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을 다루는 전기영화가 다큐멘터리와 다른 점은 사실과 허구가 공존한다는 특징입니다. 픽션에 해당하는 부분이 독자적 리듬을 가지면서 팩트를 다양하게 해석하도록 기여한다면 우리는 최상의 전기영화를 만나게 되죠.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신작 <네루다>는 이런 측면에서 전기영화의 모범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치가 보다는 시인으로 더 알려진 네루다는 칠레의 외교관으로 스페인에 주재하면서 프랑코 파시즘 독재와 스페인 내전을 목격하고 사회주의자가 됩니다. 칠레로 돌아온 후 칠레공산당에 입당, 노동운동을 박해하는 곤살레스 대통령과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하죠. 결국 의원직을 박탈당한 그를 체포하라는 검거령이 떨어지고, 네루다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정치적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영화는 이 시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곤살레스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비밀경찰 오스카가 네루다를 추격하게 되면서 쫓고 쫓기는 사투가 벌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오스카는 네루다의 작품을 접하고 점점 네루다의 매력에 빠지게 되죠. 네루다 또한 자신을 추격하는 오스카를 따돌리고 숨박꼭질 놀이를 즐기는 영웅이 되어가구요. 한 인물의 연대기 역사에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네루다는 여성 편력도 심하고, 제멋대로 자유분방하며 영웅심과 허세도 강한 남자입니다. 그러나 도망다니면서 밑바닥 민초들의 생생한 삶을 접하고 역사와 자연속의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 눈뜨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의 삶은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총체적 삶이며 따라서 그의 시는 <모두의 노래>가 되었던 것이죠. 꽤나 설득력있는 해석이라 생각해요.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오스카라는 이 가상의 인물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국회의 소란한 장면 뒤로 들려오는 긴 나레이션이 있습니다. 보여지는 장면과 불일치를 이루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네루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관객이 알아차릴 때쯤, 진짜 목소리의 주인인 오스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순간 관객들은 네루다로부터 빠져나와 오스카의 시선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장치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낯설게 하기, 즉 소격효과를 창출하죠.
오스카가 읽어주는 네루다의 작품을 듣고, 네루다의 생각이 오스카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된다는 점에서 오스카는 네루다의 분신이자 페르소나입니다. 네루다의 예술적 감각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이 그의 작품에서 조연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는 네루다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죠. 또한 오스카는 네루다가 시로 표현하고 싶은 민중의 표상이자 시적자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네루다와 오스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로서 결말에 가서는 추격자와 도망자의 역할이 바뀌는 연극을 수행하고, 주연과 조연이 치환되는 작품을 낳게 되는 것이죠. 안데스 산맥 설원에서 오스카의 죽음 앞에 선 네루다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못해 비장한 느낌마저 듭니다.
"네가 나를 만든 거야..."
"나와 함께 일어나 다시 태어나라 경찰형제~~"
첫댓글 나, 아무래도 이 영화 봐야겠어요. 시간이 통 안나서 못갔는데
퓨어님의 글 보니까 안보면 안될거 같은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그리고 멋진 후기 잘 읽었습니다.
암요~ 보셔야죠...
영화가 완전 가을아침님 취향저격인데요...
pure님..
영화평 잘 봤습니다.
그리고 질문이 있습니다.
이 영화
공간적 배경이 주로 어디인가요?
아무래도 칠레겠죠?
고맙습니다^^
저는 칠레라고 생각하며 보았는데요.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지대, 안데스산맥, 산티아고 등등요~~
@pure 아 그러쿤요.
제가 몇해전 칠레여행을 갔었는데.
발파라이소라는 산티아고 인근 도시에
유난히 네루다 관련 된 것들이 많아서
거기도 혹시 나오는지 한번 봐야겠군요^^
@OPORTO 아.. 발파라이소를 다녀오셨군요? 영화에도 발파라이소 네루다의 집(세바스티아나)이 살짝 나오긴 합니다.
발파라이소는 네루다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도시이고, 네루다 이후 예술적인 벽화와 그래비티가 그려져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유명하다고 하던데 저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
@pure 그래요..
언덕으로 된 항구도시인데
마을 여기저기에 네루다 그래비티가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네루다는 ㅡ일 포스티노ㅡ외에는 아는바가 없어서 ㅜㅜ..
칠레 가면 꼭 가봐야 할 마을이라 생각합니다.
분위기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