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점
늦잠을 잤다. 집안이 퍽 고요하다. 부스럭대고 일어나려는데 목에 힘이 들어간다.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분명 평소처럼 하고 잤는데 무언가 괴로운 꿈의 연속이었던 모양이다. 애써 일어나 블라인드를 연다. 건너편 건물,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학의천 건너 아파트 모델하우스 벽이 눈부시도록 희다. 봄은 햇볕부터 달라진다. 결코 가깝지 않은 저 건물이 이처럼 가까이 와 닿는 것을 보면. 창으로 내다보이는 건물만 가득한 작은 하늘, 더러운 회색 하늘이 조금씩 엷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빛의 산란은 참으로 화사하다. 머잖아 은은한 하늘빛도 만날 수 있을까. 얼마 전 중미산 천문대에 가다가 만난 하늘빛 하늘 때문에 아주 잠깐동안 행복했다. 하늘은 하늘빛이 당연한데 왜 그리 행복했을까. 너무도 당연해서 돌아보지도 않던 일들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기쁨이 되었다. 제 모습 제 빛깔을 갖추고 사는 일들이 사람뿐 아니라 사물도 힘든 시대가 되었을까.
아픈
고개 억지로 틀어 아파트 마당을 돌아본다. 가벼워진 옷차림을 한 여인네들이 종종거리며 지나가는 길, 저쪽 오른편에 천막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오늘 금요일이다. 격주로 열리는 알뜰 시장이 서는 날이다. 지난주에도 내다보다가 허탕만 쳤지. 문득 마음이 급해진다. 내다만 보면 되는데 무엇이 그리 바쁘다고 놓치기 일쑤인 알뜰 시장. 말이 알뜰시장이지 싸지는 않다. 그래도 싱싱한 맛에 한 번 나가면 한 아름씩 사들고 온다. 겨울 내내 꽁꽁 얼어 다글거리는 굴을 샀고 검은 흙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감자를 샀고 어쩌다 열무를 샀고 빼놓지 않고 버섯을 사 잘 먹었다. 어제는 큰길가에 노점상이 온 걸 보고 대뜸 달려 나가 사과를 사들고 왔으니 오늘 과일은 안 살 것이다.
과일 노점처럼 화려한 곳은 없다. 트럭 그득 사과를 쌓아놓고 있는 걸 보면 내가 흐뭇해진다. 추운 날, 담요며 두꺼운 천으로 덮어 놓고 있는 길거리 사과장수에게 가는 일은 기쁨이었다. 김포 살던 시절도 그랬다. 강화 가는 큰길가 군데군데 노점상이 있었다. 그들은 철철이 다른 과일을 팔았는데 겨울엔 단연 사과였다. 이런 저런 곳을 다니다가 한 곳에 단골이 되었다. 그곳은 대형할인점보다 훨씬 쌌고 도매상보다 쌌다. 그리고 무엇보다 싱싱했다. 건네주는 사과쪽을 깨물면 아삭하고 단물이 흘러내렸다. 얼굴이 까맣게 탄 사과장수 아저씨 손은 터서 거칠었고 어쩌다 하루는 안 보이곤 했는데 그런 때면 시골에 간 때였다. 그런 날은 경북 안동 과수원에 내려가서 직접 사과를 사가지고 온다고 했다. 사과장수 아저씨는 늘 칼을 가지고 있어 맛을 보라고 깎아주었고 한번 맛보면 안 살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한 박스 사면 덤으로 한두 개는 꼭 더 얹어 주었다. 맛좋고 싸고 싱싱하고 게다가 덤도 주고. 노점상의 매력은 거기 있다.
노점상은 지나간 시절을 생각하게 한다. 재래시장 인심이 거기 있다. 같은 값을 주더라도 흥정하는 맛이 있고 금방 밭에서 뽑아온 듯한 싱싱함이 있으며 조르면 하나라도 더 얹어주는 인심이 있다. 덤이라는 건 참 묘해서 생각하지 않던 흐뭇함을 안겨준다. 실상 비싸지 않은 물건 살 때와 비싼 물건 살 때가 다르기는 하지만 귤 한개 사과 한개는 꼭 그 가게로 향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물론 장사치야 그런 걸 다 계산하고 파는 것이리라. 그래도 아홉 개 받고 덤으로 한개 얻는 것과 으레 열개 받으려니 하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우리 조상들은 참으로 절묘해 마음을 꿰뚫어보아 인심이라는 단어로 승화시켰다. 할인점에 가면 기대하지도 줄 생각도 안하는 것, 그게 바로 덤이고 인심이다.
인덕원 지하철에서 내려 아파트 오는 길목에도 노점상이 있다. 사과며 귤이며 딸기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지나가는 눈길 한번으로도 풍성해진다. 이곳은 비싸다. 물론 덤도 없다. 한 번 사먹은 이후로 지나가면서 눈요기만 할 뿐이다. 말이 노점이 티브이도 의자도 난로도 갖추고 있어 노점이라는 느낌이 안 든다. 하기사 주위가 나이트클럽이니 그래서 그런 것일까. 하여간 덕분에 겨울 내내 과일들이 주는 화려함만 즐겼다. 이곳에는 김포 아저씨처럼, 직접 과수원에 내려가 과일을 사온다는 그런 노점상이 없다. 그래서 그랬을까. 이곳의 겨울은 풍성하지 않다. 겨울 내내 사과가 없어 냉장고가 텅 비어있었다. 아니다, 아니다. 사과가 없다고 냉장고가 텅 비지는 않는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농수산물 도매 시장이 멀지 않기는 하지만 마음을 먹어야 하니 쉽게 나서지지 않는다. 어디 나만 그럴까. 아마 모든 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디 여기에서만 그럴까. 프랑스 살 때도 그랬다. 두어 주일에 한번, 한달에 한번 까르푸나 오샹에 가 사다보면 과일이었다. 샤리오에 그득 집어넣은 것이 모두 과일이라 나중엔 도로 주섬주섬 꺼내놓곤 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다. 한국인들 모두가 그랬다. 처음엔 그런다고들 했다. 종류도 많고 가격까지 싼 과일에 홀려 정신없이 과일만 산다고들 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삶이 한결 부드러워보였다. 우리도 그렇다면. 온갖 과일이 풍성하고도 싸다면 살기가 한결 부드러워질 텐데 라고 까지 생각해보곤 했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지만.
햇살이 한결 높아진다. 써내려가는 동안 희게 빛나던 건물 벽이 많이 옅어졌다. 얼른 나가서 시금치라도 사야겠다. 어제도 겨울 냄새 듬뿍 나는 김치전을 부쳤으니 오늘은 봄이 조금이라도 묻어나는 녹색을 올려볼까. 추위가 파릇파릇 묻어나는 시금치, 얼어붙은 땅위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던 그 시금치를 사야겠다. 김밥도 싸고 시금치 된장국도 끓이고 그리고 잡채도 해야지. 검은 흙 잔뜩 묻은 감자도 사야지. 아 생강도 잊지 말아야겠다.
첫댓글 무언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들판에 나갔다왔습니다. 냉이 캐는 아줌마들과 꽃다지. 그게 다였습니다. 덤과 에누리가 없는 세상. 그만큼 사람이 없어진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