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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정조 시대에 활약했던 대표적인 문인화가(文人畵家)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의 작품전이 서울 서초구에 있는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다는 신문기사를 본 순간,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기사를 접한 바로 그날부터 약 한달 반 동안 작전 관람을 위해서 사전 준비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전시기간2003.12.27-2004.2.29)
푸른솔은 늙지 않는다(蒼松不老) 표암 강세황의 詩.書.畵.評 전.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빼어났기 때문에 삼절(三絶)이라 불려졌을 뿐 만 아니라, 글씨와그림에 대한 수준 높은 감식안(鑑識眼)까지 합쳐 사절(四絶)이라 불려 지기까지 했던 예원(藝苑)의 총수(總帥) 강세황의 작품전을 보러 가면서 어찌 사전에 그에 대한 아무런 준비 과정도 갖지 않고 그냥 불쑥 찾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과거에 한 두어 번 읽고 서가에 꽂아 두었던 (표암 강세황 시서연구(文永午, 豹菴 姜世晃 詩書 硏究,태학사 1997)를 꺼내어 밑줄까지 그어가며 정독 또 정독했었고, 인터넷 서점을 뒤져 찾아낸 표암 강세황 회화연구( 邊英燮, 豹菴 姜世晃繪畫硏究, 일지사 1999)와, 이번 전시회를 위해 예술의 전당에서 발간한 413페이지에 이르는 대형 도록(圖錄)을 우편주문으로 미리 구입한 후 마치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처럼 읽고 또 읽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비록 단편적인 자료이긴 하나 국역 근역 서화징(吳世昌, 槿域書畵徵 ,시공사 1998)과 최순우의 표암 강세황 (崔淳雨, 표암 강세황 최순우 전집3, 학고재 1992). 임두빈의 한국 미술사 101장면,가람기획, 1998).(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솔출판사 2003). (오주석,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솔출판사 1999). (박영대,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우리그림백가지,현암사 2002)까지 한 줄로 쭉 포개놓고는 읽어 내었다.
무슨 일이던지 한번 빠져 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깊이 빠져 들곤 하는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중학교 2학년 막내딸이 이번에도 또 시비(?)아닌 시비를 걸어왔다.
“아버지! 아버지가 만약 학교 다닐 때, 지금처럼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면 아마 모르긴 해도 지금쯤은 무엇이 되어도 크게 되어 있지 않았겠어요?”
“아니 이 녀석아?”“지금 아빠의 처지가 어때서 그래?”“듣고 싶은 음악 마음대로 들을 수 있고 , 보고 싶은 책 마음대로 볼 수가있고, 가고 싶은 음악회나 전시회에 마음대로 갈수 있는 처지인데 여기에다 무엇을 더 원하고 바라겠니?”“아빠는 현재의 아빠 처지가 만족스럽단다.”
나는 전시회 마감기한을 일주일 남겨놓은 일요일을 택하여 서울 행 새마을열차에 몸을 실었다.서울로 떠나기 하루 전 날인 , 토요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 다음날 요일 오전까지 흡족하게 내렸는데, 이번 비는 무려 6개월이나 가문 끝에 내린 비였기에 비를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갈증을 한꺼번에 풀어준 고마운 단비였던 것이다.나는 흔들리는 열차에 몸을 기댄 채 아침에 집을 나서기 위해 우산을 펴 드는 순간 아내가 등뒤에다 대고 했던 말을 떠 올려보고는 쿡쿡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 당신이 약 1달 반가량 표암 선생에 대한 공부를 한답시고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선생께서아시고, 수고했다는 뜻에서 이렇게 흡족한 단비까지 내려 주시는 건 아닐까요?”어쨌거나 나는 표암 강세황의 작품전을 보기위해 약 1달 반가량 표암에 대한 관련서적과 자료들을 섭렵해 오는 동안 내내 행복에 젖어있었다.그러기에 나 또한 이번에 내린 단비를 아내의 말처럼 표암 선생께서 내려주신 단비라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젊은 나이에 출사(出仕:벼슬을 하여 관아에 나아감)를하여 나이가 들수록 벼슬이 올라가고 , 또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예술혼이 무르익는 가는 삶을 살아가는데 반해, 태어날 때부터 등에 힌 얼룩무늬가 표범처럼 있었다 하여 아호를 표암 (豹菴)으로 지어 부른 강세황은, 벼슬을 하며 지내야 할 젊은 나이에는 시.서 화 에 원도 한도 없이 흠뻑 빠져지내다가, 남들이 벼슬자리에서 물러날 나이인 61살에 영능참봉(왕릉관리인)을 시작으로 첫벼슬길에 올랐고, 10년 뒤인 71살 에는 한성판윤(漢城判尹: 서울시장)자리에 까지 오르는 고속 승진을 계속하였다.72 살(1874년)에는 중국 건융 황제의 80세 축하잔치에 사절단 부단장으로 중국을 다녀왔는가 하면, 76 살 때에는 금강산을 유람하는 등 생을 마감하던 78세까지 노익장을 과시하며 삶과 예술을 완성해 갔던 것이다.
표암 강세황은, 본인을 비롯하여 할아버지 설봉공(雪峰公) 강백년(姜栢年1603-1681)과, 아버지 백각공(白閣公) 강현(姜鋧 1650-1733), 이렇게 3대가 나란히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으로써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광을 누리기까지 하였다.
기로소에 들어 갈 수 있는 자격은 나이가 많은 왕이나, 실제 벼슬이 정이품(正二品)인 정경(正卿) 이상이며, 나이 또한 70이 넘은 문신(文臣)이어야 하기 때문에 3대가 계속하여 기로소에 들어간 가문은 극히 희귀하여 조선조 5백년을 통틀어 다섯 가문(家門) 정도에 불가하였다 하니, 삼대가 모두 오래 살면서 높은 벼슬까지 누린 강세황의 가문이야 말로 참으로 축복 받은 가문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 전시회에는 초상화 3점, 글씨 40점, 산수 인물(山水人物) 30점, 사군자 및 초충화훼(草蟲花卉) 18점. 서화평(書畵評)과 그의 교유관계를 보여주는 작품 23점등 5개 분야 114점의 작품, 표암 가문의 장서 등 총 179건의 작품과 자료가 소개된다고 안내서는 밝히고 있다.
나는 작품 하나하나를 어떤 식으로 만나볼 것인가 고민 아닌 고민을 하면서 흔들리는 차창에 기대어 미리 준비해 간 발다시레 갈루피(Baldassare Galuppi 1706-1785)의 피아노 소나타 5번을 들었다.갈루피의 피아노 소나타 5번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와 구별해 내기 힘들 정도로 모차르트 풍의 피아노 소나타와 닮아 있는데,어찌나 경쾌하고 아름답던지 이 곡이 있음으로 해서 갈루피는 영원히 기억되어져야할 그런 작곡가가 되어버린 듯하다.나는 미켈란젤리(Benedetti Michelangeli Arturo 1920- )가 영국 DECCA에서 녹음한 연주 음반을 자주 듣는데. 이 곡을 듣고 나면 삶에 대한 새로운 의욕과 활력소까지 얻어 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인터넷 사이트를 아무리 뒤져 보아도 갈루피에 대한 쓸만한 정보는 거의 전무하다 싶을 정도로 갈루피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런 작곡가이다.
미도문화사가 펴낸 음악대사전은 갈루피를 이렇게 설명해 놓고 있다. <베네치아 작곡가.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이어서 베네치아에서 A,로티에게 작곡을 배웠다. 1728년경부터 많은 오페라를 썼으나 1729년의(Dorinda)로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1741년에 런던으로 가서(Penelope)등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748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 성당의 부(副)합창장, 1762년 그곳의 합창장, 동년 베네치아 음악원원장. 1766-68년 에카테리나 2세의 초청을 받아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러시아 궁정 음악가로 활약하였다. 오페라 112곡 이외에 오라토리오,교회음악, 쳄발로 소나타 등이 있다.>
내가 표암을 만나려 서울로 가면서 갈루피가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5번을 택한 이유는 평소에 내가 이곡을 다른 어느 곡 못지않게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표암과 동시대인이 바로 갈루피 였기에 특별히 이곡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갈루피( 1706-1785)는 표암보다 6년 전에 태어나 79년을 살았고 ,표암(1712-1791)은 갈루피보다 6년 뒤에 태어나 갈루피와 똑 같이 79년을 살다갔다.두 사람 모두 서로 약속이라도 하듯 79세를 살았다.
이날 전시된 많은 작품 중에서도 나를 옴쭉달싹 못하게 묶어 놓았던 작품은 강세황 자신이 그린 자화상 1점(보물 제 590-1호)과, 1783년 5월 표암이 부총관(副摠官)의 은전을 입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을 때 정조(正祖)임금께서 표암에게 초상이 있느냐고 묻었을 때, 표암이 없다고 대답하자 정조임금께서 특별히 이명기(李命基)에게 부탁하여 그리게 한 보물 제 590-2호인 <강세황 영정> 1점.그리고 표암이 35 세 되던 해 여름 초복 다음날 선비 8명과 동자 2명,심부름하는 아이 1명 이렇게 모두 11명이 모여 개 한 마리를 잡아 먹고 각각 포즈를 취한 모습을 그린 뒤, 선비 8명이 모두 시를 한편씩 지어 그림 옆에 붙여놓은 <玄亭勝集> 이렇게 세 작품이었다.표암 자신이 70세 되던 해에 그린 초상화(보물 제 590-1호)그림은 중앙에 삼각구도의 앉아있는 전신상을 그린 것인데, 눈썹은 물론이고 수염 하나하나 까지 너무나 세밀하게 그려 놓아마치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옛 그림에서는 초상화를 그린다는 말을 전신사조(傳神寫照)라고 했는데, 이 말은 초상화는 인물을 그리는게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정신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말함이다.표암은 자신이 그린 초상화를 통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하지만, 남에게는 부드러운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의 자신을 그려 놓음으로서 초상화가 지향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전형(典型)을 극명하게 드러내 놓고 있다.
그리고 초상화 윗부분 양편에는 큼직한 글씨로 자찬(自讚)까지 써 놓았는데 자긍심이 하늘이라도 찌를듯하다.
彼何人斯 鬚眉晧白 (저 사람이 누구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頂鳥帽 披野服 ( 관리의 갓을 쓰고 야인의 옷을 입었다)
於以見心山林而名朝籍 ( 마음은 산림에 있는데 이름은 조정에 올라있구나)
胸藏二酉 筆搖五嶽 (가슴에는 만권의 서적을 간직하였고, 붓의 힘으로 는 오악을 뒤 흔들어 놓겠네.)
人那得知 我自爲諾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나 홀로 즐길 뿐이네)
翁年七十 翁號露竹 (늙은이의 나이는 일흔이고 호는 노죽이라네)
其眞自寫 其贊自作 (초상화는 자신이 직접 그렸고 찬도 직접 지었네)
歲在玄黓攝提格 때는 현익섭제격(壬寅 1782,정조47)
표암은 나이 70에, 앉아 있는 자신의 전신상을 그려 놓고는 스스로를 평하길 가슴속에는 만권의 서적을 관직 하였고, 붓의 힘으로는 오악을 뒤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공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표암의 하늘이라도 찌를 듯한 기고만장한 자부심에 오랫동안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표암은 72 세 때(1784년) 중국 건융 황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단 부단장으로 중국에 갔었는데, 건융 황제는 표암의 글씨를 보고 천골개장(天骨開場: 뛰어난 재주가 그대로 글씨에 나타나 있다는 뜻)이라 탄복까지 하면서 미하동상(米下董上:미불(米芾)보다는 아래이지만 동기창(董其昌 보다는 위 길이라는 뜻)의 어필 4자 편액까지 하사 해 줄 정도로 그의 글씨는 이미 이웃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표암은 자신보다 33살 아래인 단원 김홍도(1745-1806)를 제자이자 동료, 그리고 화단의 지기로써 가까이 사귀면서 일생동안 지도하면서 관계를 지속했으며,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1707-1769)의 그림에도 많은 화평을 남겼고, 두사람이 함께 표현연화첩(豹玄聯畵帖)이란 합작품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자하 신위(紫霞 申緯(1769-1845)를 만년에 제자로 받아 들여 가르쳤는가 하면, 겸제 정선(謙齋 鄭歚 1676-1759)의 그림에도 작품평을 남기는 등 예원(藝苑)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다음으로 내 눈길을 오래도록 붙들어 매고 있었던 작품으로서는 1783년 표암이 부총관(副摠官)의 은전을 입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을 때 정조임금이 이명기(李命基)에게 명하여 그리게 한 보물 590-2호인 강세황의 영정인 (강세황 71세상-姜世晃 七十一歲像) 그림이었다.이 71세像은 조사모(鳥紗帽)에 관복(官服)을 입고 호랑이 가죽을 덮은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인데, 얼굴부분과 융배 부분, 그리고 손 부분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바닥에 깔려있는 화문석의 무늬 하나하나까지에 이르기까지 화면전체를 치밀하면서도 꼼꼼하게 그려놓아, 마치 초상화에 대한 어떤 모범답안이라도 보여주는 듯하다.초상화 앞면 오른쪽에는 강세황이 세상을 떠난 뒤 조윤형(曹允亨 )이가 표암강공칠십일세진(豹菴姜公七十一歲眞)이라는 글씨와 강세황이 죽었을 때 정조임금이 내린 제문(御製祭文)을 그대로 베껴 써 놓았다.
疎襟雅韻 粗跡雲烟 소탈함과 고상한 풍류는 필묵으로 그 흔적을 남겼고
揮毫萬紙 內屛宮牋 많은 종이에 휘호하여 병풍과 서첩을 남겼네
卿官不冷 三絶則虔 벼슬도 낮지 않았으며 시.서.화 삼절은 정건(鄭虔 :당나라의 서예가)을 닮았고,
北차華國 西樓踵先 중국에 사절로 가서 나라를 빛내기도 하였으며 기로소 에 들어 선대의 행적을 계승하였네.
才難之思 薄酎是宣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생각에 초라한 술잔을 베푸노라
이명기(李命基)가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그린 (강세황 71세상-보물 590-2호)초상화에 대해서는 강세황의 셋째아들 강관이 계추기사(癸秋記事)에 초상화를 제작하게 된 내력과 제작과정, 그리고 가족이 모여 완성된 초상화를 감상했던 일들은 물론, 자료 구입비와 인건비, 사례비, 심지어 화구(畵具)의 구입처, 표장용 재료를 얻어다 쓴 집안 그리고 배접장인의 이름까지 자세히 기록해 놓음으로써 초상화가 그려진 당시의 상황과 관행까지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어 더욱 친근감 있게 초상화에 다가 갈수가 있었던 것이다.
계추기사에 의하면 초상화의 제작공정 기간은 총 20일이었으며 이명기가 초상화를 완성하는데 만 10일이 걸렸다고 적고 있다.재료구입비와 인건비를 합하여 37냥이 소요되었는데 당시 쌀 1석의 기준가가 4-5냥이었음을 감안하면 강세황의 초상화 제작비로는 쌀 10석 가량이든 것으로 추정되며, 이명기가 10 일 동안 회현동 강세황의 집에 머물면서 초상화를 그린 사례비가 10냥 이었는데, 당시의 쌀로 환산해 보면 쌀 2석 정도 받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기록이란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2 백 년 전에 그려진 초상화 1점에 대해서 이렇게도 상세한 내용을 알게 해 주는 기록이 현존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꿈같은 사실인가.나는 초상화와 계추기사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표암을 직접 대면하고 있는 듯한 착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전시된 많은 작품 중에서도 내가 제일 반해 버린 작품은 표암이 35세 되던 해 여름 초복 다음날, 선비 8명과 동자 2명, 그리고 심부름 하는 아이 이렇게 11명이 모여 개 한 마리를 잡아먹고는 시도 읊고, 거문고도 연주하며, 바둑을 두는 등 제각각 풍류를 즐기는 장면을 그린 뒤 선비 8명이 모두 시 한편씩을 지어 그림 옆에 이어 붙여 놓고, 현정승집(玄亭勝集: 그윽한 정자아래 우아한 모임)이라 이름 지어 놓은 시회 (詩會)그림이었다.
원래는 그림과 글씨 부분을 합쳐 2m가 넘는 긴 두루마리 였다는데, 현재는 그림과 글씨 부분이 나누어 표구 되어 있었다.그림 앞에는 큼직한 글씨로 현정승집(玄亭勝集)이라는 제목을 쓰고, 그 다음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그림에는 친절하게도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여 놓고 있다.
그림의 설명 다음에는 이날 시회(詩會)에 참가했던 8명의 선비들의 시를 차례로 적어 놓았는데 그림에 대한 설명이 너무도 재미가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伏日 設家獐會飮,俗也 (복날은 모여 개(家獐)를 잡아 먹는 것이 풍속이다)
丁卯 六月一日 爲初伏 ( 丁卯 (1747) 6월 1일이 초복이었다)
是日有故, 其翌日追設玆會于玄谷之淸聞堂(이날 마침 일이 있어서 그 다음날 에 이 모임을 현곡 청문당에서 개최하였다)
酒闌, 屬光之爲圖,以爲後觀, 會者凡十一人( 모인사람은 모두 11명이었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光之(강세황의 字)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여 이날의 모임을 기념하고자 하였다.
坐室中 爲德祖 (방안에 앉은 사람은 德祖(柳慶種),戶外執書而對坐者爲有受 (문밖에 책을 들고 마주 앉은 사람이 有受(柳慶容), 中坐者爲光之(가운데 앉은 사람이 光之(姜世晃),傍坐搖扇者爲公明 (옆에 앉아서 부채를 흔들고 있는 이가 公明(성명미상),奕于軒北者爲醇乎(마루북쪽에서 바둑을 두고있는 사람은 醇乎(朴道孟),露頂而對局者朴君聖望(갓을 벗고 대국하는 이가朴聖望),側坐者爲姜佑(그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姜佑),跣足者爲仲叔(발을 벗은 사람은 仲叔(성명미상)이다.童子二人, 讀書者爲慶集, 搖扇者爲山岳(동자가 둘인데 책을 읽고 있는자가 경집(慶集),부채를 부치고 있는 자가 산악(山岳)이다.軒下侍立者爲家僮貴南( 마루아래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자는 심부름꾼 귀남이다)于時積雨初收新蟬流喝(이때 장마비가 처음으로 걷히고 매미소리가 흘러나왔다)琴歌迭作,觴詠忘疲 致足樂也( 거문고와 노랫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술마시고, 시 읊조리며 피로함도 잊었다)畵成, 德祖爲記,諸人各爲詩, 系其下(그림을 그리고 나서 덕조(柳慶種)는記를 짓고 제각각 시를 지어 그 밑에 달았다.
복날 다음날 친구들이 모여 개 한 마리를 잡아먹고, 제각각 시도 짓고 풍류를 즐기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놓고는 자세하게 설명까지 곁들이고 있는 장면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만 느껴져서 나는 이 그림 곁을 쉬 떠나지를 못하고 오랫동안 어슬렁대고만 있었다.
술이 거나해진 후, 각자 시 한편씩을 지어 그림 밑에 달아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모두가 하나같이 풍류와 멋을 즐길 줄 알았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 같은 풍경인가.글을 지은 사람은 유경종이지만, 두루마리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 사람은 표암 강세황 자신이었으므로 이 <玄亭勝集>은 표암의 그림과 글씨를 한눈에 감상해 볼 수 있는 참으로 귀중하고도 소중한 작품인 것이다.
만약 요즈음 젊은이들이, 복날에 함께 모여 개 한 마리 잡아먹고 술이 거나 해 졌다면, 노는 모습들은 어떠했을까?
시(詩)는 고사하고 모두가 하나같이 포커(poker)나 고스톱을 즐기며 시간들을 보내지는 않았을까?나는 엉뚱한 상념에 사로잡혀 갈 길도 잊은채 오래도록 이 그림 한 장에 붙들려 옴쭉달싹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약 1시간 반 동안 전시작품들을 모두 감상하고 예술의 전당을 나서는 순간 내 머리에는 불현듯이 김남주 시인의 싯귀 하나가 떠 올랐다.
찬서리/ 나무 끝을 나르는 까치를 위해/ 홍시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 옛 마을을 지나며 전문)
나는 이날 강세황의 작품 전시장에서 김남주 시인의 말마따나 찬서리 나무끝을 나르는 까치를 위해 홍시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을 보았던 것이다.전시회장을 빠져나온 나는 서둘러 수원으로 향했다. 꿈의 문화유산이라 불리 우는 수원성(華城)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럴 어찌하랴.
오후 4시경 수원에 도착한 나는 <갈비 먹으러 수원 간다>고 말할 만큼 갈비의 고장으로 이름난 수원에서 우선 갈비부터 배 불리 먹은 다음 수원성을 돌아보리라 계산을 하고 수원에서도 이름난 삼부자 갈비집(수원시 인계동)을 찾아 들었는데, 그만 갈비 맛에 반해 도를 넘겨버린(?) 소주 때문에 수원성이고 무엇이고 다 팽개쳐 버리고 않을 수가 없었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 있었겠는가.일요일 하루, 표암의 글씨와 그림, 그리고 갈루피의 피아노 소나타 5번, 여기에다 수원갈비까지 포식할 수 있었으니, 이런 횡재 맞은 일요일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