연이 가출하고, 본처 장수황씨가 죽고, 고아가 된 익균을 경주최씨가 맡아 기르면서 경주최씨가 어느 시점에서 거처를 삼옥리에서 어둔리로 옮긴 것이 아닌가 필자는 추정한다.
김병연의 삶과 관련하여 본처 장수황씨 이외에 경주 최씨라는 또 하나의 여인이 있다는 사실은 시인의 삶과 그의 가족생활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단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하여 학계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 안동김씨 휴암공파 족보에 의하면, 김병연의 본처 장수황씨는 1838년 9월 21일 사망하고, 경주 최씨라는 또 하나의 여인이 1863년(계해), 6월 18일 사망하여 그 묘소가 경주남산리에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안동김씨 족보는 2015년 한글로 발행된 을미보(乙未譜)를 포함하여 현재까지 모두 9차례 발간되었는데 시인 김병연에 관련된 기록은 1926년에 발행된 제5간 병인보(丙寅譜)에 최초로 나타난다.
炳淵字性深號蘭皐有文名 純祖丁卯三月十三日生癸亥三月二十九日卒
配長水黃氏丙寅生戊戌九月二十一日卒父哲周祖烘曾祖桂元外祖洪在成本南陽墓厝于火
后配慶州崔氏丁丑生癸亥六月十八日卒父興州祖□□墓慶州南山里卯坐
병연. 자는 성심, 호는 난고. 문명을 떨쳤음. 순조 정묘년(1807) 3월 13일 태어나 계해년(1863) 사망.
본처 장수황씨. 병인년(1806) 태어나 무술년(1838) 9월 21일 사망. 아버지는 황철주, 할아버지는 황홍, 증조는 황규원, 외조부는 홍계영. 본은 남양홍씨. 묘소는 화장함.
후처 경주최씨. 정축년(1817년) 태어나 계해년(1863) 6월 18일 사망. 아버지는 최흥주. 조부는 최□□. 묘소는 경주 남산리 묘좌.
기록이 보여주듯이 학균과 익균을 낳은 장수 황씨는 33세에 사망하는데, 이때 큰 아들 학균은 이미 2년 전에 형 김병하의 집에 양자로 보낸 상태이고, 작은 아들 익균은 8살에 불과했다. 경주 최씨가 어떤 연유로 김병연의 후처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집을 나간 김병연은 돌아오지 않고, 장수 황씨가 죽어 아들 익균이 고아로 남았기 때문에 그를 돌보아줄 새어머니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 사람들이 경주 최씨를 설득하여 후처로 모심으로써 홀로 남은 아이 익균을 맡게 했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김병연의 뜻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은 여지가 크지 않다. 바로 이 점이 후일 익균이 김병연을 세 번이나 찾아가 집으로 모셔가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완강히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이유였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익균을 맡아 키우던 경주 최씨는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농사도 지을 만한 하다고 생각하여 삼옥리에서 어둔리로 이사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영국은 “익균이 김삿갓이 방랑길에 오른 후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어둔에서 계속 살다가” 시인이 전라도 동복에서 작고하자 유해를 어둔의 어구인 노루목에 이장하고 어둔을 떠난 것으로 추측한다.
그렇다면 김병연이 10살 때쯤 들어와서 24살 때쯤 떠나기까지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옥리는 어떤 곳이었을까? 그는 이곳에서 글공부를 하고, 장수 황씨와 결혼을 하고, 큰 아들 학균을 낳고, 또 작은 아들 병연을 낳았을 것이다. 한 소년이 성장하면서 결혼을 하여 성가(成家)를 하려면 일정한 마을 공동체와의 소통이 필요하다. 김병연이 삼옥리 생활을 입증할만한 증거나 자료는 지금은 찾을 수 없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과 지리적 여건 및 유적조사 보고서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추정이 가능하다. 삼옥리는 영월 동강(東江)이 굽이쳐 흐르는 안쪽에 위치한 반도형 땅 안쪽에 자리 잡은 지역이다. 지금 사람들은 삼옥교라는 다리를 건너서 마을로 들어가지만 김병연이 살았을 당시에는 이런 다리는 없었을 것이고, 아마도 나룻배로 건너다녔을 것인데, 흐르는 물이 세차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동강이 래프팅 명소로 자리 잡은 데는 이 주변의 물결이 어떤 곳이지를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삼옥리는 일반인이 접근하기는 어려우면서도, 안으로 들어가면 일정한 마을이 있고 사람들도 제법 많이 살고 있어서 폐족이 된 김안근 일가가 숨어살기에 좋은 곳으로 추정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상수 집필, 영월삼옥리유적(寧越三玉里遺蹟))은 영월 삼옥리 유적 발굴과 관련하여 보고서를 내면서 삼옥리(三玉里)는 “남한강 상류지역인 동강의 회절부 일대로서 주변에 잔구성 구릉이 발달되어 있는데, 비교적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작은 침식분지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카르스트지형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측방퇴적으로 생성된 충적대지가 일부 형성되어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생활무대로 이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자연환경과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삼옥리 일대에 영월동강리조트 (지금의 동강시스타 리조트)의 건설이 추진되면서 이 일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이 발굴을 통해서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고, 이 발굴조사를 통해서 이곳이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대대로 물려 살던 주거지였음이 입증되었다.
동강시스타 리조트 부지 일대에서는 역사시대 유물로 “구들시설이 남아 있는 나말여초기의 주거지 8기와 내부에 집석시설을 갖춘 수혈유구, 소성유구” 등이 발견되었으며, 이들 유구(遺構)에서는 “주름문병을 비롯해 시루, 숫돌, 대호, 도자기류, 청동류, 철기류, 구슬류”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 주변의 움무덤에서는 “쌍용문 동경과 중국에서 유입된 각종 동전[개원통보, 상부통보, 천희통보, 천성원보, 황송통보, 숭령통보 등]”이 발견되어 묻힌 사람의 신분이나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며, 이곳이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영월지역의 사회, 문화상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지역임을 확인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런 유물들을 근거로 보건대, 삼옥리는 석기시대 이후 대대로 사람들이 거주하던 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평야지대에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강가에서는 어로를 하고, 산에서는 수렵을 하며, 평지에서는 농사를 짓는 등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기에 좋은 터전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지형적으로 세찬 강물이 가로막아 내륙의 일반인들과는 격리된 곳이기에 김안근 일가와 같은 폐족이 세인들의 눈총을 피해 살기에도 적합한 곳이었을 것이다.
부모를 따라 삼옥리로 들어온 김병연은 이곳 마을에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나고, 더 이상 가장으로 책임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언젠가는 신원복권이 되어 과거를 보고 입신양명하리라는 꿈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김병연은 한양으로 가서 부잣집 문객이 되어서라도 생계를 꾸릴 모색을 하였으나 이마저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한양은 이미 문객들이 넘쳐나 있었고, 아무리 재능이 있다한들 역적의 손자가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월로 돌아가자니 아내와 아이들을 대할 면목이 없고, 글공부밖에 한 것이 없으니 다른 대안이 있지도 않았다. 과체시 「회향자탄」(懷鄕自歎)에서 말했듯이, 그는 이른바 “울타리에 뿔이 걸린 양”(觸藩羊)의 신세가 된 것이다. 결국 그가 택한 길은 방랑이었다. 처음에는 단지 명승을 관람하러 떠난 것이었지만, 아마 그 자신도 그런 출발이 그를 영원히 집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쨌든 조선 8도를 누비면서 그는 가는 곳마다 시재를 발휘하고,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10여 년 동안 자라고 살았던 고향 영월에 대해서만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곳은 그의 가족이 생존을 위해 떠돌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고, 아직도 그의 가족이 세상의 눈총을 의식하며 숨죽이고 살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시와 과체시를 불문하고, 김병연이 영월, 삼옥리, 어둔리 등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회향자탄」은 흔히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삶에 대한 요약이라고 평가되는 이 시에서조차 시인의 고향을 짐작하게 하는 시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는 영월과 김병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끝없이 쫓겨 다니는 폐족으로서는 운명적 금기(禁忌)였다. 전제군주 체제하에서 역적의 후손이 설 땅은 없었다. 안동김씨 집안사람들조차 김병연 일가를 가까이하려 들지 않았고, 이런 냉대와 배척은 그 후로도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II. 김병연의 과체시「충혼응포월산미」(忠魂應飽越山薇)
2009년 한 서예가에 의해서 김병연의 과체시집 한 권이 번역 소개되었다. 책 이름은 『방랑시인 김병연 죽장에 삿갓쓰고』이며 저자는 윤신행이다. 윤신행은 수원에 거주하며 서예학원을 운영하는 서예가인데 우연한 기회에 그에게 붓글씨를 배우는 제자 한 사람이 고서 필사본 한 권을 가지고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의 서언(序言)에서 윤신행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2007년] 어느 날 나의 서제자(書弟子) 석청(昔靑) 어광선(魚光善)이 찾아왔다. 그는 고등학교 기술 선생인데, 다년간 내게서 서예를 익혔다. 현재는 학사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그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고서적을 들고 와서 해석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일단 살펴본 바 그 책의 표지에는 金笠詩라고 적혀 있었고, 붓으로 필사한 초서 문구는 겹친 글자가 있어 해독하기 난해하였으나, 대강 大意는 이러하다. “김립 시를 습득하여 보니 너무 감격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밥 먹는 것도 잃어 버렸다.”라는 습득자의 찬(贊)이 있었다.(윤신행, 『죽장에 삿갓쓰고』, 서예문인화, 2009, 5쪽)
김삿갓의 과체시집 필사본을 처음으로 번역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이 책의 출간은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학계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책발간의 목표가 표지에 명시되어 있듯이, “서예작품용 한시”에 맞추어져 있었는데다가 책 제목이 “방랑시인 김병연 竹杖에 삿갓쓰고”로 되어 있어 컴퓨터 검색에서 “김삿갓”으로 검색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필사본에 실려 있는 과체시를 순서대로 싣고 번역과 주석을 달았으며, 후미에 원본 이미지를 함께 수록하여 필사본의 원형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등, 김병연의 과체시 연구에 나름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이 책에는 모두 76편의 과체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마지막 76번 「난고김삿갓의 백두산시를 본떠 시를 짓는데 겸하여 운까지 달았다」(效金蘭皐白頭山詩兼步韻)는 김병연의 작품이 아니라 필사자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제외하면 책에 실린 김병연의 시는 75편이다. 이들 과체시 중 일부는 이응수 선생이 『김립시집』 대증보판에서 채록하여 놓은 것들도 있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동선』(東選)이나 『과시분운』(科詩分韻), 또는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과체시집들에서 확인되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다른 어느 필사본에도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새로운 작품들이 실려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과체시는 이 책에 68번째로 실려 있는 과체시로 제목은 「충성스러운 영혼들은 응당 월산 고사리로 배부르시리라」(忠魂應飽越山薇)이다.
그 원문의 생김새는 다음과 같다.
논의를 위하여 이 시를 탈초하면 다음과 같다.
忠魂應飽越山薇
01 落花古巖春相問 02 越女採採歌芳菲
03 淵明靖節菊露史 04 屈子淸愁荷製衣
05 遺壇芬苾倘酹忠 06 葉葉春薇可䭜飢
07 當年不食不義粟 08 越山猶多首陽薇
09 淸風孤竹感懷激 10 白雲蒼梧悲淚揮
11 山花紅瘦子規怨 12 九疑秋會生翠微
13 千秋士氣立祠祀 14 孰謂忠魂香火依
15 薰蒿縱薦蓮蘋澗 16 肹蠁難憑蘭蕙幃
17 遺風起問伯夷國 18 越峀香薇春正肥
19 生於魯山雨露恩 20 長以殷天日月暉
21 瓊英馥馥薄言採 22 一面華山千古崣
23 虛壇春滿灌盃鬯 24 古宮雲深栢甤葳
25 紅椒丹荔敬慕誠 26 公議千年在布韋
27 猶今若無六臣死 28 終古誰同二子歸
29 靑絲細筵越溪娥 30 錦江春雲紅翠霏
III. 시의 형식 및 내용 분석
충성스러운 영혼들은 응당 월산 고사리로 배부시르리라
01 落花古巖春相問 낙화암(落花巖) 오래 된 바위는 봄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02 越女採採歌芳菲 나물 캐는 영월 여인들의 노래 소리 싱그럽다.
03 淵明靖節菊露史 도연명의 정절(靖節)은 국화로 역사에 드러났고
04 屈子淸愁荷製衣 굴원(屈原)의 맑은 시름은 연잎 옷으로 지어졌지.
05 遺壇芬苾倘酹忠 유단(遺壇)에 분향하고 충혼들을 위해 술을 부으니,
06 葉葉春薇可䭜飢 올올이 살진 봄 고사리는 가히 요기가 되시리라.
07 當年不食不義粟 그 해에는 의롭지 않은 곡식일랑 먹지를 않았으니
08 越山猶多首陽薇 영월 산에는 햇빛 받은 고사리가 더욱 많았을 거야.
09 淸風孤竹感懷激 맑은 바람 부는 외로운 대숲에는 감회가 물결치고,
10 白雲蒼梧悲淚揮 흰 구름 아래 푸른 오동나무는 슬픈 눈물을 흩날렸지.
11 山花紅瘦子規怨 산꽃의 붉은 빛이 시드니 두견새가 원망하고
12 九疑秋會生翠微 엇비슷한 아홉 봉우리 가을 되면 희미한 비취빛이 생겨나는데,
13 千秋士氣立祠祀 천추의 기개 있는 선비들에게 사당을 세워 제사하니,
14 孰謂忠魂香火依 충성스러운 영혼들이 향불에 찾아든다고 누가 말했나?
15 薰蒿縱薦蓮蘋澗 수련과 마름이 핀 냇가에서 향쑥을 태워 연기를 올리니,
16 肹蠁難憑蘭蕙幃 난초향기 풍기는 휘장엔 파리도 얼씬 못하는구나.
17 遺風起問伯夷國 백이숙제의 나라를 묻는 풍속이 여전히 살아 있어,
18 越峀香薇春正肥 영월 산의 향기로운 고사리는 봄부터 진정 살이 찌기 시작한다.
19 生於魯山雨露恩 노둔한 산에 돋아나서 비와 이슬의 은혜를 입고
20 長以殷天日月暉 왕성한 햇빛과 달빛을 받으며 자라난,
21 瓊英馥馥薄言採 향기로운 옥 고사리를 부랴부랴 뜯노라니
22 一面華山千古崣 한 쪽에 꽃 핀 산이 천고에 우뚝 솟아있네.
23 虛壇春滿灌盃鬯 봄 빛 가득한 텅 빈 제단에 울창주를 부으니
24 古宮雲深栢甤葳 구름 깊은 옛집에는 잣나무와 꽃들이 무성하다.
25 紅椒丹荔敬慕誠 붉은 산초와 붉은 여지처럼 공경하고 사모하는 정성이
26 公議千年在布韋 천년에 걸친 공론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에게까지 닿았구나.
27 猶今若無六臣死 만약에 오늘날 사육신(死六臣)이 없다면
28 終古誰同二子歸 영원토록 누가 두 사람을 따르겠는가?
29 靑絲細筵越溪娥 영월 계곡, 푸른 실 같은 대자리 위엔 영월 미녀가 앉아 있고,
30 錦江春雲紅翠霏 금강(錦江)엔 봄 구름이 울긋불긋 펄펄 날려간다.
이 과체시는 총30구로 되어 있다. 시의 제목은 “忠魂應飽越山薇”(충성스러운 영혼들은 응당 영월 산의 고사리로 배부르시리라)로 7언으로 되어 있어, 시인 자신이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병연 과체시의 제목은 몇 글자만으로 된 짧은 제목도 있고, 이십여자가 넘는 긴 제목도 있다. 하지만 5언이나 7언으로 된 절구나 율시에 익숙해 있고, 7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과체시의 특성 상 이 시의 제목은 과시 시험관들이 제시했다기 보다는 시인 자신이 택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시는 상평성 다섯 번째 운인 “微”를 운통(韻統)으로 하고 있으며, 제8구의 끝에서 제목의 마지막 글자인 “薇”를 운자로 채택하고 있다. 이는 제목의 한 글자를 운자로 택하여 해당 운통에 속하는 글자들로 짝수구의 운자를 배열하고, 제8구의 운자는 가급적 제목에 들어 있는 글자를 사용해야 한다는 과체시의 규칙을 따른 것이다. 이 규칙이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김병연은 과체시에서 이 규칙을 충실이 따르고 있다. 과체시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신광수의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의 제8구는 “何處江山非我愁”로 루(樓) 운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제목 속에 포함된 글자는 아니다. 김병연의 과체시는 완벽할 정도로 과체시의 규범을 준수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실제로 과거에는 응시해 본 적이 없으면서도 과체시를 지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해진 보수적 성향이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시는 30구로 되어 있어 혹시 일부 구절이 누락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과체시는 통상 36구의 완결된 형식을 갖추거나, 마지막 2구를 낙구(落句)로 허용하여 34구로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서 34구 미만으로 지었음에도 급제한 답안이 있기는 하나 그 수는 많지 않고, 김병연의 과체시들은 대부분 34구나 36구의 표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만약에 이 시의 누락된 구절을 확인할 수 있다면 향후 이 시의 배경과 의미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하여 우리는 이 시의 비교 판본이 발견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제목과 제8구에 등장하는 월산(越山)은 영월산(寧越山)을 의미한다. 월(越)은 시에서 많은 경우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고사나 미녀 서시(西施)로 유명한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를 의미하는데, 이 시에서는 기타 관련 시어와 시의 내용상 영월(寧越)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두 차례의 월산(越山)이외에 越女(제2구), 越峀(제18구), 越溪(제29구) 등 모두 5번 “越”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영월(寧越)을 의미함과 동시에 서시를 비롯한 많은 미녀가 있어 유명했던 월나라를 연상시키는 효과를 함께 지닌다.
시인은 단종이 죽자 금장강에 투신한 충절들의 제사가 거행되는 어느 봄날, 민충사를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봄 제사이니 필경 단옷날이었을 것이다. 강변 절벽에 따사한 햇살이 비치고, 멀리서는 나물 캐는 여인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제1구에 나오는 낙화고암(落花古巖)은 영월 동강에 있는 바위 절벽인 낙화암(落花巖)을 의미한다. 부여 백마강의 낙화암과 이름이 같은 동강의 낙화암은 단종을 모시던 시녀와 종인들이 투신한 곳으로 영조18년(1742),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 1685-1742)가 이 절벽의 위쪽에 “낙화암”이라는 비석을 세우고, 투신한 충절들의 신위를 봉안하기 위해 사우 민충사(愍忠祠)를 세웠다. 홍성보의 비석은 어떤 부랑자에 의해 훼손되어 강물로 버려졌다고 하는데, 다행히 해서체로 된 비문의 탁본이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어 그 형태는 알 수 있다(엄흥용 엮음, 『영월의 금석문』, 영월문화원, 2019, 37쪽.).
지금 세워져 있는 낙화암 비석은 1924년 영월군수 홍양(洪陽) 이석희(李錫僖 1884-1945) 등에 의해 다시 세워진 것이다.
동강 낙화암 원경
영월부사 홍성보의 낙화암 글씨
1955년 11월, 영월면장 김남규(金南圭)와 면 의원들이 이곳에 낙화암순절비(落花巖殉節碑)를 세웠다. 비석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음기(陰記) 건립내역이 새겨져 있다.
조선조 단종께서 영월에 머무시다가 정축년(1457) 10월 24일 천명이 불휴(不休)하여 갑자기 승하하셨다. 이때 시종(侍從) 시빈(嬪) 90여명이 모두 한꺼번에 순절하였다. 꽃잎처럼 떨어지며 인(仁)을 이루니, 충절은 해와 달을 꿰뚫었고, 슬픔은 강산을 흔들었네. 이름은 청사에 올라 천추를 두고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옛터에 변함이 없도록 비를 세워 충절을 드러내는 바이다. (李朝端廟, 駐蹕寧越, 丁丑十月, 二十四日, 天命不休, 奄遭昇遐, 侍從侍嬪, 九十餘人, 一切殉節, 花落成仁, 忠貫日月, 哀拯江山, 名登靑史, 千秋不朽, 舊址不變, 立碑表忠)
단종과 그의 충신들을 기리는 제사는 단종의 기일과 사계절 길일에 거행되었는데, 봄제사는 단오 어름에, 가을 제사는 단종의 기일인 음력 10월 24일에 올려졌다. 이 과체시를 지은 시인이 제사를 목격한 것은 봄 제사 때가 분명하다.
제단에 올려진 고사리를 보면서 시인은 도연명(陶淵明 365-427)과 굴원(屈原 340-278BC)을 생각한다. 도연명은 중국 동진 후기의 전원시인으로 정절(靖節)선생으로 불리웠다. 굴원은 초나라 말기 모함을 받아 쫓겨나서 시름에 겨워 지내다가 결국 멱라수에 몸을 던진 충절의 시인이다. 이 두 충신에게는 각기 아이콘(icon)이 있는데, 도연명에게는 국화가, 굴원에게는 연잎이 그것이다. 단종을 위해 충절을 바친 충신들을 위한 제단에 바쳐진 고사리를 보면서 시인은 중국의 충절 시인 도연명과 굴원을 생각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국화와 연잎을 고사리에 비유하는 것이다.
실로 도연명의 국화 사랑은 남다른 것이었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고, 그윽이 남산을 바라본다”(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처럼, 도연명은 국화를 노래한 많은 시구를 남겼다. 굴원 또한 초나라에 충성하였으나 모함을 받아 쫓겨나서 초췌한 은자(隱者)로 초야를 거닐었다. 그는 연잎으로 옷을 지어 입고 우국충정을 노래했던 고사는 유명한 충절의 범례로 회자되고 있다.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애연설」(愛蓮說)에서 지적하였듯이, 도연명의 “국화는 꽃 중에 은자”(花之隱逸者也)의 상징이다. 또한 연잎으로 옷을 지어 입는 풍습은 예로부터 은자들의 고사에서 많이 전해진다. 굴원 자신도 그의 시 「이소」(離騷)에서 “마름과 연잎 말아 저고리 짓고, 연꽃잎을 모아 치마를 만드네”(制芰荷以爲衣兮,集芙蓉以爲裳)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과체시의 서두에서 시인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초나라의 굴원이나 당나라의 도연명에 비유하고, 그 충신들을 위한 제사에 바쳐진 고사리를 국화나 연잎에 비견되는 위대한 상징으로 채택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물 캐는 여인들이 노래를 하면서 채취하는 것도 고사리요, 이후 전개되는 시상(詩想)이 백이숙제의 고사, 그리고 그들마저 비판한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시조와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제5구의 “유단”(遺壇)은 민충사의 제단을 말하는 듯하다. 시의 제5구와 제6구는 제사의 시작을 묘사하고 있다. “유단(遺壇)에 분향하고 충혼들을 위해 술을 부으니,/ 올올이 살진 봄 고사리는 가히 요기가 되리로다.”(遺壇芬苾倘酹忠 葉葉春薇可䭜飢). 여기서 “올올이 살진 봄 고사리”는 분명 충성스런 영혼들을 위해 제단에 제물로 올려진 고사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의 제단이 어떤 형태를 띠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일반적인 제사 제단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겠지만, 모시는 영령의 수가 많고, 신분상의 귀천이 있어서 어쩌면 셋으로 나누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한 근거를 우리는 장릉에서 거행되는 단종의 제사에서 찾을 수 있다. 영월 장릉에는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영혼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장판옥(長版屋)이 있는데, 정조15년(1791) 왕명에 의해 건립되었다. 김병연이 태어나기 14년 전이다. 이 사당에는 현재 사육신을 포함하여 충신 32명, 조정 관리 및 선비 186명, 환관 및 노비 44명, 여인 6명, 도합 268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장릉에서의 제사는 단종 기일 및 4명절, 즉 설, 단오, 추석, 동지에 올려지는데, 이때 배식단 위에 제물이 진설되고 유교식 제사가 모셔진다. 오늘날 배식단의 모습은 사진과 같이 화강석으로 된 3개의 제단으로 나뉘어 있다.
장릉 장판옥 앞의 배식단
영월의 여인들이 정성스럽게 채취하여 제단에 올린 고사리를 보면서 시인은 계유년(癸酉年)(1453) “그 해”(當年)를 생각한다. 단종 원년에 해당되는 이 해는 사육신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난 해이다. 과체시의 포서(鋪敍)에 해당되는 제7-12구에서 고사리가 지니는 충절의 상징성은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고사리가 충절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 말 고죽국의 왕자였다. 고죽국(孤竹國)은 은나라 제후국 중 하나로 청구국 서쪽인 난하 및 산해관 서방에 위치하여 약 천년 가량 지속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임금의 두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서로 임금의 자리를 사양하였고, 주왕(紂王)을 정벌하려고 출정하는 무왕(武王)의 말고삐를 잡고서 아무리 폭군이라고 할지라도 신하가 임금을 정벌해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간청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고, 무왕의 정벌로 인하여 세상은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자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으로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그들이 고사리를 캐먹고 사는 것을 풍자하여 그 고사리는 과연 주나라의 것이 아니냐고 비웃는 바람에 급기야는 굶어죽었다는 설도 있다. 이런 속설은 성삼문의 시조에서,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 주려 죽을 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세엣 것인들 그뉘 따헤 났다니.”라고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백이숙제와 그리고 수양산의 고사리 고사는 시에서 수양대군과 단종의 관계로 연결된다. 시의 제8구 “월산(越山)에는 수양(首陽) 고사리가 더욱 많았겠지”(越山猶多首陽薇)는 두 사람을 풍자한 구절이다. 월산은 물론 영월의 산을 의미하지만, 그 발음이 수양대군의 손자였던 월산대군(月山大君)과 발음이 같아서 세조의 왕위찬탈과 관련된 일련의 시대상황을 연이어 생각하게 한다. 또한 수양 고사리(首陽薇)는 1.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곡식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먹다가 죽은 고사리, 2. 수양대군을 연상케 하는 고사리, 3. 햇볕을 받아 잘 자란 고사리 등 다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11구의 자규(子規)는 불우한 天子의 전형적인 상징이지만 이 시에서는 단종 자신이 시를 통해 스스로를 비유한 중요 은유이기도 하다. 단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淸泠浦 명승제50호)로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서쪽으로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섬과 같은 곳이다. 이곳이 여름 홍수로 범람하자 단종은 영월읍내 객사였던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하듯이 단종은 자신을 촉나라 마지막 임금으로 죽어 새가 되었다는 두우와 동일시하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一自寃禽出帝宮 한 마리 원한 맺힌 새 궁중을 나오니
孤身隻影碧山中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 밤이 가고와도 잠을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 해가 가고와도 한은 끝이 없다.
聲斷曉岑殘月白 소리 끊긴 새벽 묏부리에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 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하늘은 귀머거리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何乃愁人耳獨聽 어찌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이리 밝은가.
단종의 애절한 심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켰고, 그 한 징험은 오늘날 장릉에 서 있는 정자 배견정(拜鵑亭)과 바위 명문(銘文) 배견암(拜鵑巖)으로 구현되어 있다. 장릉의 재실 동쪽 50보쯤에 위치한 이 작은 정자의 본래 이름은 공북정(拱北亭)이었다. 공북정은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찾아와 북쪽의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리는 정자라는 의미이다. 이 정자는 정조 17년(1793), 영월부사 박기정이 중건하였다. 또한 박기정은 배견정 정자 아래쪽 바위에 배견암이라는 명문(銘文)을 음각하였다고 한다.
이 과체시가 영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첫구를 낙화암(落花巖)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구를 금강(錦江)으로 맺는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금강은 오늘날 래프팅으로 유명해진 영월 동강(東江)의 옛 이름으로 금장강(錦障江), 또는 금강(錦江)으로 불렸다. 이곳은 경치가 빼어나서 영월 8경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며 조선시대 영월군수로 있던 이자삼(李子三)이 세운 정자 금강정(錦江亭)이 세워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시인이 시작과 끝으로 선택한 두 시어, 낙화암과 금강이 백제의 고혼이 어려 있는 부여의 두 지명과 동일함으로 인하여 독자로 하여금 시대를 뛰어넘는 충절의 역사를 돌이켜 보게 한다는 것이다. 제10구의 창오산(倉敖산)은 순임금이 순시를 하다가 죽은 곳인데, 그가 죽자 그의 두 부인이 흘린 피눈물이 상강의 대나무에 얼룩져서 반죽(斑竹)이 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제9구에서 사육신 등 충신을 백이숙제에, 그리고 낙화암에 투신한 충절들을 상강에 투신한 순임금의 두 부인에 비유하고 있다. 구의산(九疑山)은 순임금의 무덤이 있는 산 이름으로 지금의 호남성 영원현 남쪽에 있다. 이 산은 9개 산봉우리의 모습이 비슷비슷해서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과체시에서 시인은 영월 민충사에서 거행되는 제사를 참관한 듯 하다. 제단 위에 올려진 고사리를 보면서 시인은 사육신 등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성스러운 영혼들을 생각하며, 그 감흥을 과체시의 형식을 빌어 읊고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과체시의 지은이가 난고 김병연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첫째, 윤신행이 어광선으로부터 받은 필사본은 “金笠詩”라고 그 저자를 분명히 하고 있다. 아울러 이 필사본을 습득한 중간 소유자의 낙서도 “김립 시를 습득하여 보니 너무 감격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밥 먹는 것도 잃어버렸다”고 필자를 확인해주고 있다.
둘째, 이 책에 실린 첫 과체시 「작북유록한불견백두산」(作北遊錄恨不見白頭山)의 제목 밑에는 “金秉淵”으로 필자가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 표기는 조선시대 후기 방랑시인 “金炳淵”을 지칭하는 일반적 표기 형식이었다. 그들은 해당 작품이 난고 김병연임을 알고 있었지만, 김병연이 과거를 본 적도 없고, 또한 폐족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정확히 표기하는 대신 조금 글자를 바꾸어 표기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선호되던 방식이 ‘炳’을 ‘秉’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동선』(東選),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동시』(東詩), 그리고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일부 선집본 형태의 필사본에서 공통적으로 채택되고 있다. 즉, 김병연의 과체시만을 모아 필사하면서 그들은 그 첫 작품에만 “金秉淵”으로 필자를 한 번만 표기하는데, 「충혼응포월산미」(忠魂應飽越山薇)가 실린 필사본의 저자 역시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셋째, 이 과체시의 수사법이 일반시에서 김병연의 수법과 매우 흡사하다. 이 과체시는 다중적(多重的) 의미를 내포하는 조선과 중국의 인물 및 지명을 다양하게 망라하고 있다. 즉, 인명으로 백이와 숙제, 도연명과 굴원, 월산대군, 수양대군 등을 암시하는 시어들이 채택되어 있고, 지명으로는 창오산, 구의산, 금강, 낙화암, 화산, 월산, 등이 등장한다. 대개 이들 시어는 축약된 것을 풀어야 의미가 통하는데, 이는 김병연이 그의 일반시에서 즐겨 쓰는 수법이다.
예를 들어, 그가 북쪽을 유람하면서 지었다는 「원생원」(元生員)을 살펴 보자.
日出猿生原 해가 뜨니 원숭이가 들판에 나오고
猫過鼠盡死 고양이가 지나가니 쥐들이 모두 죽는다.
黃昏蚊簷至 황혼에 모기가 처마 끝에 이르고
夜出蚤席射 밤이 되니 벼룩이 자리에서 쏜다.
(원문, 이응수,『김립시집』대증보판, 한성도서출판사, 1941, 159-160쪽.)
이 시는 물론 원생원(元生員), 서진사(徐進士), 문첨지(文僉知), 조석사(趙碩士)라는 이름을 가진 지방 유지들을 곤충 및 동물로 풍자한 것이다. 그런데 그 풍자 효과는 시를 원문으로 읽을 때 발휘되고, 개별 한자를 풀어 보면 나름의 의미가 통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논한 과체시에서 그대로, 그리고 매우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제8구의 “越山猶多首陽薇”(영월 산에는 햇빛 받은 고사리가 더욱 많았을 거야.)라든가, 제19구의 “生於魯山雨露恩”(노둔한 산에 돋아나서 비와 이슬의 은혜를 입고) 등의 구절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누구나 수양대군과 그가 강봉시킨 노산군 단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어의 발음과 의미의 다양성을 활용한 중의적 표현방식은 김병연의 특기(特技)이다. 독자들이 그의 시를 즐겨 암송하는 이유는 내용을 분석하면 나름대로 의미가 통하고, 소리 내어 읽으면 희한한 욕설이 되는 등, 읽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중의적 수사법은 한자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말과 결합하여 특이한 효과를 내기도 하며, 「이십수하」(二十樹下)에서처럼 한자와 우리말 숫자가 결합하는 탁월성을 보이기도 한다. 「충혼응포월산미」(忠魂應飽越山薇)는 김병연의 시적 천재성이 규범의 틀에 묶이기 쉬운 과체시의 영역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적 의미가 크다.
IV. 마무리
김병연이 영월에 정착한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10세(1816) 경, 삼옥리에 이주하여 24세(1830) 경, 방랑길에 오른 것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본 과체시를 분석해 보건대, 김병연은 10세-24세 사이 어느 단옷날 민충사 제사를 참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시기는 그의 학문적 역량이 어느 정도 축적된 이후로 추정된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1457년 관풍헌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은 후, 방치되었던 시신이 영월의 호장 엄흥도에 의해 수습되어 현 위치에 암장(巖漿) 되었다. 그로부터 60년 후 중종의 명에 의하여 단종의 무덤이 찾아지게 되었고, 이로부터 단종과 그를 위해 충절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제향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단종의 능침이 왕릉으로 격상되고 최종 공사가 완료된 것은 숙종25년(1699)이었으므로, 김병연이 살았던 시기는 민충사와 장릉에서의 제향의식이 이미 충분히 완성된 이후에 해당된다. 과거를 통하여 입신을 하려 했던 김병연이었기에 그가 계유정난 이후의 정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욱이 어린 시절부터 영월에 살았기 때문에 그가 이 지역 명소나 유적지를 찾았음은 쉽게 상상이 된다. 감수성이 강한 청년 김병연은 아마도 청령포, 관풍헌, 장릉 그리고 이 시의 배경이 된 민충사, 낙화암 등지를 방문했을 것이다. 이런 추정을 가능케 하는 흔적들이 이 과체시에 충분히 담겨 있다.」
이 과체시가 단종을 위해 충절을 받친 영혼들에 대한 민충사 봄제사를 배경으로 쓰인 것은 분명하다. 만약에 이 시가 김병연의 작품으로 확인된다면 이 시가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김병연은 영월에 살면서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았다고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월과 관련하여 짧은 시 한 편은 커녕 단 한 줄의 언급도 남긴 것이 없다. 영월에 대한 언급은 폐족으로 세인의 시선을 피하며 살아야 했던 자신과 가족의 은신처를 노출하는 위험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체시는 낙화암으로 시작하여 금장강으로 마무리 되고, 역사적 사건을 암시하면서 죽은 이를 추모하는 제향의식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묘사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장 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과체시「충혼응포월산미」(忠魂應飽越山薇)는 김병연이 영월에 살았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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