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예술제 창시한 파성 설창수(56)
진주에서 파성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윤양 박사와 기리 리명길 교수 두 사람이 아니었던가 싶다. 파성에게 직언을 한 사례로 김윤양 전경남일보 사장 이야기를 하면서 한 토막 기억해 내었었다.
리명길은 문인협회 진주지부장이나 예총 진주지부장을 맡고 있을 때 파성과 한 자리를 했을 때는 파성의 말에 대체로 토를 달았다. "그 말에 동의를 하면서도 저는 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거나 술자리 같은 데서는 어릿광부리듯한 말투로 "선생님 속셈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고 능청을 부리기도 했다.
리명길은 시조시인으로, 체육인으로, 정치학 교수로 또 문화예술 운동가로 진주는 물론이고 경남 일원에 드러난 우뚝한 인물이었다. 리명길의 형제간들은 다 운동선수이거나 운동에 능했었다. 1970년대 어느해던가, 전국체전에 5형제가 나란히 출전하여 <주간조선>에서 진주의 명문가로 특집 취재했던 적이 있었다. 현재 사회활동을 하는 이로는 리영달 치과의 리영달 박사,시조시인으로 활약하는 리영성 등이 있다. 파성은 이들 형제의 막내인 리영란을 특별히 총애했다.
리명길은 하도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동을 했기 때문에 현재 진주문협 회장 안동원은 주석에서 "선생님의 주전공은 무엇입니까? 제가 대학 다닐 때 교양 체육을 가르치시다가 문화사를 가르쳤고 또 지역사회개발학과를 만들어 그쪽에 교수를 하시고 법경대학 학장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운동만 해도 그렇잖습니까? 진주 축구 대표선수, 진주 배구 대표선수, 진주 야구 대표 선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아닙니까. 그러다가 시조를 쓰고 어린이 시조를 제창하고 정치학박사가 되고 도대체 헷갈려요. 헷갈립니다." 하고 진반 농반 섞어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리명길은 지역의 토박이로서 진주를 참 많이 사랑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늘 '진주오광대' 대본을 보유하고 있다고 큰소리 치기도 했고 도청 진주 환원에 있어 앞장 서서 지론을 펴기도 했고 진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시민들에게 교양을 심어주기도 했다. 경남일보 논설위원으로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고 진주 금성초등학교 건물을 왜 보존해야 하는지를 논리정연하게 피력하기도 했다. 파성은 때때로 리명길의 주장이 지루하다 싶을 때는 "기리, 인제 됐어, 그만하면 됐다니까" 하고 자상한 선배로서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했다.
리명길은 시조를 쓰면서 조선시대 시조를 통해 조선정치를 구명한 학위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좀 독특한 주장을 펴기도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동시조(童時調) 쓰기를 제창한 것이 그것이다. 그랬을 뿐만 아니라 '절장시조'(絶章時調), '겹시조' 등을 제창하기도 했다. '절장시조'는 시조 3장 중 초중장 떼내버리고 종장만 쓰기로 한다는 것인데 "3.5.4.3"만 가지고 정서를 풀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이것은 가람 이병기가 '양장시조'(兩章時調)를 제창한 것에다 한 술 더 뜨기로 한 주장인 것으로 보였다.이병기의 양장시조는 초장만 빼고 중장 종장만으로 서정을 풀어낼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었다. 거기다 리명길은 '겹시조'를 제창했는데 그것은 평시조와 양장시조, 절장시조 등을 서정의 양에 따라 무작위로 선택하여 중복해 쓴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에 있어 '겹시조'라는 말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당시 시조작가들 사이에 오고 갔었다.
생전의 리명길 교수와 필자와는 여러가지로 인연이 깊었다. 필자의 두 아들과 딸이 모두 리교수의 부인이 경영하던 일신산부인과에서 태어났고, 리교수가 문인협회 지부장으로 있을 때 필자가 사무국장을 지냈고, 리교수의 친손 외손의 이름을 거진 필자가 지어 주었고, 필자의 내자와 일신산부인과 원장(전 진주여고 총동창회 회징)과의 관계가 특별히 돈독했다는 것 등을 그 인연으로 들 수 있다.
다음엔 리명길 체제의 진주문협 비화를 소개하게 될 것이다.