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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예언」 – 베르나르 베르베르
톨스토이·셰익스피어·헤르만 헤세와 함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Bernard Werber는 그의 조국 프랑스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높다고 한다. 「꿀벌의 예언」을 만난 것은 어쩌면 행운일지 모르겠다. 지금도 해마다 벌이 사라지고 있어서 꽃이 수정을 하지 못해 인공으로 한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앞으로 언젠가 진짜로 꿀벌이 사라진다면 인류도 멸망할지 모른다는 말이 헛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꿀벌의 예언」이 소설은 지금부터 30년 뒤에 인류가 멸망할 위기가 닥칠 상황에서 지구를 구하고자 하는 과학자이자 역사가이기도 한 ‘르네’라는 주인공이 미래를 바꾸기 위해, 인류를 구할 방법이 적혔다는 고대의 예언서 「꿀벌의 예언」을 찾아 간다는 것이 줄거리다. 과거와 미래를 오가면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르네 일행이 과연 예언서를 찾고 지구를 구할 수 있을까?
“베스트셀러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소설 『꿀벌의 예언』은 주인공 르네 톨레다노가 꿀벌이 사라지고 인류 멸종의 위기를 맞은 2053년까지 최면을 통해 앞서가서 지구를 보고 온 뒤, 미래를 바꾸기 위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르네가 다녀온 30년 앞의 미래는 겨울임에도 지구 온난화가 극심해져 지구 기온은 43도가 넘고, 전 세계 인구는 팽창할 대로 팽창해 150억 명에 달하는 충격적인 모습이다. 여기에 더해 꿀벌까지 사라지면서 식량이 부족해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인간들은 식량 자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핵무기까지 동원해 세계 대전을 벌이려고 한다.
소설 속에 미래의 르네는 현재의 르네에게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꿀벌의 예언] 이라는 예언서에 있다는 걸 알려 주고, 르네는 인류를 구할 실마리가 적혀 있는 그 책을 찾아서 전생의 자신을 찾아간다. 놀랍게도 예언서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던 전생은 무려 1천 년 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출정했던 십자군의 기사였다. 르네는 전생의 자신과 함께 예언서에 얽힌 거대한 모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간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미래를 구할 힘은 현재 바로 이 순간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 메시지는 독자가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현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 모두의 [현재] 에는 미래를 보다 낫게 바꿀 힘이 있다. 꿀벌이 사라질 미래까지도
전작 『기억』에서 르네 톨레다노는 인류 역사를 되짚고 자신의 전생을 만나면서 [나는 누구인가] 를 탐색했다. 그랬으나 이번에는 미래로 시선을 돌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를 묻는다. 개인의 삶이라는 미시적 관점에서 과거를 살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이제는 [우리] , 즉 [인류]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역사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인류의 미래를 그리며 작자는 [꿀벌] 을 키워드 삼아 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실제로 꿀벌의 실종은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는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소비하는 식물의 80퍼센트는 꽃식물이며 꽃식물 수분의 80퍼센트를 담당하는 곤충은 꿀벌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꿀벌이 전부 사라진 뒤에는 식량난으로 인해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는 미래를 보여준다. 인류를 포함해 지구에 존재하는 숱한 존재들은 서로의 생사를 가를 만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사실을 무시하는 인류의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고 마는 미래에 우리 앞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놓여 있음을 소설은 경고한다. 독자들은 최악의 미래를 막으려는 르네의 모험을 따라가면서 꿀벌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자연스럽게 얻게 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멸망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 힌트는 꿀벌에게서 찾을 수 있다.
[과학적 상상력]과 함께 이야기를 끌고 가는 또 하나의 축은 [역사적 사유] 다. 르네의 모험 이야기 속에 번갈아 가며 나오는 [므네모스] 는 일종의 역사서 역할을 한다. [우리가 태어나는 이유는 세 가지 때문이다. 1. 배우기 위해. 2. 경험하기 위해. 3.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서다.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여기서 방점이 찍힌 건 3번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인류가 꿀벌이 모조리 사라지게 만든 실수를 바로잡는다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이에 답하기 위해 작가는 여러 부족과 국가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하면서 현재에 이른 과정을 자기만의 시선으로 기술하고 있다. 『꿀벌의 예언』은 역사적 사실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교묘하게 엮어서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평행 세계를 엿보는 기분이 들게 한다. 과학적이고, 역사적 지식이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결합되는 세계, [베르베르 월드] 라고 부르는 이 독보적인 세계는 늘 그래 왔듯이 기대를 뛰어넘고 매혹적 이야기를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출판사 서평]
사실인 것과 사실이 아닌 것이 섞인 것이 소설이다. 잘 아는 〈삼국지 연의〉도 그렇다. 소설은 재미가 우선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 소설은 서평에서 보았듯이 꿀벌이 사라질 것을 걱정하면서 썼다. 또 그렇게 흘러가지만 ‘십자군’이야기와 〈구약성서〉까지 새로 공부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해 준다. - 4.24
제2권은 1권에서 이어진 ‘구부러진 시간’과 ‘마지막 꿀벌’이라는 소제목으로 되어 있다. 1권에서 본 것이 소설의 줄거리라면, 책에서는 ‘므네무스’(잊혀진 기억)이라는 단원을 두고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을 여기에 옮긴다.
(1) 로마의 지배가 계속되자 유대민족은 저항의 필요성을 알기 시작했다. 특히, ‘요하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민중의 봉기를 우려한 유대왕 헤로테안티파스는 요하난을 잡아 교수형에 처했다. 그러자 요하난의 제자이며, 히브리어로 구원자인 ‘예수아’라는 이가 죽은 스승의 뜻을 이어받았다. 예수아는 물고기 형상을 자신의 상징이자 식별 표시로 삼았다. 예수아는 유대 땅을 점령한 로마인과 그들의 존재를 눈감아 주는 심약하고 비겁한 유대교 사제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결국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서기 33년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
예수아와 그 제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생전에 예수아가 하던 설교를 접하고 감명받았다. 그는 자신이 잘못된 판단으로 다른 쪽에 서 있음을 깨닫고 예수아가 처형된 3년 뒤, 이스라엘 땅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계적으로 파급될 만한 힘을 지닌 새로운 유대교 교파를 만들기를 결심했다.
요하난의 그리스어 이름은 이오아네스(요한), 예수아는 이에수스(예수)로 ‘예수’라는 이름에 크리스트(그리스도)를 덧붙여 불렀는데 ‘신께 축복받은 자’라는 뜻이다. 크리스트는 ‘메시아’로서 히브리어로 마시아로 불리게 되었고, 점차 물고기 대신 예수아의 처형도구였던 ‘십자가’를 상징으로 삼았다.
사울은 ‘바울’로 개명하고 그의 교파는 《성경》을 핵심 교리로 삼았다. 유대교 시조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그리고 예언자 이사야, 예레미야, 미스겔, 다니엘을 숭배한다는 점에서는 정통 유대교와 같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뚜렷한 차별점을 가졌다. 바울은 히브리어 성서인 『구약성서』의 후속편으로 『신약성서』를, 예수의 생애를 중심으로 편찬하고자 했다. 뛰어난 조각가이기도 했던 바울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상에 기반한 새로운 교파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유대교 종파 중 하나였던 자신의 교파를 독자적인 종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대 땅에서는 반란이 계속되고, 그때마다 로마군에 의해 유혈 진압됐다. 폰티우스 필라투스 총독이 유대 땅을 다스린 10년 동안에 스스로 메시아를 자처했던 유대인 130명, 반란에 가담한 유대인 12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2) 로마는 수많은 황제들에 의해 건설되고 번영과 영광, 그리고 백성을 핍박했다. 황제 중에서 기독교를 승인한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를 탄압한 ‘네로’황제가 유독 떠오르는 것은 비단 나만의 기억은 아닐 것 같기도 하다.
서기 64년 7월 18일, 네로황제는 도시계획 차원에서, 로마 14개 구역 중 3곳의 빈민 밀집 지역을 정비하고자 했다. 불결한 지역을 정비하는 방법으로는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이라고 판단해 병사들을 시켜 그곳을 불 지르게 했다. 그런데 불이 바람을 타고 번져 목표한 3구역 말고 다른 구역으로도 번졌다. 불을 면한 곳은 14곳 중 4구역에 불과했다. 결국 3만여 명이 죽고, 2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백성의 분노가 들끓자 원로원에서는 황제의 폐위를 요구했다. 곤경에 빠진 황제는 재난의 1차적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렸다. 기독교인들을 잡아 고문해 자백을 받아내고, 사자의 먹잇감으로 주는 등 갖자지 기상천외한 처형 방식을 동원해 로마 시민들의 눈요깃거리로 내놓았다. 체포된 사람이 너무 많자 이런 서커스 방식의 처형으로는 역부족이었으므로 그들을 산채로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그것이 로마를 불태우고자 했던 기독교인들이 속죄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길거리에서 불타 죽었다. 생존자들은 불안을 느끼고 로마를 탈출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피난처로 택한 곳이 그리스의 키프로스 섬이었다.
(3) 서기 70년 예루살렘을 수중에 넣은 로마군은 약탈을 자행하고 솔로몬 성전을 불태웠다. 베레니카 여왕이 자청해 티투스 장군의 첩이 되었지만, 그의 화를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열심당 당원들은 멀리 달아났다. 불모의 절벽 위에 지어진 마시다는 그들에게는 천혜의 요새였다. 사막 한가운데였지만 마시다에는 샘이 있어 농작물도 기를 수 있고 가축들에게 물도 먹일 수 있었다. 이곳에 피신한 유대인은 1천 명이 넘었다. 그들은 요새를 거점으로 로마군과 싸웠다. 엘라자르 사령관은 3년 동안 로마군 1만 명과 맞서 싸워 성과도 거두었다. 하지만 로마군은 이스라엘 노예들을 동원해 성벽 꼭대기에 닿을 수 있는 비탈길을 절벽에다 만들었고 73년 4월 15일 마침내 마시다는 로마군에게 함락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성채에 진입한 로마군이 본 것은 유대인의 시체뿐이었다. 그들은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떠났다. 제1차 디아스포라(흩어짐)가 일어난 것이다. 이스라엘 땅을 떠난 이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활발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북아프리카 가르타고, 알렉산드리아, 중동의 다마스, 안티오키아, 바빌론, 현재의 튀르키예, 그리스 아테네, 달포이, 테살라니카, 이탈리아의 카푸아, 나폴리, 밀라노, 프랑스의 마르세유, 리옹, 에스파냐의 톨레도, 코르도바 등이 그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4) 서기 132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유대 땅을 돌아보고 이미 불탄 솔로몬 성전 터에 유피테르 신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긴장감이 팽팽했던 유대 땅에서 황제의 명령은 ‘물이 물잔에서 넘치게 하는 한 방울의 물’이었다. 유대인 지도자 ‘시몬 바르 코크바’는 해방운동군을 조직해 점령군과 두 번째 전쟁에 돌입했다. 서기 70년에 이은 두 번째 유대전쟁이었다. 뛰어난 전략가였던 그는 기동력으로 두 개의 로마군단을 섬멸했다.
하지만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서 반란군을 진압했다. 이번에는 2개 군단이 아닌 8개 군단으로 이루어진 대군이었다. 로마군은 초토화 작전을 펼쳐 민간인들까지 몰살했다. 로마군의 보복은 잔인한 방식으로 오랫동안 계속됐다. 전쟁이 지속된 3년 동안 로마군은 수만 명이 죽었지만, 유대인은 58만 명이 죽었고, 요새 도시 50개와 985개 마을이 파괴되었다. 코크바는 서기 70년 제1차 전쟁 때 마시다에 은신했던 것처럼 군대를 이끌고 베타르로 이동해 항거했다. 하지만 135년 결국 로마군에 투항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왕국을 ‘필리스틴’에서 파생한 팔레스타인으로 부르게 했고, 예루살렘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어 부르게 했다. 이스라엘 땅에서의 삶이 녹록치 않았던 유대인들은 이번에도 망명을 택했다. 북쪽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인도의 코친과 뭄바이, 중국의 카이펑에도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됐다. 첫 번째 보다 훨씬 규모가 큰 디아스포라가 일어난 것이다.
제2차 디아스포라는 유대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그리스 수학자 탈레스, 찰학자 피타고라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 천문학자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유대인도 아닌 이들의 저술은 필사되어 주석이 달려 유대인 도서관에 보관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읽었다.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신을 일종의 발명가로 여겨 ‘우주의 위대한 설계자’라고 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그리스식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정치제도로 여겼고, 그리스 과학서들이 유대인 공동체에서 읽히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해부학, 약학, 외과학이 특히 발달했는데 히브리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디오스코리데스, 칼리노스의 저서를 교본 삼아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들은 언어를 통한 치유, 다시 말해 심리치료도 도입했다. 진통제도 만들고, 위궤양 치료제는 물론 봉합수술과 제왕절개, 절단 수술도 시행했다.
(5) 제2차 디아스포라 이후 유대인 공동체는 과학과 의학분야 발전과는 별개로 밀교적 사상인 ‘카발라’가 태동했다. 카발라를 통해 3세기에서 8세기 사이 지식이 전수되었고, 율법학자들은 이상적인 성전에 관해서도 책을 썼다. 창조론에 관한 주요 서적들이 이때 랍비들에 의해 집필됐다. 카발라는 연금술과도 관련이 깊고, 수학적 구조물은 물론 음악과 그림에 사용되기도 했다. 모세 5경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토라’는 ‘타로’의 기원이 됐으며 카드 속 그림을 해석해 누구나 쉽게 미래를 점칠 수 있는 마르세유 타로 카드는 중세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6)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가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중단되었다. 당시는 로마시민 10%정도만 기독교를 믿고 있었는데, 황제는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로마인들의 죄의식을 없앨 목적으로 『신약성서』를 새롭게 만들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유다’라는 인물을 배신자의 아이콘으로 부각하였고 랍비들과 유대민족에게 다시 잘못이 돌아가게 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 국교가 되고도 백성들은 유피테르를 비롯한 여러 신에 대해 숭배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무조건 기독교로 개종해야 한다고 했다. 가톨릭은 그리스어 ‘보편적이다’는 뜻인데, 그동안 세금을 내기만 하면 어떤 지역 종교도 관대했던 로마가 이 가톨릭이란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하루아침에 정책을 바꿨던 것이다. 이로써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 아닌 다른 종교는 모두 미신 혹은 이교로 규정한 것이다.
이집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설립한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있고 도서관장 테온의 딸이자 수학자인 ‘히파티아’가 피타고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해 기하학과 천문학, 수학, 철학 등을 거리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카를로스는 결국 히파티아를 납치해 그녀를 발가벗긴 후 전차에 묶어 끌고 다니다가 광신적으로 변한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태웠다. 카를로스는 당시 파피루스 두루마리 50만 개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 불을 지를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히파타이 제자들 상당수가 책이 불타기 전 빼돌렸다. 카를로스 대주교는 유대인들이 이 일에 가담했다고 의심해 유대인들을 알렉산드리아 밖으로 모두 추방하기도 했다.
(7) 로마제국의 패망과 이슬람
476년 9월 4일 로물루스 황제가 폐위되면서 서로마제국은 막을 내렸다. 로물루스 황제는 로마 건국 시조와도 이름이 같은데 역사의 아이러니다. 소위 야만족들이 사방에서 침공해 왔으며 반달족, 동고트족과 서고트족, 부르군트족, 프랑크인, 게르만 수에비족, 훈족이 동시다발적으로 제국을 침공해 각각 독립적인 왕국을 세웠다. 지금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삼았던 동로마제국은 그래도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26년 동안 지속된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국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겨우 힘의 균형을 유지하던 620년 이슬람을 주창한 제3세력이 등장하여 636년 아랍군대는 카디시야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퇴하고 이란,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까지 영향력을 뻗쳤다.
아랍인들은 너그럽게도 정복지에서 살고 있던 조르아스터교와 유대교 신도들, 소위 〈책의 사람들(쿠란에서 이교도를 지칭하는 말)〉에게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종교를 유지하는 대가로 세금을 더 물어야 하기는 했다. 아랍인들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서 수많은 파피루스 두루마리 책들을 발견하고는 이것의 처리 문제를 오마르 갈리파에게 물었는데, ‘모두 물에 던져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용기 있는 자들이 이를 미리 빼돌려 숨기고는 그것을 읽었다. 711년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이 서고트족이 점령하고 있던 에스파냐를 침공하고는 우마이아 왕족 아브드 알라흐만이 756년 새로운 이슬람 국가 건국을 선포한 뒤에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고는 바그다드에 있던 에바스 왕조 갈리파의 권위를 전면 부정했다. 이로부터 2세기 동안 코르도바 왕국은 종교적 관용과 개방성을 보였으며 번영을 누린다. 이때 40만 권의 장서를 갖춘 코르도바 대학이 설립되고, 유일신을 신봉하던 세 종교는 조화롭게 공존했다. 서로 종교는 달랐지만, 경제·문화·과학 발전에 한마음으로 기여했다.
이때 무슬림 재판관이기도 한 이븐 루시드가 등장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주석하여 《영혼론》을 저작해 ‘영혼과 육체는 분리된 것인가’라는 주제를 깊이 천착하기도 했다. 코르도바 학자들의 학문적 성과는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을 통해 유럽에도 알려졌다. 그중 하나가 이전에 인도에서 탄생한 아라비아 숫자가 전해진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 정신은 이렇게 코르도바에서 부활하게 되었고, 아랍 문명은 이후 수십 년 동안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루시드 말년에 새로운 갈리파 아쿠보 알만수르에 의해 이단으로 몰리게 되고, 1197년 루시드는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분서 명령이 내려지고, 그의 저서는 광장에서 불태워졌다. 상심한 루시드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학문에 대한 이슬람의 관용과 개방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유대인 모세스 벤 마이몬과 이사크 알발라그, 기독교인 토마스 아퀴나스, 알베르투스 마구누스, 훗날의 단테와 조반니 피코텔라가 루시드의 철학적, 과학적 업적을 계승한 것은 어쩌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5.3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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