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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건축과 성리학적 건축개념
병산서원, 도동서원, 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1. 사림파와 향촌, 서원건축
조선조의 파워 엘리트, 사림파 士大夫란 “선비士와 벼슬아치大夫를 겸한” 계층을 의미한다.
평소에는 글을 읽는 선비지만, 일단 나라의 부름이 있으면 벼슬길에 나아가 그동안 갈고 닦은 경륜을 펼치며
실천에 옮기는 知行合一의 인간상이었다.
한번 벼슬에 오르면 영원히 직업 공무원으로 일생을 마치고, 아버지가 귀족이면 대대로 귀족이 되는 고려조의
상황에서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인간들이었다.
유교사회로 통치이념을 전환하려는 점에서는 모든 사대부들이 공통적이었지만,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역성혁명에는 상반되는 입장들이 대립했다.
절의파라 불리운 정몽주 길재 이색 등은 이른바 체제 내의 개혁을 주장했던 반면, 정도전 조준 등의 과격파는 쿠데타에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새왕조 건설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참여파 내에서도 갈등과 분열이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새나라의 건국공훈자가 되었고, 성공한 쿠데타의 실세로서
정치적 경제적 전리품들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훈구파라 하여 가문 대대로 새왕조의 고위직을 독점했고, 역성혁명의 초기 이상과는 달리 새로운 귀족층을 형성
하게 되었다.
반면 절의파들은 정치적으로 숙청되었든가 아니면 지방에서 은둔하면서 학문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士’와 ‘大夫’가 뚜렷하게 분리된 것이다.
사대부층이 분리되면서, 숲 속에서 글만 읽는 절의파 계열을 일컬어 ‘사림士林’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조선사회의 정치적 사상적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대략 16세기로, 자신들의 향리에서 경제적
기반을 잡아가는 동시에 여론 주도층으로서 사회적 입지를 굳혔다.
자의 타의로 중앙정계에 관여를 않던 사림파들의 정치 경제적 기반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향촌이었다.
비록 조선조가 유교통치를 표방했지만 기층사회에는 아직도 불교시대의 유습들이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당시 향촌사회의 가족제도는 이른바 子女均分相續制를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부모의 재산을 자녀의 수 만큼 나누어 공평하게 물려주는 제도이며, 아직은 남녀나 장차남의 차별이 없었다.
당시 야심있는 청년들이 출세할 수 있는 지름길은 재산많고 권력있는 집안에 ‘杖家를 드는’ 일이었다.
장가를 든 다음에는 처가 마을에 정착하게 되며, 친가의 확고한 연고지가 없으면 일생을 처가 마을에서 마치게된다.
그들의 아들 역시 사돈마을로 장가를 들게 되니, ‘씨족마을’은 아직 형성될 수 없었다.
성리학적 제도의 거대한 구조 향촌사회 교화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자녀균분상속제를 타파할 필요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평등한 조건에서 남녀간 장차남 간의 서열과 위계를 강조해봐야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림파들은 16세기 동안 가부장제도와 장자상속제를 실험하고 정착시킨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기존의 가치관이 붕괴된 17세기 초에 혈연과 자손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가치기준이었다.
가부장제와 장자상속은 자연스럽게 같은 성씨들이 모여사는 씨족마을을 형성하게 된다.
재산을 상속한 장남은 종손으로서 마을을 지키게 되고, 드디어 여자들이 시집媤家을 오는 가부장제를 실현케 했다.
씨족마을의 형성은 가문주의를 발전시키고, 이는 다시 가문 중심의 서원 설립 붐으로 이어진다.
향촌교화와 장자상속제, 가부장제, 사림파의 형성, 예학의 발달 등은 별개의 사실들이 아니라 모두 성리학의 수용과
실현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서로 얽혀있는 불가분의 현상들이었고, 그 구조의 핵심에 서원이라는 건축공간이 있었다.
서원설립 운동과 전개과정 유교와 유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유교의례의 실체는 선현을 제사하고 숭모하는 것이고, 이는 곧 유학적 지식의 수양과 실천행위다.
반대로 유학의 학문적 대상들은 모두가 유교의 경전이며, 학문적 수련없이 유교라는 종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유가의 이러한 종교와 학문의 동일성을 이해해야 조선조 서원의 교육제도와 건축을 이해할 수 있다.
서원은 유교의 성전인 동시에 유학의 교육기관이다.
서원이라는 용어는 고려말부터 등장했지만, 당시의 서원은 일종의 개인학교 私塾나 도서실의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지민, 朝鮮時代의 書院建築, 도동서원 실측조사보고서, 1989, 52쪽. 조선초 까지만 해도 서원은 서당, 서사, 정사 들과
같은 소규모 교육기관의 별칭이었다.
한국에 유학이 수입된 것은 이미 신라 때였고, 이후 유학적 강학기관으로서의 ‘정사 精舍’와 유교적 제향기관으로서의
‘사묘 祠廟’가 존재해 왔다.
서원이 학문기관과 종교기관의 통합체로서 출현한 것은 역사발전 상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시기는 매우 늦어져
1543년 주세붕이 백운동서원 안에 안향의 사당과 강학소인 명륜당을 함께 설립한 후였다.
賜額書院이란 국가에서 공인하는 증표로 서원의 현판을 하사하는 것으로, 공식 인쇄된 서적들을 배급받게 되고,
서원에 모셔진 선현의 지위도 격상되는 영예를 안게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서원에 속한 토지와 노비는 세금과 병역의 의무에서 면제되는 경제적 특혜였다.
요즘 용어를 빌자면, 지방 사림들에게 서원이란 곧 명예의 전당이요, 동시에 황금알을 낳는 사업체였다.
국가가 인정하는 사액서원이 되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각 지방의 사림들과 가문들이 앞을 다투어 서원을 경영하니, 17-18세기에는 전국에 600여개의 서원이 운영되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조선조 말까지 공교육기관인 향교가 총 230여개가 세워졌던 것과 비교하면, 사교육기관인 서원이 압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의 전국 인구가 500만이었던 점으로 미루어보면, 적어도 인구 8000명당 하나의 서원이 존재했던 셈이다.
양반인구는 전체의 20%로 1600명, 남자는 절반인 800명, 서원의 입학대상이었던 15-35세 사이의 성인남자 양반을
기준으로 한다면 대략 300명당 1개의 서원이 존재했던 꼴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과다한 사교육부담, 그리고 유휴 노동력의 룸펜화는 과거에도 중대한 사회문제였다.
이 많은 서원들이 모두 건전한 교육기관일 수 없었다.
서원의 난립현상은 앞서 말한 경제적 목적 때문이거나, 아니면 가문의 허세와 경쟁 때문이었다.
서원을 설립하려면 유림에서 인정할 만한 선현의 제사를 모셔야했다.
그러나 한국의 선현들을 모두 통털어도 600명에 이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자연히 한 인물이 여러 곳의 서원에 배향되는 이른바 ‘첩설疊設’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가장 인기있는 인물은 퇴계와 율곡으로 두 분은 전국의 20-40개 서원에서 제사되었다.
도동서원의 주향자인 김굉필도 전국 8개소의 서원에 모셔졌다.
아니면, 가문의 조상들의 공적을 과장하거나 조작하는 ‘외향猥享’을 통해 서원을 창건하기도 했다.
송긍섭, 李退溪의 書院敎育論 考察, 퇴계학연구 2집, 129쪽.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이 제대로 될 까닭이 없었다.
자연히 서원의 중심 기능은 교육에서 제향으로 흐르게 되고, 지방민에 대한 착취와 당쟁의 근거지로 전락하는
이른바 ‘서원폐書院弊’의 온상이 되었다.
18세기 중반 영조대에 들어 전국의 사설서원 300개소를 철거하여 한동안 서원의 난립현상이 주춤거렸다.
그러나 19세기 세도정치 시대에는 다시 난립하기 시작하여, 아예 교육시설인 동서재가 없고 강당도 형식적인
서원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세도가들의 견제와 멸시를 참으며 권좌에 오른 흥선대원군은 드디어 1871년 서원철폐를 단행했다.
전국에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강제 철폐를 감행한 것이다.
그가 개혁정치의 첫째 수단으로 서원철폐를 단행한 이유는 당시 서원이 지방 양반들의 경제근거지인 동시에
구 세도가문들의 권력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서원의 문제는 교육이나 제향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였으며 국가경제의 문제였다.
2. 서원건축사의 전개과정 초기형식
초기형식에 해당할 서원의 건축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물론 임진란의 피해 때문이다.
퇴계가 직접 경영했던 이산서원, 퇴계학파의 본거지이며 최대규모였던 여강서원 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지 한국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백운동서원)만이 남아있어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소수서원 하나만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초기의 건축은 형식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스러웠던 것 같다.
물론 서원이 갖추어야 할 최소의 기능인 강당 - 사당 - 숙사 - 장판각 등은 구비되었지만, 이들 간의 유기적인 질서를
찾아내기는 무척 어렵다.
확실한 것은 서원의 제도가 비록 중국의 예를 규범으로 삼았지만, 건축형식은 중국의 원형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매우 규범적이고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중국 서원의 형식과 소수서원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소수서원의 경우, 강당을 중심으로 숙사들이 배열되고 그 뒤 한 편에 사당이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초기 서원이 제사기능보다는 교육기능을 우선했다는 점은 명확하다.
병산서원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강학공간만이 마련되고 후에 제사공간이 부가되는 순서는 이미 밝힌 바 있다.
중기형식 중기형식들은 현존 유명서원들의 전형이라 해도 무방하다.
병산서원을 위시하여 도산서원 옥산서원 도동서원 등이 여기에 속한다.
중심 축선상에 루각과 대문, 강당, 사당을 일렬로 세우고 필요시설들을 여기에 부가하는 형식이다.
중기의 형식은 다양한 지역별 변형들이 존재한다.
특히 충청 호남권의 서원들은 영남의 형식과는 대조적이다.
장성 필암서원의 경우, 중심축의 위상은 지켜지지만 동서재가 강당의 뒤에 붙음으로써 사당영역과 강당영역이
하나로 통합된다. 그
렇다고 호남권의 서원들은 교육기능이 약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소위 전당후재형 前堂後齋型은 서원건축 뿐 아니라 이 지방의 향교건축에도 일반적인 유형이기 때문에,
하나의 지역적 전통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이러한 형식이 정착되었는지 명확하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단 대체적으로 이 지방의 지형이 영남과 같이 경사지가 많지 않아 평지를 선호했으며, 기호학파의 학문적 성향이
영남학파와는 달랐다는 데서 원인들을 찾고 있다.
영호남 할 것 없이 중기형식들은 서원건축의 집합적 형식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성리학과 예학의 절대적인 규범이
형상화된 형식들이다.
후기형식 후기형식은 강학기능이 거의 소멸되고 향사기능만 남았던 시기, 서원의 부정적인 역기능이 한창일 때의
형식이다.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거의 없으므로 동서재가 필요없고 강당도 약화된다.
대신 문벌과 지역사회 주도권을 위한 향사기능은 확대되어 사당이 서원의 중심적 위치로 부상한다.
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를 겪을 때, 그 명맥을 부지하기 위해 많은 편법들이 고안되었다.
강당부분을 철거하고 단순한 사당으로 남았던 예, 사당부분을 없애고 강당만으로 서당의 이름을 걸어 철폐를 면한 예,
또는 강당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강당과 사당을 분리 유지했던 방법들이다.
그 결과 서원건축은 형식적 완결성이 사라지고, 집합적 질서도 해체되어 버렸다.
대원군의 실각 후 많은 서원들이 재건되었지만, 이미 기능과 사회적 필요성, 그리고 유형으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린
후여서 건축적으로 주목할 대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3. 서원의 제도,
조직과 기능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의 위상을 현재로 따지면, 사립전문대학 정도에 해당한다.
관학인 지방의 향교는 공립고등학교 정도, 그러면 대학교에 해당하는 기관은 서울의 성균관이다.
학교건축의 매스터플랜을 위해서는 학사계획 academic plan이 수립된 후에 시설물계획 facility plan을 수행하는 것이
정상적인 설계의 과정이다.
과거의 교육기관인 향교나 서원의 건축은 대부분 고정된 형식에 의하기 때문에, 개개의 시설물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려졌지만 교육제도와 인원규모, 조직 등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내재적 기능인 학사계획에 대한 이해없이
시설물계획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서원의 인적구성은 교수진과 학생군, 그리고 이들을 보조하는 하인 書院奴들이다.
書院奴. 서원은 남자들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婢는 없다.
首奴 묘지기 정지지기 고지기 등으로 각자의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
교수진은 원장(학장), 원이(부학장), 강장(교무과장), 훈장(학생과장), 재장(사감), 집강(훈육주임), 유사(총무),
장의 (평의회장) 등의 직책이 있다.
현재 대학의 보직과 다를 바가 없는 조직이다.
병산서원의 경우 교수진은 10-20인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모두가 서원에 상주한 것은 아니고, 원장과 원이 유사 정도가 상주하면서 학생지도를 맡았다.
교수진이 사용한 시설은 강당의 두방과 동재의 유사실이며, 학생들은 평소에는 강당을 이용할 수 없었다.
학생들의 입학자격은 엄격했었다. 1단계 과거에 합격한 생원이나 진사만이 입학할 수 있었고,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자는 당회의 승인을 얻어야만 했다.
퇴계의 <<伊山院規>>에 정해진 규약.
서원이 고시준비학원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순수학문 수양의 전당으로 유지하기 위한 기준이었다.
물론 이 기준은 서원이 건강한 교육기관으로 역할했던 16세기에나 통용되었던 순진한 기준이었다.
입학 후에는 정해진 수학기간이 없고, 철저하게 능력별 교육을 시행했다.
따라서 입학정원은 물론 전체 학생수 조차 일정하게 유지할 수 없는 문제를 안게 되었다.
어느 시대든 부도덕한 교육기관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능력별 졸업제를 악용하여 졸업을 계속 유보시키면서 전체 학생수가 수백에 달하는 서원들이 속출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악덕사학재단에게는 학생수가 곧 수입원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학생들 또한 졸업을 서두르지 않는 경향도 나타났다. 서원에 적을 두면 세금과 공역의 의무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이비 사학, 사이비 학생들의 증가는 국가 재정에도 큰 피해를 미치게 되어, 1710년 전국의 서원학생정원을
일괄적으로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사액서원은 20명, 비사액서원은 15명으로 제한했다.
사실 일반서원의 기숙사인 동서재의 규모로 보아 수용인원은 최대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 역시 유림세력들의 뿌리깊은 관행에 의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병산서원의 학생 수는 많을 때는 92명, 적게는 7명에 이른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2-30명의 수준을 유지하였다.
학생들의 연령은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16세 소년에서부터 45세 늦깍이 까지 다양했다.
교수진의 연령은 대개 3-40대로 나타났다.
이상은 1735년부터 1838년까지의 인원을 기록한 <<屛山書院入院錄>> (하회 충효당 소장)을 분석한 결과임.
서원의 학생이란 일방적인 피교육자는 아니었다.
대부분 이미 입신할 정도의 학문적 바탕을 가진 인격체였고 그들 스스로 서원을 운영하고 서로 교육하는 집단이어서
일종의 자치조직도 가지게 되었다.
이 조직의 우두머리가 재유사로서 동서재 각 1명씩 2명이 서원 운영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서원의 시설물들이 구성원의 변동에 적극 대응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설 규모는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임기응변식으로 운영해 왔다는 것이 정확한 사실일 것이다.
講堂과 東西齋 외에도 교육에 활용된 시설로는 藏板閣을 들 수 있다.
서원의 명문도를 평가하는 기준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판본의 소장량이었다.
당시의 서적은 거의 필사본 아니면 목판본이었고, 필사본은 오자와 탈자가 많고 노력이 많이 들어서 학생들이
필요로한 것은 대개 목판본이었다.
목판본의 원판인 목판은 서원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고 군소 신설서원들은 명문서원에 간청해 인쇄를 허락받을
정도였다.
이처럼 중요한 시설이었던 장판각은 소속 학생들도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철처하게 보안되었다.
향사를 위한 祠堂과 祭器 祭需의 진설과 보관을 위한 典祀廳은 종교시설로서의 서원의 핵심 건물이었다.
그리고 제수마련은 물론 평소 서원 유생들의 식사와 잡일을 처리하기 위한 서원노들의 廚所 역시 필수적인 시설이었다.
3. 성리학적 건축이론
인간 중심의 성리학적 우주관 유학자들, 특히 관념과 명목을 중시했던 성리학자들은 우주의 생성부터 인간의 심성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태극太極이 음양陰陽을 낳고, 음양은 사상四象이 되며, 사상은 팔괘八卦가 된다.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의 팔괘가 결합하여 주역周易의 64괘를 이루니, 비로소 세상만물이 이루어진다.”는
1-2-4-8-64의 이진법적 논리전개는 동양적 사고의 핵심을 이루어왔다.
이 기초적인 우주론은 많은 중세적 논쟁들을 야기한다.
절대자로서 신을 인정하지 않는 동아시아적 전통에서, 이러한 논리적 진화과정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이, 어떻게 효도를 하는 것이 하늘의 뜻에 어긋남이 없는가? ........
성리학의 논리는 우주와 인간, 자연과 인간의 메카니즘을 동일한 체계로 파악하려 했고,
인간의 이성과 관념으로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서구 문명의 뿌리를 형성해 온 이원론적 인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리理인가 기氣인가?
우주론적 전개와 부합하는 인간의 도리는 무엇인가?
어떻게 정치를 하는 것이러한 天人合一사상은 이론과 행동, 관념과 현실, 마음과 몸을 일치화하려는 특유의
형이상학으로 발전했다.
엘리트의 종교, 소수를 위한 공간 유교는 근본적으로 학문 연수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철학과 종교의 체계이며,
문자를 매개로 하여 전달된다.
또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1:1 지도를 통해서 학맥이 유지되는 교육방법을 고수해 왔다.
일반 민중들은 통치의 대상이고 교화의 대상일 뿐, 유교적 질서의 과실을 향유하거나 학문의 즐거움을 나누는 주체가
아니었다. 유교의 건축은 당연히 소수 엘리트를 위한 장소요, 그들의 요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서원이나 향교가 이른바 human scale로 구성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이용자들의 수자가 작기 때문이고, 이차적으로는
그들의 선민의식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선택된 소수만이 사용하는 유교적 공간은 대중들에게는 폐쇄적인 동시에 이용자들에게는 모든 곳이 공개되는 양면성을
갖는다. 도동서원에 공존하는 외부적 근엄함과 내부적 개방성은 선택된 공간만이 취할 수 있는 성질들이다.
건축은 관념을 담는 그릇 유교문화는 문자를 매개로 창조되고 전파되며, 그 문자는 사실 기록의 기능보다는 관념 표현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특히 성리학자들은 무형적인 추상과 관념의 세계를 이상으로 삼았다. 불교시대에 가장 발달한 예술
쟝르가 건축을 포함한 조형예술이라면, 유교시대에는 문학 - 특히 서정문학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문학적 추상성과 관념성은 유교문화 전반의 특성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음악은 의례를 위한 正樂이 정통을 이루며,
미술은 관념세계를 묘사하는 文人畵가 각광을 받는다.
俗樂과 풍속화의 예술성이 인정받기는 김홍도 등의 18세기 말에 와서야 가능했다. 건축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건축이라는 쟝르 자체가 비재현적이기 때문에 ‘사실과 추상’을 분류하기는 어렵고, 모든 건축적 개념은
관념적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유교건축은 건축의 객체성과 물체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관념적이다.
유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건축으로 담을 수 있는 그 무엇이지, 건축물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 무엇이란 자연일 수도 있고, 道일 수도 있다. 따라서 건축은 半외부화 개방화된 일종의 frame으로 작용하며,
내부공간은 무성격화 투명화한다.
유형학적 원형에 대한 향수 宋대의 朱子는 제자 양성을 위해 白鹿洞書院을 창설하였고, 조선조의 주세붕은 이를
원형으로 삼아 白雲洞書院을 창설하였다.
물론 주세붕은 쭈쯔의 백록동서원을 본 적도 없고, 서원의 건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건축규범의 단편들과 서원의 교육방향 및 규칙들을 수록한 쭈쯔의 <白鹿洞書院揭示>는 주세붕의
원전이 되어 <白雲洞書院規>로 탈바꿈하였다.
한국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은 수백년 전의 중국인 쭈쯔가 마련한 규범을 좇아서, 이름까지 돌림자로 정한 채
창건되었다.
쭈쯔를 위시한 중국의 성현들이 행한 행동양식이 성리학의 정착단계에서 조선조 지식인들의 원형이 되었듯이,
중국의 유교적 건축들은 구체적으로 모방 재해석되어 하나의 건축유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유준영, 造形藝術과 性理學, 한국미술사논문집, 정신문화연구원, 1984, 13쪽. 유준영교수는 구체적으로 강원도
華陰精舍의 예를 주자의 武夷精舍와 비교 분석하면서 유사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원형과 재현을 방법론으로 채택한 유교건축에서 건축적 유형 (type 또는 typology)이 절대적인 규범으로 작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향교는 향교대로, 서원은 서원대로 고정된 유형이 있다.
서원건축의 유형은 선택가능한 범례가 아니라 꼭 준수해야할 규범으로 작용한다.
유형에 대한 집착과 원형에 대한 향수는 유교건축물들을 획일적이고 보수적으로 만든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사유재산이어서 비교적 변화가 자유로왔던 서원건축 마저도, 몇몇 창조적인 예들을 제외하고는, 백편일률이 되게된
원인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